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두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머리가 여럿인 존재를 말한다.이 개념은 '정치학'에 이용되기도 한다.그렇지만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신화에 바탕을 둔 서양회화에서이다.'다두체'는 각기 다른 존재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한 사물의 시간에 따른 변신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한 사물 내의 다층적인 속성을 상징하기도 한다.'다두체'는 주로 시간에 따른 인생의 변화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그러니까 스핑크스의 수수께기를 한 그림내에 모아 놓으면 '다두체'가 된다.'다두체'의 그림들을 보면 주로 인생의 시기들을 표현한 것들이 많다.
나는 사실 '나 답다'는 것의 정의를 포기한지 오래다.내가 총체적으로 나를 파악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않는다.물론 상대적으로 타인들에 비해 내가 나의 다양한 모습을 잘 수집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그것이 '나의 정체성'에 대해 내가 유일한 형태의 조형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나는 마치 고철 수리상처럼 나의 편린들을 소유하고 모아내고 있으며 가끔 그것들로 고철 예술품을 만들어보려고 시도한다.그러나 내가 올려세우는 높이만큼 아래에서 무너지는 조각들이 발생한다.결국 나는 무너지는 것들과 새로워지는 것들 사이의 부단한 움직임 속에 있다.그러므로 현재로서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그 흐름의 도상 위에 올려놓을 수 밖에 없다.
가끔씩 사람들은 나의 예상치 못했던 행동에 의아해한다.이건 당연한 일이다.인간은 언제나 예측가능성을 위해 타인을 몇 몇 단어로 몇 몇 그림으로 구상화해놓은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이 편의주의적 발상은 또한 폭력적인 양상을 띠기도 하는 인간 존재의 한계이다.특히 폭력적인 양상이 두드러질 경우는 타인의 예측가능성과 본인의 예측 불가능성을 동일한 잣대 위에 올려놓치 않을 때이다. 타자는 자신이 예상한 주름을 따라야하지만 자기는 그 주름을 계속 창조한다고 믿는 경우이다.
나는 인간이 아주 복잡한 구조물이라고 생각한다.이 구조물에는 선/악,진리/거짓,도덕/위반,폭력/순종,이기/이타 가 유화물감 섞어 놓은 듯 혼합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물론 어떤 행동을 함에 있어 추구해야하는 바를 설정하고 또 그런 지향을 갖도록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들은 있을 것이다.그렇지만 그 발걸음이 그렇게 사뿐사뿐하지도 또 그렇게 명쾌하지도 않다.마치 하교길의 초등학생처럼 인간은 자기 내부의 다면성을 늘 기웃기웃거린다.
내가 영화나 문학을 접하면 희열을 느낄때는 그런 '다두체'의 인간들을 만날때이다.아니면 작가가 내가 어렴풋이 그리고 있었던 '다두체'의 한 면을 형상화해서 사실처럼 보여주고 있을때이다.그러면 나는 내심 '나의 악마적이고 세속적인 속성의 바닥에 대해' 그것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구나 하면서 위로를 받는다. 이런 작품들 속에서 나는 '가장 큰 친구이자 가장 큰 적'을 만나며 짜릿해한다.
나는 영화를 보다 잘 울기도 하고 -와이프보다 내가 더 잘 운다-지나가는 걸인에게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기도 한다.그렇지만 나는 또 아주 잔인하다.가끔 나는 나의 잔인함이 위악적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만 꼭 그런 것은 아닌 듯 하다.또라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는 <아메리카사이코>의 주인공이 자기보다 좋은 명함을 들고 거들먹 거리는 친구를 죽이는 장면을 충분히 이해했다.또한 살인후에 스스로 놀라는 것에도 공감한다.물론 처리방법은 당연히 토막이다.토막은 살인자가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기도 하니까...이걸 도덕적으로 옳으니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니..라고 한다면 아직도 '인간'에 대해 너무 관대한 것이다.
알라딘의 역시 '다두체'의 한 모습일뿐이다.또한 이것은 은폐가 아주 용이하다.사람이 일 대 일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는 실제 버벌 커뮤니케이션보다 논-버벌 커뮤니케이션의 비중이 크다.그 사람의 분위기,말하는 태도,눈빛,몸짓 등등 이런 것이 메시지의 내용에 부가하여 그 사람을 나타내는데 큰 영향을 준다.이것은 단지 이미지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이미지로 설명할 수 없는 몸에 배인 어떠한 것이다.그러나 '알라딘'은 그런 면에서 완전히 탈신체화된 공간이다.이곳은 문자만이 살아 있다.물론 그 문자들을 통해 그 사람의 면면을 읽는다.특히 댓글이라는 비공식적이고 웃어넘길 수 있는 편린들 속에서 그의 성격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그렇지만 이것은 모니터에 대고 이야기하는 모니터 속 얼굴의 하나일 뿐이다.실제의 나를 '증식'시키고 '변모'시키기에 알라딘은 아주 편한 공간이다.내가 나를 이렇게 보기때문에 나는 알라딘에서 사람들도 그렇게 본다.
물론 유년시절 원만한 교유관계와 충분한 정서함양으로 인해 '선후가 분명'하고 '앞뒤가 수미상관'하고 '외부와 내부가 일관'된 그런 '안정적 정체성'과 '인격'의 소유자들도 분명 알라딘에 있다.가끔은 그런 '안정성'이 부럽기도 하다.그렇지만 나는 아니다.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들과 연애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