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시대의 일상사 - 순응, 저항, 인종주의, 개마고원신서 33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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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권력의 분산된 전체에 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어떤 작용지점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질 들뢰즈-

'파쇼' 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파스케스'이다. 이는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 시가 행진을 할 때 맨 앞에 세우던 나뭇가지에 둘러 싸인 도끼를 말한다. 20세기 초에 이 말은 세계적인 비극을 몰고 오는 정치 혁명의 대명사가 된다. 우리가 '파쇼'라는 말을 생각하면 몇 몇 얼굴이나 몇 몇 장면들이 자동연상된다. 무솔리니, 프랑코, 히틀러,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하겐크로이츠, 홀로코스트...등등하지만 이런 고정화된 몇 가지 이미지들은 파시즘이나 나치즘과 같은 복잡한 현상을 몇 가지 인상으로 한정 짓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가장 흔하게-또한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것이 '단절론'과 '의도주의'이다. 쉽게 말하자면 20세기 초에 발생한 유럽발 비극은 유럽 역사에서 비정상적이고 부정되어야할 독특한 기억이라는 점이고 이것의 가장 큰 원인은 지도자와 그의 추종자들의 망상적인 의도에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정의롭고 편리한 발상이란 말인가?)  

<파시즘>의 작가 로버트 팩스턴은 20세기 초반 유럽발 정치혁명으로서의 '파시즘'은 결코 단일하지 않은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의 역사적 파시즘 연구는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즘의 사이의 유의미한 차이를 보여준다. 또한 당시 유럽 각 국가에서 발생했던 파시스트운동의 여러가지 형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독일,이탈리아 뿐 만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동유럽의 여러 국가에서도 파시즘 운동은 발생했다. 팩스턴은 이런 파시즘 운동의 역사적 보편성을 부각하면서 이것이 왜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 운동의 단계를 넘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지 고찰한다. 즉 '파시즘의 조건'과 실제 '유의미한 파시즘 정치실험' 사이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이는 남발되는 '일상적파시즘'이나 '연성파시즘'논리에 한가지 대답이 될 수도 있다.  팩스턴의 <파시즘>에서 파시즘 정권이 추구한 것이 '대안적 근대성'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60년대 이후 파시즘 연구에서는 '근대성'의 문제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메이슨은 '나치즘 속에 작동하고 있는 합리적 동력, 근대적 힘'에 대한 부분을 말한다. 즉 사회적 생산관계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파시즘 문제를 접근한다면 파시즘의 권위주의적 독재문제 뿐만이 아니라 파시즘을 횡으로 가르고 있는 근대화론의 문제 역시 중층적으로 다루어져여 한다는 입장이다.  

  팩스턴의 <파시즘>이 역사적 파시즘론에 비중을 두고 비교파시즘론을 통해 실체적인 파시즘의 현상에 주목한다면 포이케르트의 책 <나치시대의 일상사>는 독일의 나치시대에 집중한다. 시각은 더 미시적이다. 포이케르트가 들고 있는 돋보기의 소실점이 모이고 있는 지점은 '나치 시대의 경험'이다. 

일상사는 나치 체제를 아래로부터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제3제국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당한 사람들, 참여한 사람들.곁에 서있던 사람들은 나치의 도전을 어떻게 경험했는가?  

포이케르트의 <나치시대의 일상사>가 돋보이는 이유는 이렇게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통해 나치 체제를 조망한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결코 '전체적 조망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일상사가 '새로운 영역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전망'이라고 말한다.   

우선 포이케르트는 "나치가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일 내에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문제는 '바이마르 체제' 였다. 대중들은 패전 이후 '바아마르 체제'가 가져다 준 조합주의적 혼란, 전통적 가치에 대한 방향감 상실, 대공황의 여파등으로 퇴행적인 정상성에 대한 욕구가 높아진 것이다. 이것은 실제보다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대중들의 불만은 '더 이상 안된다'는 식의 일상적 합의로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여기서 히틀러의 나치가 등장하여 점짐적으로 그런 불만들을 자기 영역으로 포함해 낸다. 히틀러는 '모든 악은 바이마르 체제다' 라는 식으로 복잡한 사회관계망을 정리해 버린다. 여기서 나치즘에 대한 중요한 점이 언급되어야 한다. 나치즘은 어떤 일관된 정치적 목표와 정강이 있는 체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치당이 일관된 정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역시 변화무쌍한 공약으로 유권자들을 유혹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 데클레프 포이케르트, <나치시대의 일상사> 

나치당은 유권자의 직종에 따라 맞춤형 구애 작전을 실시한 독일의 첫 정당이었으며, 그 공약들 사이에 모순이 있건 없건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로버트 팩스턴 <파시즘>  

이 책 <나치시대의 일상사>는 일상사를 중심으로 하지만 결코 거대서사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가 '일상사'를 '새로운 전망'이라고 언급한 것은 그런 의미이다. 그는 역사적 연속성의 틀 속에서 나치즘을 배치시키는데, 즉 나치즘을 유럽 근대화의 정상적 과정 속에 등장할 가능성이 있는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사고'라고 평한다. 그는 나치제도의 특성으로 '운동으로서의 존재론적 특성','근대화의 힘','다극체제',' 철저한 계서제',' 인종주의','대외적 성공' 등을 들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60년대 이후 파시즘논쟁에서 자주 언급되는 기능주의론적 해석,즉 근대화론의 연속성의 도상 위에 포이케르트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히틀러의 나치와 절연을 통해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서독 역시 '나치의 근대화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즉 나치를 움직였던 근대화의 동력이연속적인 횡선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가지 -앞으로 이야기할 '저항'문제와도 관련이 있는- 중요한 점은 나치가 전체주의의 상징으로 이해되지만 나치의 정권 운영방식은 다극적 체제였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공약의 남발'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나치권력 내부에 존재하는 기관사이에는 서로 다른 이해와 힘의 관계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존재했다. 로버트 팩스턴의 말이 좋은 예가 될 듯하다. 

파시즘 정당들이 써먹었떤 고안물 하나는-권력을 장악하려고 진지하게 고민했던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도 사용한 방법니다- '동형기구'(parallel structures)였다. -로버트 팩스턴,<파시즘>  

이것은 유명한 파시즘 연구가인 프랭켈의 '이중국가'로 표현한것과 같은 맥락이다. 프랭켈은 히틀러 정권때 합법적으로 구성된 정부라는 '표준국가'와  당의 '동형기구'로 구성된 '특권국가' 사이에 권력다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런 권력들 사이의 갈등은 '저항'의 공간으로 이용된다는 것이 포이케르트의 주장이다.

포이케르트의 관심은 이제 '저항'의 문제로 넘어간다. '저항'의 문제와 동전의 양면으로 더 자주 언급되는 것은 '순응'이다. "도대체 왜 독일의 중간계급, 또는 두터운 노동 계급마저 나치즘에 동의를 보낸 것인가? "  나치의 비합리적 프로파간다에 속았기때문인가? 국가주의의 망령때문인가? 그저 정권의 폭력에 동의하는 척 한 것 뿐인가?  대중의 '순응'의 매커니즘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고 나치시대를 그 모델로 자주 등장한다. 그 대답 역시 어물전의 생선만큼이나 다양하며 부분적으로 진실을 담고 있다. 한가지 피해야할 답은 -물론 이것 역시 어느정도 진실을 담고 있지만- 계몽주의적 태도이다. 바흐식 표현으로 하자면 "눈뜨라 부르는 소리있어."쯤 될 것같다. 심봉사 눈 뜨듯 확 눈을 뜨면 -마치 브나로드운동의 지사같은- 그런 불행한 역사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적 유토피아적 발상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그런 모든 사람이 눈을 뜨는 유포티아는 벌어지지 않는다. 대개 운동가들은 그런 지사적 존재로 현장을 찾았다가 이미 인민들이 눈을 뜨고 있는 존재였음을 발견하는 경우가 경험적으로 허다하다. 모택동은 역설적이게도 하방운동이라는 방식으로 그 역을 강제한다.  

포이케르트는  '일상의 순응'이 총체적이고 전일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푸코의 명제처럼 '권력이 있는 곳에는 저항도 있다.'라는 것을 나치에게 가장 탄압받던 노동계급과 나치의 이데올로기적 기획의 주목대상인 청소년층의 저항을 통해 보여준다. . 즉 대중들이 나치즘에 동의를 보낸 역사적 사실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저자는 그 저항은 '조직화',내지는'전면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치명적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작은 저항들'은 있었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소극적 저항' 내지는 '묵인'이었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포이케르트는 거대한 폭력이 만연한 시대에 일상의 저항은 '소극적' 형태나 '은유적' 형태를 띨 수 밖에 없었음을 비교적 긍정한다. 특히 저자는 히틀러 청소년단에 대한 도전을 흥미롭게 제기한다. 거의 준강제적인 히틀러 청소년단에 대해 일찌감치 어린노동자가된 청소년들이 만든 '에델바이스단'이 그것이다. 이들은 일종의 '안티집단'인데 그것이 단지 불평불만의 수준을 넘어 에델바이스단에 대한 사적 폭력으로 까지 이어진다. '에델바이스단'이 비교적 중하층계급의 청소년 하위문화 수준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좀 더 상류층 청소년 그룹은 '스윙재즈'에 몰입을 보여준다. 

히틀러의 머리이자 입이었던 괴링은 최기 히틀러를 신격화하는 이벤트들을 만든다. 대중들은 신격화된 인물과 정치쇼 속에 자신의 흔들리는 정체성을 투사하고 동일화의 안정감을 얻는다. 그런데괴링은 그것이 대중들에게 효과가 있으나 일시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중들은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뉘른베르크의 스펙터클은 지속적으로 동일한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괴링은 대신 일상적으로 제공하는 여흥을 대중기만의 술책으로 이용한다. 특히 당시는 라디오를 비롯한 대중매체의 도약기였고 괴링은 이런 특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당시 대중매체들은 적극적으로 독일인들의 정서적 파탄을 위무하는 작업들에 들어간다.쉽게 말하면 3S 정책과 동일한 맥락이다. 문제는 그 여흥의 제공은 이데올로기적이었다는 것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한다, 

"즐긴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것,고통을 목격할 때조차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즐김의 근저에 있는 것은 무력감이다. 즐김은 사실 도피이다.그러나 그 도피는 일반적으로 얘기되듯 잘못된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마지막 남아 있는 저항의식으로부터의 도피하는 것이다. 오락이 약속해주고 있는 해방이란 '부정성'을 의미하는 사유로부터의 해방이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제3제국의 여흥은 목적지향적이기 때문에 그 목적에 일탈하는 문화적 행위는 도발이된다. 청소년층이 열광한 '스윙재즈'는 그런 것이었다. 청소년들은 자유분방한 성, 비권위적 방식, 목적성없는 삶 등을 지향했다. 나치는 이런 도덕적 일탈을 악으로 규정했다. 나치가 보기에 스윙재즈는 흑인들의 저속한 문화이고 빈둥거리는 쓰레기들의 음악이었다. 포이케르트는 스윙재즈를 즐기며 나치로부터 핍박을 받게 된 중상류층 청소년들이 정치적을 '반파쇼'그룹은 아니라고 명확히 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비정치적' 문화행위는 지배계급의 패권적 문화에 대한 도전이었고 하위 체제 전체에 대한 문화적 저항의 기표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비정치적 문화행위가 광범위한 저항행위인지 아니면 결국 체제 포섭적인지의 문제는 하위문화 논쟁에서 매력적인 주제이다. 이걸 조금 더 알고 싶다면 문화연구쪽- 특히 하위문화연구쪽-을 살펴보면 좋다.) 에릭 홉스봄같은 좌파 재즈매니아는 저서<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에서 재즈 역사에 좌파세력들이 관여했고 또 재즈가 좌파공간을 확보해주었다는 점을 말한다.    

<나치새대의 일상사>의 결론에서 저자는 '나치즘을 근대의 병리사'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근거를 요약한다. (밑줄 그어야할 중요한 지점은 '근대' 이다. '근대'는 해방의 역사이자 또 억압의 역사라는 점.) 저자는 나치의 '인종주의'과 관련된 근대성을 논의하는 과정에 푸코의 '배제','훈육','규율' 그리고 '권력-지식'의 문제를 큰 틀로 상정하고 논의한다. 포이케르트가 '근대적 병리사'로 바라본 나치의 몇 가지 특성 중 그의 견해를 축약하는 문장들은 이렇다. 

제3제국을 관통하고 있던 격심한 사회적 모순들은 한편으로는 나치의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가 설정한 전선을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반파쇼 운돈이 희망하던 주전선, 즉 "지배와 사회", 나치와 인민 사이의 전선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전선들은....근대적인 산업적 계급사회의 장기적인 발전 경향이 관철되고 있었다. 

나치즘은 전쟁을 통해 근대적 기술의 파괴적 힘을 보여주었고,일상생활에서는 사회적,정치적,도덕적 책임을 경원하는 원자화된 생활방식의 사회,사회적 통합이 관료제적인 절차와 포섭 그리고 대중소비의 공허한 자극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사회라는 침울한 전망을 현시했다. 

그리고 저자는 마지막으로 그의 일상사 분석과 접목시킨 '근대'의 문제가 '근대=야만'으로 이해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파쇼의 도전은 근대의 발전사가 자유를 향한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오히려 자유란 언제나 새로인 그 실현 가능성을 탐색하고 실천에서 싸우는 것일 터이다. -<나치 시대의 일상사>

데틀레프 포이케르트는 49살의 나이로 애석하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가 1987년에 썻다는 <바이마르공화국>은 아마 이 책을 이해하는 전편이 될 것이다. <나치시대의 일상사>는 좋은 책이다. 이런 책은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전망'이라는 저자의 말이 울림을 갖는것이다. '나치=히틀러, 대중독재=악' 으로 포켓 사이즈로 정리하고 행동하는 삶은 얼마나 편리하게 명료하며 아름다울만큼 빈약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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