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도 전기 - 그레고리오 대종 교부문헌총서 11
그레고리오 교황 지음 / 분도출판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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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안토니우스>와 마찬가지로 페트라르카의 저작집을 읽다가 문득 호기심이 생긴 인물이 이 책의 저자인 그레고리오 대종, 즉 대교황 그레고리오 1세다. 평생 은수자로 살아가길 바랐으나 불가피하게 교황이 된 인물이다. 서양음악의 원류인 그레고리오 성가의 주인공과 동일인임을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그레고리오 대종은 <대화집>이라는 네 권의 저서를 남기고 이탈리아의 종교 성인과 그들의 일화를 두루 소개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소개한 사람이 바로 베네딕도[베네딕토, 베네딕투스]이다. 솔직히 베네딕도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베네딕트 수도회는 들어본 기억이 있다.

 

아타나시우스로 인해 이집트의 안토니우스가 기독교 세계에서 유명해졌듯이, 그레고리오 대종의 저작은 이탈리아 산속의 일개 수사에게 불후의 명성을 갖게끔 하였다. 비록 표제는 전기라고 되어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전기는 아니다. 베네딕도의 출생과 죽음을 다루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그가 수사로서 겪는 영적 시련과 깨달음을 통해 기적을 행하는 사례 모음집이다.

 

<대화집>의 전체 구조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레고리오는 성 베네딕도를 부각시키기 위해 다른 성인들을 들러리로 세우는 형식을 취한 것은 이탈리아의 성 베네딕도를 이집트의 성 안토니우스나 갈리아의 성 마르띠누스와 필적할 인물, 아니 그 이상의 인물로 소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P.77, 해제)

 

장문의 해제를 제외하면 180면 남짓한 본문인데, 본문은 라틴어 원문과 우리말 번역문의 대역 구조로 이루어진다. 분량으로도 수록 내용으로도 읽기에 부담될 수준은 아니다. 저자 그레고리오와 수사 베드로 간의 대화 형태로 진행된다.

 

저자가 강조하는 점은 수사로서 베네딕도의 불멸의 모범성과 위대성이다. 그는 이미 수비아꼬 시기에 각종 시련을 극복하고 영적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이전에도 이적을 행하였지만 그를 질시하는 다른 수사들을 피하여 몬떼까시노에 정착한 이후 기록은 방대한 이적의 기록이다. 때로는 저자가 베네딕도를 너무 신성시할 정도로 띄우는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에 따르면 베네딕도는 제자에게 물 위를 달릴 수 있도록 하였다. 사탄과의 잇따른 대결은 가뿐히 제압할 정도며 예언의 능력마저 갖추게 되었다. 사도들의 소관이라고 손사래 치던 죽은 이를 살리는 이적마저 이루어냄으로써 베드로와 같은 사도와 동격으로 추앙한다. 35장에 이르면 거의 천상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을 정도다.

 

하느님 안으로 이끌려 올라간 그분은 하느님 이하의 모든 것을 (아무) 어려움 없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분 눈에 비춰졌던 외적 빛 안에는 영혼의 내적 빛이 있었다. (P.231, 35)

 

그레고리오가 유독 베네딕도를 높이 평가하는 사유는 무엇일까? 이탈리아에도 위대한 성인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의도가 전부는 아니라고 본다. 거의 동시대 인물로서 훗날 베네딕도 수도회가 크게 발전하였음을 내다봐서도 아니리라. 그레고리오 대종이 교황에 재위하던 시기는 이탈리아에서 일대 혼란기였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동로마 제국이 한때 이탈리아를 수복하였으나 다시 세력을 잃고 이탈리아반도는 주인 없는 땅으로 여러 게르만족이 횡행하여 법과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레고리오는 윤리적, 종교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전범을 내세우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게다가 베네딕도가 몬떼까시노에 세운 수도원은 로마 신전의 자취에 자리 잡았으니 이교도 선교의 상징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레고리오는 현실을 인정하고 게르만족을 포교 대상으로 삼는 정책을 폈는데, 그들에게 멀리 있는 그리스도와 사도들보다 베네딕도가 훨씬 현실적으로 소구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저자의 집필 목적이 어떠하고, 기독교인이 베네딕도를 어떤 존재로 존경하는지와 상관없이 나와 같이 비신도들에게도 흥미로운 인물이다. 일단 그의 무수한 이적은 흥미로운 일화, 즉 옛날이야기로 생각하면 된다. 중요한 건 그가 육신적, 정신적 유혹을 물리치고 치열한 수도를 거쳐 차근차근 완덕을 향해 나아가고 마침내 도달하였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는 풍요로운 물질로 넘쳐 나고 있기에 오히려 정신적으로 빈곤하고 타락할 위험이 크다. 베네딕도의 삶에서 어떤 교훈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자체로서 큰 보람이 아니겠는가.

 

베네딕도는 <규칙>이라는 책을 유일하게 남기고 있다. 이는 수도원과 수사들이 올바른 수도 생활을 위해 지켜야 할 규칙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를 따르는 수도원들의 연합체가 베네딕트 수도회라고 한다. 단순히 규칙서라면 내게는 관심 밖일 터인데, 그레고리오는 여기서 솔깃한 발언을 하고 있다. 조만간 이 규칙서도 대강이나마 훑어봐야겠다.

 

만일 누가 그분의 생활방식을 더 자세히 알고자 하면, 그분이 제정한 규칙서 안에서 지도하신 그분의 모든 행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실상 성인께서는 당신이 사신 것과는 다른 어떤 것도 도무지 가르칠 수 없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P.233.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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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안토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지음, 허성석 옮김 / 분도출판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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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르카의 일련의 저작을 읽는 가운데, 사막에서 홀로 고독한 수행을 하는 인물들에 관한 내용이 더 궁금해졌다. 이 책의 주인공인 안토니우스는 들어보지 못하였지만, 저자인 아타나시우스는 세계사에서 언급되었던 인물이다. 언제나 아리우스와 대비되는 존재로서.

 

수도원 같은 단체생활이 아니라 홀로 외딴곳에서 숨어 지내며 수행을 하는 사람을 기독교에서는 은수자라고 부르나 보다. 어쨌든 안토니우스,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을 거쳐 백세 이상의 삶을 누렸던 그는 수도승의 시조, 은수자의 사부로 평가받는다. 이 말은 안토니우스 이전에 사막 또는 산속에서 홀로 수도하는 관습이 없었다는 뜻이리라.

 

여기서 드는 궁금증. 왜 안토니우스는 기존처럼 집에서, 마을에서, 마을 근처에서 수행하면 되는데 굳이 인적이 드문 곳을 골랐을까. 이것은 그의 수행이 금욕수행이기 때문이리라. 그는 육체적 욕구를 극도의 최소한으로 충족시키며, 일체의 정욕을 억제하고자 한다. 육체가 풍요로워지면 마음이 느슨해지고, 정욕을 쫓다 보면 신심이 흩어질 것은 자명한 이치다. 안토니우스는 애초에 세속의 유혹을 차단하기 위해 최대한 자급자족하며 숨어 지냈던 것이 아니겠는가. 사막과 깊은 산속처럼 인적이 드문 곳은 세속의 유혹이라는 측면에서 안전하지만, 야생의 위협에 취약하며 안토니우스가 끊임없이 투쟁하였던 악령이 난무하는 장소이다. 위험으로 가득하지만 여기서 승리하며 영광을 구할 수 있는 곳.

 

그러나 네가 참으로 평화 중에 살고자 한다면 내적 사막으로 가거라.” (P.122)

 

사막에 거주하며 평화를 찾는 사람은 세 가지 싸움에서 벗어났는데, 곧 귀와 혀와 눈의 싸움이지요. 그에게 오직 마음의 싸움, 이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P.184, 금언)

 

안토니우스는 악마, 악령과 그침 없는 대결을 벌인다. 그의 정진이 심오할수록 악령은 한층 거칠고 적극적으로 그에게 도전한다. 악령이 성자와 성경을 두려워하여 멀리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그들은 동료이자 우호자인 양 그들의 눈과 귀를 속인다. 강약과 화전의 모든 수법을 동원하여 악령은 수행자를 유혹하고 무너뜨리기 위해 애쓴다. 영적 구원에 실패하는 사람이 많아야 그들은 즐거우므로.

 

정신과 영혼 면에서 깊은 수양을 쌓을수록 어찌 악령의 유혹이 많아지는가. 여기서 악령은 실체인가 허상인가. 육체와 정신의 욕구를 억압할수록 내면의 본능은 이를 충족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발현하기 마련이다. 본디 내게서 나온 것이지만 내가 허용할 수 없는 현상, 곧 그것의 물화가 수도자의 악령 아닐까.

 

수양이 높아질수록 그의 영적 능력은 한층 강력해진다. 악령의 물리침은 물론, 광인과 병자를 치유하는 예시를 이 책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이 안토니우스가 부인하듯이 오로지 높으신 분의 능력이라고 할지라도 속세인의 눈에는 그의 행위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낭중지추라고 한다. 아무리 숨어 지낸다고 할지라도 그의 명성을 눈덩이처럼 커지고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 안토니우스의 주변에 몰려들어 수행을 따라 한다.

 

이 책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문맹이다. 글자를 전혀 모른다는 뜻인지 아니면 성경 해독을 못 한다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떤 경우라도 그가 성경과 종교 이론에 해박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여기 실린 안토니우스의 가르침과 서간 내용을 보면 그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다. 모든 걸 내려놓고 금욕과 기도로 절대자에게 다가가라는 게 요지다. 대중과 교회의 요청에 따라 그는 가끔씩 은수처를 떠나지만 볼일을 마치면 황급히 귀가하였다. 로마 황제의 부름에 끝내 응하지 않고 수사로 영원히 남았다.

 

우리는 범인이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일을 행한 사람을 존경한다. 안토니우스의 삶이 그러하다. 모든 기독교도가 그를 따라 은수자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되며, 될 필요도 없다. 그의 금욕수행은 극단에 치우쳐 고행을 지향한다. 모든 종교적 수행은 일정 부분 금욕을 요구하지만 고행이 과도하여 자기학대에 가까우면 곤란하다.

 

육체는 무엇보다도 단식과 숱한 철야, 그다음 육체를 쇠약하게 하고 육체의 온갖 욕구를 끊는 다른 모든 금욕적 수행을 통해 순수하게 됩니다. (P.213, 서간 1)

 

안토니우스는 아타나시우스의 글로 인해 불후의 영광을 얻었다. 반대로 아타나시우스 또한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기록함으로 인해 영원한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아타나시우스의 전기 자체로만 보자면 흥미롭다. 인간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신앙인의 전범으로 그를 바라봤기에 글에는 온통 종교적 이적과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 다만 모든 걸 떠나더라도 자신의 믿음을 완성하기 위해 모든 걸 버리고 평생을 헌신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확실히 값어치가 있다. 비기독교인의 시각에 이 정도인데 기독교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이지 않겠는가. 그의 금언 38개와 서간 7편이 동일한 맥락이다.

 

그나저나 이집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다 간 안토니우스가 오늘날 그곳이 기독교도를 눈 씻고도 찾을 수 없는 이슬람 땅으로 바뀌었다는 걸 알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렇게나 기독교 이단 아리우스파를 배척하고, 그리스 철학자들과 논쟁하였던 안토니우스가. 마지막으로 그의 금언 중 하나를 소개한다. 관용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다.

 

사람들이 실성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이 미치지 않은 누군가를 보게 되면 넌 미친놈이야!’라고 말하며 그를 공격할 것입니다. 단지 그가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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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6월 18일(수) 19:30

장소 : 수원SK아트리움 대공연장

연주

  - 최희준 (지휘)

  - 수원시립교향악단

  - 원재영 (피아노)

  - 곽재호 (트럼펫)

프로그램

  -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 C단조 Op.35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8번 C단조 Op.65


* 세줄평

일부러 비교적 중앙 앞자리를 선택하였다. 협주곡은 자세히 보고 싶고, 교향곡은 모처럼 음향의 파도에 휩쓸리고 싶어서다. 피아노 협주곡은 다소 의아하였다. 독주와 악단 간 음량 밸러스가 맞지 않은 느낌이랄까 아니면 연주장과도 연관성이 있을 듯. 연주자의 완전한 기량을 감상하지 못한 아쉬움이 든다. 교향곡은 전혀 다르다. 기대하였듯이 쇼스타코비치 사운드다운 강렬하고 단말마적 비명과 무지막지한 폭주가 쏟아진다. 느리고 섬세함과 빠르고 거침의 대조가 오랜만에 듣는 쇼스타코비치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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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6월 17일(화) 19:30

장소 :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연주 : 이호찬 (첼로), 송영민 (피아노)

프로그램

  - 포레, 첼로 소나타 1번 D단조 Op.109

  - 포레, 첼로 소나타 2번 G단조 Op.117

  - 풀랑크, 사랑의 길, FP 106

  - 풀랑크, 첼로 소나타,FP 143


* 세줄평

포레는 낭만적일 거라는 선입견을 첼로 소나타가 말끔히 지워버린다. 그가 과연 20세기 작곡가임을 깨닫게 된다. 소나타 2번의 강렬하면서 고독한 첼로 음향이 뇌리를 울린다. 풀랑크의 첼로 소나타는 역시 풀랑크다운 재치와 현대음악 서법이 결부된 곡이다. 이 곡도 확실히 진지하게 감상할 레퍼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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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국가들 - 누가 세계의 지도와 국경을 결정하는가
조슈아 키팅 지음, 오수원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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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스라엘과 이란이 미사일 공격을 주고받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수년째 전쟁 중이다. 21세기를 전후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유혈 분쟁의 사유로 종교, 이념 등을 언급하고 있지만 핵심은 국경, 즉 영토이다. 시대가 어느 땐데 영토로 전쟁을 벌이는가 의아해하기 마련이지만, 사실이다.

 

세계지도는 단순한 그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실선 한 줄, 아니 점선 한 줄이라도 얻어내기 위한 대가는 녹록치 않다. 특히 저자가 언급하였듯이 미국과 EU, UN은 현 국가 체제 유지를 선호한다. 어지간한 분쟁은 국가 체제 내에서 수용하여 정리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지도 변경을 요구하는 집단의 본뜻에 맞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분리와 인정은 나라를 나라로 정의해주는 두 가지 요소다. 요컨대 국가를 국가로 만들어주는 것은 상호 합의 아래 규정된 세계지도상의 장소성인 셈이다. (P.24)

 

구소련에서 독립한 조지아, 과거에는 그루지야라고 불렸는데, 지도를 자세히 보면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가 국경 내에 점선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들은 국제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조지아 영토이지만, 실질적으로 별도의 독자적 국가로 운영되는 이른바 미승인국이다. 소말릴란드, 언뜻 들으면 소말리아와 동일시되는데 우리가 익히 아는 무정부체제인 소말리아와 구별되는 과거 영국령에 기반한 비교적 안정된 미승인국이다. 압하지야와 소말릴란드는 국제 사회에서 공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데, 그곳 주민 처지에서는 이런 상황이 굉장히 불만스럽기 마련이다. 쿠르디스탄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제국주의 국가가 무분별한 영토 확장을 도모하여 세계를 혼란스럽게 하였다면, 요즘은 다르다. 이미 비할 수 없이 많이 생겨난 국가들로도 모자라 독립 국가 건설을 모토로 하는 갈등이 여전하다. 민족자결주의에 바탕을 둔 민족국가들은 국경 유지와 영토 보존을 신성시한다. 문제는 단일 민족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 국가든지 자국 영토 내에 소수의 타 민족, 문화, 종교 집단이 있기 마련이며, 민족국가의 정체성이 강조되면 이들은 상대적으로 소외감과 불안감, 피해의식이 증폭되기 마련이다. 결국 양파 껍질 벗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계속 쪼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게 과연 해법인가?

 

미국과 캐나다 사이, 아크웨사스네는 독특한 성격의 지역이다. 이로쿼이 인디언의 자치권이 어느 정도 인정되는 곳인 동시에 엄연히 국경선에 따른 관할권의 차이가 중첩된다. 이는 법과 행정 측면에서 바람직한 건 아니다. 관할권의 충돌과 모호함은 자칫 부재 상태를 낳고 이는 악의적 목적에 활용될 수 있다.

 

지정학적 블랙홀은 세계 정치와 국제관계에 대한 종래의 사고방식이 통용되지 않는 장소다. 이런 지역의 법적 관할 여부는 논쟁거리거나 불확실하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서는 밀거래망이 번성한다. (P.116-117)

 

몰타기사단, 에스토니아의 전자 시민권은 실체 없는 국가 정체성의 한 사례라고 하겠다. 이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특히 후자의 실효성을 단기간 내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이 책에서 소개된 키리바시는 물론 몰디브, 투발루 같은 여러 섬나라는 실제로 국가 소멸의 위협에 처해 있으므로 전자와는 다른 의미에서 국가 정체성을 고민하게 된다. 국토가 없는 국가는 존재하는가? 비록 다른 나라에서 땅을 내주어서 이전하더라도 그것을 별개의 독립 국가로 인정하는 게 올바른가.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지칭해야 하겠는가.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온 상승으로 해안 저지대의 침수 우려도 높아만 간다. 당장은 일부 섬나라 국가의 사안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조만간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현안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키리바시는 세계지도를 재편하는 다음번 주요 물결의 최전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정치적 경계뿐 아니라 물리적 경계라는 문제에 의문을 제기할뿐더러 국가의 탄생이 아닌 소멸 문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P.258)

 

오늘날 민족국가 체제는 민족과 국경이 불일치하는 많은 사례와 충돌한다. 민족자결이 존중되어야 할 가치라면, 여러 집단으로 구성된 민족국가는 산산이 쪼개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갈등을 야기하는 소수 집단을 청소하는 방안도 있다. 신성한 우리 국토 내에서 이질적인 집단을 제거하는 방안, 그것이 곧 인종청소이다. 지난 수십 년간 세계지도 변경을 수반하는 정치적 변동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고착화된 국경선과 변함없는 세계지도는 만족과 불만의 양가성을 지닌다. 압하지야, 소말릴란드, 쿠르디스탄은 불만일 테고, 미국을 위시한 체제 안정을 희망하는 나라들과 해당 국가는 비교적 만족스러울 것이다. 민족국가 체제의 강화가 반드시 평화와 번영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보아왔다.

 

다만 국가 수립과 지도 변경은 절대불변의 영역이 아니라는 점이다. 구소련과 유고슬라비아는 차치하더라도 남수단, 동티모르는 독립이 허용되고 이 책에 언급되는 지역은 인정 안 되는 기준은 불분명하다. 어쩌면 일종의 운이 작용하는 것도 있다. 국가의 가장 큰 책무는 자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전하는 것이다. 현재의 국경을 유지하는 것과 변경하는 것, 아니면 저자의 제언처럼 현재의 엄격한 국가 주권을 유연화는 방안 등 어느 것이 해법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아래에 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효한 세계지도를 만들 방안을 찾지 못한다면, 악의적인 동기를 가진 주체들이 우리가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현재의 지도를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P.316)


 

지리와 지도를 핵심적 내용으로 다루는 책에서 의외로 방위, 통계, 지명의 오류가 많다. 귀책이 원서이든, 편집이든 사소한 오류가 신뢰성을 떨어뜨려 양서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면 안타깝게 마련이다.

 

· 트빌리시는 주그디디라는 음침한 국경 소도시에서 322킬로미터 서쪽에 위치한 도시다. (P.35)

· 1900년 무렵 경함을 벌이던 5개국 그리고 야심만만한 개인이던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아프리카 대륙의 90퍼센트를 식민지화했고, 11,0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고향인 16,100제곱킬로미터의 영토를 자기들끼리 분할해 가졌다. (P.61)

· 2015316, 태평양의 섬나라 바누아투도 지도에서 거의 사라질 뻔했다. 대서양에서 기록된 태풍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사이클론 팸(Pam)이 코네티컷 규모의 면적을 가진 이 작은 군도를 덮친 것이다. (P.270-271)

· 물론 이는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무장 분리론자들이 러시아 동부 지역을 쪼개기 전의 일이다.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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