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1 - 탈주자
장 마르크 로셰트 외 지음, 김예숙 옮김 / 현실문화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책의 무게에 눌려서 머리를 식히려고 이미 유명한 <설국열차>를 봤다. 그런데 접시물에도 코가 빠져 죽는다더니 네모 칸에 그려진 블랙 앤 화이트에 심장이 뻑뻑하다. 도살장의 공기처럼 주변 공기가 답답하다. 이럴 때는 밝고 명랑한 슬립 스틱이나 보는게 정신 건강에 좋으련만 항구적 우울증을 도발하는 이런 디스토피아로 빨려들고 말다니...(문제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키보드 옆에 코맥 맥커시의 또다른 디스토피아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책을 받고 생각보다 판형이 크다는 것에 놀랐다. 내가 고정관념으로 가지고 있는 만화책의 크기를 상회했다. 예찬이가 보는 동화책들과 비교해도 큰 편에 속한다.(내가 좋아하는 예찬이 동화책 중 1등은 <프레드릭>이다.)

원래 아이 재우고 책장에서 책을 꺼내면 곧 존다. 언젠가는 1시간을 앉아서 졸다가 다음날 목이 아파서 혼났다. 그런데 <설국열차>를 보는 날은 달랐다. 영하 90도 찬바람이 불어나와서 새벽 1시까지 졸 수가 없었다. 가끔은 소름이 돋았다.( 만약 실제 영하 90도 였으면 동상처럼 얼어붙었겠지...) 첫 번째 소름이 돋았던 것은 '설국열차'라는 존재다. 무한하게 순환하는 영속성은 정말 사람 돌게 만드는 공포다. 끝이 없다는 것이 무섭지 않은가? 나는 끝이 없다는 것만큼 무서운게 없다. <은하철도 999>에서 철이가 기계인간이 되기를 포기했던 것은 무엇때문일까? '죽음'을 모르는 그 기계인간의 존재론적 슬픔을 보았기 때문이다. '철이'는 언젠가 끝날 수 밖에 없기에 더 소중한 '생'의 아름다움을 선택한다. 이 빌어먹을 '설국열차'는 무한궤도를 돈다. 철학용어로 하면 '자기운동'인 거다. 즉 눈으로 덮인 디스토피아를  자기운동하는 것이다. 헤겔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모든 생물을 팥빙수로 만들어버린 세상에서 '설국열차'의 자기운동은 그 자체로는 '변증법'도 통하지 않는 폐쇄된 운동이다. 그저 무한히 도는 '무' 다.

 '설국열차' 1편에서 내가 첫 번재 공감한 사람은 시작부분에 등장해서 곧 사라진 노인네다. 열차 끝칸에 '개인'을 위한 공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서로의 입김이 불편할만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모여 산다. 음식도 부족하여 결국은 '죽은 자'로 단백질을 공급받는다. '아우슈비츠 열차'가 지옥행 열차였다면 무한궤도를 도는 '설국열차'의 끝 칸은 지옥 그 자체다.  

 '혼자있는 시간' 즉 '개인' 이 존재의 필수조건이라고 늘 강조하는 나로서는 당연하다. 내가 그 입장이었도 1시간동안 주어진 '홀로있음' 다음에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자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찬이를 돌봐야 하는 의무감만 아니라면 말이다.

'설국열차'는 인류의 마지막 '노아의 방주'이다. 그런데 '노아의 방주'와 다른 것이 있다. 노아의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설국'의 세계는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다. 세계의 멸망을 도래시킨 '기후무기'라는 것은 영화 <투모로우>식으로 비유하자면 환경의 습격이다. 노아의 방주는 인류의 유일한 생존자와 다른 모든 종들이 종자은행처럼 보존되어 있는 하나의 작은 생태계다. 그러나 '설국'에 그런 것은 없다. 이 곳은 대신 하나라고 설득하지만 결코 하나인적이 없는'인간' 종들만이 연필심처럼 그득하다. 노아의 세계에서는 자연의 축소판으로 그것들이 순환적 공생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설국'의 세계는 확연하게 '계급'에 따라 구획지어진다. 모든 칸은 통제되어 있고 이것을 유지하는 것은 '폭력'이다. 이 확연한 구분에도 분명 내부적 모순의 폭발이 있었다. 그러나 '경찰력'을 동원할 수 있는 앞 칸의 권력층과 기득권층은 이들의 폭동을 무자비하게 제압한다. 이 만화 속에서는 그날을 '야생의 밤'이라고 한다. 대략 마르크스의 세계구조와 유사하지 않은가...    

열차 끝 칸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상태에 이르렀지만 열차 앞 칸은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뿐이지 여전히 와인에 취해 향락을 즐긴다. 하류층과 상류층의 차이는 결정적인 위기에 대한 자원의 차이이다. 하류층은 위기에서 그냥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상류층은 약간의 타격은 받을지라도 존재 자체를 지옥으로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다. '설국열차' 안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 그 중에 일부는 휴머니즘차원에서 마지막 칸을 돕고자 한다. 또 어떤 그룹은 급진적인 테러를 꿈꾼다.기득권 세력들은 종료의 이름으로 기계를 신격화하여 자신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현재의 영속성만을 기원한다. 마르크스식의 종교가 가진 체제 순응적이며 이데올로기적 의미가 '설국열차'에서 채현된다.

물론 드라마를 이어가지 위해서 '뒤틀림'이 필요하다. 1편은 설국열차의 자기운동(이것은 설국열차를 움직이는 '올가'를 말한다) 이 그 자체의 문제보다는 기계적 노후로 인해 속도가 떨어지는 일이 발생한다. 언젠가 열차가 서게되면 모두 영하90도 아래서 얼어죽을 상황이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아주 합리적이고,간단하며,이성적이고,현실적인 방법이 있다. 어쩌다 합승해서 그냥 끌고 갈 수 밖에 없었던 마지막 칸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열차의 무게를 줄이면 당분간은 기계적 부담을 상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국열차는 애초에 권력층과 귀족층들만 태우기 위해 준비되었다. 이 설정 자체는 충분히 자본주의적이지 못하다. 이것은 내게 '설국열차'가 끊없이 운행하는 자본주의의 자기운동과도 유사하다는 생각을 들게 하면도 자본주의 비판으로 보지 못하는 이유다. 착취할 대상이 없어진 자본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형용모순이다. 

책에서는 구체적으로 그 과정을 둘러싼 논쟁이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일들이 부지기수로 벌어진다. 그래서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것이다. 실제로 그런 권력층의 결정에 대해 1등칸은 말할 것도 없지만 2등칸의 대중들은 어떻게 '동의'를 할까? 그들은 궁극적으로 '동의'를 할 것이다. 이성과 합리와 상황의 이름으로 말이다.

'설국열차' 1부에서 주인공은 결국 '설국열차'의 비밀을 알고 절규한다. 끝에 가서 '설국열차'의 궁극적 비밀이 드러난다면 작가들은 주인공을 호송하는 과정 중간 중간에 '설국열차'와 생존조건의 물적토대에 대해 말한다. SF적 상상력이라서 재미있기도 하지만 너무 설명이 부족한 감이 있다.만화는 주인공이 끝 칸의 운명을 거부하여 이제는 모두로 부터 고립된 영원한 고독 속에서 진실과 대면하면서 문을 닫는다. 그리고 열차는 하얀 고독의 터널을 계속해서 달린다. 끝없는 '무'를 향한 그 길 말이다.

'설국열차'의 그림체가 조금 낯설고 호흡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왜 그럴까? 기본적으로 컷트수가 다르기 때문인 듯 하다.  우리들이 쉽게 보는 일본만화나 한국만화에 비해 생략이 과감하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 정도 내용을 일본만화로 만들었다면 1000컷이 들어간다면 이 만화는 500컷이다. 다른 컷트 수 때문에 간혹 점프컷을 보는 낯선 느낌을 줄 때도 있지만 그것은 작가와 그의 문화가 미학적으로 선택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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