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나이트 (2disc)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 워너브라더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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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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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친구가 배트맨이다.

부모를 잃은 트라우마 때문에 약간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친구다.

물론 잘생겼고 돈도 많도 믿음직한 친구들도 몇 명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약간 '과대망상증'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그의 '과대망상증'은 '악을 섬멸할 수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다.

그는 '아이구...주인님 이제 그만 쫌' 이라고 말하는 늙은 하인에게

"배트맨이 넘을 수 없는 선은 없어요"

라고 마치 '돈이면 안되는 일이 없어요'라는 철부지 부자같은 말을 한다.

물론 배트맨도 '악'을 전부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치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매일 밤 마스크 쓰고 쇠가는 소리를 내면서 다니는 것도 힘든일이다. 그래서 배트맨은 살짝 '자경단'의 옷을 벗어던지고 다른 이에게 그의 임무를 건네려고 한다.

늘 상 입으로 이런 말을 달고 다닌다. "배트맨이 없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라고 말이다. 지쳐버린 영웅이거나 벽에 부딪힌 영웅의 모습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 중에 하나는 '영웅의 자기정체성 혼돈'을 잘 잡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배트맨의 고담시도 역시 그렇다. 가짜 배트맨도 나타나고 얼굴에 분칠 한 녀석이 나타나 오히려 '배트맨'덕분에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는 이데올로기를 선전한다. 그리고 물론 대중들은 그에 동의한다. ....'배트맨을 잡아라' 

 빌헬름 라이히는 맑스의 역사유물론이(물론 여기서 라이히가 말하는 것은 속류 맑시즘을 말한다.그리고 이것이 또한 저변화되어 있기도 하다.)  대중심리를 이해하지 못한 무능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빌헬름 라이히는 가난한 이들이 도둑이 되는 것은  관심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왜 도둑이 되지 않고 스스로를 억압하는 욕망을 스스로 즐기는가' 라는 지점에 칼을 들이댄다.

그러니까... 노동자들이 이명박을 찍었던 것에 분개하고 '계급의식이 없어' 라는 세살 먹은 아이들도 할 수 있는 개탄보다 '왜 스스로 알아서 이명박을 노동자들이 지지했는가'의 '대중심리'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빌헬름 라이히는 '성격상으로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은 계급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계급을 넘어서는 인간들의 심리적 한계이자 또 보편성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모든 '독재'를 파쇼라고 칭하지만 실제 파시즘은 좀 다르다. 학자들마다 파시즘의 발생원인과 성격에 대해 좀 다르게 평가를 한다. 하지만 그 핵심에는 모든 파시스트 정당이 '대중동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비교적 제한된 파시즘론을 주장하는 로버트 팩스턴같은 경우에도 파시즘의 성장에 있어서 '대중동의'를 인정한다. 그는 파시즘이 초기에는 퇴역 군인같은 무리들이나 주변부 무리들에 의해 주도된다는 점을 말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파시즘의 가장 큰 토양이 된 것은 - 특히 주목해야 하는데- 바로 '중간계급'이다. 즉 히틀러의 계급적 토대는 '중간층'이라는 거다. 요즘 말로 하면 '중산층'이다. 파시즘은 진행과정에서 국가별로 좀 차이가 있다. 몇 가지 공통된 점을 보면 '기존 우파들의 무능에 대한 반동,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척결, 강력한 민족주의' 등의 특징이 있다. 그러니까...20세기 초에 나타난 일종의 '뉴라이트'인 셈이다. (이걸 지금의 한국의 '뉴라이트'와 매칭시켜서 '이명박은 파쇼다' 라는 공식으로 쉽게 도출하진 마시길...내가 대중진보에 가장 혐오감을 느낄때가 그럴때다. 그것도 '포퓰리즘'이다. )

건강한 시민사회의 토대가 되는 '중산층' 과 '대중동의'의 중간계급은 차표 한 장 차이다. 물론 그 한 장 차이가 넘을 수 없는 차이이긴 하다. 어쨋거나 그런 위치에서 자신을 너무 강하게 믿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불확실성의 토대를 인정하는 것이 '성찰'을 낳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불안정한 위인데 그 안에서 무엇을 그리 강하게 확실할 수 있겟는가? 그러다보면 이것 저것 '불안정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걸 멋들어진 말로 하면 '성찰'이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세상물정 모르게 덥썩 믿다보면 하비 덴트를 믿게 된다. 어떤 영화 편집장은 미국 정치에 빗대어 하비덴트를 오바마에 비유했다.

우리나라에 빗대어 보면 아마 노무현이 될 듯하다. 지난 이야기 해서 무엇하리오만...'너네들 말이 다 맞아. 근데 그래도 노무현 밖에 없잖아' 를 기억한다. 대개는 영화 속 대중들처럼 나중에는 하비덴트를 몰아세운다. 배트맨 잡아오라고 말이다. 아니면 ' 진보니 뭐니 해봐야 별 볼일 없네'라고 '애라 모르겠다, 내 일 아니다.' 주의로 돌아간다.  배트맨도 밤 마다 옷갈아 입기 귀찮아서 하비 덴트를 후원한다. 부자들의 파티에 조커가 총질하면서 직접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조커는 총질을 하는데 무차별 살해는 잘 하지 않는다. 그건 양아치나 하는 짓이라고 조커는 생각하는 듯하다. 자신의 웃음과 아버지,아내의 이야기를 꺼내는 조커...조커의 과거사? 그런데 조커의 말을 믿나?

 

'낮의 기사' 하비 덴트는 개인적 분노와 조커의 약발짓에 반쪽을 해가지고 팔팔거리며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이런 과거의 '낮의 기사'들 지금 국회가면 많다. 현재 뉴라이트의 리더들...21세기의 대중진보들이 엄두에도 못 낼만큼 날아다니던 사람들 많다. 다 열거하기도 힘들다. 뉴라이트의 현재 리더들이 과거에 '거리'에서 얼마나 날아다니던 사람들이었는지.  


내게 <다크 나이트>의 주인공은 바로 바로 이 친구 '조커' 다. 히스레저의 연기가 멋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는 순수 악이다. 푸잇...언젠가 써먹었던 말인데 또 써보자.

"...그래서 결국 너는 누구란 말이냐? " "나는 영원히 악을 원하면서, 영원히 선을 행하는 힘의 일부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괴테가 하신 말씀이란다.

다들 자기가 선이라고 믿기를 좋아하는데 조커는 스스로 '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당당히 '너희들은 나의 자식이다' 라고 말하는 것같다.(나는 이런 캐릭터가 정말 좋다.) 괴테가 '악' 스스로 '영원히 선을 행하는 힘'이라고 말한 것이 그 이유때문이다. 배트맨이 멍청한 것은 이런 것 자체뿐만이 아니라 '영원히'라는 말 자체도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때문이다. '선/악'은 영원한 수레바퀴이다.

 선은 악에 의해 만들어진다. '선'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다. 즉 악이 있지 않으면 선이 생기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알라딘에서 그냥 조용 조용 글쓰고 음풍농월과 비분강개, 농담따먹기로 소일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선'이 되었다. 이명박이라는 '악'이 등장하면서 부터 말이다. 다른말로 하면 '이명박'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아마 저기 멀리 있는 '신자유주의'에 강 건너 돌던지면서 무던히 살았을 것을 말이다. 인하대의 김진석 교수는 이런 '선'들이 발끈할지도 모를 말인데 "'신자유주의에 모든 돌을 던지지 말라." 라고 일침을 가한다. 맥락을 이해하고 보면 이해될 일이지만 세상의 배트맨들에게 '악'이 필요하다. 존재의 토대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말이다. 나는 김진석 교수의 메시지를 슬쩍 '진보'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성찰을 요구해보라고 읽는다. 뭐 더 나쁘게 읽어도 할 수 없다. 

조커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메시지다. 이미 틀 밖에 있다. 배트맨이 린치로 조커의 입을 열려고 하지만 조커는 '그런 걸로 통하지 않는다' 라고 웃는다. 열나게 얻어터지면서도 말이다. 배트맨도 그걸 알아버렸다. 결국 조커는 모든 판을 짜고 체스판의 말을 움직이듯 배트맨을 움직인다. 자기가 입을 열고 싶을때 열고, 또 일이 적당히 꼬이게끔 만든다. 본인에게도 시간을 벌고 말이다.

두 개의 배 씬은 좀 작위적이긴 했다. 일종의 게임이론이다. 버튼 눌러라 안 누르면 제들이 누른다. 둘 다 안누르면 둘 다 죽는다. 한쪽은 일반 시민, 다른 한쪽은 간수를 비롯한 제소자. 건강한 시민들은 학습한데로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의 위대성을 입증하기 위해 '1인 1표 보통투표'를 한다. 제소자들은 뭐 웅성거리기나 할 뿐, 간수들의 총앞에 부재자 투표란 없다.

결과가 아주 재미있다. '대의민주주의제.. 엿먹어라.' 라는 결과다. 건강한 일반 시민의 투표결과는 거의 두배 차이로 상대방 배를 터뜨리는 것으로 나왔다. 문제는 소심한 시민들중 누가 마지막 버튼을 누를 것인가 이다. 죄수들 중에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죽기 싫으면 눌러야한다. 간수가 기폭장치를 들고 벌벌 떨고 있을때, 덩치 큰 죄수가 스스로 그 역을 맡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버튼을 바닷가에 버린다. 그러니까...뭔 고하니 예전에 내가 언급했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주인공의 아내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다. '네가 만든 게임의 룰을 따르지 않겠다.' 라는 일종의 '탈주'방식이다. 물론 비슷한 일이 평범한 시민들 사이에서도 나온다.

대롱대롱 빌딩에 매달려 있던 배트맨은 기세등등하다. 세상에는 너처럼 나쁜 놈만 있지 않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감독이 약한 마음이 들었던지 아니면 착한 이들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았던 듯 하다. 몇 몇 개인의 양심적 선택. 물론 이것이 세상을 나아지게 해준다. 그런데 이거 완전히 운에 기대거나,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 위태한거다.

내가 영화를 만들었다면 나는 제소자들의 배를 터뜨렸을 것이다. 물론 게중에는 ' 우리처럼 양심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죽는 것보다 , 어차피 중죄를 지은 저들이 죽는것이 더 낫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어야만 한다. 게 중에는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버튼을 누르세요' 라고 말하는 이도 있어야 한다. 엄마 품에 안긴 아이의 모습도 있어야하고 '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버튼을 누르시오.' 라는 이도 있어야 한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조커를 위해서라도 '제소자'들 배를 터뜨리고 싶었다. 아니면 시민들이 토론을 다 끝내고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제소자들이 먼저 버튼을 눌러서 모든 토론을 허공으로 날려보래던가...배트맨에게도 '네가 막지못하는 것이 있다' 는 메시지 정도는 하나쯤 남겨주었어야 하는데....안타깝다.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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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다 쓰고 난 다음 날.....지금 막. 나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마지막 부분을 다 읽었다. 판타스틱!! 마태와 악마의 대화가 나오는 멋진 장면이 등장한다. 결국 내가 하려던 배트맨/조커의 이야기나 다름없다. 나는 주절거리고 거장은 역시 더 짧고 강한 이펙트를 남기는 문장을 구사한다. 나는 루비콘 강은 넘어도 저건 못 넘을 듯 하다.  클래식 만세!!

" 넌 이곳에 나타나자마자 바보같은 짓을 했어. 그게 뭔지 말해줄까? 문제는 너의 말투야. 너는 마치 그림자들을, 그리고 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어.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는 건 어떤가. 만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의 선은 무슨 일을 하게 될까? 또 만약 이 지상에서 모든 그림자들이 사라진다면, 그때 지상의 모습은 어떻게 될 것 같나? 그림자는 사물과 인간들로부터 만들어지지. 여기 내 검의 그림자처럼. 그림자가 존재하는 것은 나무와 살아 있는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너는 지구 전체를 벗겨버리며고 하고 있어! 벌거벗은 빛을 즐기려는 너의 환상으로 이 지상의 모든 나무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벗겨내버리고 싶은 건가? 너는 어리석어."

 "늙은 소피스트, 나는 너와 논쟁할 생각이 없다." 레위 마태오가 대답했다.

                                                                             미하일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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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베니치오 델 토로 감독, 할리 베리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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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페이퍼에 올린 걸 리뷰란으로 옮깁니다.





영화의 원제목은 'Things we lost in the fire' 이다. 우리 말로 바꾸어도 달라 질게 거의 없는 착한 번역이다.

이 영화는 국내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았다. 지난 달인가 곧장 DVD로 출시되었다. 그러나 동네 비디오가게에 가서 시를 읊듯이 낭낭한 목소리로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주세요.라고 하면

주인이 '그게 뭔데요?' 라고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영화의 두 주인공은 흑진주 할 베리와 사령관 '체' 의 베니치오 델 토로이다.

워낙 알려지지 않은 영화여서 간략하게 줄거리를 좀 이야기해야겠다.

영화의 첫 장면에는 'X-파일'의 히로인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나온다. 그의 극 중 이름은 브라이언이다. 그는 굉장히 착실하고 가정적이며 사려깊은 가장이다. 오드리(할 베리) 와의 사이에 10살 먹은 여자 아이와 물에 머리 담그기를 두려워 하는 6살의 남자 아이를 두고 있다.

그에게는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절친한 친구가 있다. 마약 중독자 제리(베네치오 델 토로)이다. 브라이언은 제리에게 유일한 친구이다. 모든 사람이 제리를 포기했을 때 조차 브라이언은 그에 대한 우정을 져버리지 않는다. 오드리는 그런 남편이 못마땅하다. 

제리의 생일날,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언은 제리에게 간다. 싸구려 모텔에서 마약에 쩔어 있는 제리를 만나고 브라이언은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들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말이다. 그런데 공원에서 한 여자를 두드려 패는 남자를 본다. 그를 저지하려는 브라이언. 남자는 갑자기 총을 꺼내든다.

영화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장례식장을 찾아온 제리. 오드리와 제리는 이것이 첫 만남이다. 오드리는 제리에게 당신을 싫어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며칠 후 오드리는 제리의 모텔을 찾아가서 창고로 들어와 살라고 말한다.

과부와 죽은 남편 친구의 로맨스일까? ...아니다.

이 영화는 '상실'을 다루는 영화이다. 여성감독 수잔 비에르는 잔잔한 삶에 파멸시키는 충격적인 사건을 대하는 개인들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녀는 감각적인 클로즈업을 사용하고 바디캠이나 핸드핼드 카메라를 이용해서 조용하지만 상처로 흔들린 주인공들의 심리상태를 묘사한다. 특히 눈이나 손같은 부위에 대한 세심한 클로즈업이 빈번히 사용된다. 반면에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내에서 상실감을 극대화시킬수 있는 롱샷등을 통해 할 베리의 처연한 마음을 그려낸다.

영화에서 오드리와 제리는 둘 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다. 오드리는 소중한 남편을 제리는 세상의 유일한 친구를 잃었다. 오드리는 불면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제리를 침실로 불러들인다. 통속적인 상황인가? 그렇지 않다. 오드리는 정말 잠을 자고 싶었을 뿐이다. 남편이 잠들기 전에 귓볼을 만져주었듯이 제리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제리는 그렇게 한다. 물론 성적인 긴장감이 도는 장면들이 몇 군데 있다. 그러나 감독은 그 지점에서 살짝 씩 현명하게 비켜나간다. 

오드리의 딸이 제리에게 '아빠가 되면 안되겠냐?' 고 묻는다. 제리는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마치 브라이언이 없었던 것 처럼 만들어서는 안되지않겠냐고 말이다. 영화 내내 감독은 이 약속을 지킨다. 그렇지만 의리의 돌쇠같은 스트레오타입화 된 방식은 아니다.

오드리는 제리가 점점 브라이언의 영역으로 침범하는 것에 분노한다. 당연히 그렇지 않겠는가? 감독은 오드리의 이중적인 감정을 잘 잡아낸다. 한편으로는 제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면서도 또 제리가 브라이언의 영토를 침범하게 될 까봐 두려워하는 그런 것 말이다.

이 둘은 '상실'이라는 커다란 트라우마 앞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돕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뚜렷이 들어나지 않는 것이 이 영화의 장점이다. 마치 시간을 찍어내듯이 그렇게 상처와 싸우고 상처와 화해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감독의 섬세한 연출의 미덕이 그곳에 있다.

영화의 제목은 브라이언 네 집에 있었던 화재와 관련이 있다.

<단테 신곡 강의>를 쓴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책에는 유명한 가브리엘 마르셀과의 개인적 일화가 잠깐 소개된다.  신곡에서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입을 빌어 '신이 인간에 준 가장 큰 선물이 자유의지'라고  말한다. 마르셀은 작별 인사를 하러간 도모노부에게 묻는다 "그런데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 있지.그게 뭔지 알려나?".....도모노부가 머뭇거리고 있자 마르셀은 이렇게 말한다. " 수많은 것들이 사라져 버린다.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모든 물건들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아름다운 추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라고 말이다.

 영화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가브리엘 마르셀과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짧은 에피소드를 영화로 만든 것 같다. 영화는 그런 가르침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절망' 앞에선 인간들의 모습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더 주목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삶과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도 함께 말이다. 영화는 말미에 브라이언이 말한 '좋은 것은 받아들여' 라는 글귀로 끝맺는다. 현실이 지옥같아도 결국 그것을 헤쳐나올 수 없는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진정 '좋은 것'을 잃었을 때이다. 그 좋은 것이 이름이 '믿음'이든 '사랑'이든 '희망'이든....정할 나름이다.

잔잔하지만 아름다운 영화다. 언젠가 '상실'을 경험했던 사람들에게라면 더더욱. 할 베리와 델 토르의 연기는 훌륭하다. 특히 델 토르의 마약과 담배로 뇌의 절반 쯤 빈공간으로 만들어 버린 듯한 연기와 눈빛은 인상적이다.

 나는 이 영화를 와이프와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와이프가 좋아할 만한 영화다.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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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 일반판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 리나 레안데르손 외 출연 / 플래니스 엔터테인먼트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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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페이퍼에 쓴 것들을 옮깁니다. 

눈은 침묵이다.

눈 오는 날은 그래서 아름답다. 세상이 동양화의 마지막 여백처럼 남아 있는 날은 읽던 책을 뒤로 물리고 눈이 완성하는 빈 공간을 오래도록 바라봐도 나쁘지 않을 성 싶다. 나는  내가 '차가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누구나 그럴지도 모른다. 잘 얼린 네모난 얼음조각을 한동안 바라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봄날 햇빛을 머금은 민들레가 주는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아폴론의 미'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거창하다.  '차가움'은 일단 '단순함'을 준다. 우리가 가끔 모든 로코코적 수식을 걷어낸 작품들을 볼 때 느끼는 그런 아름다움이다. 정말 세련된 디자인들은 선을 줄인다. 눈은 그런 차원에서 세상의 선을 단 몇 개의 줄로 환원시킨다. 본질을 향한 질주같은 그런 선들은 아름답다. 우리는 눈이 지워지면 다시금 세상의 선들을 만나겠지만, 삶의 어떤 순간 순간에는 그런 선들을 생각해야 한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북극'을 사랑했던 것도 그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눈에 갇혔다는 것은 침묵에 갇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몇 년 전 폭설로 공항에 묶였던 날이 생각난다. 공항 대합실의 소란과 대비하여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은 조용했다. 실제로 눈이 오는 날은 조용하다. 눈의 입자들이 흡음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미 끊겨버린 비행기에 대한 마음은 놓고 나니 하루를 거저 얻은- 남은 일이야 알아서 되라지 뭐-자의 여유로움이 생겼다. 어디로 갈야할 지 결정하기 위해 나 앉은 공항 벤치에서 생각보다 오랫동안 머물렀다. 눈이 건네는 말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겨울에 눈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치욕적이다. 다른 지역에 눈이 왔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나는 어느 북구의 겨울과 그 침묵을 만나러 갔다.

영화 <렛 미 인>(여기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아서들 보시오. 그것까지 배려하면서 쓰라고 하는 것은 정말 구리구리한 요구요.)



영화 속의 스웨덴은 계속 눈에 덮여있다. 영화 첫 장면부터 눈이 펄펄 내린다. 그러나 이 영화는 스웨덴의 겨울풍광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이건 '뱀파이어' 영화다. 하지만 결코 공포물은 아니다. 영화는 '성장영화' 이고 '사랑'의 영화이며 '봉합'(?)의 영화다. 왕따 소년 오스칼과 뱀파이어 이엘리가 주인공이다. 오스칼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그의 금발과 햇빛이 부족한 피부빛은 스웨덴의 겨울과 닮아 있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그러면서 결코 반항하지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칼로 나무에 분풀이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때 이웃집으로 이사온 이엘리를 만난다. 그녀는 '맞받아 치라'고 오스칼에게 이야기한다. 그녀가 지켜줄 것이라고....

그리고 그들은 소통하기 시작한다.('소통'이라는 말을 쓰고 보니, 마치 이 말이 이제는 '혁명'의 모든 조건인양 쓰이는 경향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디가나 '소통' '소통' '소통'이다.  남발하는 '소통'의 만연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들은 서로 '외롭다'는 조건으로 상대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기존 공포물의 뱀파이어와는 다른 동화적 구현의 '렛 미 인' 에서 첫 번째 깜찍한 전환이 벌어지는 지점이다.

 

그렇다. '뱀파이어'는 외로운 존재이다. 나는 시골 마을에 서 있는 장승이나 솟대가 외로와 보인다는 생각은 했지만 '뱀파이어'가 외로와 보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구의 감독은 '외로운' 뱀파이어를 끌어낸다.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소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스럽에 '왕따' 소년의 '외로움'에 침입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얼마지나지 않으면 - 스토리라인에 온 신경만 집중시키지 않는다면- 오스칼과 이엘리가 하나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뱀파이어 이엘리는 오스칼의 '얼터에고'인 셈이다. 영화 중반부에 이엘리의 존재를 알게된 오스칼이 '너는 누구냐?" 라고 묻는 대목이 있다. 이엘리는 '나는 너다' 라는 식으로 대답한다. 오스칼의 억눌린 자아가 만들어내는 얼터에고로서의 이엘리를 감독이 직접 설명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식으로 '결국 그들은 하나야' 오스칼의 망상이야라고 스토리를 따라간다면 관객의 상상력 협착증에도 문제가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속해 있는 세계를 그려내는 중요한 장치가 스웨덴의 눈오는 풍경이다. 오스칼의 내면처럼 그곳은 눈으로 흡음된 침묵의 세계이다. 이곳에서 상징계의 상징이 언어라면 상징계를 거세하는 표상은 침묵이된다.

 영화 첫 장면에서 감독은 오스칼을 창 안에 있는 아이로 설정한다. 창 밖과 창 안이 모두 눈 속에 있는 셈이다. 북구의 겨울은 어둠과 묵음으로 이에 답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사실 이런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거의 무채색이며 이유없는 뱀파이어의 희생양이다. 감독은 여기서 음향효과를 이용한다. 어른들의 장면에는 몇 가지 시끄러운 일상의 소란을 설정하거나 아니면 모든 소음을 덮어버리는 단순한 기타멜로디로  덮어버린다. 단절이며 거세다. 동성애적 코드가 보이는 오스칼 아버지와 친구의 대화장면은 오스칼이 이런 어른들의 세계와 단절된 존재임을, 즉 거세된 존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에게 아버지의 이름은 없다.(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그렇게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떠올려보자.)

오스칼은 눈오는 밤이 세계와의 소통의 단절을 말하듯이 오스칼 역시 언어들도 부터 단절된다. 상징적 질서와의 단절이다. 그는 '외로움'을 재료로 삼아 자신의 세계를 꾸려나가야 한다. 극단적으로 어려운 성장통이지만 감독은 파괴나 일탈 같은 것을 소재로 삼지 않는다. 섬세하지만 극단적인 폭발을 내재한 이 성장의 아픔은 결국 '뱀파이어'의 흡혈이라는 행위를 통해 어른들의 세계에 흡집을 내기 시작한다.(하지만 상징의 질서는 힘이 세다.) 

이 영화 초반에 이엘리를 돕는 아버지 또는 애인이 등장한다. (뱀파이어는 늙지 않는다.) 그는 이엘리가 직접 거리에 나가서 흡혈을 하지 않도로 살인을 통해 이엘리의 생명을 유지시켜주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어른들의 세계가 만들어 놓는 유일한 제도적 안전 장치가 되는 셈이다. 뱀파이어를 사회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이 실패했을 때, 뱀파이어는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잔인한 방식의 사랑의 완성이다.( 다분히 잔인한 것은 성장할 오스칼이 곧 걷게 될 길이기도 하다는 마지막 암시 같은 것 때문이다.) 





영화는 오스칼이 이엘리를 가방에 넣어서 어른들의 세계를 떠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들은 기차 안에서도 대화를 나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영화에서 결국 어른들의 언어는 그들을 침입하지 못한다. 영화는 오스칼이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적극적인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내가 영화를 갈등의 해소보다는 봉합적인 결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그런면에서 현실적이다.) 결국 오스칼은 언젠가 자신과 이엘리가 하나의 존재라는 것은 인정함으로서만 그 여행을 마감할 수 있다. 오스칼의 셈세함은 그 선에 닿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뱀파이어는 이미 우리다. 우리들 역시 오스칼같은 봉합의 기억이 있었을지 모른다. 상징계로 통합되기 위해서 우리는 일정 정도 뱀파이어야하고 또 그런 기억조차 잊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더 폭력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그런 태고의 섬세한 기억을 잃고 뱀파이어를 완전시 소거해 버린 순혈적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나를 못견디게 하는 것은 그런 뱀파이어를 타자화시키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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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명창 임방울 - 고독한 광대의 생애 이상의 도서관 20
천이두 지음 / 한길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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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궁시렁 궁시렁"쑤욱..대에...머리" 를 흥얼거리니 모두 <개그 콘서트>에 나온거라고 폴짝 거린다. 그 프로그램은 예전에 서너 번 본 적이 있었는데 당최 재미가 없어서 이후 절연하고 있다. 그런 반응을 보고 개그 소재로 "쑥대머리"를 이용했었나 보다하고 추측했다.  쑥대머리는 개콘, 개콘 은 쑥대머리...더질더질. 짖궃게도 질문을 하나 던진다. "쑥대머리가 무슨 뜻인지?"..조금 전까지 총기어렸던 눈빛과 전광석화같던 추임새는 백열등 전구 터지듯 펑하고 사라진다. 교실 앞에 나가 수학 문제를 풀라는 것도 아닌데 다들 머뭇 머뭇 멀뚱 멀뚱.. 천장에 만원짜리 붙었는가. 그래도 다행히 '쑥대머리' 가 판소리인 줄은 안다. 그래서 다음 질문을 하니 또 저 멀리 잔별도 많은 하늘에 오늘은 오버로드가 떳나보다. 오버로드 정찰 보낸 질문은 이거다. '쑥대머리는 판소리 어디 나오는 노래인지?' 
에이..때는 바야흐로 "오버로드 정찰 갔다 돌아온다 황급히 들어와서 정확히 두 시 방향 프로토스 발견했소" 하는 시대이니(한 때 유명했던 또랑광대의 판소리 스타크 사설이다.) 뉘를 탓하랴. 마침 2시 방향에서 저그들이 러쉬하니 지상병력을 모으러 다들 흩어진다. 더질더질

우리 시대의 판소리의 위상이 그렇다. 이건 현실이다. '우리 소리를 무시하지 마라.' 라고 각성의 소리를 외치는 것은 기실 아무 소용도 없다. 차라리 맥도날드가서 파전을 주시오라고 외치는게 더 빠를 지도 모른다. 결국 이건 계몽적 의지로 응혈되어 남아 도는 피를 쏟는-차라리 헌혈을 해라-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이 좋은 것을 몰라주는게 서럽다는 투정은 10대 후반쯤에 종료해야 한다. 예술에서도 그렇고 정치에서도 그렇다. 간혹 통속적인 예술 매니아,정치 애호가(?) 중에는 "진정을 몰라주는 대중"에 대한 원망을 여기 저기 섞곤한다. 그런 말을 오래 듣고 있다보면 진짜 지겹다.  한다는 소리를 단적으로 정리하면 '이 좋은 걸 몰라주는..',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수준의..' 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푸념을 통해서 낮추는 건 '대중'이요 높이는 건 '자기'임을 자신은 모른다. 여기에는 은근한 엘리트 의식-각성된 자의-이 숨겨져 있다.  

  판소리 대목중 '쑥대머리'는 일제시대 명창 임방울의 트레이드 마크다. '쑥대머리는 개콘이 아니라 임방울'의 전매특허다. (판소리 용어로 '더늠'이라고 하면 될 성 싶다)   

쑥대머리 귀신형용(鬼神形容) 적막옥방(寂寞獄房) 찬 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漢陽郞君) 보고지고.
오리정(五里亭) 정별후(情別後)로 일장서(一張書)를 내가 못봤으니
부모봉양(父母奉養) 글공부에 저를이 없어서 이러난가.  

 <춘향가>의 옥장한탄 장면에 나오는 대목이다. 요즘은 따로 떼어 부르기도 하지만 완창 <춘향가>에 있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다른 더늠을 넣는 넣는 것인데 그것은 판소리 창자의 특권이다. (<쑥대머리>의 내용분석은 정양 시인 <판소리 더늠의 시학>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있다. 참고하면 좋을 듯 하다.) 하여간 임방울은 이 곡 하나로 1930년대 일약 판소리계의 스타가 되었다. 당대 SP음반사들이 서로 임방울을 불러서 녹음했다고 한다. 내가 가진 천이두 선생의 책 <천하명창 임방울>에는 '쑥대머리' 녹음이 3번으로 적혀 있다. 하지만 최근 자료를 보면 총 4회 각기 다른 레이블에서 녹음한 걸로 나온다. 판소리의 고음반자료들과 명창들의 흔적들이 재발굴되면서 이런 자료들은 수정되기 때문에 그리 흠잡을 필요는 없을 성 싶다. 

  임방울 선생과 사연 깊은 곡이 지난해 한 번 크게 울린적이 있다고 한다.(나는 현장에 가보지는 못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노제때 안숙선 명창이 임방울 작사 작곡의 <추억>을 불렀다는 것이다. <추억>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임방울의 여성 편력과 그의 따뜻한 마음, 그리고 음악적 표현력을 이야기할 때 꼭 언급되는 내용이다. 기생 산호주의 죽음을 애통하는 일종의 단가이다. 산호주는 임방울 선생의 소리에 반한 기생이다. 둘이 눈이 맞아 살다가 어느날 임선생 목소리가 망가진 걸 알고 독공하러 훌쩍 떠나버린다. 산호주는 임방울을 찾으러 가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한다. 이후 젊은 나이에 산호주가 죽자 선생이 그녀를 애도하며 만든 곡이다. 가사의 내용이 망자에 대한 애통한 심정을 담고 있으니 추모곡이라 할 말 하다.  

내가 가진 책은 <천하명창 임방울>이다. 저자는 동일인이고 책의 소제목도 거의 대동소이하다. 천이두 선생은 이 책에서 임방울 선생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하이브라이드한 글쓰기를 선보이고 있다. 스스로도 일종의 에세이라고 칭하는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주가 되는 것은 일종의 평전 형식이다. 임방울 선생의 지인들로 부터 들은 이야기와 전설같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의 삶을 한 편 한 편씩 소설형식으로 풀어나간다. 책의 첫 대목에 임방울의 국장과 광주 각설이들의 조문이야기도 일련의 에피소드에 소설적 상상력을 가미해서 서술한 대목이다. 그 외에도 공창식 명창으로 추정되는 스승으로부터의 수련 과정, 칼칼한 스승 유성준 명창으로부터의 배움과정 등은 모든 소설 형식으로 꾸려진다. <전설의 명창 임방울>을 알라딘의 미리보기로 읽어 보니 첫 장면에서 소설적 부분이 좀 더 보강된 듯하다. <천하명창 임방울>에 실린 에세이류의 글들이 <전설의 명창 임방울>에도 실려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어쨋든 내가 가진 책에는 소설류의 글 다음에는 판소리 에세이라고 할 만한 글들이 주로 실린다. 중심에는 임방울 선생의 소리와 관련된 것이지만 판소리 특성이나 전승과 관련된 글들이 주로 실려 있다. 그런 면에서 천이두 선생이 소설과 에세이를 결합한 방식은 임방울 선생의 일대기를 따라가면서 판소리를 둘러싼 전체적인 그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임방울 선생이 동편의 소리와 서편의 소리를 동시에 배워 자신만의 독창적인 창법을 만들어 낸 것을 저자는 높이 평가한다. 이런 장면에서 동편과 서편의 전승계보 그리고 또 고제 판소리와 신제 판소리의 차이등을 송만갑,정정렬 명창들이 에피소드를 통해 비교한다. 또한 당대의 라이벌이라고 할 말한 명창 김연수와의 대립구도를 통해 임방울의 장단점을 엿볼 수 있게도 한다.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김연수는 아폴론적이고 임방울은 디오니소스적이다. 김연수는 판소리 오마당을 정리하여 자신만의 동초제를 만든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한다. 판소리의 현대화라고 할 만한-저자는 좀 부정적이지만-창극 운동에서도 정정렬 명창의 뒤를 잇는다. 임방울은 이와는 완전히 반대다. 창극을 싫어했고, 제자를 남기지도 못했다. 소리만큼은 당대 최고였지만 김연수처럼 완벽한 발음을 전달하지도 못한다. 김연수 명창의 음반을 들을때 무언가 명쾌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의 발음에 대한 강조때문이기도 하고 합리적인 이면론에 기인하기도 한다. 하여간 이 둘은 여러모로 달랐으나 판소리계에서 각각 존경을 받을 위업을 성취한 사람들이다. 

 임방울 명창의 소리는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을까? 요즘들어 봐도 임방울의 목소리는 매력적이다. 다만 음반취입을 꺼린 그이기에 녹음도 별로 없고 있다한들 음질이 열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방울의 소리는 다른 명창들이 갖지 못한 그만의 독특한 개성이 있다. 명창 강도근 선생은 임방울선생의 청을 '찬물 날아가는 소리'라고 했다. 마음에 드는 비유다. 특유의 청구성에 수리성을 얹은 소리로 당대 대중들의 폐부를 찌른 것이다. 여기에는 임방울이 대중과 직접 소통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 상황이 있다. 임방울 선생의 따님이 했다는 말에 핵심이 있다. 요약하자면 '선배들이 누린 통정이니 대부니 하는 이름도, 정부의 비호 아래 겨우 숨이라도 쉴수 있게된 인간문화재라는 칭호도 얻지 못한 가객' 이라는 것이다. 임방울 명창은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 전후'까지 한국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비극 시대를 민중과 함께 겪어온 사람이었다. 그가 기댈 수 있는 청중이란 것은 선배들처럼 '양반들'도 아니었고,또 후배들처럼 '정부'나 '일부 애호가들'도 아니었다. 전근대와 근대의 이행기 속에서 그는 망국의 한을 가진 민중들을 토대로 그들과 함께 울고 노래할 수 밖에 없었다. 판소리 사회사에서는  이 시대와 관련하여 '판소리 계면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아무래도 앞서 말한 역사적 한이 청중들의 기호와 소리에 반영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임방울이 큰 몫을 차지했다는 것도 그릇된 말은 아니다. 하지만 천이두 선생은 그것을 '민중성'과의 결합이라는 판소리 본연의 정신과 연결시킨다. 또한 임방울의 소리는 통속적 계면화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면의 예술성을 극대화시켜 판소리에서 저어하는 노랑목의 위험성을 건너고 있다고 말한다.     

 거친 시대,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다간 명창 임방울.  엉뚱한 상상을 한다. 온갖 부귀와 미녀들이 있는 옥황상제의 궁전 '광한천허부'에서 탈출하려고 눈을 쫑끗 뜨고 있는 임방울 말이다. 그의 소리를 사랑한 옥황상제가 그를 계속 옆에 두려고 하고, 그는 자기 소리를 사랑하는 민초들과 여염집의 자유로움으로 달아나려 실강이하고...더질더질

** 내가 리뷰를 쓴 책은 정확히 말하자면 현대문학에서 나온 천이두의 <천하명창 임방울>이다.그러나 현재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전설의 명창,임방울>이며 앞선 책의 개정,증보판 인 듯 하다.

**임방울 명창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이 사이트를 이용하면 된다.www.imbangu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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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반복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2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언젠가 역사의 반복 문제를 말하며, 꼬리를 무는 뱀 '우로보로스'를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그리스 도상학에 나오는 이 거대한 뱀은 영원 회귀, 또는 생의 반복, 불교적으로 말하면 육도윤회를 상징한다. 끝없이 순환하는 세계가 자기 꼬리를 무는 원형의 뱀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역사와 반복>에서 이 우로보스적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하지만 '반복'에 대해서 명심해야 할 것은 그것이 '구조적이며 형식적인 것'이지 개개의 사건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건은 매번 차이를 발생시키는 일회적인 것이다. 또한 이런 반복은 사후적 파악이 가능한 것이지 의식적으로 실현할 수도 없는 것이란 점을 고진은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    

먼저 가라타니 고진의 '반복'은 거시적으로 월러스틴의 '체계론적'  순환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그는  60년 경제 변동을 뜻하는 콘트라티예프 곡선에 따라 세계사 의미를 도표화한다.(월러스틴의 세계체계론을 알고 있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 들일 수 있는 내용이다.)   










-1810



1810-1870



1870-1930



1930-1990



1990-



세계자본주의



중상주의



자유주의



제국주의



후기자본주의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국가



(제국주의적)



영국



(제국주의적)



아메리카



(제국주의적)



자본



상인자본



산업자본



금융자본



국가독점자본



다국적자본



세계상품



모직물



섬유공업



중공업



내구소비재



정보



국가



절대주의



네이션스테이트



제국주의



복지국가



지역주의


.


 예를 들어 그는 현재 시점을 헤게모니 국가가 없는 즉 '제국주의적' 시대로 이해한다. 마지막 헤게모니인 미국은 흔들렸고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는 등장하지 않았다. 이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의 시대 인식 방법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제 고진은 되묻는다. 그렇다면 현재의 시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930년대의 상황을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국주의 시대가 열리는 1870년대를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이다.  

본론에서 고진은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을 다시금 읽는다. 이 책은 그에게 <자본론>의 쌍생아이다. 물론 다른 이면을 다루고 있는. 그는 <자본론>과 <브뤼메르18일>이 대칭적으로 '반복강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자본론>은 알다시피 자본축적 운동이 자기증식하는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고진은 이를 자본의 '반복성'으로 읽는다. 자기증식하며 차이를 만들고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만 <브뤼메르18일>에서 그가 찾아내고 있는 강박은 무엇일까? 이게 이 책에서 그가 말하고 싶은 핵심적인 주제다. 그것은 '억압된 것의 회귀'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톨킨식의 '왕의 귀환'이다. 지젝이 말한 것처럼 '제대로 묻히지 못한' 왕이 햄릿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이다. 그럼 제대로 묻힌다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두 번 묻히는 방식, 즉 반복적 매장 만이 역사 현상학적으로 가능했다.

   언젠가 어떤 분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뿌리없음을 말하며 그 이유 중 '왕을 목메달지 못한 나라'라는-1789년 프랑스 혁명을 상정하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역사적 단죄의 중요성을 말하고자하는 바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얼핏 맞는 듯 하지만 역사적으로 늘 상 사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루이16세를 목메단 프랑스는 공화국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왕을 죽였는데도 말이다. 그 뒤에 등장하는 것은 나폴레옹 제국이다. 그리고 이를 반복하고 있는 1848년 혁명은  이 책의 주요 주제인 보나파르티슴으로 귀결되고 만다.  고진은 <브뤼메르18일>에서 이런 반복 가능한 시스템을 '표상의 문제'에서 읽어낸다. 즉 반복강박이 만들어지는것은 억압 자체때문이 아니라 그 표상 시스템 자체가 가진 '구멍'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실재계의 구멍을 메우려는 대상 a 같은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렇게 말한다. 

"절대주의 국가를 쓰러뜨리고 출현한 부르주아 국가는 마치 전자와 무관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실제로는 위이게 그것이 죽인 왕을 다시 소환화게 된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고진은 보나파르티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답인, 엥겔스의 답변을 보완한다. 보나파르티슴에 대해 낯선 이들을 위해 먼저 이 대목을 정리해 보자. 엥겔스는 이 독특한 현상을 두고 '브루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균형상태에서 어느 한 쪽도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자립성을 띤 국가권력'이라고 말했다. 고진의 문제제기는 이렇게만 보나파르티슴을 이해하게 되면 절대적 왕권 하에서의 균형상태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절대왕권의 균형은 계급적 균형이 아니라 '봉건세력과 브루주아의 균형'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절대왕권이 무너지고 난 이후 부르주아 국가 내에서 어떻게 계급적 균형이 이루어지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고진은 엥겔스의 보나파르티즘을 보완하면서 두 가지 측면을 이야기 한다. <브뤼메르18일>의 표상 문제와 관련된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보통선거와 대의제'의 것이다.  대의제는 '대표하는 것'과 '대표되는 것'사이에 자의성에 의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계층들-마르크스는 농민을 지목했다. 마르크스에게 혁명 주체는 계급적으로 집산된 산업노동자였다-은 '대의제'의 자의성으로 인해 보나파르트를 지지할 수 있게된 것이다. 고진은 히틀러 역시 대표적인 보나파르트주의자라고 보면서 그가 총통이 된 것에 국민투표의 힘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앞서 말했듯이 '왕'을 죽인다고 뭐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왕을 죽인 그 시스템 안에 보나파르트를 황제로 추대한 반복적 강박의 구명이 들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이 대의제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 

 고진은 '반복의 표상'을 세계사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그가 보기에 1789년 혁명과 1848년 혁명을 일종의 반복이다. 그런데 이런 반복 자체가 더 멀리 있는 역사의 재현과 유사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것은 '로마 제국'이다. 1789년 혁명에서 왕을 죽이고 나폴레옹이 나온 것을 '시저의 반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반복적인 제국의 형성의 고투는 '국민국가외 정복 정책의 내적 모순'에 부딪힌다. 결국 나폴레옹시기에 각국은 내셔널리즘과 독립운동에 열을 올리게 되고 결국 '네이션=스테이트'의 연장으로 제국주의 모순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런 유럽의 제국주의는 또 세계에 더 많은 네이션=스테이트를 반복하게 된다. 고진은 '하나의 유럽'이라는 것이 이런 '제국'의 반복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견한다. 이제 반복의 구조는 세계자본주의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보나파르트의 '모든 이해를 해소하려는' 절충주의적 방식은 결국 당대 '글로벌 자본주의와 국민국가 경제'의 대립을 불러온다. 이는 앞서 말한 정치적 의미의 '제국과 국민국가' 모순의 재연이다. 현재 글로벌경제라고 하는 것은 결국 후진국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인데 이것은 네이션=스테이트를 희미하게 하며 또한 동시에 이를 강화하는 효과를 발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고진은 <브뤼메르18일>의 분석을 토대로 이제 일본자본주의의 반복 강박을 살펴본다. <브뤼메르18일>의 일본판 응용이라고 보면 된다. 일본의 근현대사를 알면 조금 더 친근하게 바라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과문하다보니 구체적 사안보다는 일반론적 흐름으로 이해하며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도 한일관계의 특성상 거론되는 인물 중에 이름이 낯익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고진은 여기서 '천황제 파시즘'의 문제를 파시즘의 '동적 과정'으로 파악하고 이를 보나파르티슴의 다른 표현 양태로 설명한다.  1925년 보통선거의 도입으로 메이지 시대 부활한 '천황'은 의미론적으로 살해당한다. 그런데 그 이후 '쇼와 유신'에서 천황은 다시 부활한다. 죽은 왕이 다시 귀환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25년 보통선거제의 도입과 함께 2.26 쿠테타의 실패가 한 몫을 했다. 청년장교들의 쿠테타는 실패하고 군부통제권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그리고 이 군부를 비롯해서 의회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이미지와 영향력을 가진 자가 등장하게 된다. 그가 바로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이다.(우리와는 별로 안좋은 인연의 인물이다.) 그는 황실 귀족이었고, 군부에 영향력도 있었다. 그런고로 군부를 견제하는 모든 세력들이 그를 지지하게 된다. 그리고 고노에 내각은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아지만 2.26쿠테타 당시 기타 잇키같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의 평등론을-토재분배, 재벌억압같은- 추진한다. 고진은 고노를 보나파르티즘에 가장 어울리는 정치인이었다고 말한다. 그럼 그는 왜 히틀러가 되지 못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를 천황을 위협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일본 우익들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진은 역설적이게 일본 파시즘을 방해한 것이 천황이라고 말한다.(현재 만연하는 파시즘에 대한 기표적 소비로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서 천황은 일본 파시즘 자체이기때문이다.) 

 여기서 고진은 뒤에도 이어가게 될 일본 담론 공간을 구분하는 주요 방법론을 제기한다. 이는 전쟁 중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온 '일본 근대의 초극'이라는 논쟁을 재독하는 것이다.  크게 일본의 근대담론의 공간은 두가지 모순은  '국권/민권' 그리고 '아시아/서양' 사이에서 형성된다.  복고와 유신,존왕과 양이,쇄국과 개국,동양과 서양...이런 것들이 기본축을 구성한다. 예를 들어 일본은 스스로 서양 세력에 맞서 아시아를 지키겠다는 취지로 '대동아공영론'을 주장한다. 결국 그것은 제국주의로 귀결되고 말지만 최소한 담론영역에서는 '아시아적'이다. 그래서 2차세계대전은 그들에게 아시아에 대한 침략전쟁이자 또 서양에 대한 아시아의 해방전쟁이 되는 셈이다. 물론 고진은 이것을 이렇게 해부하려는 시도 자체가 대단히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하여간 일본의 '근대초극'의 문제는 메이지와 다이쇼..그리고 쇼와를 거치며 반복되는 과제로 고진은 이를 통해 일본의 근대성 문제와 아울러 일본의 에피스테메에 대해 지적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문학적 분석으로 이어진다. 자연스럽게 사상가 고진과 비평가 고진이 오버랩되는 것이다.  



                            국권





2 제국주의







1 부르주아국가







3 아시아주의







4 민주주의(사회주의)





                             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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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심에는 오에 겐자부로가 있다. 고진이 보기에 오에 겐자부로야 말로 일본적 근대문학의 성취로 보는 듯 하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오에는 동시대의 미시마 유키오와 내적으로 대적하는 관계에 있다. 이 둘은 서로 비판적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근대의 쌍생아였다. 반면 고진은 80년대의 하루키를 등장시키면서 오에와 하루키 사이의 거리감에 대해 말한다. <근대문학의 종언>의 의미를 오에와 하루키를 통해 예증하고 있는 것이다. 고진은 구체적으로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원년의 풋볼>(몇 년 전 읽은 최고의 소설이었다.) 과 하루키의 <1973년의 핀볼>을 일종의 패러디적인 오독을 하면서까지 대립시킨다. (패러디인지 아닌지는 중요한게 아니라고 고진은 말한다.) <만년원년의 풋볼>은 고진이 분석한 '일본 근대의 초극'에 의거하여 캐릭터를 분석한다. <만년원년의 풋볼>을 보면서 어렴풋이 느꼇던 것들 예를 들자면 소설 속 알레고리가 의미하는 생과 역사의 반복 문제,그리고 자기 소멸을 문제 등에 대한 고진의 분석은 흥미로왔다. 거기에 주인공인 나와 동생의 관계,또는 그가 동일시하는 증조부의 관계를 정치적 근대 모순의 좌표 속에 설정한 시도는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이어서 내게는 작은 발견과도 같았다. 결국 자기소멸이란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자명성 마저 이해되는 듯 했다. 고진은 이렇게 말한다. 

"<만엔원년의 풋볼>을 1960년대와 쇼와 35년의 정치투쟁에는 바쿠후 이래 일본의 정치적.사상적 역학이 집약되어 있다. 그리고 <만엔원년의 풋볼>이외에 그 '총체'를 또는 그것이 분열된 '근거지'를 파악하려고 한 작품은 없다. 1960년 6월의 정치행동과 만엔원년의 봉기를 결부지음으로써, 이 작품은 말하자면 1960년과 쇼와 35년이라는 시차에 존재하는 것을 포착한 것이다. "

반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1973년의 핀볼>은 근대적 담론이 탈근대적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하루키의 고유명사는 분별적인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고진은 오에의 주인공들과 비교해서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일종의 '초월론적 자기' 위치에 서 있는 인물들로 묘사한다. 그는 이것을 '풍경의 발견'이라고 말한다. 즉 경험적 자기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또다른 초월적인 자기의식이 하루키의 주인공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근본적인 도착이 있다. 이런 초월적인 자기의식은 상찬도, 패배도 모른다. 고진은 하루키의 소설이 가진 탈근대성에 대해  '고유명을 가진 역사가 초월되는 그곳에서 풍경이 등장한다.'라고 말한다. 고진은 이를 단순한 포스트모던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전도된' 이란 말에 밑줄을 긋고 싶어하는 듯 하다. 그가 하루키의 소설을 독해하는 용어 중에 하나는 '아이러니'인데, 이 말은 '모든 것이 장난이며 또 진지하다'를 뜻한다.결국 유의미한 것은 무화하고 무의미한 것에 진지하게 몰두하는 세계. 이것은 결국 나르시즘적인 '자기대화'임에 틀림없다. 고진은 이런 흐름이 이미 근대문학계열 속에 있었음을 주지시키며, 이런 독아론적 세계가 최근 작가들의 기본적이 토대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세계로부터의 도피'내지는 '타자성으로부터의 도망'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가라타니 고진의 이야기는 이제 근대문학에 대한 마지막 장으로 향한다. 여기서 그는 헤겔의 노년 비유를 통해 노년을 받아들인 오에 겐자부로, 노년을 거부한 미시마 유키오의 유사성과 차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규범의 자기 해체 이전에 규범 스스로 자살해버린 시대의 나카야마 겐지의 이행기적 전후작품을 통해 일본 담론공간의 모습이 재구현되고 또 다시 해소되어가는 예를 보여준다.

<역사와 반복>의 마지막 장은 <불교와 파시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일본 선불교가 성장하게되는 정치적 계기들과 지식인들 중심의 선불교의 세계관이 가진 비행동성 내지는 관념성 등을 지적하고 있다. 일본 내 선불교의 성장은 정치권력의 민중적 불교인 정토종계열의 압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고진의 주장이다. 일본 불교는 한국 불교와 다르다. 주로 정토종 계열로 알고 있다. 일종의 '타력종교'로 '자력' 해탈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 선불교 문화와는 차이가 있다. 고진은 선불교가 일본내에서 소수 지식인 중심으로 확산된 이유를 비판적으로  읽고 있다. 이런 대목은 일본보다 오히려 선불교 중심인 한국에서 더 쉽게 이해될 수 있을 성 싶다. 기독교에도 종파가 많듯이 불교도 다양한 종파가 있다. 한국에서는 조계종의 선불교 전통이 사실 주류가 아닌가 싶다. 즉 한국에서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여러 불교 중에서 선불교적 에피스테메 안 있다는 뜻이다. 물론 선불교가 한국 불교의 중심이라 할 지라도 법통상 그런 것이고 일반 불교신자들은 - 순전히 기복신앙부터 시작해서- 훨씬 다층적으로 수용한다. 앞선 글 들에 비해 짧은 분량이지만 흥미롭게 읽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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