나치 시대의 일상사 - 순응, 저항, 인종주의, 개마고원신서 33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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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가 권력의 분산된 전체에 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어떤 작용지점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질 들뢰즈-

'파쇼' 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파스케스'이다. 이는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 시가 행진을 할 때 맨 앞에 세우던 나뭇가지에 둘러 싸인 도끼를 말한다. 20세기 초에 이 말은 세계적인 비극을 몰고 오는 정치 혁명의 대명사가 된다. 우리가 '파쇼'라는 말을 생각하면 몇 몇 얼굴이나 몇 몇 장면들이 자동연상된다. 무솔리니, 프랑코, 히틀러,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하겐크로이츠, 홀로코스트...등등하지만 이런 고정화된 몇 가지 이미지들은 파시즘이나 나치즘과 같은 복잡한 현상을 몇 가지 인상으로 한정 짓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가장 흔하게-또한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것이 '단절론'과 '의도주의'이다. 쉽게 말하자면 20세기 초에 발생한 유럽발 비극은 유럽 역사에서 비정상적이고 부정되어야할 독특한 기억이라는 점이고 이것의 가장 큰 원인은 지도자와 그의 추종자들의 망상적인 의도에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정의롭고 편리한 발상이란 말인가?)  

<파시즘>의 작가 로버트 팩스턴은 20세기 초반 유럽발 정치혁명으로서의 '파시즘'은 결코 단일하지 않은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의 역사적 파시즘 연구는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즘의 사이의 유의미한 차이를 보여준다. 또한 당시 유럽 각 국가에서 발생했던 파시스트운동의 여러가지 형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독일,이탈리아 뿐 만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동유럽의 여러 국가에서도 파시즘 운동은 발생했다. 팩스턴은 이런 파시즘 운동의 역사적 보편성을 부각하면서 이것이 왜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 운동의 단계를 넘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지 고찰한다. 즉 '파시즘의 조건'과 실제 '유의미한 파시즘 정치실험' 사이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이는 남발되는 '일상적파시즘'이나 '연성파시즘'논리에 한가지 대답이 될 수도 있다.  팩스턴의 <파시즘>에서 파시즘 정권이 추구한 것이 '대안적 근대성'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60년대 이후 파시즘 연구에서는 '근대성'의 문제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메이슨은 '나치즘 속에 작동하고 있는 합리적 동력, 근대적 힘'에 대한 부분을 말한다. 즉 사회적 생산관계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파시즘 문제를 접근한다면 파시즘의 권위주의적 독재문제 뿐만이 아니라 파시즘을 횡으로 가르고 있는 근대화론의 문제 역시 중층적으로 다루어져여 한다는 입장이다.  

  팩스턴의 <파시즘>이 역사적 파시즘론에 비중을 두고 비교파시즘론을 통해 실체적인 파시즘의 현상에 주목한다면 포이케르트의 책 <나치시대의 일상사>는 독일의 나치시대에 집중한다. 시각은 더 미시적이다. 포이케르트가 들고 있는 돋보기의 소실점이 모이고 있는 지점은 '나치 시대의 경험'이다. 

일상사는 나치 체제를 아래로부터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제3제국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당한 사람들, 참여한 사람들.곁에 서있던 사람들은 나치의 도전을 어떻게 경험했는가?  

포이케르트의 <나치시대의 일상사>가 돋보이는 이유는 이렇게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통해 나치 체제를 조망한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결코 '전체적 조망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일상사가 '새로운 영역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전망'이라고 말한다.   

우선 포이케르트는 "나치가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일 내에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문제는 '바이마르 체제' 였다. 대중들은 패전 이후 '바아마르 체제'가 가져다 준 조합주의적 혼란, 전통적 가치에 대한 방향감 상실, 대공황의 여파등으로 퇴행적인 정상성에 대한 욕구가 높아진 것이다. 이것은 실제보다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대중들의 불만은 '더 이상 안된다'는 식의 일상적 합의로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여기서 히틀러의 나치가 등장하여 점짐적으로 그런 불만들을 자기 영역으로 포함해 낸다. 히틀러는 '모든 악은 바이마르 체제다' 라는 식으로 복잡한 사회관계망을 정리해 버린다. 여기서 나치즘에 대한 중요한 점이 언급되어야 한다. 나치즘은 어떤 일관된 정치적 목표와 정강이 있는 체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치당이 일관된 정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역시 변화무쌍한 공약으로 유권자들을 유혹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 데클레프 포이케르트, <나치시대의 일상사> 

나치당은 유권자의 직종에 따라 맞춤형 구애 작전을 실시한 독일의 첫 정당이었으며, 그 공약들 사이에 모순이 있건 없건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로버트 팩스턴 <파시즘>  

이 책 <나치시대의 일상사>는 일상사를 중심으로 하지만 결코 거대서사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가 '일상사'를 '새로운 전망'이라고 언급한 것은 그런 의미이다. 그는 역사적 연속성의 틀 속에서 나치즘을 배치시키는데, 즉 나치즘을 유럽 근대화의 정상적 과정 속에 등장할 가능성이 있는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사고'라고 평한다. 그는 나치제도의 특성으로 '운동으로서의 존재론적 특성','근대화의 힘','다극체제',' 철저한 계서제',' 인종주의','대외적 성공' 등을 들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60년대 이후 파시즘논쟁에서 자주 언급되는 기능주의론적 해석,즉 근대화론의 연속성의 도상 위에 포이케르트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히틀러의 나치와 절연을 통해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서독 역시 '나치의 근대화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즉 나치를 움직였던 근대화의 동력이연속적인 횡선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가지 -앞으로 이야기할 '저항'문제와도 관련이 있는- 중요한 점은 나치가 전체주의의 상징으로 이해되지만 나치의 정권 운영방식은 다극적 체제였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공약의 남발'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나치권력 내부에 존재하는 기관사이에는 서로 다른 이해와 힘의 관계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존재했다. 로버트 팩스턴의 말이 좋은 예가 될 듯하다. 

파시즘 정당들이 써먹었떤 고안물 하나는-권력을 장악하려고 진지하게 고민했던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도 사용한 방법니다- '동형기구'(parallel structures)였다. -로버트 팩스턴,<파시즘>  

이것은 유명한 파시즘 연구가인 프랭켈의 '이중국가'로 표현한것과 같은 맥락이다. 프랭켈은 히틀러 정권때 합법적으로 구성된 정부라는 '표준국가'와  당의 '동형기구'로 구성된 '특권국가' 사이에 권력다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런 권력들 사이의 갈등은 '저항'의 공간으로 이용된다는 것이 포이케르트의 주장이다.

포이케르트의 관심은 이제 '저항'의 문제로 넘어간다. '저항'의 문제와 동전의 양면으로 더 자주 언급되는 것은 '순응'이다. "도대체 왜 독일의 중간계급, 또는 두터운 노동 계급마저 나치즘에 동의를 보낸 것인가? "  나치의 비합리적 프로파간다에 속았기때문인가? 국가주의의 망령때문인가? 그저 정권의 폭력에 동의하는 척 한 것 뿐인가?  대중의 '순응'의 매커니즘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고 나치시대를 그 모델로 자주 등장한다. 그 대답 역시 어물전의 생선만큼이나 다양하며 부분적으로 진실을 담고 있다. 한가지 피해야할 답은 -물론 이것 역시 어느정도 진실을 담고 있지만- 계몽주의적 태도이다. 바흐식 표현으로 하자면 "눈뜨라 부르는 소리있어."쯤 될 것같다. 심봉사 눈 뜨듯 확 눈을 뜨면 -마치 브나로드운동의 지사같은- 그런 불행한 역사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적 유토피아적 발상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그런 모든 사람이 눈을 뜨는 유포티아는 벌어지지 않는다. 대개 운동가들은 그런 지사적 존재로 현장을 찾았다가 이미 인민들이 눈을 뜨고 있는 존재였음을 발견하는 경우가 경험적으로 허다하다. 모택동은 역설적이게도 하방운동이라는 방식으로 그 역을 강제한다.  

포이케르트는  '일상의 순응'이 총체적이고 전일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푸코의 명제처럼 '권력이 있는 곳에는 저항도 있다.'라는 것을 나치에게 가장 탄압받던 노동계급과 나치의 이데올로기적 기획의 주목대상인 청소년층의 저항을 통해 보여준다. . 즉 대중들이 나치즘에 동의를 보낸 역사적 사실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저자는 그 저항은 '조직화',내지는'전면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치명적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작은 저항들'은 있었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소극적 저항' 내지는 '묵인'이었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포이케르트는 거대한 폭력이 만연한 시대에 일상의 저항은 '소극적' 형태나 '은유적' 형태를 띨 수 밖에 없었음을 비교적 긍정한다. 특히 저자는 히틀러 청소년단에 대한 도전을 흥미롭게 제기한다. 거의 준강제적인 히틀러 청소년단에 대해 일찌감치 어린노동자가된 청소년들이 만든 '에델바이스단'이 그것이다. 이들은 일종의 '안티집단'인데 그것이 단지 불평불만의 수준을 넘어 에델바이스단에 대한 사적 폭력으로 까지 이어진다. '에델바이스단'이 비교적 중하층계급의 청소년 하위문화 수준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좀 더 상류층 청소년 그룹은 '스윙재즈'에 몰입을 보여준다. 

히틀러의 머리이자 입이었던 괴링은 최기 히틀러를 신격화하는 이벤트들을 만든다. 대중들은 신격화된 인물과 정치쇼 속에 자신의 흔들리는 정체성을 투사하고 동일화의 안정감을 얻는다. 그런데괴링은 그것이 대중들에게 효과가 있으나 일시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중들은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뉘른베르크의 스펙터클은 지속적으로 동일한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괴링은 대신 일상적으로 제공하는 여흥을 대중기만의 술책으로 이용한다. 특히 당시는 라디오를 비롯한 대중매체의 도약기였고 괴링은 이런 특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당시 대중매체들은 적극적으로 독일인들의 정서적 파탄을 위무하는 작업들에 들어간다.쉽게 말하면 3S 정책과 동일한 맥락이다. 문제는 그 여흥의 제공은 이데올로기적이었다는 것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한다, 

"즐긴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것,고통을 목격할 때조차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즐김의 근저에 있는 것은 무력감이다. 즐김은 사실 도피이다.그러나 그 도피는 일반적으로 얘기되듯 잘못된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마지막 남아 있는 저항의식으로부터의 도피하는 것이다. 오락이 약속해주고 있는 해방이란 '부정성'을 의미하는 사유로부터의 해방이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제3제국의 여흥은 목적지향적이기 때문에 그 목적에 일탈하는 문화적 행위는 도발이된다. 청소년층이 열광한 '스윙재즈'는 그런 것이었다. 청소년들은 자유분방한 성, 비권위적 방식, 목적성없는 삶 등을 지향했다. 나치는 이런 도덕적 일탈을 악으로 규정했다. 나치가 보기에 스윙재즈는 흑인들의 저속한 문화이고 빈둥거리는 쓰레기들의 음악이었다. 포이케르트는 스윙재즈를 즐기며 나치로부터 핍박을 받게 된 중상류층 청소년들이 정치적을 '반파쇼'그룹은 아니라고 명확히 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비정치적' 문화행위는 지배계급의 패권적 문화에 대한 도전이었고 하위 체제 전체에 대한 문화적 저항의 기표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비정치적 문화행위가 광범위한 저항행위인지 아니면 결국 체제 포섭적인지의 문제는 하위문화 논쟁에서 매력적인 주제이다. 이걸 조금 더 알고 싶다면 문화연구쪽- 특히 하위문화연구쪽-을 살펴보면 좋다.) 에릭 홉스봄같은 좌파 재즈매니아는 저서<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에서 재즈 역사에 좌파세력들이 관여했고 또 재즈가 좌파공간을 확보해주었다는 점을 말한다.    

<나치새대의 일상사>의 결론에서 저자는 '나치즘을 근대의 병리사'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근거를 요약한다. (밑줄 그어야할 중요한 지점은 '근대' 이다. '근대'는 해방의 역사이자 또 억압의 역사라는 점.) 저자는 나치의 '인종주의'과 관련된 근대성을 논의하는 과정에 푸코의 '배제','훈육','규율' 그리고 '권력-지식'의 문제를 큰 틀로 상정하고 논의한다. 포이케르트가 '근대적 병리사'로 바라본 나치의 몇 가지 특성 중 그의 견해를 축약하는 문장들은 이렇다. 

제3제국을 관통하고 있던 격심한 사회적 모순들은 한편으로는 나치의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가 설정한 전선을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반파쇼 운돈이 희망하던 주전선, 즉 "지배와 사회", 나치와 인민 사이의 전선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전선들은....근대적인 산업적 계급사회의 장기적인 발전 경향이 관철되고 있었다. 

나치즘은 전쟁을 통해 근대적 기술의 파괴적 힘을 보여주었고,일상생활에서는 사회적,정치적,도덕적 책임을 경원하는 원자화된 생활방식의 사회,사회적 통합이 관료제적인 절차와 포섭 그리고 대중소비의 공허한 자극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사회라는 침울한 전망을 현시했다. 

그리고 저자는 마지막으로 그의 일상사 분석과 접목시킨 '근대'의 문제가 '근대=야만'으로 이해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파쇼의 도전은 근대의 발전사가 자유를 향한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오히려 자유란 언제나 새로인 그 실현 가능성을 탐색하고 실천에서 싸우는 것일 터이다. -<나치 시대의 일상사>

데틀레프 포이케르트는 49살의 나이로 애석하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가 1987년에 썻다는 <바이마르공화국>은 아마 이 책을 이해하는 전편이 될 것이다. <나치시대의 일상사>는 좋은 책이다. 이런 책은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전망'이라는 저자의 말이 울림을 갖는것이다. '나치=히틀러, 대중독재=악' 으로 포켓 사이즈로 정리하고 행동하는 삶은 얼마나 편리하게 명료하며 아름다울만큼 빈약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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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벽 5시에 눈이 떴다. 곧바로 TV로 달려갔다. 반복되는 그림들을 너무 오래봐서 푸른 잔디를 보니 졸린 눈이 빨리떠졌다. 후반전이 시작된지 얼마지나지 않았다. 박지성은 후반전 중반쯤에 교체되었고... 경기는 거의 압도적으로 바르셀로나의 분위기였다. 맨유는 후반전 제대로된 공격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르셀로나는 단단한 수비와 미드필더를 바탕으로 한번에 빠른 공격을 이어갔다. 메시가 헤딩 골을 넣었고...사실 조금 더 치고 받는  화끈한 경기를 원했는데...좀 실망스러웠다. 맨유는 '압도' 당했다기 보다는 찐득함에 손발이 무거워진 것처럼 보였다. 제대로된 팀 컬러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뜻이다. 바르셀로나가 우승을 해서 좋긴 한데...그 보다 훌륭한 경기를 보지 못해서 ...졸린 눈이 아깝다. 

 

2.지젝은 죽음에 대해 두가지 형식을 말한다. 

'산 죽음' 과 '죽은 생명'이다. 

 생물학적 죽음과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은 상징적 죽음이다. 지젝이 '죽지 않으려는 시체'라든가, '두 번 죽어야한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생물학적 죽음은 실재계의 죽임이고 주체적 위치가 소멸되는 것은 상징적 죽음이다. 

지젝에 따르면 '삶과 죽음의 이항대립은 상징계 바깥에 사는 이들의 살아있는 죽음, 실재계의 광기 속에서만 존속하는 신체들로 보충된다. 두 죽음사이의 간극은 괴물이나 아름다운 것의 출현'으로 채워진다. 

 한가지 착각하지 않아야 되는 것은 '괴물이나 아름다운 것'이 '선이나 악'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 상징적 질서의 붕괴에 대한 리액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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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레 동안 그들은 수많은 장작을 날라왔다. 그러나 열 번째로 인간에게 빛을 가져다주는 새벽이 밝았을 때/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대담한 헥토르를 밖으로 들어내어/ 그의 시신을 높다란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거기에 불을 질렀다.//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이 나타나자 이름난 헥토르의 장적더미 주위로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일리아드>, 24권 784행-789행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중에서 단 한 장면만을 꼽아야 한다면 나는 '프리아모스 왕,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찾기 위해 아킬레스를 찾다' 를 고를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에 의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아들을 찾기 위해 노구의 왕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스 동맹의 천막을 찾는다. 신의 아들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의 행동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헥토르의 장례를 위해 며칠이 필요하냐고 묻는다. 프리아모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 열하루째 되는 날 그를 위해 무덤을 만들어줄 것인즉, 열이틀째 되는 날 꼭 필요하다면 우리는 싸울 수 있을 것이오".  아킬레우스는 선뜻 이렇게 답한다. "프리아모스 노인이여! 그 모든 것이 그대의 명령대로 될 것이오."   



준족의 전쟁-기계 아킬레우스의 이 결정은 단순한 영웅에서 한층 성숙한 영웅으로의 변모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실제로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와의 12일 장례기간 약속을 지켜준다.  

이명박씨는 '최고의 예우를 갖추라'는 말의 메아리가 채가시기도 전에 당장 그날 밤부터 이런식으로 약속을 지켜주었다. 그는 늘 여론의 뒷북을 타고 도는 일을 한다. 과잉 대처에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하지만 이 기간동안 어떤 움직임이 있을지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다 보니 다른 종류의 크고 작은 마찰은 불보듯 뻔하다.  영화 <친구>의 마지막 장면에도 장동건의 졸개가 유오성을 막으려할 때 장동건이 이렇게 말한다. "그냥 보내줘라... 오늘 아부지 제사라 카더라...보내줘라."  조폭도 제사는 챙겨준다. 

개인적으로 명계남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는 어제 너무 흥분한 나머지 "국민이 죽여놓고 무슨 국민장이냐?" 라고 날선 말을 했다. 상가집에서 흥분해서 나온 말은 사실 그냥 잊어주는게 예의이다. 그렇지만 노무현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해 심리적으로 부딤감을 갖는 이들도 많아서 이런 말은 해야 할 것 같다. 명계남의 발언은 정말 흥분해서 뱉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명계남은 노무현 대통령을-망자를 언급하는 행위가 다시 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망설이게 된다.-뽑아주고 지켜주지 못한 '대중'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가해자들이 어떻게 국민장을 할 수 있냐는 말이다. 얼핏들으면 또 그럴듯 해보이고 뭔가 죄책감때문에 고개를 떨구어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이에 앞서 대표적 친노 인사로 유명한 영화배우 명계남(57)은 자살한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이 국민장으로 치러질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데 대해 "국민이 죽여놓고 무슨 국민장을 하느냐"며 "국민장을 하면 가만 안 놔두겠다"고 격분한 것으로 전해졌다.

명계남은 이어 "노 전 대통령을 탄핵했던 192명의 문상이나 화환을 절대 받아줄 수 없다"며 "조중동(조선, 중앙, 동아일보) 기자들이 들어오면 가만 안 두겠다"고 말했다.

먼저 명계남의 첫번째 착각은 '대통령과 주군'을 혼동하는 것에 있다. 명계남에게 대통령은 주군에 가까울지 모르지만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유권자에게 대통령은 동일한 충성을 바쳐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즉 대통령의 임기 내에 대통령에 대한 판단은 여러가지 형태로 수정될 수 있고 수정되어야만 한다. 명계남은 자신의 입장을 과잉일반화해서 '주군에 대한 충정'을 말하고 있다. 명계남 개인으로는 그런 행동 양식이 타당할 수 있고 지조있는 방식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대중에게 전도시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먼저 노무현 전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단일한 지지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기억이 2MB가 아니라면 5년전 대선 상황을 떠올려서 복기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에 가장 충성도가 높았던 층은 그 때나 지금이나 노사모이다. 많이 해체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노사모가 일가친척을 동원해 올인 투표를 했다고 해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무현은 여러 차례의 당내 경선, 그리고 정몽준과의 단일화를 통해 여러 가지 이해와 성향이 다른 후보들의 지지층을 혼합시켰다. 거기에 막판 정몽준의 배신행위로 분산된 표의 결집까지 있었다. 즉 노무현의 충성스러운 지지층과 그가 얻은 득표수를 착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고보면 처음부터 노무현을 물에서 건져주고 보따리까지 챙겨줄 지지층은 생각만큼 그렇게 두껍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국민'이고 '대중'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 중에는 노무현보다 좀 더 보수적인 지지층도 있엇고, 훨씬 진보적인 지지층도 있었다. 그들은 투표행위를 한 것이지 '충성'서약을 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무현의 행보에대해 지지하면서도 예의주시하는 층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움직이는 대중'이다. 지지를 철회할 수도 있고, 어떨 때는 항목별 지지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들은 또한 충격적인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앞에 또 깊은 애도를 보내고 있는 것일뿐이다. 이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정작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대중'을 고정된 무엇. 대개는 수동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다. 실로 '대중'이라는 철학적 개념이든 '대중문화'라는 문화적 개념이든 대중에 대해 반쪽만 편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언젠가 말했지만 대중은 양가적 존재다. 대중에게는 수동적인 면이 있고 그 반면에 역동적인 면이 있다. 대중은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즉 전체적으로 보이는 순간에도 실제 어떤 선별적 수용을 취한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대중'에 대해 일면적으로만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 어디에 더 주목할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이다.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쨋다구?>의 역자 한보희는 이런 표현을 한다. 좀 길지만 이 이야기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전체주의 사회의 인민들은 죄다 반민주주주의자로 낙인찍는 것인데(이를 테면 대중독재) 이러한 사고는 민주주의에 관한한 순환적 정의- 민주적인 인민이 만드는 사회만이 민주적이다-로 빠져들거나, 그 자체로 반민주적인 발상인 엘리트주의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즉 전체주의적 우중들은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거나 민주주의를 망쳐놓는다는 식이다. .... 그리하여 '대중 독재'라는 역설적 관념의 반대편 극단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민주 파쇼' 라는 또 하나의 기괴한 관념이다.  

나는 솔직히 엘리트주의란 말은 거창하고 '대중에 대한 스노비즘' 정도가 아닐까 싶다.대중에 대한 스노비즘에는 일관된 방향성이 없다. 본인 스스로 대중이기 때문에 대중으로서 자처하지만 다른 대중과의 차별을 중요시 여긴다. 대중 속의 재엘리트화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하는 짓에 대해서는 무언가 거부감이 생기고 다른 무언가를 찾아야 될 것같은 강박이 생긴다. 차라리 전통주의적인 엘리트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이야기 나누기 쉽다. 하지만 봄날 풍선 날아가는 듯 한 '대중에 대한 스노비즘'은 본인 스스로도 일관성이 없어서 규정해내기 쉽지 않다. 이런 스노비즘 속에는 -모든 것은 아니겠지만- 정신적 미성숙과 관계적 성찰의 미숙함이 담겨있다. 

명계남은 노무현을 지켜주지 못한 국민을 비난하고(이것에 왠지 모를 죄책감을 자극한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겠지만-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있지만 실제로 비난의 화살은 노무현의 측근들에게 더 돌아가야한다. 만약 명계남이 그 측근이었다면 그 역시 노무현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책임이 국민보다 더 크단 말이다. 안희정,이광재가 구속수사를 받았던 것은 노무현 재임기간 중이었다. 국민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한 개인으로도 보지만 그와 함께 작업했던 사람들의 집합체로 읽기도 한다. 도덕성와 원칙을 지키겠다는 대통령 옆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발생했다면 사실 먼저 책임졌어야하는 것은 그런 측근들이었다. 이명박의 과잉수사로 전직 대통령이 불미스러운 죽음을 당했다. 그 옆에서 더 크게 운다고 그들의 잘잘못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대통령을 더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국민이 아니라 측근들 아니었나 생각한다면 이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그런데 문화계 측근으로 알려진 명계남씨는 '국민이 죽였으니 국민이 책임지라고 한다.'  

물론 명계남의 말 중에는 한가지 명백한게 들어있다. 그동안 노무현을 가장 괴롭혔던 게 누구인지 밝힌 부분말이다. 그것은 보수 언론이었다. 처음에 어떻게 해보려던 노무현은 결국 언론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하지만 취임 초부터 끝까지 언론은 노무현에게 악의적이었다. 그것이 비판이었다고 말한다면 악의적인 것과 비판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거다. 흥미도 끌지 못할 만큼 재미없는 것은 조중동의 논리로 노무현을 공격하다가-즉 노무현을 가장 괴롭히던 주장들을 수용하다가- 죽음 이후에 갑자기 그 책임을 '대중들'에게 돌리는 것이다. 명계남이 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과거 행각을 대중에게 전가시키는 방식이다. 결국 '대중'은 똑같은 식으로 또 다시 죽음의 책임자가 된다. 물론 대중들이 그 죽음에 어떤 책임이 없다는 말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발화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인없는 '대중'을 비판의 도마위에 올려놓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공히 그 죽음에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대중들의 행동' 쪽에 있을까 아니면 '노무현의 측근'과 '보수언론'의 지속적 행동 쪽에 있을까?   

노무현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건 ,노무현을 비판했건.. 설령 한나라당을 지지했을지라도.. 노무현 전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하고,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성숙한 인간들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이다. 추모 행사를 버스로 둘러막거나...나야말로 '진성'이고 '적자'인데 ..너희들 그간 뭐라 했어.빠져..라는 것은 이 시점에  미성숙이거나 어리광의 증거이다.    

7일간의 국민장으로 결정난 듯 하다. 아킬레우스가 그랬듯이 조용히 추모의 정으로 그 분을 보내드리는 시간이다. 나 역시 긴 언설로 가시는 걸음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것 같아 죄송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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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 49  

 -황동규

늦가을 저녁 아우라지강을 혼자 만나노니/ 나의 유해 예까지 끌고 와 부릴 만하이. 

앞산 한가운덴 잎갈이나무들 위통 벗고 모여/ 마지막 햇빛 쪼이고 있고, 

주위로 침엽수들 침착히 서서/ 두 강이 약속 없이 만나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 

껄끄러운 두 강 만나/ 고요한 강 하나 이룬다. 

빈 배 하나 흔들리며 떠있다./ 시간이 고이지 않는다. 

 

유해 끌고 오다 고단하면/ 어느 잿마루에 슬쩍 버려도...... 

강 만나러 가다/ 끝내 못 만난 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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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에 처음 소식을 접하고 하루 종일 먹먹하다. 아이와 함께 산책을 나간 길에도 그 먹먹함은 그림자처럼 내 뒤를 따른다. 

살면서 이제 그만 무던할 것이라 다짐했던 것은 늘상 거짓으로 입증된다. 한 밤의 정전처럼 다가오는 어떤 일들에 마음이 쓰이고 흔들거린다. 

살면서 두 명의 대통령의 비보를 듣게 되었다. 첫번째 독재자의 비극적 죽음은 어린 나이였기에 큰 충격이라기 보다는 어른들의 불안감이 주는 불편함이었다. 거기에 TV속에 비쳐지는 그 음울함과 장송곡들이 초등학생인 내게는 너무 싫었다. 내게 그 대통령의 비극적 사건보다 더 충격적인 죽음은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다가왔었다. 고 김광석의 죽음이다. 오늘 오전 노무현대통령의 비보는 김광석의 부음 소식이후 내게는 최고의 충격이었다. 낮 동안 뉴스특보를 보고 다시 또 저녁에 뉴스특보를 봤다. 같은 내용이 고장난 테이프처럼 반복되고 있는데도 계속 보게 된다. 마음은 강가에서 내려놓은 종이배가 작아져가는 것을 바라보는 마음처럼 쓸쓸하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5공 청문회가 물론 가장 컷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청문회의 스타는 노무현만이 아니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야당 총재 하던 시절이었다. 그 때 스타중에는 두 정객 밑에서 여당 국회의원으로,또 각료로 허명과 비난을 받았던 이들도 상당하다. 내가 가장 오래 기억하는 망자의 모습은 3당합당에 반대하며 울분을 토하던 그의 모습이다. 당회의장에서 질질 끌려나가면서 울음 반, 고함 반으로 달려가던 모습. 내가 참가했던 90년 가투 중에서 선배들이 흥에 겨워 '오늘 같은 시위라면 정말 이건 우리가 승리다.' 라고 했던 시위가 90년 봄 3당합당 반대 시위였다. 수유리에서 대충 시위를 하고 지하철로 암암리에 신세계 백화점 분수대 앞으로 몰려 들었다. 예정된 시간이 되자 골목 골목 숨어있던 대학생들이 어디서들 그렇게 많이 쏟아져나왔는지. 당시 TV 뉴스에서도 경찰이 규모를 예상하지 못하고 고전했다고 보도한 걸로 안다. 

나는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다. 이유는 진중권의 생각과 동일하다. '진보정당 구축'이 더 중요한 과제로 여겨졌고, 또한 비판적 지지와도 싸웠다. 하지만 노무현이 꾸릴 공간에 기대감을 가졌고 실제로 그가 만든 탈권위적 분위기속에서 사회 전체적으로 진보운동의 공간이 확보된 것도 사실이다. 그분을 을 찍지도, 절대적 지지도 보내지 않았지만 대부분 진보진영이 그랬던 것처럼 얼토당토 않은 '탄핵정국'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구해냈다. 그리고 또 다시 그 분과는 비판적 거리를 유지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후에 오히려 더 나은 모습으로 남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분의 소탈한 성격과 대중친화력, 서민적 정서같은 것들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햇다. 그건 정치인 노무현보다 사회운동가 노무현에 대한 기대였다. 전직 대통령이란 후광도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현직에서의 문제는 이미 비판할 것은 한 것이고 다시 되돌려 어쩔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의 후반생이- 실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간혹 언급되는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 같은 모습을 남아 주길 바랬다. 집 짓기를 하던지 농업운동을 하던지 환경운동을 하던지...하지만 그동안  애증어렸던 나의 바람도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되고 말았다.  

하루 종일 몇 번을 본 뉴스를 다시 또 본다. 다른 영상들을 볼 때는 착잡하고 그가 겪어온 지난 험난한 시절의 이야기를, 그의 영욕을 돌아보는 영상이 나올 때는 코 끝이 찡하다. 최소한 한국정치사에서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같은 인물을 만나려면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했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당당히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은 그보다 더 지난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을 ...가슴 깊은 곳에서 추모한다.... 부디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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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를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삵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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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비가 그쳤다.  

집 앞을 얼마 앞둔 내리막 길에 앉은뱅이 노인이 보였다. 젖은 바닥을 엉덩이로 기어 내려가고 있었다. 창문 사이로 보인 노인의 행색은 영락없는 노숙자였다. 아파트 단지 근처에서 그런 행색의 노인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부산역 근처에 가면 자주 볼 수 있다.  '바닥이 모두 젖어서 옷도 다 젖었을텐데...'  햇살이 내리 쬐는 날이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지도 모른다. 내려서 도와주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차는 이미 아파트 주차장에 와있었다. '다시 돌아가 볼까..잘 갔겠지..아니 그래도'  

결국 차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지 못하고 그 노인이 어떻게 되었나 살폇다. 멀리서 보니 마을 버스 정류장에 지친 몸을 기대고 있었다. 나는 예전에 노숙자들을 몇 번 만난 적이있어서 그들에 대한 낯선 공포같은 것은 없다. 최소한 그들 모두가 알코올중독자거나 행패를 부린다고 생각치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 노인을 확인하고 싶어서 근처까지 갔다.  

오늘은 비가 아침부터 많이 왔고 바닥은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았다. 정말 그것때문이었다.

사람들이 흘깃 흘깃 더러운 냄새가 나는 노인을 지나쳐가고 있었다. 그는 대략 70쯤 되어보였다.실제보다 더 늙어보였을 수도 있다. 노숙자들은 실제보다 더 늙어보인다. 옷은 남루했고 운동화는 아주 낡았다. 손톱은 아주 더러웠고 눈 근처에는 마른 눈꼽이 아직 남아있었다. 흔히 만나는 노숙자들의 행색과 똑같았다. 그래도 술을 마신 것 같진 않았다. 그 노인은 담배를 뒤적였지만 가진 것은 없어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눈 위쪽이 찢어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피는 살짝 엉겨붙고 있었다. 나는 괜찮냐고 물었다. 그 노인은 어눌한 말투기는 했지만 괜찮다고 답했다. 무릎이 아파서 ...어딘가에 부딪혔다..라고 말했다. 나는 조심하셔야지요..하면서 잠시 기다리라고하고는 근처 약국으로 갔다. 마데카솔과 대일밴드..그리고 옆에 있는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을 샀다. 노인의 상처는 생각보다 좀 컸다. 마데카솔을 발라주고 대일밴드를 그의 눈 위에 붙여주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큰 밴드를 샀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면서.... 노인에게 담배 하나를 붙여주었다. 마데카솔과 밴드를 주머니에 챙겨주었다. 가지고 계시다가 떨어지면 또 바르세요..라고 말했다. 노인은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고맙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빗길인데 조심하셔야된다고 말하고 돌아섰다.

돌아오면서 두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마데카솔을 먼저 바르는게 아니라 상처를 소독하고 지혈을 조금 더 했어야한다는 것. 침착하지 못했다. 나로서도 우연히 만난 노숙자의 상처를 치료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두번째는 '저 노인 오늘 저녁은 어디서 먹을까' 하는 생각...저녁밥값이라도 드렸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지금도 마음 한 켠이 씁쓸하다. 노인의 옷은 하루 종일 비를 맞았을 터이고, 나는 부족한 지식으로 대충 상처를 처리하고 말았고, 따뜻한 밥 한 그릇 해결해주지 못했다. 언제쯤 되면 뭐든 제대로 좀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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