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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의 아틀리에 - 장욱진 그림산문집
장욱진 지음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집에는 장욱진의 그림이 한 점있다.
그러나 너무 놀랄 것은 없다.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복사본 그림이다.이 그림과의 인연은 몇 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원룸 빌딩 9층에 살았다.13평짜리 원룸에 침대,책상,옷걸이가 가구의 전부였다.아마 원룸살이의 기본세트 아닌가 싶다.침대에 누우면 마주보이는 하얀 벽이 을씨년스러웠다.뭔가 필요했다.해답은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 지하상가에서 구해졌다.서울 본가에 갔다가 우연히 지하상가 액자점을 어슬렁 거렸다.거기서 엽서 크기보다 조금 더 큰 장욱진의 그림을 보았다.몇 만원인가를 주었다.투명한 아크릴 액자속에 그림은 평화로왔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즐거웠다.
그림을 사들고 삭막한 원룸 벽에 걸었다.햐얀 벽면에 땡그렁하고 장욱진 그림 한 점만 걸렸다.집에 국화 한 다발 사서 꽂아 놓아 본 원룸생들은 알 것이다.몇 천원 밖에 안하는 국화가 집안 분위기를 한동안 바꾸어준다는 것을... 그림 속에는 장욱진 작품에 수시로 등장하는 대상들이 전부 들어 있다.아마 유명한 그림일게다.그 제목은 아직도 잘 모르지만 말이다. 복사본 그림은 이렇다.초록빛 나무 속에는 새들 대엿섯마리가 찌르릉 찌르릉 지저귄다.나무 왼쪽 위로는 마지막 남은 붉은 홍시마냥 옅은 태양이 걸려있다.나무 아래 바둑판처럼 네모난 멍석이 깔려있다.멍석위에 앙상한 숯처럼 까만 사람 세명이 마주보고 앉아 있다.그 아래로 네발 달린 강아지가 어슬렁 지나간다.그림은 안정감이 있으면서 평화롭다.과감한 생략과 기호화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느 여름날 시골마을 어귀가 그려진다.동네 큰 나무아래 흰옷입은 노인들이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눈다.올해 농사이야기도하고 서울간 자식 이야기도 한다.이웃 마을 김영감 손자 낳은 이야기도 한다.매미의 왱왱왱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산 위에서 불어온 여름바람이 흰 마고자의 열을 내리고 살며시 돌아나오는 소리도 들린다.어느 집 담장너머 콩국수 면발 물에 헹구는 소리도 들린다.장욱진의 그림을 한참 보고 있으면 마치 그 그림속이 내 고향인 듯 오만가지 소리와 향기.그리고 풍경이 마음속으로 밀려든다.
<강가의 아틀리에>는 이번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시회에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책 100권' 중 하나로 뽑혔던 책이다.그림 산문집이라는 말처럼 책에는 글보다 그림이 많고 그림보다 여백이 많다.여기 올라온 글들은 화가 장욱진 선생이 6-70년대 잡지나 신문에 기고 했던 것들이다.주로 장욱진 선생의 신변이야기들,그림과 관련된 생각들,술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문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글의 내용이 깊은 울림을 갖지도 않는다.화가는 그림으로 승부하는 사람이지 글로 평가받는 사람이 아니니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국립박물관장이었던 김원룡 선생은 장욱진 선생을 두고 '붓만 빼았으면 그자리 앉은 채 빳빳하게 굶어죽을 사람'이라고 했다.한가지에 미쳐야 일가를 이룬다는 말이 그에 다르지 않을 것 같다.장욱진의 그림에서 보이는 단순소박함이 유치하지 않고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그의 내공에서 기인한 것일게다.어떻게 생각해보면 장욱진의 그림은 유치원때 한두번 그려본 그림같기도 하다.사람은 머리에 손발만 갖춘 모습이다.동물들도 입체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이 그냥 네발 또는 두발이 성냥개비처럼 땅에 닿아있다.장욱진은 자신이 심플하다라고 말했다.그의 그림은 보면 그의 삶이 정말 심플했을 것으로 짐작된다.설령 그의 삶이 번잡한 일상에 치였을 지라도 그이의 영혼은 단순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했을 것 같다.
장욱진의 그림 속 인물들은 기호에 가깝다.자코메티가 떠오른다.실존주의 조각가라는 자코메티 역시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실체를 최대한 단순화시켰다.그의 사람들은 그래서 모두 앙상한 뼈만 남은 사람들 같다.존재의 본질이 외연에 있지 않다는 것인가? 하여튼 장욱진의 인물들도 모두 앙상하다.하지만 같은 기호로 남은 인간이지만 장욱진의 그림 속 사람들은 훨씬 풍요로와 보인다.아마 인물들이 무언가와 관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관계의 대상은 대개가 태양.나무,개,한옥집 등등 우리 자연과 삶의 모습들이다.그래서 장욱진의 그림은 단순하고 본질적이어도 결코 외롭지 않다.또한 그의 작품들은 동양에서 바라보는 인간적 가치의 본질을 보여준다.이러한 보편성은 그의 표현이 갖는 한국적 터치를 통해 특수성도 확보한다.이 책에 있는 삽화들은 불가의 달마도나 선화를 연상시킨다.많은 여백과 단순한 붓터치는 보는 이에게 많은 상상을 요구한다.장욱진이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그림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 하다.그는 말했다.
나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자기를 한곳에 몰아 세워놓고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아무것도 욕망과 불신과 배타적 감정 등을 대수롭지 않게 하며 괴로움의 눈물을 달콤하게 해주는 마력을 간직한 것이다.회색빛 저녁이 강가에 번진다.뒷산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장욱진의 그림 속 세상에 기호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석양이 수면을 쓸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막걸리 한 잔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