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2.3 - 2권 선발대, 3권 횡단
장 마르크 로셰트 외 지음, 김예숙 옮김 / 현실문화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설국열차2.3>은 화풍에 변화가 온다. 조금 더 온화해지며 커트 사이의 생략도 전편에 비해서는 조금 낫다. 그 차이란 아주 미세한 것다. 외국 뮤직비디오나 영화예고편을 보면 얼핏 보기에 컷트편집처럼 보이지만 자세히보면 한두 프레임의 디졸브 편집이다. 이런 효과는 미묘하지만 보는 이의 피곤함을 덜해준다. 마치 목탄이나 수채화로 그린 것 처럼 만화화풍이 부드러워졌다. 실제로 <설국열차2.3>은 컬러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것은 흑백화면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가격상승문제도 인한 판매율을 고려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짐작해본다.

<설국열차1>과 <설국열차2.3>은 다른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부터 시작된다. 세상에는 다른 종류의 설국열차가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이 열차 역시 무한운동을 한다. 주인공은 제2설국열차의 선발대원이다. 이들은 마치 유겐트처럼 어린 시절부터 저온하에서도 생존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은 특수한 사람들이다. 주인공이 하는 일이란 것은 열차가 한 번씩 정지훈련이란 이름으로 멈추어설 때 열차 밖의 설원으로 나가서 탐색-말이 좋아 탐색이지 멸망한 문명에서 권력자들의 창고를 채워주기 위해 뭔가 건져오는 것이다-하는 것이다. 이 주인공은 회의주의자이며 반항적이다.

<설국열차 2.3>의 제2 설국열차 역시 철저한 계급 사회이다. 열차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들로 구성된 로마의 원로원같은 정치체제가 존재한다. 정치가, 종교지도자, 레이더관측사 등등이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열차 내에서 베푸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다. 고전적인 마르크스 문화주의의 테제들이 은유적으로 등장한다.

제2 설국열차는 기본적으로 '공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열차의 비밀을 아는 소수 권력층을 제외하고 열차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그것이 일등 칸이든 마지막 칸이든 마찬가지다- 모두 그 '공포칩'을 몸 속에 내장하고 있다. 그들의 공포는 '제1 설국 열차와 충돌하는 종말'이다. 이미 세상은 종말의 레퀴엠을 끝냈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코다를 끝없이 반복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코다 역시 죽음의 피날레가 있다는 사실은 기차안에 '공포의 정치'를 작동시키는 필요조건이된다.

우리는 흔히들 '자본주의가 공포를 식량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제 2설국열차는 현재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에 대한  만화적 은유가 가득하다.(그러니까 현문연에서 출판했겠지). 입구가 막힌 세계에서는 '음모론'과 '유언비어'가 기승을 부린다. 열차 내에서도 '열차'가 사실은 '비행선'이라는 주장을 하며 전복을 꿈꾸는 세력이 있다. 이들은 일종의 공상적인 급진주의자들이며 결국 테러라는 형태로 열차의 운명에 변경을 불러일으키고 만다. 또 1편에 이어서 기계의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후에 반혁명에 동원되기도 하고 기회주의적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열차 내에서 가상현실 여행을 떠나고 꼭두각시에 불과한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받아들인다. 작가들은 실제 방송진행자를 얼굴부문만 있는 꼭두각시 인형으로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영웅적인 행동을 통해 결국 권력상층부만 알고 있는 열차의 비밀을 알게된다. 하지만 그 역시 그 비밀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한다. 실재를 만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그리고 급진주의자들의 폭탄 테러와 함께 열차는 마지막 칸을 분리시킨다. 제 1 열차에 대한 공격과 제 2열차의 마지막 칸을 분리하는 사건은 한가지로 읽힐 수 있다. 그것은 결국 인류의 숨기고 싶은 비밀에 대해 은근히 풀어놓는 것 처럼 보인다. 르네 지라르가 말하던 그 '태초의 폭력과 희생양의 제의'가 인류의 종말을 앞에 두고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카인의 후예'이다. 거기에 더 중요하게도 모든 폭력의 동시대인과 그 후예들이 그러하듯 '카인의 후예'임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자손들일 뿐이다.

혁명과 반혁명을 거쳐 설국열차는 대서양을 건넌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전파를 타고 음악이 잡히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장송곡이라는 포레의 레퀴엠을 들으며 열차는 바다를 건넌다. 그 끝에 과연 새로운 삶의 씨앗이 있을까?

이미 20여년 전에 나온 책이기때문에 그 결말이 그렇게 충격적이거나 새롭다고 할 수는 없다. 왠지 이런 류의 성찰적인 SF 소설이나 영화에서 한번쯤 봤음직한 결말이다. 그 결말 이후에 설국열차는 이제 어떡게 될 까? 진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무' 였음을 확인한 다음에는 무엇이 남는 것일까?  열차의 운명은 그렇게 끝이 났을까? 아니면 새로운 환상의 추동을 통해 다른 진실을 찾으러 떠났을까?

 책장을 덮으며 쓴 입맛을 맛보고 <설국열차>에서 내린다.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열차의 속도감과 끊없는 설원,그리고 그 속도에 편입하지 못하면 죽음과 맞딱뜨려야 하는 세상을 생각해본다.<설국열차>의 묵시록적 은유는 조금 단순화되어 있으며 또한 상투적이기도 하다. 또한 하층 계급의 주체적인 자발성에 대해 거의 한번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한 생존의 기본적 에너지조차 부여받지 못한 곳에서 그런 자발성도 사라질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이미 오랜 시간전에 씌여진 책이지만 <설국열차>가 폭주하는 자본주의와 그에 탑승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시대를 거쳐서 여전히 유효하리라고 본다.

열차 시간표에서 다음 열차를 손으로 짚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이제 우리는 봉준호 감독이 영상으로 그려낼 <설국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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