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로 2008 을 거의 뉴스 하이라이트로 보고 있다. 새벽에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어제 회사에 젊은 친구들이 벽에 유로 대진표를 그려놨다. 우승팀 맞추기 10000원 빵.

대략 12명 정도가 참여했다.

네덜란드에 3명 정도 있었고...스페인에도 2명,터키에도 1명이 있었는데.(이건 몰빵을 노리는 도박이다.)

그런데 의외로 독일에는 단 한명도 걸려 있지 않았다.

별로 내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아 놔...진짜 귀찮게 내기에 걸라고 얼마나 쫓아다니던지...지겨워서 '알았다..할 께'

그리고....

나는 무려 20분을 고민했다.(소심하기는...)

독일 축구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몇 이나 있겠는가? 그들의 무뚝뚝한 얼굴과 축구 스타일이 비슷 비슷하다.^^ 그 때 ...

<아내가 결혼했다>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대충 이런 이야기...

" 팬과 인기는 브라질 팀이 갖지만 우승 트로피는 독일이 갖는다" ..

독일팀은 언제나 인기가 없는데 또 보면 항상 4강 이상 간다.

....장고 끝에(악수나면 안돼!!)  무려 10000원을 독일에 걸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과 비지니스는 달라" (ㅋㅋ 이런 냉혹함 ㅋㅋ)

오늘 새벽에 독일이 포르투갈을 이겼다. ㅋㅋ 나는 12만원에 한 걸음 더 가까와졌다.

투자를 해서 수익이 발생하면(우승팀에가만 가는 몰빵이다)

투자금을 빼고는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 ^^ 일부는 아프리카로, 일부는 북한으로...

원래 쉽게 번 돈은 그렇게 써주어야

오래 오래 장수할 수 있다.

독일...가자..가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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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left 2008-06-20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상은 포르투갈과 스위스 경기인데요.. ^^;;

turnleft 2008-06-20 10:42   좋아요 0 | URL
앗, 독일전으로 다시 바뀌었네요;;

드팀전 2008-06-20 11:32   좋아요 0 | URL
아..첨에 타이틀만 보고 잘못올려서 바로 수정...
 


영화<크로싱>이 개봉했다.

식량난과 의약품 부족으로 한 집의 가장이 국경을 넘는다. 그 사이 아픈 아이 엄마는 죽고 아이만 홀로 북한에 남겨진다.

아버지는 중국 공안에 쫓기다가  브로커를 만나게 되고 북한의 아내가 이미 죽었으며 아이가 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안다.

돌아가야 한다. 아이를 그곳에 홀로 남겨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 역시 아버지를 찾아 길을 나서고...

운명은 그렇게 얽힌다.

 

 

 

이 영화가 시사회를 했을 때 가장 적극적 관심을 보인 것은 <조선일보>와 미국이다. 이들이 왜 영화<크로싱>에 관심을 가졌는지는 뻔 하다. 조선일보는 북한 인권을 이야기하면서 시종일관 북한 정권의 부도덕성과 독재정치를 걸고 있다.  북한의 생생한 실상이라는 말이 그들의 기사에서 수십번 나온다.

지난 5.28 조선일보 데스크의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국 국민들이 북한인권과 탈북자들의 처참한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그 실상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10년 동안 햇볕정책으로 북한의 진실은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 (중략) ... '크로싱'은 지금까지 북한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 가운데 북한의 현실에 가장 근접한 영화로 탈북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진실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고 사랑하게 만들 수 있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은 더 이상 북한의 현실을 몰라서 역사 앞에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 (중략)

.. "한 핏줄을 나눈 우리 대한민국 국민과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우리 형제의 비극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 대통령은 중국의 최고 지도자에게 탈북자의 강제북송을 중단할 것을 당당하게 요구할 때도 됐다."

  형용모순이다. 마치 "햇볕정책" 으로 인해 북한의 실상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식이다. 그러면서 북한의 참상에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나서자고 이야기한다. 마치 기독교에서 불쌍한 사탄의 무리를 인도하자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물론 그냥 모른 척 하고 있는 것 보다는 낫다만 저들이 말하는 '북한'에 대한 이야기는 진정한 '인권'이나 '인류애'보다는 자신들의 반공주의 대북관에 근거해 있다. 그러므로 영화 <크로싱>에서 정작 중요하게 읽어야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강 건너 불보듯 하고 있다.

조선일보가 스펙트클로서의 '북한의 비참'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저 '전시로서의 비참' 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정권을 악'으로 규정하는 힘을 모으자는 이야기를 실제로 하고 싶은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북한의 치명적인 식량난'이다.  거기에는 좌와 우/북한과 남한 같은 개념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죽어 넘어가는 사람들 앞에서 그건 사치다.

지난 주 <한겨레 21>은 특집으로 북한 식량난 문제를 다루었다. 한겨레는 지난 주 촛불의 시민적 역동성을 이야기 했고 이번 주에는 드디어 촛불의 시민대오에 들어 와 있는 수많은 깃발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층 진보한 거다. 성적 소수자,양심적 병역거부자. 다함께, 채식주의자.노동자...시민의 이름 아래 자신의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섹션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그 촛불안에 북한 문제를 다루는 사람은 없다. 사실 이명박은 북한 식량 지원을 머뭇거리고 있다. 미국과 정부 내에서도 북한의 식량난이 치명적이란 것을 알고 있다. 100만톤 가량의 지원 분중에서 50만톤은 미국이 선적하기로 했다. 한국 정부는 조건을 달고 있다. "먼저 북한이 지원을 요청할 경우" 라고 말이다. 북한은 또 북한대로 기를 세우고 있다. "남한이 지원하겠다고 하면.."

이렇게 하루 하루를 버리는 동안 사람들은 쓰러질 것이다. 결국 이것도 이명박의 문제중에 하나이다.그런데 이명박을 밀어붙이기 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은 곧 죽음과도 연결된다.

<한겨레 21>에 지난 주에 실린 인터뷰는 이 문제가 상당히 다급한 사안이라는 것을 알게한다.

가끔 알라딘에도 계시는 분들을 위해 미리 말해두자...나는 북한의 정권을  개뼉다귀같은 독재 정권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북한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이유는 둘째 치고라도..

나와 같은 언어를 쓸 줄 아는 아이가 배가 고파서 굶어 죽는다는데.....다른 뭐가 더 중요한가.

촛불집회로 온 국민이 모여든 이 시점에 이것도 '분파주의'라고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주로 바보같은 사람들이다.

나는 이걸로 무슨 모금같은 걸 주도할 주변머리는 되지 못한다. 대신 관심있는 사람들은 노력해서 지원할 수 있는 사이트를 찾으면 된다. 나는 원래 '유니세프' 쪽 지원을 했는데 북한어린이 지원 캠페인이 지금 벌어지고 있지 않아서 다른 사이트를 찾았고 그 쪽으로 일시 지원했다. 북한 문제를 중심적으로 다루는 '좋은 벗들'이나 '굿 네이버스' 그외 다른 몇 몇에서 긴급지원에 들어가고 있다.

문제가 더 심각해지면 kbs나 mbc에서 보도할 것이다. 그 다음에 하는 것도 좋지만 그 사이도 아이들은 죽어갈 지 모른다.

“하루라도 서두르면 한명 더 살릴 것”



북한 식량지원 긴급 캠페인 진행 중인 오태양씨 인터뷰

해맑은 얼굴은 그대로였다. 수줍은 미소도 변한 게 없었다. 그런데도 뭔가 달라 보였다. 2006년 6월부터 꼭 22개월 동안 인도 동북부 비하르주 가야시 외곽 둥게스와리에서 달리트(불가촉천민) 주민 지원활동을 하고 돌아온 오태양(34)씨에게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힘’이 느껴졌다. 돌산으로 둘러싸인 오지에서 40℃가 넘는 더위 속에 2년 가까이 우물을 파고 마을길을 닦았다니…, ‘포스’가 쌓이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게다.





5월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정토회관 사무실에서 오씨와 마주 앉았다. 그는 말없이 ‘정토회 청년직능국 사무국장·긴급구호단장’이란 직함이 박힌 명함을 내밀었다. 지난 2001년 12월 불살생이란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차마 총을 들 수 없다”며 양심의 명령에 따라 병역거부를 선언했던 그다. 병역법 위반으로 1년3개월 수감생활을 했고, 낯선 이국땅에서 1년10개월 봉사활동을 했다. 모두 3년3개월을 그렇게 지냈으니 ‘병역의 의무’를 갈음할 만하겠다.
지난 4월 귀국 직후부터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다”고 했다. 사이클론 피해를 입은 버마(미얀마) 지원활동에, 중국 쓰촨성 지진피해 지원사업까지 ‘긴급구호’가 필요한 대형 재난이 잇따른 탓이다. 그리고 ‘북한 식량지원 긴급 캠페인’이 운명처럼 오씨에게 맡겨졌다. 그가 건네준 캠페인 자료에는 ‘너의 배고픔을 알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동포야!’라고 씌어 있었다.

예년과 비교해 올해 북한 식량 사정은 얼마나 나쁜 건가?
=통일부의 추정치로도 100만t가량이나 부족하다. 북한은 배급사회다. 배급체계에서 100만t이 모자라면, 부족한 식량을 어디서 가져올 수 있겠나. 메울 길이 없다. 지난해 큰 수해가 났기 때문에 농업 생산량이 뚝 떨어졌다. 수해 자체도 큰 문제였지만, 그로 인해 식량난이 극심해지면서 벌써부터 굶어죽는 이들이 나오고 있다. 미국이 50만t을 지원하겠다고 밝혔지만, 나머지 50만t은 외부에서 지원을 해줘야 한다. 지난해 추수해서 비축해둔 식량은 다 떨어진 상태고, 씨감자 등은 7~8월이나 돼야 수확을 한다. 지금이 가장 힘든 시기다. 아사자가 나오고 있는 곳은 대부분 지난해 수해 피해가 컸던 지역이다. 올해 상황이 나쁠 거라는 건 기실 지난해부터 예견됐던 바다.
대북 식량지원 활동과 인연이 깊은 걸로 안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사실 요즘 가슴이 많이 아프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도 나고. 1996년 대학 3학년 때 처음 북한의 처참한 실상을 접했다. 그해 4월부터 <한겨레>가 굶주리는 북녘동포 돕기 모금운동을 했다. 기사를 보면서 매일이다시피 울었다. 어떤 날은 신문을 보다가 너무 눈물이 나서, 타고 가던 지하철에서 내려 역 벤치에 앉아 한참을 혼자 울기도 했다. 친구·선후배와 함께 모금운동에 참여했다. 내가 한 끼 줄이고 한 숨 덜 자면서 한 사람 더 만나면, 동포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마음이었다. 외세가 침략한 것도 아니고, 대규모 자연재해가 발생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먹을 게 없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10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번엔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도록 내버려둬선 안 된다.
당시엔 북한 지원활동에 대한 반감도 많았을 텐데.
=거리에서 모금활동을 하다 따귀를 맞기도 했다. (웃음) 북한에 식량을 지원해주면 군량미로 쓴다고 얘기하는데, 군복을 입었어도 굶주리는 동포 청년이다. 그들도 먹어야 산다. 이념의 테두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얘기다. 1990년대 중반 식량난 때는 일부지만 북한에 대해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경향도 있었고, 다른 쪽에선 오로지 적대감만 갖고 북한을 바라보는 부류도 있었다. 요즘도 남쪽에선 “먼저 요청해야 준다”고 말하고, 북쪽에선 “먼저 제안하면 받을 용의가 있다”고 맞선다. 10년 전이나 비슷하단 느낌이다.



△ ‘너의 배고픔을 알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동포야!’ 정토회가 마련한 ‘동포의 밥상 체험’ 행사가 열린 5월29일 서울 인사동 들머리에서 한 외국인 여성이 북한 주민들이 먹고 있는 풀죽을 맛보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정아 기자)




그래도 대북 인도 지원에 대한 여론은 나아지지 않았나?
=물론 많이 바뀌었다. 남도 북도 마찬가지다. 통일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북한에 수해 등 긴급재해가 발생하면 도와줘야 한다는 여론이 90%가량 나온 것으로 안다. 북한 정권과 북한 주민을 똑같이 바라볼 필요는 없다. 민족을 넘어 인류적 관점에서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먹을 게 없어 굶주리고 있는 이웃을 돕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게다가 한민족이다. 지금 북한 식량난을 돕는 건 결국 우리 미래를 지키는 일이다.
‘긴급 캠페인’은 어떤 식으로 진행하고 있나?
=오늘 부산항에서 밀가루 200t을 선적했다. 다른 대북지원 단체들도 노력하고 있다. 일단 민간 차원에서 옥수수 1만t을 만들어보려 한다. 1만원이면 옥수수 20kg을 살 수 있다. 이 정도 양이면 5인 가족 기준으로 한 달을 연명할 수 있다. 하지만 1만t으로는 20만 명 분도 안 된다. 미국에서 지원 식량이 오기까지 버텨내지 못한다. 핵심은 우리 정부다. 정부가 움직여야 한다. 6월에 접어들면 아사자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가 하루라도 일찍 지원을 결정하면, 그만큼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다. 식량 20만t을 긴급지원해야 10년 전의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정부는 북쪽이 공식적으로 지원 요청을 먼저 해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는데.
=궁금하다. 정말 상황을 모르고 있는 건지, 알면서도 머뭇거리고 있는 건지. 북한 식량난의 실상에 대한 자료가 없는 것도 아니다. 혹 실상을 잘 알고 있음에도 당분간 대북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내부 입장이라도 정한 건가? 미국도 지원하는 판에, 같은 민족이자 통일을 준비하는 사이에 ‘먼저 요청하면 주겠다’고 고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더구나 지금 상황에선 정치적으로 우리 정부가 고립될 수도 있다. 북-미가 정치적으로 빠르게 다가서고 있다. 북한으로선 식량지원도 받기로 한 마당에 미국하고만 대화하면 그만이다. 결국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설 자리가 없게 된다. 가장 어려울 때 지원을 안 하고서 나중에 대화하자고 나서면 북이 쉽게 응하겠나? 대북 식량지원은 물론 인도적인 문제지만, 정부로선 정치·외교적으로도 필요한 일이란 얘기다.

“사람이 배고파서 죽는다는 걸 상상하지 못하겠다. 굶다가 죽을 수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굶어죽는 이가 느낄 고통을 헤아릴 수 있을까? 북녘 동포들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 오씨는 이날 아침식사로 동료들과 함께 꽁보리밥과 멀건 소금국을 먹었다고 했다. 점심에는 아침에 먹었던 보리밥 남은 것으로 죽을 쑤고, 밀가루만 조금 들어간 물수제비를 띄워 먹었다. ‘동포의 밥상’을 체험하기 위해 옥수수죽과 시래기죽, 감자 몇 알, 보리밥 등으로 일주일치 ‘메뉴’를 짜놨단다. 옥수수죽만으로 일주일을 버텨보려 했는데, 쌀이나 보리보다 옥수수값이 턱없이 비싸 포기했단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고통받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오씨가 다시 맑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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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쥐만세 2008-06-19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태양씨를 예전에 병역거부 할때 한겨레 21 인터뷰에서 봤는데,
훌륭한 청년이 되었네요.
실은 순수하고 맑은 청년이 세파에 다쳐 못일어날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설국열차 2.3 - 2권 선발대, 3권 횡단
장 마르크 로셰트 외 지음, 김예숙 옮김 / 현실문화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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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2.3>은 화풍에 변화가 온다. 조금 더 온화해지며 커트 사이의 생략도 전편에 비해서는 조금 낫다. 그 차이란 아주 미세한 것다. 외국 뮤직비디오나 영화예고편을 보면 얼핏 보기에 컷트편집처럼 보이지만 자세히보면 한두 프레임의 디졸브 편집이다. 이런 효과는 미묘하지만 보는 이의 피곤함을 덜해준다. 마치 목탄이나 수채화로 그린 것 처럼 만화화풍이 부드러워졌다. 실제로 <설국열차2.3>은 컬러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것은 흑백화면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가격상승문제도 인한 판매율을 고려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짐작해본다.

<설국열차1>과 <설국열차2.3>은 다른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부터 시작된다. 세상에는 다른 종류의 설국열차가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이 열차 역시 무한운동을 한다. 주인공은 제2설국열차의 선발대원이다. 이들은 마치 유겐트처럼 어린 시절부터 저온하에서도 생존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은 특수한 사람들이다. 주인공이 하는 일이란 것은 열차가 한 번씩 정지훈련이란 이름으로 멈추어설 때 열차 밖의 설원으로 나가서 탐색-말이 좋아 탐색이지 멸망한 문명에서 권력자들의 창고를 채워주기 위해 뭔가 건져오는 것이다-하는 것이다. 이 주인공은 회의주의자이며 반항적이다.

<설국열차 2.3>의 제2 설국열차 역시 철저한 계급 사회이다. 열차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들로 구성된 로마의 원로원같은 정치체제가 존재한다. 정치가, 종교지도자, 레이더관측사 등등이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열차 내에서 베푸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다. 고전적인 마르크스 문화주의의 테제들이 은유적으로 등장한다.

제2 설국열차는 기본적으로 '공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열차의 비밀을 아는 소수 권력층을 제외하고 열차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그것이 일등 칸이든 마지막 칸이든 마찬가지다- 모두 그 '공포칩'을 몸 속에 내장하고 있다. 그들의 공포는 '제1 설국 열차와 충돌하는 종말'이다. 이미 세상은 종말의 레퀴엠을 끝냈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코다를 끝없이 반복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코다 역시 죽음의 피날레가 있다는 사실은 기차안에 '공포의 정치'를 작동시키는 필요조건이된다.

우리는 흔히들 '자본주의가 공포를 식량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제 2설국열차는 현재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에 대한  만화적 은유가 가득하다.(그러니까 현문연에서 출판했겠지). 입구가 막힌 세계에서는 '음모론'과 '유언비어'가 기승을 부린다. 열차 내에서도 '열차'가 사실은 '비행선'이라는 주장을 하며 전복을 꿈꾸는 세력이 있다. 이들은 일종의 공상적인 급진주의자들이며 결국 테러라는 형태로 열차의 운명에 변경을 불러일으키고 만다. 또 1편에 이어서 기계의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후에 반혁명에 동원되기도 하고 기회주의적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열차 내에서 가상현실 여행을 떠나고 꼭두각시에 불과한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받아들인다. 작가들은 실제 방송진행자를 얼굴부문만 있는 꼭두각시 인형으로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영웅적인 행동을 통해 결국 권력상층부만 알고 있는 열차의 비밀을 알게된다. 하지만 그 역시 그 비밀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한다. 실재를 만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그리고 급진주의자들의 폭탄 테러와 함께 열차는 마지막 칸을 분리시킨다. 제 1 열차에 대한 공격과 제 2열차의 마지막 칸을 분리하는 사건은 한가지로 읽힐 수 있다. 그것은 결국 인류의 숨기고 싶은 비밀에 대해 은근히 풀어놓는 것 처럼 보인다. 르네 지라르가 말하던 그 '태초의 폭력과 희생양의 제의'가 인류의 종말을 앞에 두고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카인의 후예'이다. 거기에 더 중요하게도 모든 폭력의 동시대인과 그 후예들이 그러하듯 '카인의 후예'임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자손들일 뿐이다.

혁명과 반혁명을 거쳐 설국열차는 대서양을 건넌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전파를 타고 음악이 잡히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장송곡이라는 포레의 레퀴엠을 들으며 열차는 바다를 건넌다. 그 끝에 과연 새로운 삶의 씨앗이 있을까?

이미 20여년 전에 나온 책이기때문에 그 결말이 그렇게 충격적이거나 새롭다고 할 수는 없다. 왠지 이런 류의 성찰적인 SF 소설이나 영화에서 한번쯤 봤음직한 결말이다. 그 결말 이후에 설국열차는 이제 어떡게 될 까? 진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무' 였음을 확인한 다음에는 무엇이 남는 것일까?  열차의 운명은 그렇게 끝이 났을까? 아니면 새로운 환상의 추동을 통해 다른 진실을 찾으러 떠났을까?

 책장을 덮으며 쓴 입맛을 맛보고 <설국열차>에서 내린다.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열차의 속도감과 끊없는 설원,그리고 그 속도에 편입하지 못하면 죽음과 맞딱뜨려야 하는 세상을 생각해본다.<설국열차>의 묵시록적 은유는 조금 단순화되어 있으며 또한 상투적이기도 하다. 또한 하층 계급의 주체적인 자발성에 대해 거의 한번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한 생존의 기본적 에너지조차 부여받지 못한 곳에서 그런 자발성도 사라질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이미 오랜 시간전에 씌여진 책이지만 <설국열차>가 폭주하는 자본주의와 그에 탑승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시대를 거쳐서 여전히 유효하리라고 본다.

열차 시간표에서 다음 열차를 손으로 짚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이제 우리는 봉준호 감독이 영상으로 그려낼 <설국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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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1 - 탈주자
장 마르크 로셰트 외 지음, 김예숙 옮김 / 현실문화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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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책의 무게에 눌려서 머리를 식히려고 이미 유명한 <설국열차>를 봤다. 그런데 접시물에도 코가 빠져 죽는다더니 네모 칸에 그려진 블랙 앤 화이트에 심장이 뻑뻑하다. 도살장의 공기처럼 주변 공기가 답답하다. 이럴 때는 밝고 명랑한 슬립 스틱이나 보는게 정신 건강에 좋으련만 항구적 우울증을 도발하는 이런 디스토피아로 빨려들고 말다니...(문제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키보드 옆에 코맥 맥커시의 또다른 디스토피아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책을 받고 생각보다 판형이 크다는 것에 놀랐다. 내가 고정관념으로 가지고 있는 만화책의 크기를 상회했다. 예찬이가 보는 동화책들과 비교해도 큰 편에 속한다.(내가 좋아하는 예찬이 동화책 중 1등은 <프레드릭>이다.)

원래 아이 재우고 책장에서 책을 꺼내면 곧 존다. 언젠가는 1시간을 앉아서 졸다가 다음날 목이 아파서 혼났다. 그런데 <설국열차>를 보는 날은 달랐다. 영하 90도 찬바람이 불어나와서 새벽 1시까지 졸 수가 없었다. 가끔은 소름이 돋았다.( 만약 실제 영하 90도 였으면 동상처럼 얼어붙었겠지...) 첫 번째 소름이 돋았던 것은 '설국열차'라는 존재다. 무한하게 순환하는 영속성은 정말 사람 돌게 만드는 공포다. 끝이 없다는 것이 무섭지 않은가? 나는 끝이 없다는 것만큼 무서운게 없다. <은하철도 999>에서 철이가 기계인간이 되기를 포기했던 것은 무엇때문일까? '죽음'을 모르는 그 기계인간의 존재론적 슬픔을 보았기 때문이다. '철이'는 언젠가 끝날 수 밖에 없기에 더 소중한 '생'의 아름다움을 선택한다. 이 빌어먹을 '설국열차'는 무한궤도를 돈다. 철학용어로 하면 '자기운동'인 거다. 즉 눈으로 덮인 디스토피아를  자기운동하는 것이다. 헤겔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모든 생물을 팥빙수로 만들어버린 세상에서 '설국열차'의 자기운동은 그 자체로는 '변증법'도 통하지 않는 폐쇄된 운동이다. 그저 무한히 도는 '무' 다.

 '설국열차' 1편에서 내가 첫 번재 공감한 사람은 시작부분에 등장해서 곧 사라진 노인네다. 열차 끝칸에 '개인'을 위한 공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서로의 입김이 불편할만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모여 산다. 음식도 부족하여 결국은 '죽은 자'로 단백질을 공급받는다. '아우슈비츠 열차'가 지옥행 열차였다면 무한궤도를 도는 '설국열차'의 끝 칸은 지옥 그 자체다.  

 '혼자있는 시간' 즉 '개인' 이 존재의 필수조건이라고 늘 강조하는 나로서는 당연하다. 내가 그 입장이었도 1시간동안 주어진 '홀로있음' 다음에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자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찬이를 돌봐야 하는 의무감만 아니라면 말이다.

'설국열차'는 인류의 마지막 '노아의 방주'이다. 그런데 '노아의 방주'와 다른 것이 있다. 노아의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설국'의 세계는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다. 세계의 멸망을 도래시킨 '기후무기'라는 것은 영화 <투모로우>식으로 비유하자면 환경의 습격이다. 노아의 방주는 인류의 유일한 생존자와 다른 모든 종들이 종자은행처럼 보존되어 있는 하나의 작은 생태계다. 그러나 '설국'에 그런 것은 없다. 이 곳은 대신 하나라고 설득하지만 결코 하나인적이 없는'인간' 종들만이 연필심처럼 그득하다. 노아의 세계에서는 자연의 축소판으로 그것들이 순환적 공생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설국'의 세계는 확연하게 '계급'에 따라 구획지어진다. 모든 칸은 통제되어 있고 이것을 유지하는 것은 '폭력'이다. 이 확연한 구분에도 분명 내부적 모순의 폭발이 있었다. 그러나 '경찰력'을 동원할 수 있는 앞 칸의 권력층과 기득권층은 이들의 폭동을 무자비하게 제압한다. 이 만화 속에서는 그날을 '야생의 밤'이라고 한다. 대략 마르크스의 세계구조와 유사하지 않은가...    

열차 끝 칸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상태에 이르렀지만 열차 앞 칸은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뿐이지 여전히 와인에 취해 향락을 즐긴다. 하류층과 상류층의 차이는 결정적인 위기에 대한 자원의 차이이다. 하류층은 위기에서 그냥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상류층은 약간의 타격은 받을지라도 존재 자체를 지옥으로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다. '설국열차' 안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 그 중에 일부는 휴머니즘차원에서 마지막 칸을 돕고자 한다. 또 어떤 그룹은 급진적인 테러를 꿈꾼다.기득권 세력들은 종료의 이름으로 기계를 신격화하여 자신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현재의 영속성만을 기원한다. 마르크스식의 종교가 가진 체제 순응적이며 이데올로기적 의미가 '설국열차'에서 채현된다.

물론 드라마를 이어가지 위해서 '뒤틀림'이 필요하다. 1편은 설국열차의 자기운동(이것은 설국열차를 움직이는 '올가'를 말한다) 이 그 자체의 문제보다는 기계적 노후로 인해 속도가 떨어지는 일이 발생한다. 언젠가 열차가 서게되면 모두 영하90도 아래서 얼어죽을 상황이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아주 합리적이고,간단하며,이성적이고,현실적인 방법이 있다. 어쩌다 합승해서 그냥 끌고 갈 수 밖에 없었던 마지막 칸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열차의 무게를 줄이면 당분간은 기계적 부담을 상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국열차는 애초에 권력층과 귀족층들만 태우기 위해 준비되었다. 이 설정 자체는 충분히 자본주의적이지 못하다. 이것은 내게 '설국열차'가 끊없이 운행하는 자본주의의 자기운동과도 유사하다는 생각을 들게 하면도 자본주의 비판으로 보지 못하는 이유다. 착취할 대상이 없어진 자본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형용모순이다. 

책에서는 구체적으로 그 과정을 둘러싼 논쟁이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일들이 부지기수로 벌어진다. 그래서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것이다. 실제로 그런 권력층의 결정에 대해 1등칸은 말할 것도 없지만 2등칸의 대중들은 어떻게 '동의'를 할까? 그들은 궁극적으로 '동의'를 할 것이다. 이성과 합리와 상황의 이름으로 말이다.

'설국열차' 1부에서 주인공은 결국 '설국열차'의 비밀을 알고 절규한다. 끝에 가서 '설국열차'의 궁극적 비밀이 드러난다면 작가들은 주인공을 호송하는 과정 중간 중간에 '설국열차'와 생존조건의 물적토대에 대해 말한다. SF적 상상력이라서 재미있기도 하지만 너무 설명이 부족한 감이 있다.만화는 주인공이 끝 칸의 운명을 거부하여 이제는 모두로 부터 고립된 영원한 고독 속에서 진실과 대면하면서 문을 닫는다. 그리고 열차는 하얀 고독의 터널을 계속해서 달린다. 끝없는 '무'를 향한 그 길 말이다.

'설국열차'의 그림체가 조금 낯설고 호흡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왜 그럴까? 기본적으로 컷트수가 다르기 때문인 듯 하다.  우리들이 쉽게 보는 일본만화나 한국만화에 비해 생략이 과감하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 정도 내용을 일본만화로 만들었다면 1000컷이 들어간다면 이 만화는 500컷이다. 다른 컷트 수 때문에 간혹 점프컷을 보는 낯선 느낌을 줄 때도 있지만 그것은 작가와 그의 문화가 미학적으로 선택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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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에 걸쳐 민주노총 산하의 산별노조로서 민노총 총 파업에 대한 찬반투표를 했다.

투표율은 70%수준.

찬성이 또한 70% 수준....

이 결과는 산별노조 전체 차원에서 집계되고 또 민노총 전체 차원에서 집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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