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화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6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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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두 편이 우무오피아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이 작품은 같은 이보족이지만 우무아로 여섯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우무아로는 다른 이보족과 달리 여전히 기독교와 유럽문화에 개방적이지 않다. 비록 군사적, 행정적으로는 영국 식민 지배 체제에 속하지만, 마을의 일상적인 삶은 철저히 전통적이다. 여기 주인공인 대사제 에제울루가 종교적으로 이들을 지배한다.

 

이 소설은 구한말 우리네 과거사를 상기시킨다. 근대문명의 강력한 힘을 지닌 외세의 압력 속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으로 대응한다. 소수의 개화파와, 다수의 수구파. 소설 속 모제스와 은워디카는 전자에 속한다. 그들은 백인과 유럽 문명의 발전상과 힘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그 속에서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한다. 동족들에게는 타락자, 배신자나 앞잡이로 폄하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에제울루는 모순적 인물이다. 그가 세속적 명예욕과 지위를 탐하고 있지 않음은 영국 식민 체제가 제안한 우무아로의 족장 또는 왕 자리를 거부함에서 드러난다. 그는 우무아로와 옥페리 간 전쟁을 일거에 종결시킨 백인 세력의 위력을 깨닫고, 아들 오두체를 교회에 보낸다. 백인들의 지식을 빠르고 철저하게 습득하여 자신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소위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과 비슷한 입장이다.

 

여섯 마을이 분열되면서 적들이 모든 잘못을 그에게 덮어씌우려고 해서 엄청난 분노가 끓어올랐기 때문이다. 무슨 연유에서 그러는가? 그것은 에제울루가 백인 앞에서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P.21)

 

그의 치명적 잘못은 마을에서 점차 약해지고 흔들리는 울루 신과 대사제 자신에 대한 입지를 파괴적으로 복수하려는 데 있다. 그는 외세와 싸우는 게 아니라 동족들을 적으로 상대한다. 우무아로와 옥페리 간 영토 분쟁에 있어 부족에 불리한 증언-물론 덕분에 윈터바텀으로 하여금 유일하게 정직한 원주민이라는 평가를 얻지만-을 하여 원성을 자초한다. 은와카와 에지데밀리의 노골적인 적대시. 마을을 떠나서는 안 되는 대사제 신분임에도 백인들의 소환에 무력하게 응하도록 방치하는 부족민들을 향한 노여움.

 

자기들끼리는 분열되더라도 외세의 위협 앞에서는 단합하는 게 일반적인 속성인데, 에제울루는 그렇지 않았다. 극심한 분노는 오히려 자신을 장기간 구금하였던 백인을 오히려 동지로 간주하고, 자기 부족을 도리어 적으로 삼는 적전 분열의 행위이자 중대한 오판이다. 그는 자신이 대사제로서 울루 신과 에제울루의 막강하고 파괴적인 힘을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누구도 자신들에게 대들고 맞먹지 못하게끔. 비록 우무아로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가 당장에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자기 부족 사람들이었으며 백인은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동지가 되어 있었다. 그가 옥페리에 억류되어 있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의 노여움과 싸워야 할 근거는 한층 더 커져만 갔다. (P.308)

 

우무아로 마을에 울루 신만 있던 전통 사회였다면 에제울루의 작전은 통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대안이 없으므로.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교회와 기독교가 백인 식민 체제에 힘입어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단계가 아닌가. 교회는 솔깃한 제안으로 고통받는 부족민들을 유혹한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에제울루의 아들 오두체를 향한 분노는 이것의 중차대한 성격을 드러낸다. 한층 치명적인 것은 아들 오비카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부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투쟁에서 에제울루가 오로지 믿는 바는 울루 신이 부여한 정당성인데, 대사제의 가장 뛰어난 아들이 원인 모르게 급사하였다는 사실은 대사제의 투쟁이 신에게조차 버림받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울루 신은 어째서 자기를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그를 때려눕힌 다음 진흙으로 덮어 버리는 식으로 그를 다룬단 말인가? 그는 자꾸자꾸 되물었다. 그가 무슨 죄를 저질렀던가? 신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복종하지 않았던 것일까? (P.398)

 

대사제의 승부수는 완전한 패착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신의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에제울루는 모든 게 울루 신의 뜻이며, 자신은 단지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화살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변한다. 우무아로 여섯 마을을 통합하기 위해 최고 신으로 모셔 온 울루 신이 우무아로를 사지로 내몬다고 할 때 신의 의미는 무색해진다. 결국 울루 신은 대사제 에제울루의 잘못된 신탁의 결과로 부족민의 믿음을 잃게 된다.

 

그들의 신은 고집스럽고 야망에 찬 사제에 대항하는 부족민들과 한편이 되었다. 그러니까 개인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부족민들보다 훌륭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부족민의 의견에 반하는 결정을 절대로 얻어 낼 수 없다는 조상들의 지혜를 확인시켜 주었다.

만일 상황이 이렇다면 울루 신은 아주 위험한 시기를 선택해 이런 진리를 확인했던 것이었다. (P.399)

 

이 소설을 나이지리아 이보족 전통 사회 대 백인 식민 지배 체제, 울루 신을 정점으로 하는 토착 종교 대 기독교, 에제울루와 같은 통합주의자 대 은와카와 에지데밀리 같은 세속주의자 또는 분열주의자, 윈터바텀 대 클라크, 라이트 같은 대립하는 백인 지배층의 지배적 사고로 구성된 작품으로만 간주하면 곤란하다. 이러한 구조와 갈등이 작품의 기본 축을 형성하지만, 작가는 양측 어디도 편애하지 않는다. 이보족 출신 작가로서 전통 사회를 옹호하고, 당연히 백인 식민 체제를 비판할 것 같지만 의외로 작가는 굉장히 중립적이고 관조적이다. 그는 누구의 시시비비도 공개적으로 평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독자가 주체적으로 판단하도록 한다.

 

이 작품이 진정으로 흥미로운 대목은 나이지리아 이보족의 풍부한 문화 요소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아체베는 소설에 이보족의 전통문화를 담뿍 담고 있다. 문장에 속담, 가요, 민담 같은 소재를 도입할 뿐만 아니라 고유명사를 번역하지 않고 직접 사용하는가 하면, 전통 축제와 풍습도 분량을 할애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민속적 장면은 호박잎 축제(7), 결혼 풍습(11), 아쿠우 은로 날(17), 장례 풍속(19)에서 풍성하게 묘사된다. 이 소설을 읽는 묘미의 하나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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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알테무지크서울 제25회 정기연주회 - 비올라 다 감바 콘체르타타

일시 : 2025년 8월 30일(토) 14:00

장소 :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연주 : 알테무지크서울

  - 음악감독, 비올라 다 감바 : 강효정

  - 바로크 바이올린 : 김은식, 김상하

  - 바로크 비올라 : 안지원

  - 바로크 첼로 : 이유민

  - 바로크 베이스 : 박연희

  - 쳄발로 : 이승민

프로그램

  - 텔레만, 비올라 다 감바와 현악기를 위한 모음곡 D장조 TWV 55:D6

  - 파이퍼, 바이롤 다 감바를 위한 협주곡 A장조

  - 아벨, 비올라 다 감바를 위한 무반주 모음곡 D단조

  - 그라운, 비올라 다 감바를 위한 협주곡 G장조 GraunWV Av:XIII:36


* 세줄평

고음악 앙상블 공연은 처음이다. 소음량이고 편성 단촐하다보니 IBK챔버홀도 살짝 버겁다는 느낌이 든다. 제대로 아는 곡은 하나도 없다. 밝고 고아하고 경쾌한 음악들이다. 비올라 다 감바 음색을 느끼기에 아쉽다는 생각은 아벨의 곡에서 해소되었다. 파이퍼와 그라운의 협주곡이 활력 넘쳐 재미있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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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8월 27일(수) 19:30

장소 : 삼익아트홀

연주 : 이진현 (피아노)

프로그램

  - 쇼팽, 연습곡 Op.10

  - 리스트, 피아노 소나타 B단조 S.178


* 세줄평

평소 쇼팽의 연습곡은 전곡 듣기는 지루하여 선호하지 않았는데, 실연으로 듣는 곡은 전혀 다르다. 물론 연주자의 열정과 파워가 큰 작용을 하였다. 이후 임윤찬의 음반을 들으니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였던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리스트의 소나타는 좋아하는 곡이지만 이처럼 압도적인 스케일의 곡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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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비룡소 클래식 14
생 텍쥐페리 글 그림, 박성창 옮김 / 비룡소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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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처음 읽는다. 너무나 유명한 동화이지만 오히려 꺼리는 마음과, 내용을 얼추 알고 있는데 굳이 하는 마음이 반반이었다. 생텍쥐페리의 주요 소설들을 순서대로 섭렵하게 된 계기도 <어린 왕자>를 단순히 동화가 아닌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이 책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들려준 가르침은 낯설지 않다. 작가가 꾸준하게 자기 작품에서 설파하였던 의견과 동일하다. 사람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타자와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형성하고 거기에 참여해야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아니, 난 친구를 찾고 있어. ‘길들인다는 게 뭐야?”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 쉽게 잊혀진 어떤 것인데, 그건 관계를 만든다는 뜻이야.”

관계를 만든다고?” (P.89)

 

어린 왕자도, 장미꽃도 관계를 만드는 법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친구가 되지 못하고 좋아하는 사이임에도 헤어지는 길을 택하게 된다. 이는 비단 친구 사이뿐만 아니라 이성 간의 사랑에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에게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P.90)임을 깨닫고 소중하게 여길 때 참된 사랑이 자리 잡게 된다. 어린 왕자가 깜짝 놀랐듯이 지구상에 장미꽃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그중에 정말로 내게 소중한 장미꽃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내게 다른 무엇과도 구별할 수 있는 의미를 지닌 꽃이어서다.

 

사람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랄수록 동심, 즉 순수한 마음을 잃게 된다. 어린 왕자가 소행성을 떠나 여러 별을 여행하다가 만난 사람들의 모습은 결국 무엇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지를 알지 못하게 된 속화된 어른들의 압축판이다. 헛된 권력, 허영심, 숫자에 매몰되고, 술을 마시는 자신이 부끄러워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술꾼처럼 중요한 게 무엇인지 놓친 오늘날의 인간 군상이다.

 

잘 가. , 내 비밀을 말해 줄게. 아주 간단한 건데...... 그건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P.96)

 

화자가 어린 왕자를 만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속이 안 보이는 보아 뱀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상자 속 조그만 양을 어린 왕자에게 그려줄 수 있어서다. 여우에게서 직접적 교훈을 얻는 건 어린 왕자이지만, 화자 역시 어린 왕자를 통해 같은 깨달음을 받게 된다. 그것은 화자에게서 독자에게로 이어진다.

 

어린 왕자는 비로소 사랑할 줄 알게 되었고, 장미꽃을 귀중한 친구로 길들이기 위한 책임감도 느끼게 되었다.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에 대하여 회피하지 않는 책임감, 이것이 뒷받침되어야 존재 간 관계는 진실하고 두터워진다. 관계, 친구, 사랑은 항상 즐겁고 행복하지 않다. 아픔과 슬픔과 인내심으로 묵묵히 견뎌내야 하는 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굳건히 이겨내야 비로소 관계는 단단해진다.

 

연약한 장미꽃은 언제 병들고 스러지거나 꺾여버릴지 모른다. 시간은 영원히 기다려주지 않는다. 어린 왕자는 빨리 소행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랜 시간이 걸려 지구에 왔지만, 느긋하게 돌아갈 수 없기에 어린 왕자는 힘들지만 빠른 길을 선택한다.

 

동화의 마지막 대목은 의외로 쓸쓸하다. 어린 왕자가 뱀에 물려 죽는 장면은 아무리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하지만, 어쨌든 비극적이다. 물론 보통의 존재가 아니기에 어린 왕자는 고향 소행성으로 무사히 돌아가 하늘에서 웃으며 반짝이겠지만 말이다. 이 동화를 요즘은 아이들이 많이 읽도록 권장하는데, 솔직히 아이들이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와 메시지를 속속들이 알아차릴 수 있을지 궁금하다. 물론 작가는 도리어 이렇게 반박하겠지만.

 

어른들이란 이렇다. 하지만 어른들을 나무라서는 안 된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너그럽게 대해 주어야 한다.

물론, 인생을 이해할 줄 아는 우리들은 숫자 같은 건 신경쓰지 않는다.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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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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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으로 한강의 <작별>이 선정되었다. 이 책은 수상작을 포함하여 후보작으로 검토되었던 총 7편의 단편소설을 담고 있다. 작품들 각각이 독자적 미학과 재미를 안겨주고 있어 흥미로운 독서가 가능하였다. <작별>은 이미 다른 곳에서 감상을 기록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나머지 작품의 소감만 언급하고자 한다. 수록 작가 중 이승우와 정이현은 수년 전 작품집- <식물들의 사생활>, <생의 이면>, <그곳이 어디든>(이승우), <달콤한 나의 도시>(정이현) -을 읽은 기억이 있어 반갑다. 나머지 작가는 초면이다.

 

언뜻 겉보기에 두드러져 보이는 유사성은 외지인 혐오 인식이다. 강화길, 김혜진, 이승우의 작품이 여기에 해당한다. <>(강화길)은 시골 동네 속 동남아 혼혈, 도시 사람을 향한 편치 않은 감정을 나타낸다. <동네 사람>(김혜진)은 보수적인 동네 속 젊은 여성들의 외양과 행위가 이질적임을 보여준다. <소돔의 하룻밤>(이승우)에서 나그네로 분한 천사는 물론, 롯 자신도 소돔성에서 타자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누구나 유사하고, 익숙하고 친숙한 것이 아닌 존재와 현상에 대해 본능적 거부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생소한 것에 대한 잠재적 두려움과 위협을 인식하기 때문일 수 있고, 그것이 풍기는 불편함 자체를 거북하게 여겨서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적대적이고 공격적 반응으로 이어지게 마련인데, 소돔성이 명시적이고 극단적인 사례라면 <동네 사람>은 은근한 왕따와 사회적 폭력으로 이어지는 양태이다. <>은 가장 내재적이고 은폐적인 경우다.

 

<언니>(정이현)도 소외와 배제의 의미- 인희 언니는 모교 출신이 아니다 -를 담고 있지만, 이 작품은 지위를 이용한 부당한 권력이라는 다른 유형의 폭력을 강조한다. 약자의 치열한 노력은 인정받지 못하고, 힘겨운 저항조차도 성과 없이 묻혀버린다. 여기서 인희 언니와 그 엄마가 애용하는 벙커는 이중적 해석이 가능하다. 상처의 위로와 치유 공간인 동시에 도피와 퇴행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어느 것이 사실에 가까운가는 전적으로 인물의 선택에 달린다.

 

그러고 있으면, 이러려고 내가 살아왔구나, 살아가는구나. 그런 마음이 들어. 이 방에서 이렇게 숨을 쉬려고.” (P.201)

 

<>은 단합되고 화목한 시골 마을의 얇은 표면 아래 여러 갈등이 내재하고 증폭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미자네와 이장, 화자의 시어머니 간, 대진과 용현, 그리고 화자의 딸 민아 간에는 서로 간 우의를 가장한 미움이 옅게 배어 있다. 이런 요인들로 마을의 일상은 잠재적 불안으로 가득하고, 사람들 간 관계는 미세한 균열로 계속 생긴다. 독자는 민아의 행방불명이 사실인지 화자의 착각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화자가 현상의 핵심을 비로소 깨달았음을 알게 될 뿐이다. “마을에 들어와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방해하는 년”(P.62)인 악귀 손이 타자적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칭할 수도 있음을 말이다.

 

나는 양손에 얼굴을 천천히 묻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그 냄새를 맡았다. 이제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마땅한 일이었다. (P.87, <>)

 

마을, 동네는 사람들의 친밀한 공동체를 말한다. 이 안에서 우리는 적대적 외부의 위협 없이 안심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단지 공간적 이웃이라고 해서 같은 마을, 동네 사람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토박이들에게 있어 새 이주민은 남인 동시에 공동체의 순수성을 깨뜨리는 이질적 존재다. 그네들이 공동체에 동화하려는 노력과 열의를 재빨리 보여주지 않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동네 사람>의 두 아가씨처럼. 자신들은 한적한 동네에서 조용하고 여유로운 일상을 보낸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낯선 존재는 호기심의 대상이다. 말투와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모두 시선과 소문의 대상이며 평판을 좌우한다. 공동체는 더 이상 보호 체제가 아니라 감시 체제가 된다. 동네에서 화자 일행이 숨거나 피할 곳은 없다. 융화되거나 떠나지 않는 이상은. 둘 다 불가능하다면...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내쉬어도 화끈거리는 열기가 가시지 않는다. 목덜미를 타고 뜨거운 기운이 치솟는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또렷해진다. 지금껏 수없이 오간 이 길에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오싹함이다. (P.137)

 

<소돔의 하룻밤>은 성경 속 유명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의 재해석이다. 작가는 매 단락 인물의 선택과 행동의 함의를 심리적, 사회적으로 해부한다. 그 해석은 낯설지 않지만 참신하며 무엇보다 지적으로 흥미롭다. 작가의 지적인 글쓰기가 빛을 발한다.

 

<희박한 마음>(권여선)은 모호하고 은밀하며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 두 인물인 데런과 디엔의 관계도 남녀 부부 또는 연인인 듯하다가 뒤에 가야 모두 여자이며, 나이대도 노년임을 간접적으로 비춘다. 아파트의 계량기 고장으로 인한 층간 소음을 계기로 데런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디엔과의 삶을 회상한다. 노년에 청년 시절을 회상하는 거야 흔하지만, 여기서는 두 사람이 차례로 꾼 꿈 이야기를 통해 두 사람의 관계가 평탄하지 못한 비밀을 담고 있음을 암시한다. 소설을 마지막까지 모호함을 유지한다. 독자는 여전히 두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정지돈의 단편은 독특하게 읽혔는데, 부기를 보고 비로소 일반적 성격의 작품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태순의 회고담 형식을 빌어서 일본인 양코씨와 만남, 오사카 엑스포 안내원으로 참가했던 경험 등을 술회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한국 근대사를 개인적 시각에서 설명 내지 정리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1970년을 전후하여 빠르게 선진화, 미래화를 지향하는 세태 속에서 무조건적 예찬하는 현상과 더불어 양코씨와 같이 소수의 삐딱한 부정적 인물들이 어지럽게 스쳐 지나간다. 결혼 후 이민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났다는 태순의 발언은 시니컬하다.

 

저는 미래란 말을 이해하는데 평생을 다 쓴 것 같은데 지금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미래가 반복된다면 그것을 미래라고 할 수 있나요 라고 말했다. (P.223)

 

표제 <Light from Anywhere(빛은 어디에서나 온다>)는 오사카 엑스포 당시 낙선된 테마를 택하였다고 하는데, 당선된 테마의 선언적 상투성보다 훨씬 예술적, 영감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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