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땅
존 뮤어 지음, 김수진 옮김 / 디자인이음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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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뮤어는 미국에서 국립공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의 노력 덕분에 요세미티, 옐로스톤 등이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그의 자연 에세이 10편을 수록하고 있다. 20세기 전후에 쓴 글이지만 여전히 신선함과 생동감이 넘친다. 그는 주로 미국 서부 지역에서 활동하였기에 이 책의 지역적 배경도 캘리포니아, 알래스카, 오리건, 워싱턴이 중심이 되며 동쪽으로는 옐로스톤과 유타주 정도까지다.

 

그의 글을 읽을 때 미리 유념할 점이 있는데, 일단 이 당시는 관광과 개발 등 인간에 의한 파괴 행위가 제법 있지만 현대처럼 대대적으로 본격화하기 이전이다. 뮤어는 문명이 거의 개입되지 않은 야생 상태의 자연과 동식물을 경험하였다. 알래스카와 요세미티 등과 관련해서 지구온난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뮤어가 경이롭게 발견하고 찬미하고 감동적으로 기술한 만년설과 빙하의 상당수는 사라지거나 멀찌감치 내륙으로 후퇴하였다. <글레이셔만 발견 이야기><알래스카 여행>의 여정을 구글 지도로 비교해 보면 그 역력함에 아련함을 느끼게 된다.

 

만을 둘러싸고 서 있는 산기슭과 다섯 개 거대 빙하의 웅장한 전면도 볼 수 있었다. 그중 가장 가까이 있는 빙하는 바로 내 발아래에 있었다. 내가 글레이셔만 전체를 조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얼음과 눈과 새로 만들어진 바위로 채워진 고독한 풍경. 그 어둠과 적막과 신비. (P.17, <글레이셔만 발견 이야기>)

 

다섯 개의 거대 빙하가 한 곳에 몰려드는 글레이셔만을 실제로 조망한다면 압도감에 사로잡히게 될 것 같다. 저자의 이름을 딴 뮤어 빙하가 가장 거대하다는데, 강이 아니라 호수의 느낌을 주는 빙하라니. 그조차도 옛날에는 만 전체가 하나의 거대 빙하였다니 사뭇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웅장함. 빙하라면 그린란드나 아이슬란드 이상의 그야말로 극지방에 가야 목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시애틀 지역을 여행할 기회가 생기면 해안선을 따라 글레이셔만 국립공원까지 올라가는 코스를 꼭 체험하고 싶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압도적인 자연풍광에 우선 매혹된다. 하지만 경치는 계속 보면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이때 동식물 등의 다채로운 식생이 뒤따른다면 금상첨화다. 요세미티의 곰, 시에라사슴, 더글러스청설모, 줄무늬다람쥐, 마멋. 오리건의 더글러스전나무, 고귀한 소나무 피너스 램버티아나 소개를 보면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이들 지역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주요 동물은 곰과 방울뱀인데, 인간에게 생명의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위험 동물이다. 하지만 뮤어는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하며,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 과장되었으며 서로 간 존중하면 그다지 위험 요소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뮤어의 글을 읽다 보면 때로는 여행 에세이 또는 가이드북의 인상을 받는데, 실제로도 그런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문장도 간혹 있다. 국립공원은 보호와 관광이라는 이중적 목적을 지닐 수밖에 없다. 자연보호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지역경제라든가 산업적 측면도 외면하기에 곤란하기에 적절한 관리 아래 이루어지는 여행 산업 발전을 위해 그가 에세이로 소개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알래스카 여행>, <옐로스톤 국립공원>이 전형적이며, <요세미티의 동물들><오리건의 숲과 동식물>도 다분히 목적성을 띠고 있다. 뮤어는 인간을 배제한 자연보호를 주창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중심의 자연관도 배척한다. <야생 양모>에 피력하였듯이 인간의 효용 관점에서 자연과 야생을 가치 판단하면 왜곡과 편향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현재의 문명이 가르치는 신조를 보면 세상을 특별히 사람이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이런 생각보다 문화와 야생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극복하기 힘든 장애도 없는 것 같다. (P.272-273, <야생 양모>)

 

자연 에세이에 인간적 요소가 추가되면 더욱 빛나게 된다. 저자가 <스무고개 골짜기>에서 자연의 세례를 받은 경험”(P.103)이라든가 리터산 등반 시 암벽에서 운명이 다할 것처럼 꼼짝 못 한 위험담(<가까이에서 바라본 시에라네바다 산맥>), 곰 및 방울뱀과 대치한 이야기 등은 재미와 흥미를 배가한다. ‘풀의 남자데이비드 더글라스 에피소드(<오리건의 숲과 동식물>)도 놓칠 수 없다. 파괴와 약탈의 시기에 그는 존 뮤어와 함께 아메리카 자체를 사랑한 사람이다.

 

현대의 문명인에게 자연과 야생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여가와 휴식, 모험과 체험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문명이 심화할수록 갖게 되는 파편화와 소외감을 치유하는데 자연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이 간섭하고 지배하지 않는 자연은 우주의 본원적 질서를 품고 있어서다. 뮤어는 이 점을 강조하고 역설한다. 국립공원 지정은 이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흙과 나무, 바위와 물, 공기와 햇살이라는 형상 안에는 본질적인 영적 세계가 감추어져 있다. 그러니 본질적이라 불리는 것들을 진정 본질적인 영적 세계로 이렇듯 일시적으로 표현한 것을 자세히 살펴보고, 이곳이 바로 천국이며 천사들이 머무는 곳임을 깨달으라고 말이다. (P.251, <옐로스톤 국립공원>)

 

이 책의 최초 정가 책정 근거는 무엇일지 궁금하다. 좋은 책을 독자에게 멀찌감치 떨어뜨리는 최고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반면 재책정된 가격은 가치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다. 지나친 양극단에서 적정성을 찾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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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아벨 콰르텟 베토벤 현악사중주 전곡연주 4

일시 : 2026년 2월 6일(목) 19:30

장소 :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연주 : 아벨 콰르텟

  - 윤은솔 (바이올린)

  - 박수현 (바이올린)

  - 박하문 (비올라)

  - 조형준 (첼로)


프로그램

  - 베토벤, 현악사중주 4번 C단조 Op.18-4

  - 베토벤, 현악사중주 16번 F장조 Op.135

  - 베토벤, 현악사중주 13번 Bb장조 Op.130

  - 베토벤, 현악사중주를 위한 대푸가 Bb장조 Op.133


* 세줄평

초기곡인 4번에 이어 마지막 현악사중주곡이 바로 연주됨에도 이질적임을 느끼지 못하는데, 16번에서 베토벤은 후기곡에서의 장대함과 심오함을 일부러 벗어던지고 해탈의 느낌을 자아낸다. 하이라이트인 13번과 대푸가를 듣고나니 대푸가를 피날레로 교체한 게 타당해 보인다. 맹렬한 현의 질주에서 나타나는 지극한 현대성을 당대 청중은 이해할 수 없었을 테니.

개인사로 마지막 여정을 함께할 수 없음이 너무나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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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의 노트 - 식물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
신혜우 지음 / 김영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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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다른 식물의 세계책들과 차이 나는 지점은 무엇보다 그림에 있다. 대개 글과 사진으로 구성되기 마련인데, 저자는 글과 그림으로 구성하며 해당 그림은 모두 저자가 직접 그렸다고 한다. 이건 저자가 식물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하여 가능하다. 그림이라고 해서 간단한 차원이 아니라 식물도감 수준의 정밀한, 그리고 과학적인 도해 작업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조형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보다 식물의 입장에서 지구에 생존하는 형태, 생태, 진화를 그림에 담습니다. 과학적인 훈련을 통해 식물에 대한 사랑을 조명한 것이 그림이지요. (P.8, 프롤로그)

 

예쁘고 세밀하게 그려진 식물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문득 그림이 더 컸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든다. 176면과 177면 사이 펼친 양면 가득 실린 녹나무 그림 같을 수는 없더라도 한 면 가득 커다랗게 그림으로 채웠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이건 순전히 개인적 욕심이다. 저자는 식물학자로서 대중이 잘 알지 못하는 식물의 다양한 생태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한층 클 것이기에 글도 놓칠 수 없을 테니.

 

식물에 대해 거의 무지에 가까우므로 소개된 식물 이야기는 생소하면서도 신기하다. 그나마 이름이라도 알고 있어 친숙하다고 착각했던 식물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생경한 면모가 있다는 점은 살짝 놀랄 정도다. 사람은 본성상 동물에 끌린다. 육식에 반대하는 채식주의자는 많지만, 식물은 마구 꺾고 자르고 뽑고 베도 되는 대상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좀처럼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우리에게 식물은 일상생활에서는 사물 또는 도구이며, 자연 속에서는 자원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저자는 식물이 생장과 번식을 위해 기울이는 엄청난 노력을, 한치라도 목적에 유리하도록 치열하게 탐색하고 적응하는 모습을 기술한다. 식물이라고 흔히 통칭하지만, 눈에 겨우 보이는 꽃가루와 작은 식물에서 거대한 나무에 이르기까지, 열대에서 극지방, 땅속과 지상에 걸쳐 생존하는 식물의 폭은 광대하다. 광합성을 하지 않는 기생식물과 식충식물처럼 동물성에 가까운 유형도 생존 가능성을 증가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하물며 식물이 품은 맹독에 이르러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제한된 분량에 다양한 식물을 소개하고, 다양한 식물의 면모를 기술하려다 보니 보다 깊숙한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한 점은 이 책의 태생적 한계다. 그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부족한 점과 마찬가지 연유라고 짐작한다. 저자는 단순히 식물의 생태를 독자에게 알리려는 목적보다는 이를 통해 식물의 삶을 이해하고 존중하도록 애쓰고 있다. 그래야 식물이라는 생명체를 무심코 가볍게 취급하는 관행을 줄일 수 있을 테니. 나아가 식물의 생태에서 지혜와 교훈을 얻기를 바라고 있다. 각 장의 매 편 말미에서 저자는 해당 식물들에서 얻을 수 있는 이러저러한 지혜를 우리네 삶에도 유추하고 적용하기를 요청한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이.

 

식물은 각자 자신에게 적합한 시간에 꽃을 피우고, 삶의 다음 고리로 연결해갑니다. 사람도 저마다 꽃을 피우는 시간이 다를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찾아올 수도, 어떤 사람은 늦게 찾아올 수도 있겠죠. 중요한 건 일찍 꽃을 피우는 것보다 나에게 맞는 시간에 꽃을 피우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아닐까요? (P.39, 이제는 꽃을 피울 시간)

 

몇몇 재밌고 신기한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현대에도 잘 살아남은 원시식물인 고사리, 미래의 사료와 환경 보전의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는 개구리밥, 솔방울 가습기의 놀라운 원리, 붉은색을 많이 띠는 가을 열매의 이유 등은 신기하다. 국화과 등에 속하는 식물에서 보이는 로제트 잎, 생태적 특성과 환경 조건 등을 고려해 성을 선택하는 식물, 국화꽃 한 송이가 사실은 작은 꽃다발인 두상화서라는 사실, 식물의 이타심 등등. 특히 식물이 동물과 유사한 패턴을 보이고 환경과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한 루트-브레인 가설과 우드 와이드 웹. 게다가 주변에 흔히 보던 은행나무, 소철, 메타세쿼이아가 자연 상태에서는 멸종위기 종이라니 놀랍다. 수국과 수국백당, 장미는 관상용으로 인간이 계속 개조하여 자연번식이 불가능한 품종이라니 씁쓸할 따름이다.

 

지구에서 오랫동안 진화해오며 살아온 종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주된 이유는 기후변화나 자연선택이 아닙니다. 직간접적인 인간의 활동이 가장 큰 원인이죠. (P.257)

 

인간이 살다 보면 많은 식물과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어떤 식물은 유용하여 우대받고 다른 식물은 무시되고 멸종되는 사례를 완전히 막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연과 생물을 이용 수단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동반자라고 관점을 바꾼다면 이 책에 실린 식물은 물론 인간 자체의 삶도 한층 풍요로워질 것이다.

 

앞서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흥미롭게 읽었지만, 식물 이야기의 비중이 좀 더 높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게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이 좀 더 전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므로. 확실히 식물학의 더욱 깊고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학술서라고 하기는 어려운데, 저자는 일반 독자에 대한 배려와 교감의 끈을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 전문 서적류의 건조하고 딱딱함보다는 식물학과 대중의 소통에 무게중심을 두려고 하는 저자의 의도가 나타난다. 그 결과가 <이웃집 식물상담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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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186회 아트엠콘서트 - 김세준 비올라 리사이틀

일시 : 2026년 1월 15일(목) 19:30

장소 : 신영체임버홀

연주 : 김세준 (비올라), 박진형 (피아노)

진행 : 바이올리니스트 이수민

프로그램

  -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2번 D단조 BWV 1008

  - 브루흐, 로망스 F장조 Op.85

  - 비외탕, 비올라 소나타 B-flat장조 Op.36

  - 파가니니, 라 캄파넬라 Op.7 [윌리엄 프림로즈 편곡]


* 세줄평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비올라로 들으니 바닥에 깔리는 저음 대신 한층 친근한 목소리로 다가온다. 파가니니 곡도 원곡의 화려한 고음이 주는 쨍한 맛과 다른 미감을 보인다. 두 곡 모두 첼로와 바이올린에 친숙하고 특화되다 보니 원곡을 능가하지 못하지만 색다른 별미로 즐길만하다. 프로그램의 핵심은 브루흐와 비외탕이다. 중역대에 특화된 코맹맹이 같은 편안한 사운드를 중심으로 비올라가 보여줄 수 있는 서정적이고 기교적이며, 느림과 빠름의 모든 아름다움을 두 곡을 통해 느낄 수 있다. 바이올린 곡으로 유명한 작곡가들인데 이들의 비올라 곡이 소중하다. 2026 아트엠콘서트 메세나 회원으로 첫 공연 참석인데, 대화와 연주가 이어지는 진행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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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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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도 대학 도서관의 대출 상위 도서 목록에서 이 책을 처음 알게 되었다. 과학 에세이라고 하는데, 표제도 독특해서 흥미를 갖게 되었다. 알라딘 서점의 서평을 보니 대체로 높은 평가를 하는 가운데, 극단적으로 낮은 평점을 부여하는 사례도 간혹 볼 수 있다. 아마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나 보다.

 

이 책은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반부에서 생물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과 업적을 다루고 있다.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과학자인 조던의 숨겨진 삶을 드러내어 고양하는 저작 의도로 이해하였다. 그만큼 어린 조던이 분류, 질서, 체계에 예민한 감각과 집착을 드러내는 일화라든가 대지진으로 거의 다 망가져 버린 수많은 어류의 표본과 명칭을 상실할 위험에 처하면서도 굳세게 버텨냈다는 이야기 등은 확실히 저자가 삶의 모범으로 삼아 추구할 가치가 있는 인물로 보인다. 어류 분류학에서 그가 남긴 업적은 워낙 대단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부분은 스탠퍼드 대학 총장으로서의 데이비드 스타 조던 이야기다. 그가 오늘날 세계적 명성을 지닌 대학의 초대 총장을 지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지만 이걸 통해서도 그가 당대 학계의 굉장한 저명인사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이야기가 묘하게 흘러간다. 설립자 부부와 조던 간 갈등, 특히 스탠퍼드 여사의 사망에 얽힌 조던의 혐의점은 그가 직간접적으로 책임을 면하기 어렵겠다는 판단이 나온다. 그가 여사의 사망원인을 독살이 유력한데도 굳이 자연사라고 몰고 가기 위해 애썼다는 점이 특히 그러하다.

 

존경받는 과학자 조던의 이미지는 앞에서 이미 큰 흠집이 났는데, 저자는 세 번째 부분에서 쐐기를 박는다. 철저한 우생학자로서 조던을. 그가 우생학을 열렬히 옹호하고 차별을 법제화하기 위해 노력한 대목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시대착오적이고 비난받기에 충분한 오점이다.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고 체계화하고자 하는 그의 열성은 나아가 모든 생명체를 우열의 기준을 적용하여 사다리 형태로 배치하였다. 신체적 결함, 지적 장애, 인종 편견 등이 결합하여 우수한 인간을 배양하기 위해 소위 부적합자들에 대한 차별을 주창한 것이다.

 

이처럼 룰루 밀러의 저작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어류학계 거장의 은폐된 잘못을 파헤치고 세상에 공개함으로써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용 중 가끔 느껴지는 조던에 대한 저자의 냉소적인 어투를 이제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후기에 따르면 그가 재직하였던 인디애나 대학과 스탠퍼드 대학, 그리고 캘리포니아 지역에 그의 이름을 딴 학교, 건물 등의 명칭이 전부 변경되었다.

 

내가 모델로 삼으려 했던 자는 결국 이런 악당이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이성도 무시하고 도덕도 무시하고, 자기 방식이 지닌 오류를 직시하라고 호소하는 수천 명의 아우성-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요-도 무시해버린 남자. (P.201)

 

여기까지로 그쳤으면 이 책과 저자는 대단한 갈채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은 게 논란의 대상이 된다. 군데군데 조금씩 섞어놓은 저자의 개인사다. 과학자인 아버지에게서 인간은 자연에 있어 별다른 의미가 없는 존재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 수면제 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한 사실, 자신의 동성애로 실망하고 떠나간 연인이 돌아오기만 하염없이 기다리며 삶이 엉망이 되었다는 일종의 푸념. 솔직히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 책에서 굳이 필요한 대목이었을까, 독자가 관심과 흥미를 느낄 만한 내용인가.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에게 너무나도 소중했던 그 생물의 범주, 그가 역경의 시간이 닥쳐올 때마다 의지했던 범주, 그가 명료히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 범주는 결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P.242)

 

조던이 일생을 바쳐 동정(identification)한 수많은 물고기가 오늘날 어류라는 학문적 분류가 사라져 헛되게 되었다는 사실은 조롱이 아니라 슬픔과 탄식이며 과학 발전에서 불가피한 사례로 위로받아야 마땅하다. 저자는 인간이 눈앞의 현상에 급급하여 깊은 과학적 인식을 하지 못해 단순히 물속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종을 어류로 묶어놓았다는 점을 빗대어 조던의 우생학 옹호를 같은 선상에서 비판한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자신의 삶과 선택을 정당화한다. 연인의 복귀 기대를 포기하고 새로운 여성을 만나 동성애 커플로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밝고 행복하게 기술한다. 독자는 저자를 감히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건 어류의 분류학적 통찰에 실패했던 그리고 우생학을 부르짖던 조던과 같은 무리임을 자인하는 것과 똑같으므로. 이제야 비로소 알라딘 서점의 평점이 극단적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쓰는 척도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특히 도덕적.정신적 상태에 관한 척도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P.267-268)

 

저자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물에 대해 정말 몰랐을까? 생물분류학자인 그라는 존재에 맞닥뜨렸고 그의 단호한 의지와 흔들리지 않는 정신에 감명받고 그에 대해 좀 더 알기를 원했다면, 당연히 그의 일생에 대한 개략적 확인에 들어가는 게 당연하다. 저자가 그의 삶과 학문에 관한 책을 쓸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가늠해 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에 대한 세간의 비판은 스탠퍼드 여사 관련 의혹이 아닌 우생학자로서의 그를 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저자는 우생학 지지자 조던과 스탠퍼드 여사 사망 혐의자 조던을 깡그리 엮어서 그를 악인으로 취급한다. 어류 분류학자로서 그의 열성과 업적은 전혀 비난의 대상이 아님에도 그조차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다. 표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틀린 말이다. 어류라는 학문적 분류가 바뀌었을 뿐이다. 물고기라는 실체는 엄연히 존재한다.

 

저자의 의도는 자신이 선택한 성소수자의 정당성에 대한 옹호에 불과하다. 그것을 주장하기 위해 저자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우생학자를 선택하였다. 저명한 스타 과학자의 화려한 외면 뒤에 숨어있는 어둡고 부정한 측면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행위는 긍정한다. 과학의 발전과 사회 정의라는 관점에서. 다만 그 저격이 개인적 목적-저자의 내밀한 삶과 선택에 억지로 정당성을 부여하려는-을 교묘하게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 또한 비판의 소지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어류 분류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대한 지적 영역을 확장해 준 점에서 의의가 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당대의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명문 스탠퍼드 대학의 초대 총장에 대한 영광과 오욕에 대해 알게 된 점도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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