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6/20) 부산 영화의 전당 시사회에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코스모폴리스>를 봤다. 어차피 기억에 의존하는 영화쓰기인지라 며칠 지나면 쓸 마음도 땡볕아래 아이스크림처럼 사그러질 것 같고 해서 그냥 끄적인다. 늘 그렇듯이 아님말구식이지 뭐.ㅎㅎㅎ 시작.
최근 국제 금융시장은 '버냉키쇼크'라는 것에 술렁이고 있다. 미 연방준비위원회 의장의 유동성 축소 발언에 세계 주식시장 전체가 초록불을 빨간 불로 바꾼다. 한국 증시 역시 마찬가지다. 코스피 지수 붕괴선을 두고 대책과 해석이 분분하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코스모폴리스>는 그런 국제금융시장을 움직이는 '큰 손' 애릭 패커(로버트 패틴슨 역)의 이야기이다. (앞서 언급했던 '버냉키쇼크'와 유사한 예는 영화에서도 잠시 언급된다. '재무장관의 발언 하나에 시장이 과민하게 움직인다.' 고 탓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는 세계 금융의 수도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월가의 큰손 애릭 패커는 사무실에 있지 않다. 그는 개량한 리무진 속에서 금융시장과 접속한다. 여기서 접속은 이중적인 의미다. 1차적으로 그의 비즈니스. 즉 실제 거래를 하는 방식이 그렇다. 컴퓨터 단말기를 통한 트레이드는 이제 상식이다. 두번째는 타자와의 접속방식이다. 그가 타자와 만나는 방식이 분산적이다. 이 영화에서 -기억에 의존하자면- 3명 이상의 사람이 모인 적이 없다. 마지막 이발소 씬에서 짧은 대화를 제외하면 말이다. 대화는 늘 1:1 형식을 취한다. 즉 애릭 패커가 타자와의 관계맺는 방식은 마치 컴퓨터 단말기와 개인이라는 관계의 미메시스다. 그가 컴퓨터 단말기와 접속하면서 '투자-기계'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그는 그 외의 삶에서 새로운 접속점을 찾아 내지 못한다. 그의 정체성 따위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접속의 지점을 찾지 못하는 인간은 어떤 지점에서 비가시적 자본처럼 그 물질성을 놓쳐버리게 된다는 휴머니즘적인 유물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인간화한 형식에 가까운 그가 결국 자기 목적성을 놓쳐버리는 순간 -자본은 절대 자기목적성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내파한다.
금융자본주의 하에서 자본의 흐름은 비가시적이다. 현재 국제 경제 규모에 있어서 실물경제는 비가시적 금융경제에 자리를 내준지 오래다. 이것은 어느 대통령, 어느 정권, 어느 경제블럭의 탐욕이나 욕망 때문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공황을 겪는다." 라는 오래된 금언이 있다. 이말을 한 사람들은- 물론 공황론에 대한 이견은 산처럼 많다- 이윤율 하락을 주 원인으로 생각했다.실제 2차대전 전후로 이윤율 하락을 견지해낸 것은 전시경제 시스템이었으며, 자본의 유기적 재구성 과정은 끊임없은 유동전략을 통해 '자기증식-재생산'이라는 목적을 달성해 왔다. 데이비드 하비가 <신제국주의>에서 말한 '조정' 또는 '축적'(fix) 라는 것은 세계체제론자들이 말하는 세계 경제의 파동 함수 속에서 자본이 대응하는 전술 방식을 정리해낸 것이다. 우리가 흔히 목격해왔던, 예를 들자면 외환은행 론스트 매각과 도 같은것-금융자본주의의 M&A라고 하는 방식을 하비는 '강탈에 의한 축적' 이라고 말한다. 과거 포드시스템 하에서 실물경제가 아직은 숨을 쉬고 있을 때 공간의 이동 등을 통한 생존 방식과 다른 자본의 생존 적응방식이다. 생각해보면 자본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환경을 조절하는 거대한 괴물과도 같다.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에 등장하는 매트릭스. 자본주의는 그런 괴물이 스스로 창조해 놓은 매트릭스다. 모든 배치와 재생산은 그런 스스로 수정하고, 적응하는 매트릭스 안에 놓여 있다.
쉽사리 적을 지목하고 싶은 대적의 욕망은 짐짓 자본의 효과를 원인으로 착각하게끔 한다. 실제 애릭 패커와 같은 거대한 금융가의 큰 손들은 세계 경제를 교란시킨다. 그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권을 잃고 크고 작은 행복들이 사라진다. 그들을 하나씩 제거하면 이 자본주의는 윤리적 자본주의로 전환될까? 대결은 국면적 상태로 계속되어야 하지만 - 그런 국면의 대결이 흐름을 주도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몇 몇의 효과를 주범 삼아 제거한다고 자본주의가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가보다 훨씬 큰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내에서 자본에 대항하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진격의 거인들'도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는 푸코의 권력에 대한 사유에서 힘을 얻는다. 권력을 전략적 관계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구조주의적 공간의 불능적 매트릭스를 변용가능한 쟁투의 매트릭스로 바꿀 수 있다. 영화에서 쥐와 케이크로 상징되는 사건들은 매트릭스 내의 지형도를 바꾸게 만든다. 비버리 실버는 <노동의 힘>에서 체제를 주조하는 대항력으로서의 저항의 힘에 대해 역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만드는 구조 역시 저항력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주인공 애릭 패커는 위안화 투자 실패로 파산지경에 이른다. 여기서 그는 인지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매우 취약한 지점을 드러낸다. 자본주의의 정점에 오른 사람이 자본의 비대칭성, 예측불가능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넌센스다. 감독은 그의 젊음과 오만함 등으로 인과성을 형상화해내려고 하지만 성공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감독은- 특히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지점인데- 웅변투의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서 자본의 유동성과 예측불가능성을 설파한다. 영화에서 전립선의 비대칭성같은 은유는 오히려 귀엽다. 애릭 파커는 탁월한 정보력과 이성적 분석을 통해 자본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패한다. 애릭 패커가 느끼는 존재의 붕괴감은 마치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가 말한 '소외'와 유사하다. 즉 오딧세우스는 이성의 힘을 통해 세이렌의 마법으로 부터 벗어난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귀를 막는 '소외'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자연과 인간의 변증법이 만들어낸 일종의 전술적 오류와도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공리계 속에서 스스로 오딧세우스라고 생각한 패커가 취한 방식 역시 이런 '소외'의 변증법적 과정으로 귀결되고 만다. 자본주의라는 매트릭스 안에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자본'이다. 자본은 자기합목적적인 운동을 한다. 그것만이 존재의 유일한 이유이다. 그 흐름은 저항조차 포섭하며 재생산한다.
비인간적인 패커에게는-뱀파이어 패틴슨의 무표정연기는 꽤 어울린다- 돈과 섹스만이 세계를 체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더 큰 자극을 요청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패커 역시 정상성에 대한 염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야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어떤 맥락 위에서도 자리잡지 못한다. 자신이 밟고 있고 운영한다고 착각하는 자본주의라는 토양 위에서 미끄러진다. 흥미로운 일이다. 자본주의의 숨은 운용자라 자임하는 사람이 자신의 질서 속에서 의미와 결합하지 못한다는 것. 특히 아내의 거절은 의미가 크다. 테리 이글턴은 <발터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에서 '거절이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어느 시인의 구절을 인용한다. 패커는 자본주의로부터의 일시적 거절과 아내로부터의 영원한 거절을 통해 비로소 공포와 대면한다. 그리고 의미결합의 실패로부터 오는 공포는 결국 죽음본능으로 발현된다.
흥미로운 공간이 마지막에 등장한다. 패커가 유일하게 안식할 수 있는 곳. 패커의 오늘 일정은 궁극적으로 이 이발소를 찾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부터 다녀온 이발소이다. 여기서 패커의 행동은 마치 오손 웰즈의 '케인' 의 오마쥬 같다. 잠시 회고적 상념에 젖는 패커. 영화 속에서 거의 처음으로 3자의 대화공간이 만들어진다. 이발사와 운전기사의 대화 속에서는 다시 흥미로운 접점의 공간이 언급된다. '택시'이다. 뉴욕의 택시. 이 공간은 영화 초반부에 패커의 아내가 '자기는 택시가 좋다'며 언급하는 장면에 등장하고 마지막에 다시 상기의 형식으로 등장한다. 이발사가 말하고, 현재의 운전사가 말하고, 있는 '택시' 무수한 실제의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며 성좌처럼 역사를 그들만의 작은 역사를 빚어 내는 공간이다. 안타깝게도 패커에게는 그런 실제의, 육화된 삶의 흔적이 없다. 그는 비로소 깍다가만 쥐파 먹은 머리의 흔적을 얻어낸다. 전기총이라는 인위적 자극으로도 경험하고 싶었던 육체성이 확인된다. 그가 리무진 주차장으로 가는 장면에서 그의 좌석 위치는 그런 의미이다. 그는 운전사 옆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이미 죽음을 향한 파국의 중력을 끊어 내기엔 늦었다. 영화는 다시 한번 자본주의에 대한 최종 토론을 거치고 나서 총을 겨눈 상태에서 끝이 난다.그나마 다행이다.죽어 주는 건 최악의 선택이었을테니.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 자본주의에 대한 혜안(?)의 메시지를 어딘가로 투여-사실 투척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만, 크로넨버그에 대한 예의로 그렇게 하진 않겠다- 해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라도 있었을까? 영화라는 담론에는 어쩔 수 없이 이데올로기가 들어가기 마련이고 그것을 이야기하고 읽어내는 방식은 나 역시 매우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메시지 말고도 또 있지 않는가? 그것은 같은 요리를 가지고 계란프라이를 만들 수도 오믈라이스를 만들수도 있는 그것. 크로넨버그의 계란은 어쨋거나 흡족스럽진 않다. 딱히 어려웠다고 말할 것도 없고 딱히 어떤 촉을 느꼇다고 할 수도 없는. 이거야 말로 하루키식 표현을 돌려쓰자면 요즘 뉴욕 메츠 6번 타자 같은 영화 아닌가?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여러 명의 전문가들과 시위대, 마지막 씬의 해고자까지 연극적이라고도 해야할 인물들 모두 관객들에게 자본주의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크로넨버그식 욕망의 인형들이다. 물론 돈드릴로의 아이들일 수도 있겠으나, 우리가 본 것은 영화이지 소설이 아니잖아.ㅎㅎㅎ 원작자 돈 드릴로를 존중했던 탓일까? 끊임없는 대화의 형식들, 아니 웅변의 형식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이건 소설이나 우디 알렌 스타일, 또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비포시리즈 감독 ㅎㅎ) 이지 크로넨버그의 스타일은 아니지 않았던가.
크로넨버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프로파간다를 이런 상투적이며, 직접적인 방식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크로넨버그라면 이보다는 나아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폭력의 역사>와 <이스턴프라미스>에서 날 것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폭력'의 얼굴에 대한 '자본' 버전인가? 만약 그렇다면 영화에서 사회학자의 입을 통해- 이론이라구 이론.- 드러난 대로 이것은 '텍스트화된 자본'에 대한 영화적 반복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이것을 높이 평가했을것이다. 우리가 너무 영화에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