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올라누스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셰익스피어 전집 1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조덕희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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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코리올란 서곡으로 내게 익숙한 코리올라누스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소개된 인물이라고 한다. 그만큼 고대 로마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긴 장군인데, 이 희곡을 통해 살펴본 그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어렵게 군주정을 종식하고 얻은 공화정인데 로마에서 추방당하자 오히려 외적을 이끌고 조국을 쳐들어온 인물에 대한 평가가 좋을 리가 없으리라.

 

이 작품은 역사극이자 한층 정치극이다. <작품 해설>에 이 희곡의 특징이 요약되어 있어 인용한다.

 

민중들의 반란, 민중들에 대한 귀족들의 혐오감, 민중들의 이중성과 가벼움, 그러한 민중의 속성을 이용하려는 세력, 그 세력과 귀족들의 대립, 민중과 대립했던 귀족의 몰락, 그 귀족이 취한 적과의 동맹, 그 동맹 안에서 다시 벌어지는 계략과 그로 인한 죽음 등 이 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인 톤을 유지한다. (P.268)

 

공화정이 곧 민주정을 지칭하지 않는다. 로마 공화정은 형식적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아 실제로 귀족이 통치하는 체제다. 최고 통치자인 집정관이 되려면 민중 앞에서 유세하고 표를 줄 것을 호소하는 모습이 흡사 오늘날의 선거와 유사하다. 시장이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전통시장을 돌아다니며 상인들 각자에게 깊은 관심과 동정을 기울이는 체한다. 실제로 관심 없고 하기 싫어도 겉으로 보여주는 효과를 위해서라도 필수적인 코스다. 고대 로마의 귀족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뭐 민중들의 안위와 생활에 큰 관심이 있겠는가. 그랬다면 기근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의 구제를 위해 식량을 풀었을 테지만, 그들은 이를 거부하였고 여기에 앞장선 이가 바로 마르티우스, 훗날 코리올라누스다.

 

마르티우스에 대한 평가는 내외가 일치한다. 고결하고 도도하며 지극히 오만하다는 점. 전자는 귀족들 내부의 평가이며 후자는 호민관의 생각이다. 그는 민중들을 대놓고 혐오하며, 이것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그는 다른 귀족보다 솔직한 셈이다.

 

(마르티우스) 전쟁은 두려워하면서도 평화롭게 살게 해 주니 몸이 근질근질한 것이냐 이 미천한 똥개 같은 놈아. (P.27, 11)

 

(마르티우스) 목매달아 죽여도 시원치 않은 놈들 같으니! (P.29, 11)

 

(코리올라누스) 이 똥개 같은 놈들! 나는 너희가 숨 쉴 때마다 풍기는 악취를 혐오한다. (P.169, 33)

 

그의 반민중관의 가장 압권은 31장에서 나타난다.

 

(코리올라누스) 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저 변덕스럽고 시궁창 내 풍기는 종자들에게 똑똑히 들려주어서 제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똑똑히 알게 해줘야겠습니다. 내 다시 말하지만 저딴 놈들에게 알랑방귀를 뀌어대며 우리 귀족들과 어우러져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마치 우리가 애써 일군 땅에 폭동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P.129, 31)

 

(코리올라누스) 또다시 민중들에게 양보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정의는 그 가치를 잃고 말 것이요, 로마는 건전한 원칙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입니다. (P.134, 31)

 

이 희곡에서 코리올라누스가 내뱉는 대사의 대부분은 이렇듯 민중을 폄하하고 혐오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귀족들의 속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는 솔직하지만, 집정관이 되기 위해서는 낙제점이다. 모름지기 정치의 요체는 가면을 쓰는 데 있지 않은가. 그의 어머니 블룸니아의 말처럼 말이다. 그의 명예와 고결은 철저히 개인 중심주의에 근거하였다고 보는 게 맞다. 그토록 모친에게 순종적이던 그가 여기서는 그의 어머니 말을 좇는 데 실패하였으니.

 

코리올라누스가 진정으로 고결한 사람이라면 로마를 증오하고, 로마에 복수하고자 하는 반역 행위를 해서는 아니 되었다. 그는 유아독존적인 독선주의에 매몰되어 스스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반사회적인 행위조차도 서슴없이 자행하였으니 그에게 있어 고결함이란 목적이 아닌 도구 또는 수단에 불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코리올라누스) 난 단지 나를 내쫓은 자들에게 내 이 고통을 그대로 되돌려주고자 이곳에 왔소. 허니 만약 그대가 그동안 그대의 원한을 풀고 조국의 치욕을 씻고 싶은 복수심을 키워왔다면, 나의 이 비참한 처지를 이용하여 나를 그대의 편에 서게 하시오. 나는 지옥 불처럼 끓는 분노심을 가지고 나의 조국과의 싸움에 임할 것이니, 조국에 대한 나의 증오는 그대에겐 이득이 될 터. (P.193, 45)

 

앞서 읽은 <줄리어스 시저>가 군주정과 공화정의 대립을 다룬다면, 이 작품은 귀족정과 민주정의 갈등을 제재로 한다. 민중의 표변성과 우매성은 새삼스럽지 않다. 전작에서 이미 폼페이를 잊은 민중에 대한 비난이 있었듯이, 수백 년 더 이전을 다룬 여기에서도 민중은 코리올라누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하지만 곧 그를 민중의 적으로 내쫓는다. 내놓고 자신들을 무시하고 깎아내리는 사람을 제아무리 바보라도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두 사람의 호민관, 시씨니우스와 브루투스는 민중과 코리올라누스의 관계 설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지만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정적을 제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 작가는 그렇게 노골적으로 그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지만 호민관의 입김에 휘둘리기 쉬운 민중의 작태를 보면 민주정이 중우정으로 타락하는 것은 한순간임을 알 수 있다. 정상적인 선거로 집권한 후 독재와 전체주의를 강화한 역사적 사례를 우리는 잊을 수 없다.

 

오늘날 영국 사회에 여전히 명목상의 귀족 신분이 존재하지만 실질이 없다면 당대는 명백한 신분제 사회였다. 군주-귀족-평민으로 구분되는 신분 질서에서 귀족과 평민이 단합하여 군주의 권력을 약화시켰지만, 귀족과 평민의 이해관계는 근본적으로 불 속에 던져진 숯처럼”(P.181, 43)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양 계급의 대치가 빚어내는 잠재적 위험과 비극을 코리올라누스의 행적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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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시저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셰익스피어 전집 1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박우수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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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투스 일파에 의한 시저의 암살은 (의도와는 정반대로) 로마 제정의 서막을 연 중대한 사건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사건을 셰익스피어의 글자 그대로 힘차고 극적이며 웅변적인 대사를 통해 생생한 현장감을 얻는 느낌은 색다르다. 연극 무대에서 실제 공연을 봤다면 감동은 배가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시저는 표제와는 달리 주변적 인물이다. 시저의 존재감은 자신보다는 주변의 말과 평에 의해 두드러진다. 그의 행동과 대사로 판단하는 시저는 오만함과 고결함, 그리고 자신감이 한데 어우러진 인물이고, 작가 자신도 그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4막에서 그의 유령이 나타나고 브루투스가 그의 혼령을 의식하고 있음을 통해 억울한 죽임을 당한 고결한 위인으로서 시저를 바라본다.

 

시저를 살해한 두 주인공 카시우스와 브루투스. 처남 매부 사이인 그들의 시저 살해는 상당히 다른 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이 드러난다. 브루투스는 시저를 사랑하고 시저도 그를 아끼는, 즉 그의 행위에 있어 사적인 감정은 개입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오직 로마 시민과 인민들을 위해, 로마의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시저를 칼로 찌른 것이다. 로마가 다시 군주정으로 퇴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

 

(브루투스) 내가 시저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시저가 죽어서 자유 시민으로 살기보다 시저가 살아서 노예로 죽는 편을 탁하시겠습니까? (P.99, 32)

 

카시우스는 어떤가? 시저 살해의 주범은 바로 그다. 그는 동지들을 포섭하고 브루투스를 한패로 끌어들이는데, 시저에 대한 그의 반감은 개인적 측면이 강하게 드리워져 있다. 자신이 보기에는 자기와 별 차이가 없는 그가 신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왕으로 추대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다. 게다가 그는 시저의 눈 밖에 난 처지다.

 

브루투스를 교묘하게 꼬드겨 시저 살해의 실리와 명분을 얻고자 하는 그 의도의 비순수성은 극 중에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시저가 폭군이 되어 로마인들을 도탄에 빠뜨릴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지나친 비약을 담고 있음에도 군주제를 반대하는 브루투스의 내심을 크게 흔들리게 만든다.

 

브루투스가 시저를 죽여야만 한다고 다짐하는 장면에서 그의 논법도 가정과 비약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진정으로 왕이 되고자 하는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시저는 이미 죽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브루투스) 지금으로서는 / 시저에 대한 불만의 원인을 찾을 수 없으니 / 이렇게 생각해보자. 지금의 시저가 힘이 / 더 강해지면 이러이러한 전제군주의 권력을 / 행사할 것이다. 그러니 그를 독사의 알로 / 간주하자. 그 알이 깨어나면 본성대로 / 위험해질 것이니 미리 알일 때 죽이자. (P.50, 21)

 

카시우스와 브루투스의 차이점은 시저 사후 카시우스의 언행을 통해 분명해지는데, 4막에서 카시우스의 관직 매매 행위를 둘러싼 정당성 여부에 대한 양자 간의 언쟁이 길게 이어져 독자에게 확실히 인식하게끔 한다. 시저가 죽었으므로 카시우스는 자신의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 브루투스는 한치의 흠결이라도 허용한다면 간신히 확보한 자신들의 행위 정당성을 흔들릴 것을 우려한다.

 

브루투스 일파는 시저 죽음 이후를 대비하지 못하였다. 시저가 죽고 나면 만사가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품은 데 그쳤을 뿐이다. 안토니[안토니우스]의 역량을 오판한 대가는 참혹하였으니, 두 사람의 유명한 연설은 안토니가 대중을 휘어잡는 능력이 출중함을 보여준다. 브루투스는 대중의 이성에 호소한 반면, 안토니는 그들의 감정에 호소하였다.

 

(안토니) 시저는 로마로 수많은 포로들을 데려왔고 / 그 보석금으로 국고를 가득 채웠습니다. / 이것이 시저의 야심이었습니까? / 가난한 사람들이 울 때 시저도 울었습니다. / 야심가는 더 모진 사람이어야지요. / 그러나 브루투스는 시저가 야심가였다고 합니다. / 그런데 브루투스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P.103, 2)

 

공화제를 지키려는 브루투스 일파의 시도는 시저 살해를 계기로 오히려 세력을 잃고 말게 되었다. 안토니와 옥타비우스는 이를 반시저파를 제거하는 명분으로 삼아 철저하게 궤멸시켰고, 양자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이가 결국 로마의 일인자가 되었음을 역사는 보여준다.

 

셰익스피어 당대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스리는 군주제 시절이므로 시저와 브루투스는 먼 옛날의 한 일화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셰익스피어는 군주제와 공화제의 대립, 시민의 자유를 향한 브루투스의 고고한 외침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의 사후 30년도 지나지 않아 청교도 혁명이 발발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심히 넘기기는 곤란하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군주제와 공화제에 대한 명시적 견해 표명을 하지 않는다. 그의 펜으로 묘사된 시저와 브루투스는 양자 모두 위대하고 고결한 인물이다. 시저는 왕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고, 왕이 되더라도 브루투스의 추측대로 폭군이 또는 폭군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다만 작가는 고상한 의도를 품은 한 인물이 사적인 친분 관계를 뛰어넘어 보다 고결한 목적을 위해 희생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비록 브루투스는 역사의 패자가 되었지만, 카시우스와는 다른 평가를 받고 있음이 이를 말해준다.

 

이 작품의 표제는 줄리어스 시저이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브루투스이기에 마지막 대목에서 안토니의 대사는 그를 향한 작가 자신의 평가나 다름없다.

 

(안토니) 브루투스는 로마인들 중에서 가장 고결한 인물이었소. / 그를 제외한 모든 음모론자들은 위대한 시저를 / 시기해서 살인에 가담한 자들이오. / 오직 브루투스만이 로마 시민들의 복지와 / 사심 없는 명예심에서 음모에 가담했소. (P.166,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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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의 집 창비청소년문학 34
윌리엄 슬레이터 지음, 최세진 옮김 / 창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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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막혀 있고 오로지 계단만 존재하는 공간. 크기도 위치도 확인할 수 없으며, 인공조명에 의해 밝혀져 시간조차도 알 수 없는 곳. 영문도 모른 채 그곳에 끌려온 아이들은 보편적 인간 성격과 행동 유형의 전형적 인물형이다. 그곳의 환경과 방식에 적응하고 대응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뚜렷한 차별성을 드러낸다.

 

독자는 소설 내내 그리고 끝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궁금해하게 된다. 원체 독립심 강하고 반항주의자인 롤라야 그렇다 하더라도 제일 소심하고 약골인 피터가 아닌 나머지 아이들이 기계의 조작에 길들여지는 까닭을. 유쾌한 올리버는 깊은 생각이 없으며 지배욕이 강하고, 블라썸은 음식을 중시하는 물욕주의자인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들의 험담과 이간질도 서슴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앞서 나가기 위해 권장되는 인물형이다. 상냥한 애비게일이 제일 안타까운데, 그녀는 기계의 작동 원리를 언뜻 예감하였지만 더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진실을 마주 대하는 두려움과 용기 부족. 이것은 전형적인 현대 사회의 대다수 소시민의 모습이리라. 결국 이런 것들이 그들의 타락을 가져왔다.

 

그녀는 직전에 느꼈던 소름 끼치는 예감이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동안 답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애비게일은 돌연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게 무서워졌다. 그녀는 춤추는 일에만 몰두하고 싶었다. 춤추고, 또 춤추고, 먹고, 잊어버렸다. (P.144)

 

가장 소심하고 나약한 피터의 반전은 놀랍다. 롤라의 의견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유혹에 빠지려고 하는 롤라를 오히려 올바로 이끄는 인내와 단호함. 끝내는 롤라를 저버릴 수 없어 기계와의 싸움에서 기꺼이 패배를 감수하려는 용기를 보여준다. 굶주림으로 육체가 약해질수록 그의 내면은 더욱 강건하게 성장하였음을 우리는 에필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책이라고?”

올리버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왜 책을 봐? 너무 느리잖아. 게다가 대부분 프로그램화도 안 돼 있고 말이야.” (P.115)

 

그의 반전의 근원은 바로 남들과 달리 그가 책을 본다는 사실에 있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당대가 아닌 알지 못할 미래를 설정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시대가 더는 책의 가치를 중시하지 않음을 피터의 말에 대한 올리버와 애비게일의 반응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프로그램 화면과 실시간 홀로그램의 효율성과 편안함에 비할 때 독서는 느리고 고통스러운 노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독서를 통해 스스로 상상하며 주체적 사고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게 그와 다른 아이들의 차이점이다. 다른 아이들은 소리와 불빛의 메시지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고, 음식을 얻기 위해 변덕스러운 기계의 취향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수렁에 빠지듯이 그들은 서서히 기계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감옥에 있는 거야, 알겠니? 감옥, 이건 그냥 평범한 감옥도 아냐. 고문실이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고문실. 하지만 우리 몸을 고문하는 건 아냐. 팔다리를 뽑는다는가 벌겋게 달군 칼을 손톱 밑에 쑤셔 넣는 것처럼 간단하고 직접적인 게 아니라고. 절대 아니지, 이건 더 지독해. 우리를 미치게 하려는 거야. 알겠니?” (롤라, P.70)

 

그곳의 본질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롤라다. 피터도 롤라의 생각에 동의한다. 기계가 하라는 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존엄과 가치를 포기하고 욕망에 굴복하는 동물로 전락하는 것임을 두 아이는 알아차린다. 다른 아이들은 하지만 욕망의 노예가 되기를 선택한다. 눈앞의 배고픔과 두려움을 거부할 용기와 판단이 결핍된 탓이다. 롤라의 너무나도 명료한 설명에도 그들은 자신들만의 껍질 속에 틀어박힌다.

 

그래서 피터와 난...... 우리는 기계를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어. 이건 피터의 생각이기도 해. 우리가 모두 함께 기계에 맞서 싸우면, 그들도 우리를 조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야. 그들은 포기하고 우리는 승자가 되는 거지. 하지만 누구라도, 단 한 명이라도 그들 편에 서서 기계를 따른다면 그들은 우리 모두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할 거야. 그러면 우리가 가진 기회는 거의 사라지겠지. 그러니까 제발 함께 맞서 싸우자.” (롤라, P.173)

 

이 모든 게 거대한 실험이었음이 에필로그에서 드러난다. 로런스 박사는 행동의 조건화 이론을 토대로 국가의 지원을 받아 최고지도자가 원하는 유형의 인간을 양성하고자 하는 의도를 밝힌다. “언뜻 부당하거나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어떤 명령에든...... 의심 없이 따를 수 있는”(P.239) 인간이라! 명령에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는 군대라든지 일체의 독자적 사고기능이 없는 기계를 연상하게 된다. 그것은 히틀러의 나치가 제3 제국 신민들에게 요구한 가치관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다수의 보통의, 평범한 독일 국민들이 홀로코스트의 만행을 거부함 없이 따랐던 것이다.

 

로런스 박사는 고아원 출신 아이들만을 실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혹시 모를 사회적 저항을 방지하려고 하였다. 박사의 실험은 부분적으로 실패하였지만 - 롤라와 피터는 한층 성장한 모습으로 더 나은 곳으로”(P.244) 떠난다. - 세 명의 아이들은 신호등 불빛에도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을 보인다.

 

이 소설은 스키너와 밀그램의 심리학 이론에 근거를 두고 씌어졌다.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 불합리한 제도와 명령에 기꺼이 순응하는 인간 행동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심리학 이론의 소설화다. 체제에 무조건 순응하고 복종하는 인간은 정치권력자로서 흐뭇한 유형이다. 전체주의 체제 또는 독재정치라면 더더욱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나치와 파시스트가 권력의 강제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을 열렬히 지지하고 헌신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그들의 권력 기반을 탄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들이 혁명이나 쿠데타가 아닌 민주적 선거 수단으로 권력을 쟁취하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명시적으로든, 묵시적으로든 사회의 부당한 지배 가치에 대항하여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용기 있는 행동으로 반대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전체주의 체제는 계속해서 순응적 인간을 길러내고자 할 것이다. 인간 본성의 약점을 노리는 로런스 박사의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작가는 소설 속에서 분명히 알리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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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멜빈 버지스 지음, 정해영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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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영화에 바탕을 두고 소설화한 작품이다. 이 경우든지 또는 반대의 경우든지 성공한 원작의 유명세가 개작의 성공을 담보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장르에는 각기 고유한 예술 미학이 있기 마련이므로 원작의 오리지낼리티를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개작의 독자성을 확립할 것인가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 국한하여 평한다면, 원작을 관람하지 못한 나로서는 소설에서도 나름의 감동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궁벽한 탄광촌, 가난한 살림살이, 엄마의 죽음으로 인한 편부 가정, ‘상류층의 계집애나 하는발레에 관심과 재능을 보이는 아들, 편견과 반대를 극복하고 발레단의 주연 남자무용수가 되는 아들. 줄거리의 요점을 대강 짚으면 이렇다, 매우 진부하면서도 감동을 심어주는 설정이자 구성이다.

 

자칫 상투적이기 쉬운 이 작품에 다른 읽을거리를 부여한 점은 탄광의 파업이다. 소위 영국병을 치료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접근방식을 도입한 대처 총리가 강경하게 밀어붙인 곳이 탄광이다. 자본과 효율성의 논리로 보자면 당연한 조치라고 하겠고, 그것이 당대 및 후대에 좋은 평가를 얻었다는 점도 원리적으로 보면 마땅하다. 문제는 그것이 단순히 수익성과 효율성의 관점으로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제아무리 사양산업이지만 광부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생계가 달려있으므로 그들에게는 생사가 달린 절박하고 절실한 사안인 것이다.

 

법은 무기지만, 우리를 위한 무기가 아니다. 법이 언제 우리 노동자 편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변호사, 판사, 경찰 간부들. 그들은 대개 자본가 편에 선 작자들이 아니던가. (재키, P.79)

 

소설 곳곳에는 정부와 경찰에 대한 비판과 경멸에 가까운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작품의 주인공 가족이 상대적 약자인 광부이므로 그들의 시각에서 파업을 저지하고 노조를 탄압하는 정부를 좋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정부 조치를 실제로 현장에서 실행하는 경찰도 마찬가지다. 굶느냐 마느냐, 추위에 덜덜 떠느냐 마느냐, 나아가 죽느냐 사느냐가 걸린 투쟁의 현장에서 생계유지와 전혀 무관한, 즉 없어도 하등 아쉬울 것 없는 발레를 한다는 것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따름이다. 이렇듯이 이 작품은 좁게는 한 소년의 꿈의 실현이라는 성장 소설적 관점에서 볼 수 있지만, 넓게 보면 사회계급 간 갈등과 예술의 본질적 가치를 모색한 것이다.

 

작가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하였으니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다. 계집애나 하는 발레를 남자아이가 한다고 해서 그 아이의 성향이 곧 계집애는 아니다. 운동은 남자, 예술은 여자로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은 편협한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사회적 선입견은 뿌리 깊다. 빌리의 가족이 처음에 펄쩍 뛰었던 것도 그러한 인식과 우려와 무관하지 않다. 작중에서 빌리의 친구 마이클은 서서히 동성애적 성향을 드러내며 이에 대한 빌리의 우정은 변함없다. 물론 이 작품의 핵심이 동성애 사안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런데 중요한 건 집으로 오는 내내 혼자 연습을 하면서, 비로소 나는 내가 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정말 아찔한 기분이었다. (빌리, P.64)

 

자신이 정말 하고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일찍 알아차릴 수 있다면 행운이다. 게다가 하고 싶은 것이 자신이 남다른 재능이 있으며 그걸 알아차릴 수 있다면 더 큰 행운이다. 빌리는 행운아다. 재능을 지닌 많은 아이가 눈에 띄지 못한 채 서서히 스러지는 게 다반사인 세상이다. 그래서 빌리가 윌킨슨 선생님을 만난 것도 행운이다. 뛰어난 예술가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재능을 알아차리고 이끌어 줄 수 있는 스승이 필요하다. 전문적인 훈련을 쌓기 위한 경제적 지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그게 부모든 아니면 다른 후원자든. 빌리는 제대로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빌리의 학비 일체를 마련하기 위해서 재키가 얼마만큼의 고민과 노력을 감수해야 했는지. 소중히 간직한 결혼반지를 전당포에 넘기고, 파업 동지를 배신하고 탄광에 복귀하려고 하는 참담한 심정. 배신자의 돈을 받아야만 하고, 파업 실패 소식에 오히려 일해서 학비를 벌 수 있다는 안도감 등을.

 

빌리가 발레 수업을 허락받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자신의 용기뿐만 아니라 가족의 반대도 극복해야 했다. 사회적 편견뿐만 아니라 아들의 장래를 염려하는 아버지의 현실적 사유도 반대의 충분한 명분이 된다. 이 과정에서 죽은 엄마 사라는 현실 인물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망설이는 빌리는 꿈에서 엄마의 뜻과 바람을 확인한다. 재키는 죽은 아내의 처지에서 빌리의 사안을 새로이 바라보며 자신의 반대가 올바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사라라면 빌리의 발레를 무조건 지지하고 응원하였을 터이므로. 부모가 원하는 꿈이 아니라 자식이 바라는 꿈을 인정하고 지원하는 게 부모의 참다운 역할임을.

 

나는 정말로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자꾸만 사라가 내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재키, P.192)

 

발레는 단지 빌리 엘리어트의 개인적 성공만을 가져오지 않았다. 발레를 통하여 빌리네 가족은 하나가 되었다. 엄마의 죽음과 파업 사태 이후 뿔뿔이 흩어지고 반목하던 재키와 토니, 빌리는 빌리의 발레가 갖는 의미를 깨닫고 이룰 수 있도록 분투하는 과정에서 가족의 가치를 깨닫는다. 재키는 자신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책임질 수 없음을, 토니는 아빠의 눈물을 보면서 더 만사를 아빠에게 책임 지우고 의존할 수 없음을.

 

그렇다. 파업은 어떤 집을 갈라놓기도 하지만, 또 어떤 집은 단단하게 뭉치게도 한다. 그렇더라도, 나는 재키와 토니가 발레란 것 때문에 또 이렇게 뭉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지, P.224)


문득 원작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용과 구성에서 소설과는 얼마나 다를 것인지 궁금하다. 무엇보다도 영상 매체를 통한 예술적 느낌이 글자 매체로 읽었을 때의 감흥과 동등한 수준일지 확인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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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섬 비룡소 클래식 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에드워드 윌슨 그림, 정영목 옮김 / 비룡소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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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추억의 모험소설이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읽음에 그런 생생한 감정을 갖지 못하니 한편 아쉽다. 나이의 다소, 축약본과 완역본의 차이 등이 분명히 영향을 미친다. 반면 완역본이 주는 풍요로운 내용의 향유, 줄거리만 쫓아가느라 놓쳤던 대목과 장면의 재발견 등은 장점에 해당한다.

 

<배의 주방장>이 원래 제목이라는 작가의 말을 통해 존 실버라는 인물의 비중과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확실히 전반부를 짐 호킨스가 단독으로 끌고 간다면, 후반부는 호킨스와 실버가 공동 주연이라 하겠다. 특히 강렬한 개성의 표출이란 면에서는 실버를 당할 인물이 없다.

 

실버는 해적치고는 독특한 유형이다. 해적이 어떤 사람들인지 겪어봐서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 호킨스조차 의심의 눈초리로 실버를 살펴봤음에도 그에게서 전혀 해적의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물며 지주와 의사 같은 사람들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음을 반복적으로 표현한다. 오직 선장만이 유보적 태도를 취하는데, 딱히 개인적 차원의 의심이 아니라 선장이라는 직업적 속성의 발로라고 할 것이다.

 

나는 선장, 검둥개, 장님 퓨를 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해적이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고 생각했다. 해적이란 내 생각에 따르자면 이런 깨끗하고 유쾌한 술집 주인과는 아주 다른 인간이었다. (P.103, )

 

, 지주님, 전체적으로 나는 지주님이 찾아낸 사람들을 크게 신뢰하지는 않습니다만, 존 실버만큼은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를 해 두고 싶군요.” 의사가 말했다.

저 사람은 완벽하게 믿을 만하오.” 지주가 말했다. (P.113)

 

일행이 폭동의 음모를 간파하고 무사히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우연의 개입 덕분이었다. 그를 나타내는 표현을 들자면, 음흉, 교묘, 영리, 그리고 잔인이라고 하겠다. 대개의 악역이 무모하고 성급한 데 비해 실버는 참고 때를 기다릴 줄 알면서 자신을 위장하는 데 능숙하다. 교묘한 언변으로 무지한 해적들의 충동을 억누르면서도 필요하면 냉정하고 잔인한 면모를 서슴없이 보여 준다. 해적들이 그의 말을 따랐다면 이 소설은 금방 끝이 나고야 말았으리라.

 

실버와 대비되는 인물은 선장이다. 선장은 선원들은 물론 처음부터 지주와 짐의 호의도 얻지 못하였다. 깐깐하고 고지식함에서 비롯한 오해와, 무엇보다 그들의 조심성 없음을 나무라고 특별 취급을 하지 않는 데 대한 반감일 것이다.

 

내가 서둘러 주방으로 달려가는데, 선장이 의사에게 아주 큰 목소리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배에서는 누구라고 특별히 예뻐하지는 않을 겁니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나는 지주와 생각이 똑같아 선장을 무척 미워했다. (P.124)

 

선장으로서는 세상 물정 모르는 승객들이 어리석고 답답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이것은 기분전환 뱃놀이가 아니며, “죽느냐 사느냐의 아슬아슬한 모험”(P.117)임을 깨닫지 못하므로. 부정적 인상을 받은 선장의 진가는 예방 조치와 통나무집에서 포탄의 위협에 깃발을 내리길 거부하는 단호함에서 드러난다. 실버의 위협 앞에서도 그는 당당하게 실버를 공박하며 모욕적 언사를 퍼부을 정도다. 그는 세련되고 사교적인 인물이 아니지만 깊은 책임감을 지닌 옹골차며 강인한 인물이다.

 

내 깃발을 내리라고요!”

선장이 소리를 지르더니 덧붙였다.

안 됩니다. 나는 못 합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모두 그 말에 동의했던 것 같다. 그것이 강인하고, 뱃사람답고, 선한 감정이었을 뿐 아니라, 적에게 우리가 그들의 포격을 우습게 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전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P.227)

 

짐 호킨스는 소설의 공동 주인공인 동시에 사태 해결의 열쇠를 푸는 역할이다. 작품의 커다란 굴곡점에는 항상 그가 개입한다. 보물섬 지도를 품에 넣고, 실버 일당의 음모를 엿들었으며, 벤 건을 만나고 닻줄을 끊은 히스파뇰라 호를 숨겨두는 등 작중 유일한 소년인 그가 없었다면 소설은 쓰이지 못하거나 해적 일당의 손쉬운 승리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비판적 의견도 가능하다. 보물섬에서 짐은 언제나 단독 행동을 감행한다. 이것이 가져온 성공적 결과는 소설이기에 가능하다고 봐야겠다. 게다가 항상 우연의 행운이 짐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덕택도 무시할 수 없다. 사려 깊고 심사숙고하지 못함은 그의 소년으로서의 한계인 동시에 소설 독자를 염두에 두었다고 봐야겠다. 그럼에도 결과가 항상 만사를 면죄해주지 못한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어리석은 짓으로, 앞서 내 멋대로 보트를 탔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짓이었다. 요새 안에는 성한 사람이 둘밖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이번 일 역시 결국은 우리 모두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P.271)

 

배를 탄 많은 인물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거나 무인도에 버려지는데, 악역 중에서 유일하게 실버만 무사히 생환에 성공한다. 해적의 우두머리이자 최고의 악당인 그가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지 않은 데는 그에 대한 작가의 편애가 있어서다. 엄청난 악당이자 소름 끼치는 사기꾼이고, 무자비한 해적이자 잔인한 살인자이고 간교한 배반자. 상황을 직시하는 명확한 판단력과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결단력, 무엇보다 짐에 대한 일말의 호의가 그를 살린 동시에 그를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고 있다. 이 때문에 독자는 그를 미워할 수는 있되 차마 싫어할 수 없다.

 

어마어마한 보물은 자석처럼 사람들의 탐욕과 허용을 끌어당긴다. 위험할 줄 알면서 목숨을 감수하면서도 보물을 찾기 위해 모험에 나선다. 이 작품에서도 보물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음을 맞이한다. 보물을 발견하면 모두가 행복할까? 그렇지 않음을 소설의 결말은 또한 우리에게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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