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이젠 어느정도 야간자율학습에 익숙해져 그 지루하고 긴 시간을 이겨내는 법 정도는 습득했다. 졸음이 쏟아져 주체를 못하겠다던가 마땅히 할 공부가 없어(?) 지겨움에 몸부림을 친다던가 하는 일도 차츰 줄어갔다. 선생님들은 초장에 아이들의 기를 꺾으려고 무던히도 매서운 감독관을 자처하셨지만(몇반 몇반 남학생들이 야자시간에 떠들고 만화책보다 과도하게 얻어터지는 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려댔으나)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나의 선생님들의 매의 눈에 걸릴만한 건더기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내가 머릿속에서 나혼자 100분 토론을 즐기는 중인지 트로트 메들리를 부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였으니까
반 아이들과도 어느정도 친해져 마치 백만년 전부터 친구였던양 다정하게 어울리고 재잘재잘 떠들어 댔지만 쉬는 시간이외에는 비록 선생님이 코배끼도 안보인다 할지라고 완전 모르는 사람들인 모양 처다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특별히 괴롭히는 아이가 있지도 않았고...(물론 얼마지나지 않아 나를 문던히도 괴롭히던? 아이가 생겨났지만...) 아무튼 이만하면 수월하다고 생각하던 고등학생의 생활은 그리 길게 가지못했다. 내 인생이 그렇지 뭐.. 미나리 개나리..
입학식 이 후 첫 전체조회가 시작된 월요일...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을 열심히 경청하는 척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이상한 눈길이 느껴진다. 뭐지? 초등학교 동창녀석과 그 앞에 있는 녀석이 나를 가르키며 뭐라고 수근대다가 내가 쳐다보자 아주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든다. 뭐... 뭐임? 중학교때 길거리에서 여러번 마주쳤으나 한번도 아는 척도 안하던 네가.. 무슨 이산가족을 본 듯 갑작스레 친한 척? 난 얼굴에 오만상을 지으며 '뭐 어쩌라구? 왠 친한척?'라는 신호파를 보내며 싸늘한 눈길 한 번 날려주었다. 뭔가 찝찝한 기분을 간직한 체... 조회가 끝나고 한반한반 교실로 돌아가고 드디어 끝에서 두번째 반인 우리반도 교실로 돌아가라는 호령이 떨어졌다. 예~예~ 가라고 했으면 가야지요.. 오늘도 이렇게 지겨운 월요일이 시작되는 구나 하며 3층을 향해 힘겨운 한발 한발을 계단 하나하나와 만남&이별을 하고 있는데 우리반보다 먼저 들어간 2반 녀석이 체육복을 입고 반대로 내려오고 있었다. 어떤 엉쁜 여학생과 함께.. 둘 다 출신 학교가 달라 이름도 몰르는 타인이였는데.. 그랬는데.. 그 녀석 나를 슬쩍 보더니 이런 괴변을 늘어 놓는다.
"쟤가 여자탈을 쓴 남자라며?" "몰라~ 머리가 매우 짧은 거빼곤 그런거 모르겠는데?" "그래?여자얘들은 모르는 구나, 우리반엔 소문 다 났어. 쟤랑 같은 초등학교 나온 얘들이 그러던데? 쟤 건들이지 말라구"
이게 뭔 호박잎쌈 목구멍에 막히는 까슬까슬한 소리람? 아.. 입학한지 일주일..아.. 참자.. 참고 올라가자. 못들은 척 하자. 아니 난 아무 소리도 못들었다.. 못... 못... 못듣긴 뭘 못들어! 생전 처음 보는 녀석이 함부로 내 이야기 (내 이야기? 아니 이러면 인정하는 꼴이잖아!)아니! 나와 관련된 것만 같은 근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야! 너!" 이놈의 성격.. 이 말과 동시에 이미 나의 눈은 뒤집혔고 이성은 안드로메다를 향해있다. "너 내가 여잔지 남잔지 봤어? 누가 그런 헛소리 나불대고 다녔는지 말해! 그렇게 남 이야기 시시콜콜하게 돌리고 다니는 너는 기집애 같다고 소문 좀 내줄까?" 물론 성별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저 녀석과 내가 육탄전으로 간다면 난 죽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겁을 상실한 이 깡다구.. 아 제발 누가 내 입좀 막아줘요.. "넌 기집애냐고! 함부로 막말하지 말고 다녀라. 그리고 어떤 새끼가 그런 말했는지 몰라도 걸리면 뒤진다고 쫌 전해줄래?!" 녀석은 다소 놀안 표정이였지만 그 옆에 있던 여학생은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남학생의 몸은 거의 터미네이터 수준이였으니까. 2년 후 이학생은 전교 체육부장이 되었다...ㅎㄷㄷ) 하지만 놀람도 잠시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뭔가 수긍이 된다는 듯한 눈빛을 주고 받으며, 붉어진 얼굴로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뭐지? 할말을 했을 뿐인데.. 왠지 더 큰 호박잎 쌈으로 아까 막힌 호박잎 쌈을 뚫어보려는 무식한 행동을 한 것처럼 답답한 가슴은...
그 답답함의 결과는 아니나 다를까... 이번 사건을 지켜봤던 무수한 인파속에서 '쟤가 남자라며?'의 단어는 '남자같다며?'수정된 체 혹이 하나 붙어 '남자같은데, 성격이 무지 더럽더라. 완전 핵폭발 수준이던데.'로 부풀려져 '이번 신입생중에 몇반의 누가누가 이쁘다더라.'를 능가하고 일파마파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