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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작년도 대학 도서관의 대출 상위 도서 목록에서 이 책을 처음 알게 되었다. 과학 에세이라고 하는데, 표제도 독특해서 흥미를 갖게 되었다. 알라딘 서점의 서평을 보니 대체로 높은 평가를 하는 가운데, 극단적으로 낮은 평점을 부여하는 사례도 간혹 볼 수 있다. 아마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나 보다.
이 책은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반부에서 생물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과 업적을 다루고 있다.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과학자인 조던의 숨겨진 삶을 드러내어 고양하는 저작 의도로 이해하였다. 그만큼 어린 조던이 분류, 질서, 체계에 예민한 감각과 집착을 드러내는 일화라든가 대지진으로 거의 다 망가져 버린 수많은 어류의 표본과 명칭을 상실할 위험에 처하면서도 굳세게 버텨냈다는 이야기 등은 확실히 저자가 삶의 모범으로 삼아 추구할 가치가 있는 인물로 보인다. 어류 분류학에서 그가 남긴 업적은 워낙 대단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부분은 스탠퍼드 대학 총장으로서의 데이비드 스타 조던 이야기다. 그가 오늘날 세계적 명성을 지닌 대학의 초대 총장을 지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지만 이걸 통해서도 그가 당대 학계의 굉장한 저명인사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이야기가 묘하게 흘러간다. 설립자 부부와 조던 간 갈등, 특히 스탠퍼드 여사의 사망에 얽힌 조던의 혐의점은 그가 직간접적으로 책임을 면하기 어렵겠다는 판단이 나온다. 그가 여사의 사망원인을 독살이 유력한데도 굳이 자연사라고 몰고 가기 위해 애썼다는 점이 특히 그러하다.
존경받는 과학자 조던의 이미지는 앞에서 이미 큰 흠집이 났는데, 저자는 세 번째 부분에서 쐐기를 박는다. 철저한 우생학자로서 조던을. 그가 우생학을 열렬히 옹호하고 차별을 법제화하기 위해 노력한 대목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시대착오적이고 비난받기에 충분한 오점이다.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고 체계화하고자 하는 그의 열성은 나아가 모든 생명체를 우열의 기준을 적용하여 사다리 형태로 배치하였다. 신체적 결함, 지적 장애, 인종 편견 등이 결합하여 우수한 인간을 배양하기 위해 소위 부적합자들에 대한 차별을 주창한 것이다.
이처럼 룰루 밀러의 저작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어류학계 거장의 은폐된 잘못을 파헤치고 세상에 공개함으로써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용 중 가끔 느껴지는 조던에 대한 저자의 냉소적인 어투를 이제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후기에 따르면 그가 재직하였던 인디애나 대학과 스탠퍼드 대학, 그리고 캘리포니아 지역에 그의 이름을 딴 학교, 건물 등의 명칭이 전부 변경되었다.
내가 모델로 삼으려 했던 자는 결국 이런 악당이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이성도 무시하고 도덕도 무시하고, 자기 방식이 지닌 오류를 직시하라고 호소하는 수천 명의 아우성-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요-도 무시해버린 남자. (P.201)
여기까지로 그쳤으면 이 책과 저자는 대단한 갈채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은 게 논란의 대상이 된다. 군데군데 조금씩 섞어놓은 저자의 개인사다. 과학자인 아버지에게서 인간은 자연에 있어 별다른 의미가 없는 존재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 수면제 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한 사실, 자신의 동성애로 실망하고 떠나간 연인이 돌아오기만 하염없이 기다리며 삶이 엉망이 되었다는 일종의 푸념. 솔직히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 책에서 굳이 필요한 대목이었을까, 독자가 관심과 흥미를 느낄 만한 내용인가.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에게 너무나도 소중했던 그 생물의 범주, 그가 역경의 시간이 닥쳐올 때마다 의지했던 범주, 그가 명료히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 범주는 결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P.242)
조던이 일생을 바쳐 동정(identification)한 수많은 물고기가 오늘날 어류라는 학문적 분류가 사라져 헛되게 되었다는 사실은 조롱이 아니라 슬픔과 탄식이며 과학 발전에서 불가피한 사례로 위로받아야 마땅하다. 저자는 인간이 눈앞의 현상에 급급하여 깊은 과학적 인식을 하지 못해 단순히 물속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종을 어류로 묶어놓았다는 점을 빗대어 조던의 우생학 옹호를 같은 선상에서 비판한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자신의 삶과 선택을 정당화한다. 연인의 복귀 기대를 포기하고 새로운 여성을 만나 동성애 커플로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밝고 행복하게 기술한다. 독자는 저자를 감히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건 어류의 분류학적 통찰에 실패했던 그리고 우생학을 부르짖던 조던과 같은 무리임을 자인하는 것과 똑같으므로. 이제야 비로소 알라딘 서점의 평점이 극단적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쓰는 척도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특히 도덕적.정신적 상태에 관한 척도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P.267-268)
저자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물에 대해 정말 몰랐을까? 생물분류학자인 그라는 존재에 맞닥뜨렸고 그의 단호한 의지와 흔들리지 않는 정신에 감명받고 그에 대해 좀 더 알기를 원했다면, 당연히 그의 일생에 대한 개략적 확인에 들어가는 게 당연하다. 저자가 그의 삶과 학문에 관한 책을 쓸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가늠해 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에 대한 세간의 비판은 스탠퍼드 여사 관련 의혹이 아닌 우생학자로서의 그를 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저자는 우생학 지지자 조던과 스탠퍼드 여사 사망 혐의자 조던을 깡그리 엮어서 그를 악인으로 취급한다. 어류 분류학자로서 그의 열성과 업적은 전혀 비난의 대상이 아님에도 그조차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다. 표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틀린 말이다. 어류라는 학문적 분류가 바뀌었을 뿐이다. 물고기라는 실체는 엄연히 존재한다.
저자의 의도는 자신이 선택한 성소수자의 정당성에 대한 옹호에 불과하다. 그것을 주장하기 위해 저자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우생학자를 선택하였다. 저명한 스타 과학자의 화려한 외면 뒤에 숨어있는 어둡고 부정한 측면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행위는 긍정한다. 과학의 발전과 사회 정의라는 관점에서. 다만 그 저격이 개인적 목적-저자의 내밀한 삶과 선택에 억지로 정당성을 부여하려는-을 교묘하게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 또한 비판의 소지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어류 분류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대한 지적 영역을 확장해 준 점에서 의의가 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당대의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명문 스탠퍼드 대학의 초대 총장에 대한 영광과 오욕에 대해 알게 된 점도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