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 세계인이 감동한 레오 버스카글리아 교수의 사랑학 특강
레오 버스카글리아 지음, 이은선 옮김 / 홍익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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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이름을 들어본 책이다. 저자는 사랑학 교육자로, 사랑을 주제로 젊은이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조언과 지침을 전달하는 강연으로 특히 명성이 높다고 한다. 솔직히 인생 지침서 또는 자기계발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랑학을 어떻게 접목할까 궁금했는데, 의외로 사랑을 논한 대목은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저자의 사랑은 에로스를 초월하여 아가페에 가깝다. 자신에 대한 사랑, 가족, 이웃, 친구와의 사랑을 넘어 궁극적으로 보편적 인류애를 지향한다.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깨달으면 나를 진실로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게서 모든 것이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무한정으로 사랑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P.40-41)

 

버스카글리아는 자신에 대한 사랑을 우선시한다. 이기주의보다는 자존감 회복이라고 해야 맞겠다. 현대 사회로 올수록 우리는 주체적인 인생행로보다는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경향이 크다. 항상 잘난 남과 비교하면 열등한 나 자신의 모습만 두드러질 뿐이다. 사람은 자체로 비교 불가한 고유의 독자적 가치가 있음을 깨달으라고 한다. 그렇다고 헛된 망상과 착각을 하라는 뜻은 아니다. 자신의 실질에 대해 명확한 인식은 필수적이다.

 

지금의 내 모습을 사랑하라는 뜻을 담은 이 말이 저는 참 마음에 듭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새로운 나로 나아가는 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P.160)

 

이렇게 스스로 중심을 확고히 한 상태에서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볼 때 가족과 친구, 이웃 간 사랑과 연계 가능성이 나타난다. 타인 의존적이 아니라 동등하고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낸 적 있기에 저자의 글에서 해당 언급과 함께 소위 아시아적 전통에 입각한 깨우침이 자주 인용된다. 나보다는 우리, 이기심보다는 이타심 등 서양적 미덕과 동양적 미덕의 혼합적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저자의 유년기 가족생활에 대한 경험으로부터도 우러나오기에 가족 관련 일화도 되풀이하여 밝힌다.

 

현재의 나에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하려면 꾸준한 자기 계발 노력을 해야 한다. 저자는 배움의 가치를 강조하는데, 배움이야말로 새로운 나를 발견하기 위한 유익한 모험이라고 한다. 자신을 위해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건 자기 자신을 향한 참된 사랑이 아니다. 저자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과 단순히 생존을 구별한다. 자신이 내면적으로 충만하면 남에게 뭔가 구하기를 기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남에게 베푸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항상 다툼이 발생하는 이유는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향한 발견과 사랑이 나를 넘어 타인에게로 확산할 때 인간관계는 한층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이 세상에서 사랑을 포괄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단어는 단 하나 인생밖에 없습니다. 모든 면에서 볼 때, 사랑은 곧 인생입니다. 사랑을 놓친다면 인생을 놓칩니다. 여러분은 부디 인생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P.337)

 

이 책은 저자의 강연 모음집인데, 따라서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보다는 다소 산만하고 중복적인 내용이 존재한다. 초반은 제법 신선하고 흥미롭다. 버스카글리아의 일침에 뜨끔하면서 자기반성의 순간도 갖게 된다. 반면 중반부터는 앞에 나온 내용을 동어와 유의어 반복을 하고 있기에 긴장감과 흥미가 상대적으로 저하된다. 이런 유형의 책이 갖는 근본적 한계라고도 하겠다. 그렇기에 노자는 5천 자의 글만 남기지 않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에서 정말로 소중한 것은 우리 인생 저 너머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내 안에 있을 리가 없다고 단정하면서 평생 그것을 찾기 위해 방황합니다. 그런 게 결코 살아 숨 쉬는 삶일 수는 없습니다. (P.112)

 

버스카글리아가 사랑과 인생을 논할 때 강조한 점이 있는데, ‘여기지금이다. 여기라 함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간을 가리킨다. 우리는 언제나 이곳을 하찮게 여기고 저 멀리 다른 곳에서 이상향을 구한다. 파랑새도 그렇고, 샹그릴라도 그러하다. 현세에 대한 비판은 좋지만 차안과 이승을 버리고 피안과 저승을 무조건적으로 지향하는 태도는 올바르지 않다. 삶이란 결국 이곳에 있다.

 

우리는 해야 할 무슨 일이 있을 때 대체로 나중으로 미룬다. 막상 나중이 되면 그때 하지 못한 걸 후회한다. 사랑도 그러하다. 우리는 운명을 예견하고 통제할 수 없다. 사랑은 미루지 말고 바로 표현하라는 조언이다. 그것이 어디 사랑뿐이겠는가마는 그만큼 사랑에 있어 더욱 소중하다는 뜻이리라.

 

<성경>, <불경><논어> 등 과거의 수많은 고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올바른 삶, 훌륭한 인생을 신조로 내거는 책은 참으로 많다. 어주와 변주는 다양하지만 본질은 비슷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런 유형의 책이 시중에 넘쳐나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따르지 못해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실천 없이는 모든 게 불가능하니까요. 이야기를 하는 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생각을 갖는 건 절반만 해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몸소 행동해야 비로소 나머지가 완성됩니다. (P.398)

 

저자도 마지막에 강조하듯이 실천, 즉 실행을 끌어내지 못하면 공염불에 불과하다. 아는 것과 실행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마음속으로는 명료한 진리와 일침의 문장으로 각성을 하지만, 한두 번 실행해 보고는 이내 포기하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그렇다면 이런 유형의 책은 전혀 무쓸모인가 하면, 독자 중에서 한두 명이라도 책을 통해 개심하였다면 어쨌든 실패는 아니다. 인생 지침서를 백 권 읽는 것보다 그만큼 실천의 의의와 중요성이 크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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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7월 17일(목) 19:30

장소 : 부천아트센터 콘서트홀

연주

  - 지휘 : 김선아

  - 연주 : 부천시립합창단

  - 피아노 : 문진호, 이수경

  - 하모니움 : 양하영

프로그램

  - 로시니, 작은 장엄 미사


* 세줄평

오랜만에 부천에 간다. 부천아트센터는 첫 방문이다. 로시니 작품도 생소한 곡이다. 두 대의 피아노 반주가 재기발랄한 게 역시 로시니답다. 하모니움의 독특한 분위기도 인상적인데, 조금 더 음량이 컸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미사곡이기에 평면적이고 지루하기 쉬운데, 흥미로운 감상이 가능하였다. 독창은 아리아를 연상케 하고, 피아노 반주는 비중이 매우 큰데 11번째곡은 '종교적 전주곡'이라고 해서 아예 독주곡이다. 관현악 반주 판본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두 대의 피아노와 하모니움 반주의 오리지널 편성은 꽤나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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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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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강은 낯설면서 낯설지 않다. 우리는 소설가 한강이 친숙하지만 그의 출발은 시인으로서였다. 이 시집은 시인으로서 그의 유일한 기록이다. 이후 그는 소설에 매진하지만 시적 산문이라는 개성적인 문체로 시인의 속성을 그대로 유지한다.

 

수록 시들을 죽 일람하며 장르는 다르지만 작가로서 한강의 주제 의식과 문학정신은 거의 동일함을 깨닫는다. 시적 어조는 굉장히 나직하고 읊조리는 듯하며, 대체로 어두운 분위기를 띤다. 생명과 죽음을 대비하지만 죽음에 대한 인식의 비중이 훨씬 크다. 평탄한 시구 가운데 피와 고통, 폭력, 학살 같은 잔혹함이 무람없이 등장하여 독자를 당혹게 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미처 간취하지 못하는 미묘한 인식은 과연 예민한 영혼과 감각의 소유자답다.

 

그때 알았다 /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 지금도 영원히 /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

밥을 먹어야지 (P.11,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시적 화자는 뭔가를 알아차렸다. 매우 중요한 것이 영원히 지나고 있음을. 화자는 그게 뭔지 말하지 않지만 독자는 그게 뭔지 공감한다. 그럼에도 화자는 일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예리한 인식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그것은 단순히 무력감의 발현인가. 아니면 결국 시인의 사명으로서 운명인가.

 

하지만 곧 / 너도 알게 되겠지 /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 기억하는 일뿐이란 걸 (P.73, 효에게. 2002. 겨울)

 

시인이 죽음을 긍정함은 죽음 자체를 찬미함이 아니다. 그가 처한 삶이, 현실이 초라하고 궁핍하며 부조리에 차 있기에 그는 역설적 대안을 선택한다. 2부에 실린 작품 중에서 유달리 고통과 폭력의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피 흐르는 눈> 연작, <조용한 날들 2>가 기억에 남는다.

 

조용한 내 눈에는 / 찔린 자국뿐 / 피의 그림자뿐 (P.58-59, 피 흐르는 눈 4)

 

찌르지 말아요 // 짓이기지 말아요 // 1초 만에 / 으스러뜨리지 말아요 //

(하지만 상관없어, 네가 찌르든 부숴뜨리든) (P.62-63, 조용한 날들 2)

 

절대적인 폭력과 고통의 현실을 맞닥뜨릴 때 인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일단 두려움에 휩싸인 채 움츠러들기 십상이다. 부정의가 쉽사리 해소되지 못하면 현실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이어 차라리 삶을 경시하고 죽음을 긍정하는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시적 화자도 마찬가지다. <심장이라는 사물>에서 <서커스의 여자>를 거쳐 <파란 날><조용한 날들>로 이어지는 1부 수록작에서 이러한 전개 단계를 확인할 수 있다.

 

더 캄캄한 데를 찾아 / 동그랗게 뒷걸음질치는 나의 혀는 (P.15, 심장이라는 사물)

 

, 죽어서 좋았는데 / 환했는데 솜털처럼 / 가벼웠는데 (P.33, 파란 돌)

 

생을 부정하고 죽음을 긍정하는 화자는 <마크 로스코와 나>에서 잉태와 죽음의 현상을 대비하면서 쓸쓸한 감정을 드러낸다. <심장이라는 사물 2>에서는 오히려 반문한다. 죽음이 왜 고통인지를. 화자는 안구가 뚫린 해골을 처연하게 오만하게 응시한다. 그 자신도 뢴트겐 사진이 드러내듯 결국 일개 해골에 지나지 않는가. 인간의 물질적 본질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이처럼 <해부극장> 연작은 보여준다.

 

신도 / 인간도 믿지 않는 / 네 침묵을 기억하는 나는 (P.106, 거울 저편의 겨울 6)

 

시적 화자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매 순간을 어찌 슬픔과 고통으로만 보낼 수 있는가. 민감한 인식과 감성을 달래기에 애쓴다. <괜찮아>에서 괜찮아를 되풀이하며 내면으로 흐느끼는 자아를 토닥이며 위로하는 모습은 차라리 안쓰러울 정도다. 어설픈 화해 시도는 너무나 취약하다. 내면에 응축되어 단단한 돌멩이처럼 자리 잡은 슬픔은 쉽사리 해소될 수 없음을 <그때><몇 개의 이야기 12>는 나타낸다.

 

시인은 무슨 연유로 이토록 철저히 부정적이고 냉소적으로 되었는가. 2부 해부극장에서 독자는 고통과 폭력의 현상을 응시할 수 있었다면, <거울 저편의 겨울> 12편의 연작시로 구성된 4부에서 그 원인을 추론할 수 있다. 거울 저편 세계는 봄도, 여름도, 가을도 아니고 하필 겨울일까. 공격과 학살, 아이 살해가 넘쳐나는 세상은 결국 겨울일 수밖에 없다. 나와 너가 손을 내밀지 않고, 거울을 사이에 두고 완전하게 대립하는 세상. 내가 아닌 비아(非我)는 관용 대신에 적대시하는 세상.

 

시인은 이미 광주와 제주를 문학으로 다루게 될 것임을 운명적으로 예감한 것은 아닐까. 또는 마음속으로 문학적 형상화의 의사를 다짐하였던 게 아닐까. <회상>에서 시기와 형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냄을 보면 적어도 광주는 그러하다.

 

오그린 발바닥이 이따금 베어 피 흘러도 / 봉쇄된 거리 벗겨진 신 한 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

모든 것이 남은 천지에 / 남은 것은 없었던 그해 늦봄 (P.127, 회상)

 

고통과 슬픔이 어긋난 현실에 기인함에도 뿌리 깊숙이 들여다보지 못하고 대증 처치만 반복한다면 치료되기 어렵다. 차라리 감각이 무디다면 모르는 체하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련만. 순수하고 예민한 인식의 소유자인 시적 화자는 이도 저도 못하는 난처한 처지에 놓여 있다. 이를 극복하려면 힘들고 괴롭더라도 원인을 찾아 나서는 고통스러운 여정에 나서야 한다.

 

평론가 조여정의 작품 해설은 다가가기 어려운 시인의 시 세계를 조감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저녁의 소묘><새벽에 들은 노래>라는 연작시의 표제가 갖는 다층성도 비로소 주목하게 되었다. 다만 시인을 언어의 틀에 가두는 일부 지나친 해석은 공감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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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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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신작을 기대했던 독자 중 일부는 분명히 실망했을 법하다. 그의 주특기인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였으므로. 개인적으로는 그의 최초 에세이집이기에 오히려 흥미롭게 읽었다.

 

에세이라고 통칭하지만, 이 책은 여러 유형의 글을 담고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게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과 수상 소감이다. 중간의 다섯 편은 산문이 아니라 운문인 시다. 후반부는 일기가 중심을 차지한다. 에세이의 미덕은 작가가 굳이 가면을 쓸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다소간 분장을 했을지언정 변장을 하지 않을 것에 대한 믿음을 작가도 독자도 공유한다.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대답을 찾아낼 때가 아니라-그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 (P.12, ‘빛과 실’)

 

빛과 실은 우선하여 그의 장편소설에 대한 작가 자신의 창작 의도를 밝히고 있어 주목한다. 평론가의 비평, 독자의 소감을 넘어 작가의 육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이 오독에 대한 아쉬움과 더불어 가슴 서늘한 울림을 전해준다.

 

그가 궤도를 벗어나 <소년이 온다><작별하지 않는다>로 향하게 된 자각은 작가 특유의 예민한 감성과 인식을 새삼 깨닫게 한다.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지만 어쨌든 결코 포기하지 못하고 신뢰의 끈을 되잡기 위한 그의 끝없는 노력은 광주와 제주를 다룬 소설이 참혹함으로 점철하지 않는 바탕이 되지 않았는가.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던 것은 아닐까? (P.28-29, ‘빛과 실’)

 

여덟 살 아이가 천진하게 적어놓은 사랑의 정의는 사랑과 생명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그리고 이를 파괴하려는 모든 행위에 대한 거부가 자리한다. 작가가 강연문과 소감, ‘출간 후에에서 명시적으로 밝히기 이전에도 독자라면 그가 얼마나 삶과 생명의 근원에 민감하였는지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외관상 죽음을 지향하는 듯해도 밑바탕에는 올바른 생명의 길에 대한 뜨거운 소망이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산문적 인간인지라 시는 잘 모른다. 여기 몇 편의 시는 그저 흥미롭고 이색적일 뿐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한다. 왠지 음울하고 쓸쓸하다는 정도. 작가는 빛이 넘치는 남향을 말로만 원할 뿐 그의 내심은 어둠과 그늘의 북향을 지향한다. 그런 면에서 북향 정원정원 일기는 온전한 사적 기록이다. 독자는 여기에서 작가를 떠나 인간 한강의 내면의 목소리와 일상적 삶의 단편을 공유한다.

 

북향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 빛이 변하지 않는 (P.69, ‘북향 방’)

 

작가는 이곳 북향집에서 <작별하지 않는다>를 완성하였다. 칠 년 동안 작품도, 작가도 여러 변모를 거쳤으리라 짐작한다. 그는 왜 굳이 북향집을 골랐을까. 그를 사로잡은 온화한 공기의 감각”(P.87)은 무엇이었을까. 이 시기 그는 오히려 밝은 햇빛을 두려워하고 회피하였던 것은 아닐지.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는 강렬한 햇빛의 적나라함은 부담스럽다.

 

한 뼘 북향 정원에서 고군분투하는 작가의 행동은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절실하다. 식물이 잘 자라면 으쓱하다가 해충과 살충제에 정원이 적막해지면 의기소침하는 장면은 차라리 인간적이다. 정원일기는 꾸준하지 않다. 첫해는 꽤 자주 기록을 남기지만, 점점 멀어지면서 나중에는 몇 달 걸러 가끔씩 글을 남길 뿐이다. 어찌 되었든 라일락 향이 그득 풍기는 정원이 되었으니 성공한 셈인가.

 

햇빛.

햇빛을 오래 바라봤어. (P.167, ‘더 살아낸 뒤’)

 

햇빛의 소중함은 열대보다는 한대가, 여름보다는 겨울이, 남향보다는 북향이 한층 강렬하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마지막 수록작인 시 더 살아낸 뒤는 의미심장하게 해독하고 싶다. 이제 시적 화자는 햇빛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작가의 오랜 독자로서 하루빨리 신작 소설을 가지고 일상으로 복귀하길 희망한다. 이 에세이집이 그 단초가 될 거라는 기대를 품는다. 노벨문학상 수상이 작가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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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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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에 구입한 책인데, 아무리 서가를 뒤져도 찾을 수 없다. 기가 막힌 노릇이다. 어쩔 수 없이 도서관 신세를 빌린다. 표제 아래 한강 소설로 명시하고 있다. 왜 굳이 소설이라고 강조하는가. 독자가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 그것도 시적 산문으로 받아들일 우려 때문인가. 작가의 자전적 성격과 에세이적 요소가 짙게 담겨 있다. 어쨌든 작가는 분명히 이를 소설이라 밝힌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위기 자체는 작가의 의도적 연출이리라.

 

흰 것에 대해 쓰겠다는 화자의 결심은 흰 것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무슨 연유로 흰 것에 대한 글을 쓸 마음을 먹었을까. 흰색이 상징하는 의미는 다양하다. 순결, 순수가 우선적으로 떠오른다. 눈과 얼음에서는 투명함과 차가움이 연상된다. 극도의 뜨거움은 흰색에 가깝다. 백발과 수의는 소멸, 죽음과 연관된다. 음양오행에 따르면 서쪽은 저승을 가리키며, 색으로는 흰색이라고 한다. 괜히 좌청룡 우백호가 아니다.

 

이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이것을 쓰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변화시켜줄 것 같다고 느꼈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했다고. (P.10, _)

 

화자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을 치유하고 변화시키고자 희망한다. 한편으로 흰 거즈 아래 숨는 게 아닐까 망설이는 심정이다. 화자의 바람과 주저는 이후 서술하는 다종다양한 흰 것에 대한 문장을 통해 하나씩 확인해 볼 수 있다.

 

달떡같이 희고 어여쁜 아기에 대한 회고가 반복적으로 서술된다. 스물세 살 산모가 조산하여 두 시간 동안 살다가 삶을 이별한 아기, 화자의 언니. 어머니의 간절한 염원에도 미처 세상을 겪지 못하고 떠나간 아기 언니를 화자는 계속 의식한다. 그 아기가 무사히 자랐다면 자신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므로 아기 언니와 화자는 대척점에 놓인 관계이다. 화자는 아기 언니에 대해 모종의 부채감을 지니는가. 또는 자신의 힘겨운 삶을 대신 떠넘길 수 있기를 바라는 일종의 대체 인물인가.

 

그렇게 당신이 숨을 멈추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결국 태어나지 않게 된 나 대신 지금까지 끝끝내 살아주었다면. 당신의 눈과 당신의 몸으로, 어두운 거울을 등지고 힘껏 나아가주었다면. (P.118-119, 당신의 눈)

 

화자는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한다. 한 개인 또는 집단에게, 사회 전체에게, 아니면 국가로부터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녀는 결국 지구 반대편의 어떤 도시로 도망치듯 떠난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절대적 고독감에 휩싸인 그녀. 무상적 사물인 하얗게 내리는 눈에도 날카롭게 반응할 정도의 심정.

 

씨팔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P.55, 눈송이들)

 

극도로 자폐적인 공포감에 사로잡히는 흰 개와 지금 그녀의 처지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니면 화자의 좌절과 고통은 내면에서 비롯한 것은 아닐까. 그녀는 왜 모국어 문장, 혹은 몇 개의 단어들이 불쑥 떠올라 혀밑에 고이기를”(P.50, 주먹) 기다려야 하는가. 화자를 작가와 동일시한다면 글쟁이로서 한계에 봉착했다는 자각은 아니었을까.

 

원인이 무엇이든 그녀는 삶에서 상처를 받았고 고통을 쉽사리 잊지 못한다. 아기의 죽음, 유대인 게토에서 학살당한 죽은 어린 형의 넋, 공포로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몬 흰 개, 멸치 떼의 신비를 화자에게 알려주고 이태 뒤 세상을 떠난 작은아버지, 무명 소복을 선물로 불태우는 대상인 망자인 어머니. 비슷한 시기에 죽은 대학 동기 두 사람.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P.83, 각설탕)

 

후반부에서 화자는 치유와 생명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순면의 침대보에서 받는 위로는 절대 이상하지 않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당당할 수 있다면 내외의 고통도 나를 부식할 수 없다. 새로운 회고 속 스물세 살 난 어머니에게서 조산한 아기는 의식하지 못한 채 젖을 물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온다. 화자는 비로소 죽은 아기 언니의 기억에서 벗어나 그녀를 놓아줄 수 있다. 그것이 최선의 작별의 말”(P.128, 작별)이다. 죽지 말라고 하는 중얼거림은 아기에게 뿐만이 아니라 자신에도 해당하는 애절함의 반영이리라.

 

죽지마. 죽지 마라 제발. (P.36, 빛이 있는 쪽)

 

이 작품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수많은 단편적인 흰 것들의 이야기는 개별로서 어렵지 않지만, 그것들이 전체로서 갖는 이야기는 다른 차원이다. 작가의 집필 동기를 헤아리기 어렵다. 작가가 화자의 형태로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이 짤막한 소설에서 독자는 자기의 이해와 감정와 염원에 따라 제각기 다른 독해를 얻게 된다. 흰 것들의 이미지와 이야기에 보다 큰 의의를 부여하는 독법도 의미 있다.

 

다만 우리는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상실하고 상처받고 세상에 등을 돌려 슬픔과 괴로움으로 함몰하려는 화자. 그 순간 모든 흰 것들의 이미지와 기억과 추억을 통해 빛과 밝음의 세계, 생명의 세상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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