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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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신작을 기대했던 독자 중 일부는 분명히 실망했을 법하다. 그의 주특기인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였으므로. 개인적으로는 그의 최초 에세이집이기에 오히려 흥미롭게 읽었다.

 

에세이라고 통칭하지만, 이 책은 여러 유형의 글을 담고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게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과 수상 소감이다. 중간의 다섯 편은 산문이 아니라 운문인 시다. 후반부는 일기가 중심을 차지한다. 에세이의 미덕은 작가가 굳이 가면을 쓸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다소간 분장을 했을지언정 변장을 하지 않을 것에 대한 믿음을 작가도 독자도 공유한다.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대답을 찾아낼 때가 아니라-그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 (P.12, ‘빛과 실’)

 

빛과 실은 우선하여 그의 장편소설에 대한 작가 자신의 창작 의도를 밝히고 있어 주목한다. 평론가의 비평, 독자의 소감을 넘어 작가의 육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이 오독에 대한 아쉬움과 더불어 가슴 서늘한 울림을 전해준다.

 

그가 궤도를 벗어나 <소년이 온다><작별하지 않는다>로 향하게 된 자각은 작가 특유의 예민한 감성과 인식을 새삼 깨닫게 한다.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지만 어쨌든 결코 포기하지 못하고 신뢰의 끈을 되잡기 위한 그의 끝없는 노력은 광주와 제주를 다룬 소설이 참혹함으로 점철하지 않는 바탕이 되지 않았는가.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던 것은 아닐까? (P.28-29, ‘빛과 실’)

 

여덟 살 아이가 천진하게 적어놓은 사랑의 정의는 사랑과 생명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그리고 이를 파괴하려는 모든 행위에 대한 거부가 자리한다. 작가가 강연문과 소감, ‘출간 후에에서 명시적으로 밝히기 이전에도 독자라면 그가 얼마나 삶과 생명의 근원에 민감하였는지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외관상 죽음을 지향하는 듯해도 밑바탕에는 올바른 생명의 길에 대한 뜨거운 소망이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산문적 인간인지라 시는 잘 모른다. 여기 몇 편의 시는 그저 흥미롭고 이색적일 뿐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한다. 왠지 음울하고 쓸쓸하다는 정도. 작가는 빛이 넘치는 남향을 말로만 원할 뿐 그의 내심은 어둠과 그늘의 북향을 지향한다. 그런 면에서 북향 정원정원 일기는 온전한 사적 기록이다. 독자는 여기에서 작가를 떠나 인간 한강의 내면의 목소리와 일상적 삶의 단편을 공유한다.

 

북향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 빛이 변하지 않는 (P.69, ‘북향 방’)

 

작가는 이곳 북향집에서 <작별하지 않는다>를 완성하였다. 칠 년 동안 작품도, 작가도 여러 변모를 거쳤으리라 짐작한다. 그는 왜 굳이 북향집을 골랐을까. 그를 사로잡은 온화한 공기의 감각”(P.87)은 무엇이었을까. 이 시기 그는 오히려 밝은 햇빛을 두려워하고 회피하였던 것은 아닐지.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는 강렬한 햇빛의 적나라함은 부담스럽다.

 

한 뼘 북향 정원에서 고군분투하는 작가의 행동은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절실하다. 식물이 잘 자라면 으쓱하다가 해충과 살충제에 정원이 적막해지면 의기소침하는 장면은 차라리 인간적이다. 정원일기는 꾸준하지 않다. 첫해는 꽤 자주 기록을 남기지만, 점점 멀어지면서 나중에는 몇 달 걸러 가끔씩 글을 남길 뿐이다. 어찌 되었든 라일락 향이 그득 풍기는 정원이 되었으니 성공한 셈인가.

 

햇빛.

햇빛을 오래 바라봤어. (P.167, ‘더 살아낸 뒤’)

 

햇빛의 소중함은 열대보다는 한대가, 여름보다는 겨울이, 남향보다는 북향이 한층 강렬하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마지막 수록작인 시 더 살아낸 뒤는 의미심장하게 해독하고 싶다. 이제 시적 화자는 햇빛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작가의 오랜 독자로서 하루빨리 신작 소설을 가지고 일상으로 복귀하길 희망한다. 이 에세이집이 그 단초가 될 거라는 기대를 품는다. 노벨문학상 수상이 작가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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