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박하사탕>에 나오는 시간을 역행하는 기차에 오른다.시간이 뒤로 뒤로 흐른다.때는 80년대 중반 아침등교길, 선도부들이 학교 앞에서 위압적인 모습으로 서있다.마치 죄지은 사람들인 양 학생들은 명찰과 옷단속에 분주하다. 무언가 하나 빠진 친구들은 교문 100여미터 멀리서부터 정문을 통과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자못 진지하다. 딴에는 자신있게 교문을 통과하다 무언가 걸린 학생들은 엎드려 뻗쳐 자세로 고개를 처박고 있다.위풍당당 선도부들의 머리 위에는 교문 전체를 덮어 쓸 만한 플랫카드가 하나 걸려있다.

"  경축!!  00고등학교 00년도 졸업생 개똥이, 소똥이,말똥이,새똥이 00차 사법고시 합격 "

선생님들이 엎드려 있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너희들 자랑스런 선배들은 저렇게 잘나가는데 니들은 도대체 정신이 있냐 없냐.그 썩어빠진 정신상태로 뭘하겠다는거냐 ? 전부 일어나! 지금부터 운동장 끝까지 선착순 1명!! "

대한민국이 생겨나고 나서 아니 일제시대때부터 사법고시는 국가가 인정하는 최고의 시험이었다. 옛날에 시골에선 한 마을에서 사법고시 합격하면 군수,경찰서장 이런 사람들이 집까지 찾아와서 축하인사를 하고 갔다고 한다. 고시에 합격하면 비록 나이가 어리더라도 '영감'이 되었다고 한다.어린 시절 그게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감은 할머니가 부르는 할아버지 호칭인데 왜 20대 젊은이를 나이도 많은 사람들이영감이라 부를까? 

법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법은 사회적 강자들과 권력자들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경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수도 없이 있었다. 이런 법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독재정권과 그의 수족 역할을 해 온 법조인들 때문이다.이 책 <헌법의 풍경>은  크게 두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첫번째는 뼛 속 부터 특권화된 법조인들의 모습이다.이들은 법 정신을 수호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일반인들의 위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다. 두번째는 헌법의 조문과 헌법의 정신이 현실에서 어떻게 왜곡되며 형식적으로만 실천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김두식 교수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특권화된 법조인들의 모습을 살핀다.그는  법전 해석의 권한을 법조인들이 독점하면서 특권이 출발한다고 말한다.즉 법조인들은 일반어와는 다른, 난해하고 현실어와 동떨어진 이상한 말들을 공부하며 자신들의 장벽을 친다는 것이다.이건 누구나 동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에게 가장 밀접한 법인 < 주택임대차 보호법>같은 것만 보더라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몇번을 읽고 읽어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 어떨때는 부동산 관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해야 할 때도 있다. 생활과 관련된 법이 그 정도인데 다른 법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물론 법조계에서도 이 문제를 개선하겠다고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는 있지만 아직 턱도 없이 멀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법연수원생들의 오버는 가히 코미디 수준이다.고시원에서 쩔쩔매던 시절에 대한 복수인양 자신들이 얻은 특권을 마음껏 향유(?)한다. 그들의 막나가는 특권은 아무도 못 이긴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배울 만큼 배웠고 법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너희들보다 똑똑하니까 ... 이들이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된다. 공부하시느라 연애질도 제대로 못해보시고 인간사의 갈등과 인간에 대한 이해도 공부만(?)하신 판사님들이 법(?)에 입각해서 재판을 한다.도대체 법전만 파고 다닌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 최고 권력기관인 검찰은 어떤가? 한 체제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고민은 합격하고 나서 하자고 작정한분들이.... 합격하고 나면 생각이나 해보시는지. (물론 법조계에도 훌륭한 분들이 많이 있다.특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성공보다는 양심과 소신에 따라 행동해온 지사형 법조인들께 박수를 보낸다.) 어쨋거나 20-30대에 가장 힘이 센 사람들은 역시 검사들이다.검사들 앞에가면 높은 사람들도 다들 주눅든다는데 일반인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큰 소리 한번만 치고 으르렁거리면 꼬리내리며 정신 놓아버리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법조인들은 법의 객관성만을 내세워 자신들은 객관적인 법정신 아래서 일한다고 말한다.하여간 아전인수격으로사용되는 '객관성,중립성,불편부당' 이런 단어들은 사전에서 다시 용어정리 해야한다. 언론도 그렇고 법조계도 그렇고 이 용어들의 성 속으로 쏙 숨어 버리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누가 자신들에게 '객관성,중립성,불편부당'을 독점할 권한을 주었는지...  요즘은 판사님들의 오버 시즌이다. 노 대통령의 형이 뇌물문제로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나보다.집행유예인지 무혐의인지 하여간 풀려났다.재판부에서 노건평씨에게 대통령의 친인척으로써 행동에 주의하길 바란다는 멋진 말을 남겼단다. 언론에서는 다들 감동적으로 이 사건을 보도 했다.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아니 법적으로 문제가 되면 대통령이든 뭐든 법대로 하면 되고 아님 풀어주면 되는 거지 재판부가 그런 충고를 할 권한이 있는가?  재판부의 오버다. 

 김교수의 두번째 이야기는 헌법정신에 대한 부분이다.우리나라의 헌법이 명문으로 만 지켜지고 현실에서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헌법의 정신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관용의 정신이라고 설명한다.독실한 기독교인인 김교수는 관용의 정신이 부족한 보수적 기독교의 양심적병역거부 문제에 대해서도 헌법정신을 들이 밀며 비판한다. 표현의 자유문제나 정치적 자유문제에 있어서도 관용의 정신을 주장한다.하지만 정작 현실은 아직도 색깔론이 정치권에서 정쟁의 도구로 이용되고 주요언론들은 이를 지원해주고 있으니 전부 헌법정신에 위배된 작당들이다.그러면서도 그들의 수장은 '대한민국의 헌법을 지키지 않으려면 국가 문을 닫아야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들에게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장 위대한 정신은 헌법의 정신이 아니라 반공의 정신인 듯하다. 차라지 정권을 잡으면 헌법 1장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는 말을 삭제하고 '대한민국은 전세계 최고의 반공국가이다 '라는 말을 넣던지.(진짜 그러기만 해봐라.웅 흥분을 가라앉히자..)

이 책에는 그 외에도 헌법에 보장된 권리들이 잘못 적용되고 있는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묵비권'  즉 '말하지 않을 권리'에 대해서도 신문에 난 주요 사건들을 예로 들며 친절하게 보여준다. 검사가 '임의조사'를 할 경우 대답하기 싫으면 "저 인제 좀 지겹거든요.갈께요.안녕히 계세요." 하고 가도 준법적이란 거다.과연 실제로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실험해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또 피의자의 인권측면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이 어떻게 경찰과 언론의 담합으로 무너지는지 구체적 사례들이 등장한다. 힘없는 피의자는(그 죄의 경중을 떠나) '유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고 힘있거나 좀 귀찮게 할 피의자들은 완벽하게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는 잘못된 사례들이 인상적이다. 물론 여기에 언론은 알권리 운운하며 맞서겠지만 굳이 헌법정신을 위배해가면서 까지 경찰서에서 고개 푹숙이고 있는 피의자들을 보여줄 필요는 또 뭐있겠는가.다 똑같은 그림이던데....

우리나라의 지난 50년은 독재와 반독재 투쟁의 시기였다.그나마 이제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다.형식적 민주화란 절차적으로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민주화가 진정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현재 헌법에 보장 받고 있는 권리들이 실제적으로 지켜지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가능하다.그러기 위해서는 일부 세력들에 의해 독점된 법해석이나 특정시대에 만들어진 법해석등을 과감히 재해석하고 비판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또한 악법도 법이라고 지킬 것만 강요하는 구태에서 벗어나 악법이면 고쳐서 개인의 양심과 자유가 실제적으로 보장되는 제도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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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08-15 14:32   좋아요 0 | URL
우와...이거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중입니다. 님의 멋진 리뷰를 보면서 저는 아무래도 이 책 리뷰 쓰는거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흑흑..너무 잘 쓰셨잖아요...추천 꾸욱~

바람구두 2004-08-31 17:53   좋아요 0 | URL
정말 잘 쓰셨습니다. 관점도 잘 잡고 계시고요. 사법개혁의 물꼬가 어찌되었든 트이는 모양입니다. 저도 추천해요.

마립간 2004-09-09 21:06   좋아요 0 | URL
반성하는 사유님, 첫 만남에 불쑥 질문을 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개인의 양심과 자유가 실제적으로 보장되는 제도'에 해당하는 대안적 방법이 있을까요?

드팀전 2004-09-10 09:32   좋아요 0 | URL
최근에 어떤 대학법대 교수를 만나 이야길 했습니다. 그냥 반 왈...법의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운용이 결국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 하더군요.얼핏 그럴듯 해보이는데...과연 법의 운용자가 선의로만 법해석을 할 지 아닐지 누가 알겠냐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만 참았습니다.
대안적 방법이란 것이 각 항목에 대한 각론을 이야기하는것은 아닐겁니다.결국 너무도 광범위한 인식의 변화라든가 사회 여론의 변화라든가 뭐 그런 이야길 해야 될 겁니다.개인의 권리는 이미 헌법에 잘 보장되어 있읍니다.그런데도 잘 이행되지 않는 것은 헌법의 정신이 기타 영향에 의해 무시되고 곡해되어서 형식법처럼 되어 있다는 거겠죠.제 생각에 헌법 기본정신에 대한 침해나 왜곡에 대해 좀더 단호하고 선진적인 판례들이 나와야 된다고 봅니다.물론 현재 고루하신 헌재에서 기대하긴 어렵겠지만....학교내 종교의 자유 1인시위나 양심적 병역거부 재판등 이어지는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온다면 ...일반인들의 법감각보다 훨씬 느리신 헌재판사님들도 마지 못해 그런 주장에 법적인 힘을 실어주실 수 밖에 없겠죠.
님의 질문에 대답이 되긴 제 생각이 짧지만....위의 질문은 세가지 뉘앙스로 들립니다.하나는 "저런 식의 막연한 문제제기는 하나 마나 한 것 아닌가?" 하는 것과 두번째는 " 말은 좋은데 저게 과연 어느 세월에 가능하겠어" 하는 느낌.또 하나있다면 현재의 정치 체제하에서는 개인의 자유는 원래 구속의 속성을 갖기 때문에 완전한 개인의 자유와 자율적 연대를 구상하는 아나키즘적 속성.
이러저러한 점에 대해서 저 역시 공감하고 마음 한 구석에도 그런 감정이 남아있습니다만...
그래도 현실적 부정에 대해 작은 지껄임들이 조금씩 모여 움직임을 만드는 거라 생각합니다.사법 개혁이 조금씩 박차를 가하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마립간 2004-09-10 12:54   좋아요 0 | URL
반성하는 사유님, 답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의 해결책을 여기서 모두 찾을 수 없지만 반성하는 사유님의 의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질문의 뉴앙스 대한 이야기는 따로 글을 쓰겠습니다. 초면에 실례를 한 것 같은데, 반성하는 사유님이 충실한 글을 주시니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말씀드립니다.

드팀전 2004-09-10 14:38   좋아요 0 | URL
무슨 별말씀을 ^^ 저 역시 저 분야에 전문가가 아니니까 당위론적일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아쉽긴합니다. 설령 전문가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뾰족한 수를 내더라도 결국 도루묵이 되기 쉽겠지요.
어제 대학생들을 좀 만났는데....넌지시 국보법 폐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물었습니다.
제길 그 자식들이 뭐라냐면..." 전 그런 쪽 관심 끊은지 오랜되요" " 그거 정치하는 넘들 이야기죠" "그거 생각하느니 영어 한문장 더 외우죠." " 국보법이 뭐에요? " ....
뭐 특수한 아이들이 아니고 진짜 평범한 대학생들이었습니다.제가 분통터져 죽는 줄 알았습니다.가끔 제가 여기다 글쓰고 비슷한 생각을 가지신분들과 이야기나누고 뭐 이러는게 전부 지랄병같은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위와 같은 답을 하는 아이들에게 (거짓말 안하고 10명중 8명은 저런 류의 대답을 합니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 문제가 도대체 무슨 장판뜯는 소리인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