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So there is the first misunderstanding cleared away. Virtue Ethics does have something to say about right action. But this is only a first step in dealing with the misunderstanding, for many people find what it has to say unsatisfactory. The reasons for their dissatisfaction are so varied that they will occupy us for several chapters; in this one, I shall concentrate on some that are (2) naturally expressed in the complaint that virtue ethics does not and cannot tell us what to do; the complaint that it does not and cannot provide moral guidance.

 

 

(1) 그렇게 해서, 첫 번째의 오해가 해결된다로 옮겼지만 사실 이 문장의 곧이 곧대로의 번역은 아니다. 아마도 그렇게 해서, 더 이상의 반론이 있을 수 없게 된 첫 번째의 오해가 있다.” 이쯤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렇게 써 놨더니 어색해서 좀 망설이다가 마지막에 바꿨다. 이러는 걸 그래왔듯이 오늘도 반복하면서, 나는 그 생각만 한 번 더 했다. 나는 약간의 도움이 필요하다. 나같은 사람은 같이, 팀으로 번역 작업을 해 보면, 그리고 그 때의 내 파트너가 나 보다 더 많이 하지 않거나 더 부지런히 하지 않아도, 나보다 조금 더 결단력이 있고, 어떤 상황에서 내린 결정에 대해 조금 더 확고하다면 좋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래도 말고 잠시만 그런 경험을 쌓으면, 아마 곧 나 혼자서도 조금 더 잘 하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이렇게 공상의 수준에서 적었지만, 세상 앞 일을 누가 알겠나. 어떤 때나 기회가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까 내 필요를 들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저 그 정도로 이렇게 생각나면 써 갈 뿐..이라고 하고 넘겨 본다. 아마 그런 기회가 어디 어떤 식으로건 오겠지 뭐..하고. 

 

 

(1) 계속 이어지는 문장도 비슷한 경우다. 덕 윤리학은 옳은 행위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덕 윤리학은 옳은 행위에 관해 말할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후자는 가지고 있다는 말이 어색하기도 하고, –학 이라는 사물주어에 어울리는 동사도 아닌 것 같고 해서, 이 둘 사이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보고 정해서 옮겼다 

 

 

(2) Naturally expressed in 처음에는 unintentionally expressed, or expressed without a specific intention 등으로 보고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는이라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그럼 왜 natural vs. artificial 이 나오겠나 하는 의문이 들어 사전을 봤다. inherent 의 의미로 봐야 맞겠다는 생각에 그것으로 했다. ‘내재된 것이 드러나는의 의미로. 전자와 후자에는 겉으로는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 (그래서 그냥 자연스럽게로 옮긴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데) 그래도 어떤 미묘한 차이가 있을 것 같은 생각에 그대로 했다.

 

 

‘Virtue ethics does not provide us with moral guidance’—how can it (3) fail to, when it has provided a specification of right action? Sometimes people suspect that it has provided only a circular specification, not a specification that we could use to guide us. ‘It has told us that the right action is what a virtuous agent would do. But that’s a (4) truism. Of course the virtuous agent “does what is right”; if she (5) didn’t, she wouldn’t be virtuous; we are just going round in circles.’

 

(3) 어떻게 그걸 하지 못할 수가 있겠나? 가 무난한데, 자꾸 실패라는 강한 어조의 말을 넣어야 할 것 같은 당위감이 들어서 몇 번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 원래 생각했던 대로 하기는 했다.

 

 

(4) 이번에 옮긴 부분에서 제일 많이 나온 말이기도 하고, 우리말 선택이 까다로웠던 경우였다. truism 의 의미는 어려울 것이 없다. 그 의미를 우리 말로 무엇으로 옮기는 지도 사전에서 쉽게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말에 내가 그리 익숙하지가 않아서 자꾸만 이게 아닌데..뭔가 다른 더 나은 말이 있을 것 같은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truism이라는 말 하나로 충분한 어떤 의미가 우리 말로는 그와 같이 덩어리져서 의미가 흐르지 않는, 그런 경우였다. 낯설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예로 들 수 있는 truism 은 살인은 죄이다 등이다. 그런 경우에서는 자명한 이치라기 보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그 누구라도 거부나 반대를 할 수 없는 주장, 그런 의미로 온다. 내 이런 감은 사전에 나온 말 풀이, A statement that is obviously true and says nothing new or interesting 와 비슷해 보인다. 이 말을 직역하면 뻔한 소리 뻔한 말, 그래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저 문맥에서 뻔한 말 이렇게 옮기기는 좀 그래서 다른 것으로 골랐다.

 

 

·         지금 국어사전에서 이치를 보니, [명사]사물 정당한 조리(條理). 또는 도리 맞는 취지. 염도(厭覩) 인데, 나는 이치를 논리의 의미로만 생각하고 그렇게 옮긴 것이 아닌가 싶다.

 

 

Now it is true that the first premise of virtue ethics’ account of right action (6) has the air of being a truism. For although act utilitarians will want to deny the deontologists’ first premise (‘No! We should break the rule if the consequences of doing so would be better than those of keeping it’), and deontologists will deny the utilitarian one (‘No! We must stick to the rules regardless of the consequences’), it is quite likely that both of them would accept what virtue ethics says: ‘An action is right iff it is what a virtuous agent would do.’

 

 

(6) 밑줄 친 부분은 표현 그대로 한 공기(기운/냄새) 를 피운다로 보고 뉘앙스의 의미로 받았다. 로 받고 말았다. 밑줄이 쳐진 다음 문장의 경우는, 옮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왜 둘이 다 받아 들이는 것과 뻔한 소리라는 것을 하나로 붙여 놨는지를 금방 이해를 못해서 갸우뚱 했다가 그것이 아마도 여기나저기나 다 가져다 쓸 수 있는, 그래서 그만큼 너무 뻔한 소리임을 의미하는 줄 알았다.        

 

What I need to emphasize is that the apparent truism,(7) ‘An action is right iff it is what a virtuous agent would characteristically do in the circumstances’, is not (8) figuring as a truism in virtue ethics’ account of right action. It is figuring as the first premise of that account, a premise that, like that the first premises of the other two accounts, awaits (9)filling out in the second premise. Perhaps I could make this clearer by restating the first premise, and its supplement, in a way that made the necessity for filling them out (10) glaringly obvious, thus:

 

 

(7) ‘An action is right iff it is what a virtuous agent would characteristically do in the circumstances’, 이 문장은 아마도 이 책이 끝날 때까지 어느 하나로 정해진 번역이 아닌, 그때마다 이것저것 조금씩 다르게 옮겨지게 될 것 같다. 그만큼 아직 내가 이 문장이 말하는 의미를 정교하고 자연스럽게 옮기지 못해서 그런 것이 맞고 (그것이 크고) 하지만 동시에 비록 아직은 허공에 대고 말하는 형편이지만, 더 나은 것이 뭐가 있을까를 상의해 가는 기분, 그것을 유지하고 싶어서다. (1) 에 이어 다시 그것과 비슷한 소리를 이어 하게 되는데, 이건 그저 일반론적인 단상일 뿐이다. 다른 것은 없다.

 

(8) figuring as 는 영어 사전에 따르면 constituting as 의 의미가 큰 것 같다. 그런데 영어 사전 을 보면 나타내다 상징하다 비유하다의 의미도 굵게 되어 있다. 두 번 나왔길래 두 개를 다 써 봤다. 나타내다 뜻한다 정도로.

 

 

(9) 는 좀 재밌게 했다. 뜬금없이 저 대목에서 치과가 생각나고 이 때우는 상황이 그려지고 그래서. 그렇다고 땜빵을 기다리는..이렇게 쓸 수는 없으니;;; 조신하게 옮겼다.

 

 

(10) 은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obvious 만 써도 되었을텐데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P.1.a. An X agent is one who has and exercises (11) certain character traits, namely            the Xs.

 

(11) 난 관사에 약하다. 많이 약하다. 어쩌면 관사 때문에 영작할 때마다 긴장하고 어려움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이 규칙 저 규칙, 나 나름대로 뭔가를 정해서 적용해 보지만, 언제나 지적당하는 대부분은 잘못된 관사의 사용인 것 같다. 그 말은 거꾸로, 내가 어떤 영문 텍스트를 읽을 때 관사의 의미해석이 미진할 수 있다는 것이고, 나는 그것이 가정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언젠가 같이 청강했던 native speaker 친구에게 관사에 관해 설명을 듣기도 했는데, 그 이전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관사의 사용 같은 것은 그런 고형적인 학습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감이 다시 들었다. 지금 저 밑줄친 the circumstances 도 어찌 보면 내가 괜한 고민을 한 듯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두 개의 해석이 다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상황도 되고 (불특정) (가 처한 나름의 상황) 역시 불특정 하지만 전자 보다는 구체적인 도 가능할 것 같아서. 편법 같지만, 그 앞에 정황 설명이 없이 가정되었으므로 여기서는 어떤 상황으로 하는 것이 맞다, 그 다른 근거로 certain character traits, namely virtues, 라고 했을 때는 뒤에 그 특성을 한정하는 말이 있으므로 이때의 certain 은 어떤이 아니라 특정한으로 해야 맞다고 나는 봤었다. 다만, 그런 불특정한 조건 또는 정황의 의미라면 왜 굳이 저기서 circumstances 라고 복수를 썼을까 하는 점인데 잘 모르겠다.  

 

Unfortunately, it now looks (12) uninformatiave, once again, apparently, contrasting unfavourably with the first premises of act utilitarianism and deontology: ‘We all have some idea about what best consequences might be and of what correct moral rules or principles are, but (13)what on earth is an X agent?’

 

 

(12)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Uninformative unhelpful 정도의 의미인 것은 알겠으나, 그걸 그냥 도움이 안 된다라고 하면 될 지, 나는 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어휘력으로는 더 좋은 말을 고르지 못해서, 그 전에 위에서 that’s in no use 가 나왔던 것을 이어서 그 의미로 옮겼다. Strange thing 은 처음에는 이상한 점, 석연찮은 점으로 했다가 가만 보니 familiar 의 대구로 나온 듯 해서 다시 사전을 찾아서 낯익은(익숙한) 대 생소한 낯선 으로 받았다.

 

 

(13) 저 말이 내가 알기로는 what the hell 류의 말인데, 이런 책에 나와 있다니..하고 도대체 정도로 받아서 옮겼다. 

 

 

* 저 위에 나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쓴 캐롤의 말은 오늘 옮긴 이 부분을 혼자 읽었던 지난 1월에 서점에서 우연히 들춰 본 Quine 의 어떤 논리학 책 첫 장에 나와 있던 말이었다. 재미나게 하지막 핵심을 짚어서 따지기의 의미를 표현했다고 생각하고 수첩에 옮겨 적어 두었던 건데, 생각이 나서 그려 올렸다. 앨리스..에서 떠올라 노래도 한 곡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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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there is the first misunderstanding cleared away. Virtue Ethics does have something to say about right action. But this is only a first step in dealing with the misunderstanding, for many people find what it has to say unsatisfactory. The reasons for their dissatisfaction are so varied that they will occupy us for several chapters; in this one, I shall concentrate on some that are naturally expressed in the complaint that virtue ethics does not and cannot tell us what to do; the complaint that it does not and cannot provide moral guidance.

 

그렇게 해서, 번째 오해가 해결된다. 윤리학은 옳은 행위에 관하여 설명할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윤리학이 알려 주어야 하는 바가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지금 이것은 오해를 다루는 단계의 처음에 불과하다. 그들이 느끼는 불만족의 이유는 우리에게 여러 () 할애하게 할만큼 다양하다. 하나인 여기에서 나는 윤리학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해 아무 것도 알려 주지 않고 있으며, 그럴 없다는 불만, 윤리학은 도덕 지침을 규정해 주지 않으며, 그럴 없다는 불만 속에 내재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들에 중점을 것이다.

 

            ‘Virtue ethics does not provide us with moral guidance’—how can it fail to, when it has provided a specification of right action? Sometimes people suspect that it has provided only a circular specification, not a specification that we could use to guide us. ‘It has told us that the right action is what a virtuous agent would do. But that’s a truism. Of course the virtuous agent “does what is right”; if she didn’t, she wouldn’t be virtuous; we are just going round in circles.’

 

윤리학은 도덕적 기준을 규정하지 않는다 윤리학이 무엇이 옳은 행위인지를 상술해 오고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하지 못할 수가 있겠는가? 때때로 사람들은 윤리학이 순환 논리만을 보였을 우리가 지침으로 삼을 있는 구체적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의심을 품는다. ‘ 윤리학은 옳은 행위란 덕이 있는 사람이 하는 행위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에게나 뻔한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덕이 있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옳은 바를 행한다만일 그가 그렇지 않는다면, 그는 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안에서 돌고 있을 뿐이다.’ 

 

                Now it is true that the first premise of virtue ethics’ account of right action has the air of being a truism. For although act utilitarians will want to deny the deontologists’ first premise (‘No! We should break the rule if the consequences of doing so would be better than those of keeping it’), and deontologists will deny the utilitarian one (‘No! We must stick to the rules regardless of the consequences’), it is quite likely that both of them would accept what virtue ethics says: ‘An action is right iff it is what a virtuous agent would do.’ But, if they did, they would each be assuming that they had settled what right action was already, using their first and second premises, and were then using the truism to specify what, for them, counted as a virtuous agent: ‘A virtuous agent is one who does what is right (in my sense of “right”).[1]

 

옳은 행위에 관한 윤리학의 번째 전제가 자명한 원리처럼 보이는 외양을 풍기는 것은 맞다. 왜냐하면, 비록 행위 공리주의자들이 의무론자들의 번째 전제를부정하고자 하더라도 (‘아니오, 만약 그렇게 하는 것의 결과가 규칙을 지키는 결과보다 낫다면, 우리는 규칙을 깨야 합니다’), 그리고 의무론자들이 공리주의의 번째 전제를 부정하고자 하더라도(‘아니오, 우리는 결과에 상관없이 규칙을 고수해야만 합니다’), 양자 모두 윤리학의 다음의 주장, 어떤 행위는 그것이 덕이 있는 사람이 하는 행동인 경우에만 옳다 주장은 받아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렇다면, 그들은 각기 자기 이론의 번째와 번째 전제를 써서 무엇이 옳은 행위인지를 이미 규정했다고 가정하고, 그런 , 그들을 위해, 무엇을 덕이 있는 행위자라고 것인지를 규정하기 위해 자명한 원리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덕이 있는 행위자란 (내가 생각하는 옳음  내에서의) 옳은 것을 행하는 사람이다.’



[1] Cf. Watson’s opening paragraphs in ‘On the Primacy of Character’. 참조. 왓슨의 ‘On the Primacy of Character’ 서두에 나오는 단락들.

 

 

 

 

 

 

 

 

 

 

 

 

 

 

 

 

 

 

 

 

 

 

 

 

 

 

 

 

What I need to emphasize is that the apparent truism, ‘An action is right iff it is what a virtuous agent would characteristically do in the circumstances’, is not figuring as a truism in virtue ethics’ account of right action. It is figuring as the first premise of that account, a premise that, like that the first premises of the other two accounts, awaits filling out in the second premise. Perhaps I could make this clearer by restating the first premise, and its supplement, in a way that made the necessity for filling them out glaringly obvious, thus: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이다. ‘어떤 행위는 덕이 있는 행위자가 상황에서 그의 그런 특성대로 하는 행위일 때에만 옳다 것은 옳은 행위에 관한 윤리학의 해석에서는 자명한 논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윤리학적 해석 상의 번째 전제, 다른 이론의 번째 전제와 같이 번째 전제에서 충족되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전제를 뜻한다. 번째와 그것의 보충 전제를 진술 함으로써, 전제들이 번째 전제에 의해 충족되어야 하는 필요성이 명백히 드러나게끔 그들을 다시 서술함으로써 지금 점을 보다 분명히 있을 것이다.        

 

P.1. An action is right iff it is what an X agent would characteristically do in the circumstances, and

 

                어떤 행위는 X 라는 행위자가 어떤 상황에서 그의 그런 특성 대로 하게 되는 것일 때에만            옳다. 그리고

 

P.1.a. An X agent is one who has and exercises certain character traits, namely    the Xs.

 

                P.1.a. X 라는 행위자는 이른바 Xs 라고 하는 특정한 성격적 특성, 이른바 Xs 가지고 있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다.

 

And put that way, P.1. does not look at all like a truism.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전개되면, P1 전혀 자명한 원리처럼 보이지 않는다.

 

Unfortunately, it now looks uninformatiave, once again, apparently, contrasting unfavourably with the first premises of act utilitarianism and deontology: ‘We all have some idea about what best consequences might be and of what correct moral rules or principles are, but what on earth is an X agent?’ But now I must repeat the point made earlier. The other first premises, taken strictly, are equally uninformative. We overlook this point because the utilitarian specifications of best consequences are so familiar, and all the deontologists we know cite familiar moral rules. But, for all that is said in the first premise of either, strange things might emerge in the second.

 

유감스럽게도, 이제 이것은 또다시, 명백하게, 공리주의와 의무론의 번째 전제들에 비해 불리한 대조를 이루어 내면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최선의 결과인지, 그리고 무엇이 옳은 도덕 규칙 또는 원칙인지에 관해 아는 것이 있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이 X 행위자인가? ’ 그러나 나는 지금 이전의 주장을 반복해야만 되겠다. 엄격히 말해서, 다른 이론들의 번째 전제들도 그와 똑같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선의 결과에 관한 공리주의의 정의가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아는 모든 의무론자들은 익히 알려진 도덕적 규칙을 인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점을 간과한다. 그러나, 이론의 어느 쪽이든 그것의 번째 전제에서 주장되는 전부에 대해, 번째 전제에서는 생소한 것들이 드러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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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10-07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곧 번역서가 나오는 건가요? 기대가 됩니다.^^

am 2006-10-07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기 올리려고 왔어요. 마침 온라인 사전들 다 창으로 열려 있고요. 그래서..

곧 [부사]

1 때를 넘기지 아니하고 지체 없이. ≒즉변(卽便 ) .
우리 형제는 할아버지가 부르시면 곧 달려가야 했다.
2 시간적으로 머지않아. ≒즉변 .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어머니께서 곧 오실 거야.

그 '곧' 하나만 따라도 답이 ‘아니’ 가 되어 버리네요^^;;

이번에도, 잘 하세요,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P.1. An action is right iff it is what a virtuous agent would characteristically (i.e. acting in character) do in the circumstances.

 

어떤 행위는 상황에서 있는 행위자가 그의 특징대로 하는 행동 (, 성격 대로 하는 행동) 경우에만 옳다.

 

This specification rarely, if ever, silences those who maintain that virtue ethics cannot tell us what we should do. On the contrary, it tends to provoke irritable laughter and scorn. ‘That’s no use’, the objectors say. ‘It gives us no guidance whatsoever. Who are the virtuous agents?’

 

이런 조건의 명시가 사람들, 무엇을 해야 하는가 관해 윤리학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알게 없다는 주장을 계속하는 사람들의 말문을 닫게 하는 일은,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의 없다. 그러기는커녕, 이런 상술은 성마른 웃음이나 조소를 자극하기가 쉽다. 반대자들은 그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주장한다. ‘그것으로는 어떠한 지침도 주지 못합니다. 덕이 있는 행위자가 누구랍니까?’      

 

But if the failure of the first premise of an account of right action, the premise which forges a link between the concept of right action and a concept distinctive of a particular normative ethics, may provoke scorn because it provides no practical guidance, why not direct similar scorn at the first premises of act utilitarianism and deontology in the form in which I have given them? Of each of them I remarked, apparently in passing, but really with a view to this point, that they gave us no guidance. Act utilitarianism must specify what are to count as the best consequences, and deontology what is to count as a correct moral rule, producing a second premise, before any guidance is given. And, similarly, virtue ethics must specify who is to count as a virtuous agent. So far, the three are all in the same position.

 

그러나 만일 옳은 행위에 관한 어떤 설명에 포함된 번째 전제, 옳은 행위라는 개념과 어느 특정한 규범 윤리학 이론의 고유한 개념 사이를 연결 짓는 전제 상의 실패가, 그것이 실천적 지침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조롱에 반응을 자극할 모른다면, 그와 비슷한 비웃음이 내가 제시해 형태의 행위 공리주의와 의무론의 번째 전제를 향해서는 돌려지지 않는가? 내가 언급한 그들 각각은, 외견 부수적인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지금 점을 겨낭해서 본다면, 어느 이론도 지침을 놓지 않았다.  행위 공리주의는 무엇을 최선의 결과로 봐야 하는지를 반드시 명시해야만 하며, 의무론은 무엇이 옳은 도덕 규칙으로 간주될 것인지를 반드시 규정해야 한다. 유사하게, 윤리학은 누구를 덕이 있는 행위자로 것인지에 관해 명확히 기술해야만 한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셋은 모두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이다.

 

Of course, if the virtuous agent can be specified only as an agent disposed to act in accordance with correct moral rules, as is sometimes assumed, then virtue ethics collapses back into deontology and is no rival to it. So let us add a subsidiary premise to this skeletal outline, intended to show that virtue ethics aims to provide a non-deontological specification of the virtuous agent via a specification of the virtues, which will be given in its second premise.

 

물론, 만일 덕이 있는 행위자가, 때때로 그렇게 가정되는 것처럼, 옳은 도덕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라고만 한정된다면, 윤리학은 이름을 내리고 의무론으로 흡수되어 들어가게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론의 경쟁자가 만무하다. 그러므로 개요의 뼈대에 다음을 보이려는 의도, 윤리학이 덕의 정의에 의하여   있는 행위자에 대한 -의무론적 정의를 내리려 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보조 전제를 하나 추가하도록 하자.

 

P.1.a. A virtuous agent is one who has, and exercises, certain character traits, namely, the virtues.

 

P.1.a.  덕이 있는 행위자는 뚜렷한 성격 상의 특징, 이름하여 () 가지고 있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다. 

 

P.1.b. A virtue is a character trait that…

P.1.b. 덕이란 다음으로 설명되는 어떤 성격 상의 특징이다

 

 

 

 

 

This second premise of virtue ethics, like the second premise of some versions of deontology, might be completed simply by enumeration—‘is on the following list’—and then a list is given, perhaps completed with ‘etc.’ Or we might interpret the Hume of the second Enquiry as espousing virtue ethics. According to Hume, we might say, a virtue is a character trait (of human being) that is useful or agreeable to its possessor or to others (inclusive ‘or’ both times). Or we might give the standard neo-Aristotelian completion, which claims that a virtue is a character trait a human being needs for eudaimonia, to flourish or live well.

 

번째 전제는, 의무론의 번째 전제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다음의 목록에 나온것들 열거함으로써 끝날 지도 모른다. 그런 뒤에는 목록이 주어지고, 아마도 기타 등등으로 끝날 것이다. 또는 번째 탐구[도덕 이론에 관한 탐구] 에서의 흄을 윤리학을 지지하는 견해로 해석할 있을 것이다. 흄에 따르면, 덕은 덕을 가진 또는 타인 (포괄적인 또는양자 모두) 에게 이롭거나 맞는 (인간의) 성격 특성이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기본 관점을 제시하면서, 덕은 인간 존재가 행복, 번영을 위해 혹은 살기 위해 필요로 하는 성격 상의 특징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Here, then, let me tell you what we have a specification of right action, whose structure closely resembles those of act utilitarianism and many simple forms of deontology. Comparing the three, we see that we could say, ‘Virtue ethics (in its account of right action) is agent-centered in that it introduces the concept of the virtuous agent in the first premise of its account of right action, where utilitarianism and deontology introduce the concepts of consequences and moral rule respectively.’ That’s true; it does. But note that it is not thereby ‘agent-centered rather than act-centered’. It has an answer to ‘How shall I decide what to do?’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그것의 구조가 행위 공리주의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 옳은 행위에 관한 윤리학적 정의를 얻은 셈이다. 셋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다음의 주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 ‘ 윤리학은 (옳은 행위에 관한 해석에 있어서) 행위자 -중심이다. 그것은 공리주의와 의무론이 각각 결과와 도덕 규칙라는 개념을 놓는 자리에, 옳은 행위에 관한 설명의 번째 전제에 덕이 있는 행위자 개념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윤리학은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윤리학이, ‘행위 중심이라기 보다는 행위자 중심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자. 윤리학은  나는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결정할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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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blog.naver.com/satq?Redirect=Log&logNo=50006743945 teenage fanclub the concept

 

 

  • 지난 (1) 에 올린 내용 중에서 원문에 있는데 번역문에 빠진 부분이 있어서 추가. If virtue ethics is ‘agent-centered rather than act-centered ’, concerned with ‘What sort of person should I be?’ rather than ‘What sorts of action should I do?’ (with ‘Being rather than Doing’) (행함 보다는 존재에 관한 것이라면)

 

·          P.1. An action is right iff it promotes the best consequences. Promote 라는 말 자체야 어렵지 않은데, 여기서 저 말을 어떻게 놓아야 맞나는 좀 생각을 필요로 했다. 처음에는 막 떠오른대로 또 바로 보이는대로 최선의 결과를 증진하는/도모하는등등을 생각했는데, 좀 어색한 것 같아서 마지막에 행위의 결과가 최선이 되도록 기여하는으로 바꿨다. 문맥상의 문제는 없을 줄로 아는데 어휘선택이 (언제나 그렇지만) 은근히 까다로웠다.

 

·          This premise provides a specification of right action, forging the familiar act-utilitarian link between the concepts of right action and best consequences,  무척, 아주 여러 번 쓰고 고쳐 쓴 문장. 말로는 되는데, 글로 딱 안 떨어지는 문장, 말로 잘 풀리는대로 옮기자니 원문이 떡 버티고 있는 것 같고, 원문대로 옮겨 보자니 입 속에서 말이 말로 안되고..가지가지를 해 봤었다. –사이에서 연결고리를 지어내다, -로 묶어내다. Forge 에 힘을 주고 라는 연계를 만들어내다 정말 한 스무 개쯤은 후보를 세웠나보다. 그럴 경우 대체로 장고 끝 악수가 되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고 가급적 원문에 충실한다의 의미도 살렸다고 생각하기는 하는데역시 쉽지 않다.

 

·          이 문장은 나에게는 사실 꽤 교훈적인, 기억나는 거 많은 문장구조다. 아마 내가 저 문장을 옮겼다면, A link B and C in a way of the familiar 어쩌구..를 하면 했지, forge a link between 은 쓰지 않고 못했을 거다. 문장 써 가면 그런 부분에서 지적을 받고, 그런데 그건 지적을 받는다고 바로 고쳐질 수 있는 게 아닌, 어떤 언어적 각인이나 골수..그런 차이의 문제 같아서 예, 하고 돌아와 본들 다음에도 여전히 줄줄 늘어져 쓰고 부연이나 하게 되고..그래도 이번에 이 덕분에 다음에는 어디서 기회가 되면 한 번 써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내 생각엔 굳이 forge 를 구사한 이유는 공리주의의 어떤 이론적 의도, , 그런 의미를 강하게 하느라 그런 것 같다. 두 개념이 알아서 이어지는 게 아니라, 공리주의의 우산 아래 살로 엮인다..그런 의미.

 

·          한 가지 고백할 것은..하도 이것저것 후보를 지어내다 보니 나중에는 내가 혹시 forging the familiar act, namely utilitarian link.. 가 아닌가 하여 철렁했었다. 그 생각을 거듭하니 확신에 가까워져서 아까는 그 두 개념 사이에 익히 알려진 임무를 수행하면서, 즉 공리주의적인 연관을 맺어 내면서, 이렇게 옮겼었다. 무척 좋아했다가 그런데 설마, 지금 이 맥락에서 act가 행위 공리주의의 act 이지 뜬금없는 비유적 act 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는 잠시 혼란에 빠졌고..최종적으로는 그 앞의 두 개념이라는 것이 옳은 행위와 (공리주의의 대표언명인) 최선의 결과임에 기대서 지금의 번역으로 옮겼다. 대신 좀 얍삽하지만 조금 전의 그 번역이 맞을 경우를 대비해서 행위공리주의라 하지 않고 행위-공리주의라 했다. 후기를 쓰는 최종시점인 지금은 아무래도 forge 때문에 (뭔가를 벼려서 만들다의 의미에서) 어쩐지 아니라고 버린 그 해석이 더 맞는 게 아닌가 행위 공리주의면 굳이 왜 사이에 를 넣었을까 하는 의문도 들고..참 헛갈린다.

 

·          Laid out present 로 옮겼다. 물론 그 의미에는 arranage 도 있고 planned 도 있지만, 여기서는 펼쳐 보이다의 의미인 걸로 해석했다.

 

 

·          They begin with a premise providing a specification of right action: 참 많이도 나오는 말 specification 맨 처음, 그러니까 서문을 옮길 때는 말대말의 구도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사전에 나온 말 그대로를 어떡하건 살려야 한다고 (지금도 그건 나름대로의 내 기준이다) 그러느라 힘도 들고 그랬는데,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되 어떡하면 우리말로 뜻이 잘 통하게 하나 거기 또 마음이 간다. Specification 에 관해서는 상술, 구체화, 명시, 명기 등등 있는대로 다 모아 봤지만 솔직히 하나도 꼭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이것저것 쓰기는 하되, 나는 앞으로 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조건/대상을 정의내리다. 조건과 함께 상술하다 등으로 쓰기로 했다. 아주 큰 영어사전에 나온 말대로 explain precisely 에서 그 정확하다의 의미에 내 의미를 두기로.

 

·          P.1. An action is right iff it is in accordance with a correct moral rule or principle.  이 경우는 저 밑줄친 부분을 대로, 따라 중에서 뭘로 할까로 시간을 썼는데, 사전통합기능을 준수하여^^ 규정대로 가 명하는대로 를 골라 그렇게 옮겼다. 문장 전체가 아주 딱딱한 것이 제일 잘 고른 말 같다.

 

 

  • … is laid down for us by God, or /… is universalizable/a categorical imperative, or

 

 

·          종교적인 색채가 느껴지는 말들이나 철학전공용어라는 감이 오는 말들은 보면 긴장하고 자신이 없어진다. laid down 도 사전적으로 신이 우리에게 주신 으로 했다가 혹시나 하고 구글했는데 그랬더니 주께서 우리를 위해 버리신, 당신을 던지신 이란 말이 있길래 덥석, 이거구나..하고 옮겼다. 하지만 여기 맥락상 그건 좀 약간 지나친 감이 있는 것 같아서 신이 우리에게 하라고 명하신, 그러라고 내려 주신 정도로 말을 그냥 풀었다. 조금 더 유려한 용어를 골랐다면 좋았을텐데. Universalizable 은 일반화 보다 더한 의미의 말인 줄 아는데 혹시 어떤 철학전문용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좀 걸린다. 영문 구글에서는 그런데, 딱히 잡히는 것이 없고 그저 universalized 와 맥이 통하는, 그 정도였다.

 

  • the Good, whereas deontology begins with the Right.’[1] If the concept a normative ethics ‘begins with’ is the one it uses to specify right action, then utilitarianism might indeed be said to begin with the Good (taking this to be the same concept as that of the best), but we should surely hasten to add, ‘but only in relation to consequences or states of affairs, not, for instance, in relation to good agents, or living well’. And even then, we shall not be able to go on to say that most versions which, in this sense, ‘begin with’ the Right would have to be  versions of what Frankena calls ‘extreme act-deontology[2]’ which (I suppose) specify a right action as one which just is right.

 

·          아마도 앞으로도 그러겠지만, 이 말 참 많이 나왔다. 대문자로 되어 있는 것은 공리주의적으로 으로 그러나 덕에 관련해서는 좋음으로 했다. Living well 의 경우는 여전히 확실치 않다. 훌륭한 삶, 잘 사는 삶, 좋은 삶..중 하나일 것 같은데 딱 하나를 고르지 못하겠다.

 

·          밑줄 친 부분은 영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 의미를, 텍스트의 의미 혹은 배경지식이 달려서 고민했던 문장이다. 지금 저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여러 번 그랬다. 위에서 state of affairs 라는 말이 나와서 그 말에 도움을 받고 그저 is 를 살려 주기는 했는데, 옳은 행위란 그저 옳은 (이제 막 떠오른 생각인데, 아무래도 단지를 그저, 지극히 정도로 바꿀 걸 그랬나보다) 행동이라니.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게 명사가 형용사 (서술어) 로 정의될 수 없다는, 그런 반론을 깔고 있는 것일까..

 

·          한 가지 더, go on to say 도 사실 따지고 보면 중의적일 수 있지 않나 싶었다. 계속 주장하다, 주장을 계속해 가다. 나는 처음엔 앞을 썼다가 문맥 상 후자가 맞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          주의 처리는 가급적 손 많이 대지 않기로 했다. 제시된 책의 제목을 다 우리 말로 옮겨 보려다가 포기했다.

  • it is possible that too slavish a reliance on this slogan contributes to the belief that virtue ethics cannot provide its own specification of right action. For many who rely on it go on to say, ‘Utilitarianism derives the concept of the Right from that of the Good, and deontology derives the Good from the Right; but how can virtue ethics possibly derive the Good and the Right from the concept of the Virtuous Agent, which it begins with?’ Now indeed, with no answer forthcoming to the questions ‘Good what?’ Right what? I have no idea. But if the question is, ‘How can virtue ethics give an account of right action in such a way as to provide action guidance? The answer is easy. Here is its first premise.

 

·          여기 해석할 때는 재미있었다. 따지기의 시작이 어떻게 전개될 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몇 달 전에 읽어서 까먹었다고 변명할 수밖에;;;) derive 의 경우 이끌어내다로 했다가 아무래도 이런 말에는 철학과적 용어가 따로 있을 것 같아서 사전 다시 보고, 추론 발견, 그걸로 했다.

 

·          노래는 아까 머리 싸맨 forge ..link  에서 개념이 하도 나오길래 생각나서 들었던 곡.

 

·           

·          그림은 living well 을 이미지 검색하면 뭐가 나오나 혹시 이미지를 몇 개 보다 보면 감이 더 오지 않을까 해서 열쇳말을 넣었을 때 나온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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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pose an act utilitarian began her account of right action as follows:

 

어느 행위 공리주의자가 옳은 행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을 시작했다고 가정해 보자.

 

P.1. An action is right iff it promotes the best consequences.

 

                어떤 행위는 행위의 결과가 최선이 되도록 기여하는 경우에만 옳다.

 

This premise provides a specification of right action, forging the familiar act-utilitarian link between the concepts of right action and best consequences, but gives one no guidance about how to act until one knows what to count as the best consequences. So these must be specified in a second premise, for example:

 

전제는 옳은 행위 최선의 결과 라는 개념 사이에 익히 알려진 행위-공리주의적 연관을 만들어 내면서, 옳은 행동을 규정하고 있으나, 무엇을 최선의 결과로 봐야 하는지를 알기 전에는 어떻게 행동 해야 하는지에 관해 아무런 지침도 주지 못한다. 따라서 개념들은 번째 전제에서 반드시 보다 구체적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P.2. The best consequences are those in which happiness is maximized-which    forges the familiar utilitarian link between the concepts of best consequences and         happiness.

 

P.2. 최선의 결과란 행복이 최대화 되는 결과이다. –이것은 최선의 결과 행복  이라는              개념 사이에 친숙한 공리주의적 연결고리를 만들어 낸다.                    

 

Many simple versions of deontology can be laid out in a way that displays the same basic structure. They begin with a premise providing a specification of right action:

 

의무론의 여러 단순한 형태들을 이와 동일한 기본 구조로 나타내 보일 있다. 이론들은 옳은 행위를 규정하는 하나의 전제에서 시작된다.    

 

P.1. An action is right iff it is in accordance with a correct moral rule or principle.

 

어떤 행위는 옳은 도덕 규칙 또는 원칙에 준거하여 행해지는 경우에만 옳다.

 

Like the first premise of act utilitarianism, this gives one no guidance about how to act until, in this case, one know what to count as a correct moral rule (or principle). So this must be specified in a second premise, which begins

 

행위 공리주의의 번째 전제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전제 또한, 경우, 무엇을 옳은 도덕 규칙 (또는 원칙)으로 간주해야 하는지를 알기 전에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관해 아무런 지침도 주지 않는다. 따라서, 전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번째 전제에서 반드시 보다 명확히 정의되어야 한다.       

 

P.2. A correct moral rule (principle) is one that …

and this may be completed in a variety of ways, for example,

 

어떤 옳은 도덕 규칙 (원칙) 이란

그리고 전제는 여러 갈래로 완성될 있다. 예를 들어,

 

(1)                          … is on the following list—(and then a list follows, perhaps completed with an ‘etc.’), or

(2)                          … is laid down for us by God, or

(3)                          … is universalizable/a categorical imperative, or

(4)                          … would be the object of choice of all rational beings,

 

and so on.

 

(1)     다음의 목록을 따르는 (그러면 뒤에 목록이 나오고, 아마도  기타 등등으로 끝날 것이다.), 또는

(2)     신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 또는

(3)     보편화될 있는 /정언명령, 또는

(4)     모든 이성적 존재의 선택 대상이 되는 ,

 

기타 등등.

 

 

 

 

 

 

Although this way of laying out fairly familiar versions of utilitarianism and deontology is hardly controversial, it shows that there is something wrong with an over-used description of them, namely the slogan, ‘Utilitarianism begins with’ (or ‘takes as its fundamental concept’ etc.) ‘the Good, whereas deontology begins with the Right.’[1] If the concept a normative ethics ‘begins with’ is the one it uses to specify right action, then utilitarianism might indeed be said to begin with the Good (taking this to be the same concept as that of the best), but we should surely hasten to add, ‘but only in relation to consequences or states of affairs, not, for instance, in relation to good agents, or living well’. And even then, we shall not be able to go on to say that most versions which, in this sense, ‘begin with’ the Right would have to be  versions of what Frankena calls ‘extreme act-deontology[2]’ which (I suppose) specify a right action as one which just is right.

 

이러한 방식으로 널리 알려진 공리주의와 의무론의 진술들을 소개하는 것에 어떤 논쟁의 소지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이론들에 관해 어떤 가지의 서술, 다시 말해 공리주의는 ’ (the Good) 에서 시작되는 반면 (또는 그것을 기본개념으로 간주하는 반면 등등) 반면 의무론은 옳음’ (the Right) 에서 시작된다 구호를 남발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음을 보여 준다. 만일 어느 규범 윤리학 이론의 시작이 되는개념이 옳은 행위를 정의하기 위해 사용되는 유일한 개념이라면 실제로 공리주의는 에서 시작된다고 ( 개념을 최선이라는 개념과 동일하게 간주한다고) 생각될 있을 지도 모르겠으나, 우리는 반드시 하지만 좋음 [] 다음 , 예를 들면 좋은  행위자 혹은 사는  관련된 좋음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나 상태에 관련된 좋음 [] 이라는 말을 서둘러 추가해야 한다.  그러나 심지어 경우에서조차, 지금 이런 관점에서, ‘옳음에서 시작되는 대부분이 프랑케나가 극단적 행위-의무론이라 칭한 이론, (추측하건대) 옳은 행위는 단지 올바른 상태의  어떤 행동 이라고 정의하는 그런 이론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해 나갈 수는 없을 같다.

 

And if the slogan is supposed to single out, rather vaguely, the concept which is ‘most important’, then the concepts of consequences or happiness seem as deserving of mention as the concept of Good for utilitarianism, and what counts as most important for deontologists (if any one concept does) would surely vary from case to case. For some it would be God, for others universalizablity, for others the Categorical Imperative, for others rational acceptance, and so on. (Should we say that for Kant it is the good will, or the Categorical Imperative, or both?)

 

그리고 만일 구호가, 다소 모호하지만, ‘가장 중요한개념을 골라내야 한다면, 결과 행복 이라는 개념들은 공리주의의 the Good 관련된 개념으로서 언급될만하다고 생각되며, 의무론 경우에는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고려될만한 것은 (만약 하나여야 한다면) 분명히 경우마다 다를 것이다. 누구에게는 그것은 신일 것이며, 다른 이들에게는 보편성, 정언명제, 이성적 수용성, 등등 것이다 (칸트에게 그것은 의지, 혹은 정언 명제, 아니면 양자 모두라고 말해야 할까?)

 

                It is possible that too slavish a reliance on this slogan contributes to the belief that virtue ethics cannot provide its own specification of right action. For many who rely on it go on to say, ‘Utilitarianism derives the concept of the Right from that of the Good, and deontology derives the Good from the Right; but how can virtue ethics possibly derive the Good and the Right from the concept of the Virtuous Agent, which it begins with?’ Now indeed, with no answer forthcoming to the questions ‘Good what?’ Right what? I have no idea. But if the question is, ‘How can virtue ethics give an account of right action in such a way as to provide action guidance? The answer is easy. Here is its first premise.

 

이런 구호에 대한 맹목적인 의존이 다음의 믿음, 윤리학은 옳은 행위에 관한 자기 고유의 정의를 내릴 없다는 믿음에 일조한다는 것은 가능한 주장이다. 구호를 믿는 다수는 지금도 계속해서 공리주의는 개념에서 옳음, 의무론은 옳음에서 개념을 추론한다. 그러나 윤리학은 어떻게 자기 이론의 출발인 덕이 있는 행위자 개념에서 선과 옳음을 추론해 있는가?’  라고 주장한다. 지금으로서는, 선한 무엇?’ ‘옳은 무엇?’ 관해 아무런 답변도 예정되어 있지 않은 조건에서는, 나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생각할 없다. 그러나, 만약 질문이 행위 지침을 제시하기 위한 방도로써, 윤리학은 옳은 행위에 관해 어떤 설명을 놓을 있는가?’ 라면 답은 간단하다.  여기 윤리학의 번째 전제가 있다.

 



[1] For a particularly illuminating critique of Rawls’s distinction, see G. Watson, ‘On the Primacy of Character’ (1990). See also Hudson, ‘What is Morality All About?’, (1990) and Herman, The Practice of Moral Judgment, Ch. 10, who both challenge the slogan in relation to Kant’s deontology. .롤스의 구분에 관한 특히 명확한 비판으로는 왓슨의‘On the Primacy of Character’ 를 볼 것. 또한 허드슨의 What is Morality All About?’ 헤르만의The Practice of Moral Judgment  10장을 볼 것. 두 사람은 모두 칸트의 의무론에 관련된 구호에 도전한다.

[2] W. Frankena, Ethics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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