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하는 미술관 - 내 삶을 어루만져준 12인의 예술가
송정희 지음 / 아트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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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내 삶을 어루만져준 12인의 예술가’와 같이 갤러리스트인 저자가 애호하는 12인의 여성 미술가를 소개하는 책이다. 여기서 소개하는 12인의 미술가는 조지아 오키프, 마리 로랑생, 천경자, 수잔 발라동, 키키 드 몽파르나스, 카미유 클로델, 판위량, 마리기유민 브누아, 프리다 칼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케테 콜비츠, 루이스 부르주아. 원래 마리 로랑생을 다룬 책을 찾다가 이 책을 알게 되었고, 읽어보니 글의 내용이 알차고 깊이 있어 전체를 다 읽게 되었다. 천경자, 카미유 클로델과 프리다 칼로 정도가 그나마 들어본 이름이고 후자 두 명의 간단한 정보만 기존에 접했을 뿐 나머지 미술가는 생면부지다.

 

이 책이 동종의 다른 미술 입문서와 구별되는 특색은 저자의 약력이다. 보통 미술 관련 서적은 화가 또는 큐레이터 등 미술 전공자가 집필하게 마련이다.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 감상, 기법 등 전문적 영역은 문외한으로서는 접근에 한계가 있어서다. 저자 송정희는 문학 전공자로서 미술 전시 및 기획에 관심을 가져 갤러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이 책의 글에서 짙은 문학적, 인문학적 이해와 해석이 두드러진 건 이러한 배경 때문이고 그것이 이 책을 더 돋보이게 하고 있다.

 

저자는 12인의 예술가를 네 가지 키워드로 구분하여 배치한다. ‘아름다움, 그 너머’, ‘뮤즈에서 예술가로’, ‘몸을 통해, 몸을 위해’, ‘회복과 치유의 약속’이 그것이다. 예술가로 아름다움을 천착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아름다움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이들로 특히 조지아 오키프, 마리 로랑생, 천경자를 다룬다. 추상표현주의의 개척자 오키프는 꽃, 짐승 뼈 등 그동안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사물을 확대함으로써 그로테스크한 신비로움을 일깨운다. 그녀의 말처럼 본 것을 그렸을 뿐이지만, 그것을 제대로 보고자 한 사람은 이전에 아무도 없었다. 마리 로랑생에 대해서는 건너뛴다. 천경자의 예술과 굴곡진 삶을 처음 알게 되었다. 한국적인 것과 이국적인 것의 조화를 꿈꾼 그녀의 미술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하더라도 위작 논란으로 한국을 떠나게 된 그녀의 말년이 안타깝다.

 

오키프는 사막에 나뒹구는 하찮은 것들, 평범한 것들, 작은 것들, 버려진 것들을 크게 그렸다. 사람들은 그것을 추상이라고 했고, 그녀는 “그저 본 것을 그렸을 뿐”이라고 했다. (P.35)

 

수잔 발라동, 키키 드 몽파르나스, 카미유 클로델을 다룬 장은 남성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모델 역할을 넘어서 스스로 예술가의 고지로 올라선 인물을 다룬다. 이 점에는 앞에 나온 조지아 오키프도 마찬가지다. 수잔 발라동은 르누아르, 모딜리아니, 드가, 툴루즈 로트레크 등 화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델이다. 키키는 사진작가 만 레이, 화가 후지타의 모델이자, 댄서와 가수로 ‘몽파르나스의 여왕’으로 불렸다. 카미유 클로델은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인 동시에 자신 또한 뛰어난 조각가였다. 피사체로 그치지 않고 자신 또한 예술가로 우뚝 서기를 고대하였지만, 정신병원에서 불행한 삶을 마감한 클로델은 그나마 현대에 재평가되고 있다. 발라동과 키키, 특히 여체를 이상화하지 않고 실제적인 모습으로 그려낸 발라동은 아쉽다.

 

인상주의 화가들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부풀리거나 포장하지 않았다. 그녀의 자화상은 강인하고 굴곡진 그녀의 내면을 현실적인 표정으로 살려냈다. (P.112)

 

수잔 발라동이 여성 초상화와 누드화를 많이 그렸지만, ‘몸을 통해, 몸을 위해’ 장에서 소개하는 화가는 판위량, 브누아, 프리다 칼로다. 판위량은 삶 자체가 예술과 맞물려 있다. 창기 출신의 여성, 중국인이지만 중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유럽에서 방랑하며 정착하지 못한 미술가. 영원한 사랑과 존경의 대상인 판찬화와 재회하지 못한 채 끝끝내 떨어져 죽음에 이르는 불행한 삶. 벌거벗은 자신의 몸을 통해 인간과 여성을 끊임없이 사유한 예술세계.

 

판위량은 자국에서 쫓겨난 디아스포라 예술가였고, 그렇다고 유럽인이나 미국 모더니즘의 틀 안에 자신을 맞출 수도 없었던 경계인이었다. 그녀는 중국에서도 유럽에서도 영원한 타자였다. (P.187)

 

프리다 칼로와 남편 디에고, 둘의 만남은 천행인가 불행인가 쉽사리 판단하기 어렵다. 프리다를 괴롭힌 디에고의 행동만을 따져보면 만나서는 안 될 인연이겠지만, 그것이 결국 프리다의 예술로 빚어졌음을 고려한다며. 예술과 인생은 온전히 양립하기 어렵다. 마리기유민 브누아는 신고전주의 화가로서 역사화, 초상화, 자화상 등 여러 작품이 있지만 이 책은 <마들렌의 초상>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19세기 초에 그린 흑인 여성의 상반 나신을 통해 단순히 예술적 아름다움을 넘어서 내밀하게 잠재한 욕망, 편견과 환상을 벗겨내는 저자의 문장은 인문학적 해석의 장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당시 남성 예술가들과 문학가들에게 깊이 스며들어 있던 성적 욕망은 오리엔탈리즘과 아프리카에 대한 환상으로 나타났다. 이런 욕망과 환상이 초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 개의 시선 사이에 촘촘히 개입하고 있다. (P.202)

 

마지막으로 ‘회복과 치유의 약속’이라는 주제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케테 콜비츠, 루이스 부르주아는 앞선 미술가들에 비하면 20세기로 넘어서는 현대 예술가다. 각각 행위예술, 판화, 설치작품이라는 비주류 장르에 천착하여 일가를 이루고 미술계의 주요 일원이 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예술가가 여기 있다>, <리듬 0>, <연인들, 만리장성 걷기> 등의 퍼포먼스는 인상 깊고 때로는 감명 깊지만, 여전히 행위예술 자체는 인물, 시간, 공간의 기억에 의존하기에 당대성을 넘어서기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 <예술가가 여기 있다>를 제외하면 오히려 고행에 가까운데, 고통을 넘어선 너머를 지향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콜비츠는 빈곤, 전쟁, 고통을 직시하고 고발함으로써 예술을 향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상류층과 부르주아를 위한 예쁜 객체만을 과연 예술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우리네 삶은 행복보다는 고통과 불행이 압도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말이다. 그녀의 <판화> 연작, <피에타> 등은 예술의 다른 소명과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그것이 민중미술에 영향을 미쳤음은 당연하리라. 루이스 부르주아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거대한 설치작품 <마망>은 책에 실린 조그만 사진이 아니라 실물을 봐야 비로소 체감할 수 있을 것이며, 바느질 작업의 산물도 마찬가지로 사진과 글로는 공감에 한계가 있다. 다만 저자가 던진 질문은 하나의 숙제임에 공감한다.

 

예술과 비예술의 아슬아슬한 경계, 모호한 섹슈얼리티, 다중 정체성을 내포한 그녀의 말년 바느질 작업은 여전히 우리가 지금도 물어야 할 질문이자 과제로 남아 있다. (P.303-304)

 

저자가 여성 미술가만 소개한 것은 동성 예술가의 삶과 예술세계가 저자에게 더 와닿아서라고 밝힌다. 따라서 직접적 의도는 아니더라도 여성주의적 시각이 내용과 글에 일부 반영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책을 읽어 나갈 필요가 있다. 판위량을 창기의 신분에서 구제하고 결혼한 후 예술가로서 대성하도록 물심양면의 지원을 한 판찬화를 제외한 대다수 남성 인물은 그리 긍정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있음도. 오키프와 스티글리츠, 로랑생과 아폴리네르, 클로델과 로댕, 프리다와 디에고, 마리나와 울라이 등을 보면 여성 예술가에게 남성과 사랑은 불타오르는 예술의 동력인 동시에 자신을 갉아먹는 촛불과도 같다.

 

알지 못하였던 좋은 미술가를 여럿 알게 된 것이 이 책에서 얻은 큰 소득이다. 꼼꼼하고 차분하게 써 내려간 저자의 문장은 인문학적 글쓰기의 미덕과 결부하여 예술가와 예술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반복해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은 결국 미술가와 작품에 대한 일반적 소개를 넘어 해당 인물의 삶과 예술의 진지한 관찰과 해석이 주는 문장의 맛을 깊이 음미하기 위해서다. 개별 미술가에게 할당된 적은 분량의 글에서도 핵심적 내용을 충분히 전달하고 있으며 나아가 소개된 예술가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를 불러일으켜 추가로 지적 욕구마저 생기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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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명 : 마리 로랑생 회고전 - 무지개 위의 춤

기간 : 2026.4.10-8.23

장소 : 마이아트뮤지엄


관람일자 : 2026년 5월 29일(금)


* 관람평

광고 포스터가 눈길을 끌어서 잘 알지 못하면서 덜컥 예매하였다. 작가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기대감을 지닌 채 관람장에 들어선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는데 전시환경은 괜찮은 편이었다. 두드러진 불편 한 가지만 언급하자면 작품 옆에 바로 작품 설명이 없는 경우가 제법 많다는 점이다. 전시를 위한 최선의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설명이 한군데 몰려 있어 내가 관람하는 그림이 무언지를 곧바로 확인이 어렵다.


마리 로랑생 뮤지엄과 협력하여 100여 점을 전시하였다고 하는데, 확실히 대다수의 대표작을 한자리에서 일별할 수 있어 좋았다. 작가의 연대순으로 세탁선의 여인, 잊혀진 여인, 무지개 위의 춤, 장미와 여인의 네 섹션으로 구분하여 작품 이해를 돕고 있다. 도판을 통해 익히 본 그림이 많지만 실제 작품을 눈으로 보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실관람에서 개별 작품의 크기를 비로소 체감할 수 있으며, 재질과 표현방식에 따른 차이도 확연히 구분할 수 있다.


기억에 남는 그림들을 두서없이 나열하면 <가구가 딸린 렌트하우스> <우아한 무도회 또는 시골에서의 춤> <종려나무 아래의 젊은 여인> <춤> <성 안에서의 생활> <초상화> <기타를 든 두 소녀> <마담 앙드레 그루의 초상> <무희들> <음악> <세 명의 젊은 여인들>이다. 대체로 큰 사이즈의 그림이 주는 강렬한 인상이 여운을 남긴다.


마리 로랑생의 작품 특징, 즉 여성들의 세계를 주로 대상으로 삼았고, 파스텔톤 색상을 즐겨 사용하였으며, 그림 속 여성들은 현실세계가 아닌 신화와 환상 속 여인 같은 이미지를 지니는 점이 작품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언뜻 비슷하면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자의 개성을 찾아볼 수 있다.


익히 알려진 회화 외에도 삽화가로서의 면모도 들여다볼 수 있다. <가든파티> <춘희> 등에 수록된 석판화 등을 소개하고 있다. 유익한 동시에 흥미로운 전시회다. 가정의 달 이벤트로 엽서 한 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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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비밀편지 - 국왕의 고뇌와 통치의 기술 ㅣ 키워드 한국문화 2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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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중흥을 일구었던 영조와 정조의 찬란한 시대가 갑작스럽게 스러진 후 조선왕조는 빠르게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때 이른 정조의 죽음으로 인한 어린 순조의 즉위는 왕권 약화와 세도정치가 발호한 빌미가 되었다. 급격한 정치적 격변을 음모론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정조 독살설을 주장하였고 꽤 많은 지지층을 모았다. 이를 다룬 소설과 영화도 등장하여 대중의 관심을 끌 정도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조와 노론 벽파는 팽팽한 대립 관계다. 왕이지만 전권을 휘두를 수 없고, 파당을 형성하여 왕권을 능히 견제할 수 있는 신하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동정하는 무리와 옹호하는 무리의 당쟁. 정조의 재위는 왕권의 기반을 강화하고, 노론 벽파를 견제하면서 왕조를 재건하려는 분투의 기간이었다면 과장일까.

 

정조의 어찰과 심환지의 문집, 그리고 <정조실록>을 비롯한 정사, 이 세 가지 사료를 견주어볼 때, 정조는 공식과 비공식의 두 가지 경로를 이용하여 심환지와 접촉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P.58)

 

2009년에 공개된 정조의 어찰은 그런 면에서 역사 이해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정조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350여 통의 비밀편지. 그것은 단순한 안부 묻는 성격을 넘어서는 서신 정치 또는 공작 정치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정조는 국정의 시시콜콜한 사항을 사전에 심환지에게 묻거나 본인의 뜻을 전하면서 따르도록 요구하거나 다른 신하들의 행위를 날카롭게 평가한다. 정치, 인사 관련 주요 현안에 대해 누가 어떤 식으로 주장을 펼치도록 조정한 흔적도 역력하다. 배우를 선발하고 연기와 대사를 배정하여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무대를 지휘하는 연출자의 모습이 바로 정조다.

 

여기서 우리의 역사 이해는 혼란스럽다. 비밀편지가 집중된 정조 시대 후기의 공식 사료의 내용을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 것인지. 심환지는 정조의 어명을 거스르고 비밀편지를 파기하지 않았다. 심환지 외에 얼마나 많은 당대 신하와 정조가 비밀편지를 주고받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공식 사료 독해보다는 이면의 정치 역학이 본질에 가까움을 우리는 계속 의심해야 하게 되었다.

 

정조가 보낸 비밀편지는 자신을 독살했다고 오해할 만큼 적대적 관계로 알려진 심환지를 적극적으로 회유하고, 막후에서 비밀스런 지시와 조정을 주도하는 노련한 정치가의 수완과 동태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P.11)

 

이 책에 따르면 비밀편지는 내용상으로도 다방면의 해석을 요하는 흥미로운 사항을 많이 포함하며, 문장 면에서도 흥미로운 대목이 눈에 띈다. 짧은 시간을 내어서 급하게 써 내려간 글이다 보니 수사성을 배제하고 직설적인 문체를 사용하고 문체반정의 당사자인 자신의 공식 입장과는 다른 소품체의 문장을 구사했다고 한다. 이두식 표기의 사용은 물론 한글 어휘를 그대로 노출하는 등 구어적 표현도 드물지 않다.

 

이 비밀편지의 공개를 통하여 우리는 모범적 군주 정조가 아닌 노회한 정치가 정조의 이미지를 새로이 떠올리게 되었다. 신하들을 인형처럼 자유자재로 조종하고자 하였던 정조. 공식 석상에서는 노론 벽파에게 공격적으로 보였던 이면에는 이처럼 어르고 달래면서 공유하는 방식으로 정국을 풀어나갔던 것이다. 임금과 어찰을 교환한다는 것은 신하로서는 무한히 영광스러운 일이며 자신이 특별대우를 받는다는 의미일 테니 더더욱 임금에게 협조적으로 되기 마련일 것이다.

 

그런데 심환지는 어명을 어기면서까지 어찰을 보관하였던 것일까? 어쩌다 한두 통이 아니라 거의 전부를 수신일시까지 표시하며 일목요연하게 남겨둔 까닭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단순히 어찰의 영광을 오래 보존하려는 목적이 아님은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면 다른 정치적 의도를 지닌 것으로 봐야 하는데, 여기서 심환지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님을 알게 된다.

 

정조와 노론 벽파는 결코 한배를 탈 수 있는 정치적 동지는 아니다. 정조는 심환지를 통하여 벽파를 통제하려 하였고, 심환지는 정조의 비밀명령을 따르고 호응하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여차하면 이를 뒤집을 수 있는 물증을 손에 쥐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고 보면 어찰에서 정조가 심환지의 무심함과 부주의함을 수차 지적하고 있음은 심환지가 정조가 원하는 그대로 항상 따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봐야 할 것이다.

 

<어찰첩>에 보이는 정조의 성격은 다혈질적이고, 흥분을 잘하며, 조급하다. 정조는 이러한 자신의 성격을 태양증이라고 자체적으로 분석했다. 그 때문에 화병도 자주 나고 가슴의 심한 통증도 발생한다고 진단했다. (P.97)

 

이 어찰을 통해 저자는 정조의 사망 원인이 독살보다는 자연사, 즉 병사에 가까움을 짚는다. 편지에서 정조는 자신의 건강 상태가 나쁨을 여러 차례 언급하며, 병세를 스스로 진맥까지 하고 있다. 사십 대 중반이라면 당대 기준으로는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다. 임금으로서 국정을 총괄하고, 반대파 신하들과 대립하는 가운데 화성 신축과 문예부흥을 끌어내는 다사다난한 과업을 수행하면서 받는 스트레스 또한 격심하였을 것이다. 타고난 기질과 군주 지위가 갖는 막중함이 결부되어 정조의 병을 심화시킨 것이 아니었을까. 이 어찰의 존재로 독살설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저자의 주장대로 한층 설득력을 가지려면 보다 명백한 근거 제시가 필요할 것이다.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가 굳이 독살을 감행할 명분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정조의 비밀편지는 조선 후기 우리가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과 사고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이제 우리는 정조 시대 공식 사료가 기록하는 역사상의 사건을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려워졌다. 정조의 진정한 의도는 공식 사료에 있을까 아니면 공개 또는 비공개된 비밀편지에 숨어 있을까. 흥미로운 동시에 더 깊은 노력과 연구를 요구하는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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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기보다 잊혀졌어요
마리 로랑생 지음, 이혜연 편역 / 수오서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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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로랑생 전시회에 가기에 앞서 화가의 삶과 그림 세계를 알고 싶었다. 전시회 설명이 다소 부족하다는 평도 있었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이 책은 시중에 유통중인 마리 로랑생 관련 유일한 서적으로서, 그녀의 유일한 자전적 저서를 편역하고, 95점의 대표작 도판을 수록하였다고 한다.

 

이 책에 실린 마리 로랑생의 글은 그의 첫 책이자 유일한 저서인 <밤의 수첩>을 편역해 구성했음을 밝힌다. <밤의 수첩>에는 마리 로랑생의 산문, 시, 단상들이 담겨 있다. (일러두기)

 

이 책의 장점은 화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과 상대적으로 큰 판형과 고급용지로 담은 풍부한 도판이다. 단점은 기본적 개요 외에 수록작에 대한 별도의 설명 없이 도판이 연대기적으로 나열되어 있어 본문과 그림이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이다.


처음 9면에 걸쳐 그녀의 생애를 소개한 글을 담고 있는데,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이었고 야수파와 입체파의 득세하던 사조 속에서 자신만의 독자적 화풍을 유지 발전하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운 나쁜 결혼으로 뜻하지 않게 망명 생활을 겪어야 했으며, 디자이너 니콜 그루와의 동성애적 동반자 관계를 장기간 유지하였음도 알게 되었다. 여기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아폴리네르의 유명한 시 <미라보 다리>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말년의 그녀는 나치 정권에 모호한 입장을 취하여 전후 부역 판정을 받았으며, 무엇보다 유언이 가슴에 다가온다.

 

마리 로랑생은 서양미술사에서 흔히 남성의 관점에서 여성상을 그리던 관습에서 벗어나,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그들의 모습과 여성성을 담아낸 최초의 여성 화가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P.14)

 

그녀의 그림은 대부분 여성을 소재로 한다. 남성은 거의 배제되거나 개인적 친분이 있는 극히 예외적 존재만을 그렸다. 작품 속 여성은 남성의 시각과는 전혀 무관한 순전히 여성 화가의 시각에 비친 여성적 인상이다. 현실의 여성이라기보다 신화와 환상 속의 여인처럼 가볍고 투명하며 시공을 부유하는 듯한 가냘프고 섬세한 모습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육감적 여성은 너무나 거리가 멀다. 아폴리네르와 열정적 사랑과는 무관하게 그녀는 이미 동성애적 성향을 내재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여성 간의 편안하고 친밀한 분위기, 비슷한 취향과 부드러운 대화는 남성과의 관계에서는 좀처럼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그녀의 글의 도처에서 이를 찾을 수 있다.

 

연대순으로 수록된 그림을 보면 초기에는 입체파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1912년 <가구가 딸린 집>에서 비로소 그녀의 개성적 화풍이 펼쳐지기 시작함을 확인할 수 있다. 작품 속 여성은 검은 윤곽선으로 신체를 표현한 가운데 긴 팔과 긴 손가락, 날아갈 듯 발끝을 세우고 있다. 얼굴형도 뾰족한 인상을 주는 가운데 눈은 세부 묘사 없이 검정색만으로 그리고 있다. 주변에는 대체로 악기가 등장하고, 개 또는 말과 같은 반려동물도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후기로 가서는 검은 신체 윤곽선이 사라지고 얼굴형도 부드러워지며, 비교적 화려한 색도 간혹 사용하는 사례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한 눈에 봐도 마리 로랑생의 작품임을 알아 챌 수 있을 정도의 특색은 여전하다.

 

수록된 그림들 가운데 인상에 남는 작품을 두서없이 나열하면, <가구가 딸린 집>, <우아한 무도회 또는 시골 무도회>, <춤>, <조각배>, <삼미신>, <다이애나 여신>, <성의 삶>, <곡예를 하는 소녀>, <세 소녀>, <개가 있는 풍경>, <무희들>, <세 명의 젊은 여인>이다. <자화상>, <코코 샤넬의 초상>, <키스>처럼 대표작으로 알려진 그림은 그렇게 와닿지 않는다.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기보다 / 쫓겨났어요. /쫓겨났다기보다 / 죽었어요. / 죽었다기보다 / 잊혀졌어요. (P.84, 진정제)

 

이 책이 마리 로랑생의 화첩을 넘어서는 가치는 그녀 자신의 글을 담고 있어서다. <밤의 수첩>을 발췌 편역이기에 글의 온전한 모습을 알기 어렵지만, 그녀 스스로가 밝히고 있는 여성성의 의미, 아폴리네르와 관계와 일화, 어릴 적 아버지와 얽힌 육식 양 추억 등은 그녀 작품을 해석하는 단초 역할을 담당한다. 이 책의 표제도 그녀의 시에서 한 대목을 가져온 것이다.

 

<밤의 수첩>이 제대로 출판되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전기도 <마리 로랑생, 사랑에 운명을 걸고>라는 제목으로 역시 오래전에 나왔다가 단종되었다. 부록으로 연보가 실려 있는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어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1983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일본에서 마리로랑생미술관을 설립했다고 한다. 앞서 보았던 알폰스 무하도 그렇고, 일본의 문화적 저력을 다시금 보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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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김진환 비올라 독주회

일시 : 2026년 6월 2일(화) 19:30

장소 : 금호아트홀 연세

연주 : 김진환 (비올라), 서형민 (피아노)

프로그램

  - 브루흐, 콜 니드라이 Op.47

  - 힌데미트, 무반주 비올라 소나타 Op.25 No.1

  - 브리지, 생각 & 알레그로 아파쇼나토

  - 요크 보웬, 비올라 소나타 1번 C단조 Op.18


* 세줄평

비올라로 듣는 콜 니드라이는 다소 낯설다. 힌데미트의 소나타는 무반주라서 더욱 비올라의 음색을 더욱 잘 느낄 수 있는데, 마지막 악장을 생략하여 아쉽다. 후반부의 메인은 보웬의 소나타다. 처음 듣는 작곡가와 곡이다. 뭐랄까, 유머러스함과 진지함, 열정이 잘 조화된 작품으로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앵콜곡으로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이라 금상첨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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