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왕실의 탄생 살림지식총서 86
김현수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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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책표제를 '유럽왕실의 탄생'이라 하였지만, 저자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분야는 영국 왕실의 탄생이다. 이러한 점만 유의하여 두껍지 않은 책을 살펴나가면 흥미롭게 볼만한 가치가 제법 있다.

유럽왕실의 뿌리는 게르만왕국인 프랑크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크왕국이 베르덩조약과 메르센조약으로 오늘날의 프랑스와 독일로 분할되며 이 테두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결국 독일과 프랑스의 다툼은 공동의 선조를 둔 자손들간의 갈등인 것이다.

영국의 게르만족인 앵글로색슨족은 자생적으로 유럽의 주력세력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노르만공국의 정복왕 윌리암에 의하여 지배세력이 교체당하였다. 노르만공국의 바이킹의 일파이니 곧 프랑스와 영국과는 다른 왕국의 출발선상에 놓인 셈이다. 현대의 영국 왕실은 노르만왕조의 후손들이다.

노르만에 의한 영국 정복이 있었다는 史實은 역사책에서 익히 보았지만 그 과정은 잘 알지 못하였다. 이 책에서는 정복세력과 토착세력의 혈투인 헤이스팅스 전투를 상세히 소개하면서 그 전투의 의의를 크게 부각하고 있다. 왜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일제에 의한 조선왕조의 패망 이후 왕실의 개념은 소멸되었다. 조선말 혼란과 집권층의 무능에 크게 상심한 민초들에게 해방 이후 왕실이 등장할 여지는 전혀 없다. 비록 요즘 TV 드라마에서 만약 조선왕실이 현재에도 존속하는 것을 가정한 <궁>이 인기를 끌고 있지만서도.

무수한 해외토픽을 통하여 유럽과 아시아의 왕실의 에피소드가 낱낱이 소개되고 있다. 다이내나 황태자비의 비운의 죽음을 말할 것도 없고 일본 태자비의 아들낳기 노력도 멀찌감치 지켜보는 우리네야 우습기 그지없지만 당사국은 절박한 심정인 모양이다.

대다수의 선진국에서 왕실은 상징적 존재이다. 그들은 자의 내지 타의에 의하여 직접 통치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들에게 남은 건 순전한 명예와 부라고나 할까. 우리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잠재의식 속에 나도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심정이 자리잡고 있는 탓이다. 어린아이의 가슴속에는 가난한 부모 대신 부자 부모에 대한 환상이 숨어 있다고 한다.

역사 속의 왕실은 권력과 폭력에 의하여 자신을 다른 계층과 구분지었다. 비록 다른 방식이지만 오늘날 특수한 계층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은 지속적인 금력에 의존하니, 곧 재벌이다. 대통령은 5년 뿐이지만 재벌 총수는 수십년을 이끌어간다. '삼성공화국'이니 하는 말이 다 거기서 유래한다. 솔직히 말해서 삼성그룹의 총수가 옛날 왕을 부러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수많은 신하들이 임금 앞에서 벌벌 떨었던 것처럼 수십만명의 임직원이 일개인 앞에서 허리를 굽힌다.

인간이 사는 한 그 양태는 달리하더라도 모든이가 평등을 누리는 사회는 오지 않는다. 그래서 '왕실의 탄생'은 유럽에 국한하지 않고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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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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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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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는 '엄마의 말뚝'의 작가다. 그게 내가 아는 전부다. 사실 이 소설도 신간 여행기를 구입하여 덤으로 얻은 것이니 진짜 관심이 있어서 펼쳐든 것은 아니다. 거기다가 여행기마저 내게는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으니 덤이야 말할 필요조차 있겠는가.

다 읽고 난 후 갑자기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라는 소설이 떠오른다. 쿤데라의 열혈 독자에게는 돌맞을 소리겠지만 일단 '농담'이라는 어휘를 통해 연결이 이루어진다. 쿤데라의 경우 농담 한마디로 일시에 반동으로 몰려 그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박완서의 경우는 어떨까. 어릴적 농담 한마디로 존경받는 의학박사 영빈은 수십년 만에 만난 동창과 밀회를 거듭하게 된다. 연관성은 전혀 없다. 더우기 박완서의 소설에서 불륜관계는 한 축의 역할을 수행할 뿐 작품 전체를 끌고가는 구동력은 지니지 못한다.

처음에는 중년 남성과 여성 간의 불륜을 그린 줄로만 받아들였다. 너무나 모범생적인 인생을 살아온 나름대로 성공한 중년 남성에게 평온하지만 재미없는 가정을 벗어나고픈 욕망이 있을 것은 십분 이해한다. 그런데 국민학교 시절의 결혼하겠다는 불순한 발언을 서슴치 않았던 여자 동창을 만나니 갇혔던 물꼬가 터지듯이 그의 감정이 분출한 것이려니.

그런데 어느 순간 이야기는 영빈의 동생 영묘에게로 넘어가 있다. 준재벌가의 맏며느리가 되었는데 남편의 갑작스러운 시한부 인생으로 삶의 색채가 달라지고 죽음을 기다리며 그리고 죽음을 보내는 과정에서 그녀는 철저히 돈으로 결부된 시댁의 인간관계에 몸저리를 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영빈의 아내로 공은 돌아간다. 아내는 남편의 외도를 모른 상태에서 딸만 둘인 상황에 불편함을 느끼고 늦동이 아들을 갖기 위한 주도면밀한 작업을 진행한다. 남편이 구박한 것도 아닌데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확고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기막힌 사실은 그녀가 일자무식도 아닌 교사라는 그래도 합리적 이성과 판단을 하리라고 여겼던 직군이라는 점이다.

이 세 유형의 가족 관계가 서로 고리를 물고 있다. 어느 관계가 더 낳는가를 따지는 것은 오십보백보일 뿐. 흔히들 가족이야말로 모든 가치의 지고지선한 기둥으로 칭송하기 급급하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최고의 미덕은 가족의 가치를 옹호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실상에서 가족간에 바람직한 이상적인 관계형성을 얼마나 자주 볼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오히려 이 작품의 가족처럼 위악적인 가면을 드리우는 밋밋한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해설을 통하여 작가 박완서의 주된 관심사가 가부장적 가족관계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알게 되었다. 여기서도 영묘 시댁을 통하여 속물자본주의의 근성이 물씬 풍기고 있다. 또한 가부장적 가족관계에 대한 차가운 비난도 명백하다. 그렇지만 보다 더 큰 제재는 위선적 가족에 대한 소묘가 아닌가 싶다.

박완서는 연배에서는 지식인 작가다. 일찌기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였었고 나이 마흔에 등단하였다는 점은 그가 얼마나 지적이며 정제된 문장과 어휘를 구사하는지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글은 너무도 깔끔하다. 언제라도 감성은 이성의 필터를 거쳐서 표출된다. 그의 글에서 뜨거운 감정의 분출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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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3.1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불의 기억 2 - 얼굴과 가면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박병규 옮김 / 따님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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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권은 1701년에서 1900년까지 200년간의 아메리카(미국은 아메리카가 아니다!) 역사를 고발하고 있다.

이 책을 통독하면서 새삼 절감하는 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가이다. "가장 좋은 인디언은 죽어 있는 인디언이다"라는 말이 대변하듯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위시한 소위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 원주민은 인간이라는 관념을 찾아볼 수 없다. 황인종이 그러할진대 오로지 노예를 목적으로 납치해온 흑인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메스티소나 물라토의 존재를 보건대 동물적 육욕을 억제하지는 못했던 듯 싶으니 참으로 위선적인 가식의 얼굴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식민지 산업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점차 본국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는 무리들이 생겨나고(주로 식민지 지배층이다) 이들이 원주민들을 감언이설로 꼬드겨 무기를 들고 본국에 투쟁하게 만든다. 제국주의에 대한 숭고한 항쟁이라, 얼마나 멋진 용어인가. 그대 순진한 원주민들이여, 그들은 제국주의 본국에 억압받고, 간사한 식민지배세력에 이용당하며, 끝내는 동족에 등을 돌린 머리없는 배신자에게 쫓겨나는구나.

19세기 중반부터 아메리카의 여러나라들이 차츰차츰 독립을 쟁취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배층(사제,대지주)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독립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노예와 원주민들의 삶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 단지 지배층이 바뀌었을 뿐.

오늘날 중남미를 떠올린다. 그들의 경제적 빈곤, 정치적 혼란, 그 뿌리는 식민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불과 백여년에 이러한 암흑세상이 지구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할 따름이다. 그러니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꿈틀거리는 원주민의 몸부림이 그치지 않을 수밖에.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아르티가스의 단절된 꿈에 더불어 슬퍼한다. 분열을 극복하고 대아메리카공화국을 이루고자 노력하여 한때는 성공한 듯 보였다. 사상누각도 이보다는 더 튼튼했을 것이다. 결국 그의 이름은 일개 국명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으니 그래도 아주 의의가 없었던게 아니라고 자위해야 할까. 호세 아르티가스는 찰나의 성공이나마 거두지도 못했으니 어찌하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대국 사이에 낀 오늘날의 우루과이, 거기에는 불의에 굴복하지 않았던 아르티가스의 서사시가 묻혀있다.

기막힌 사실은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연합군에 의한 파라과이 침공이다. 눈앞에 자신들과는 달리 정의의 길을 가는 그들이 그렇게 못마땅했나 보다. 오늘날 파라과이 영토는 갈기갈기 찢긴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니 말이다.

눈을 현대로 돌려 작금의 중남미는 왜곡된 사회구조가 교정되었는지 알고 싶다. 핍박받는 원주민과 하층민들에게 자신들의 나라는 기쁨과 감사의 대상일까 아니면 증오와 저주의 존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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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3.16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
장 베르쿠테 지음 / 시공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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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002.

작년이었던가 대영박물관 전시회를 관람했을 때 로제타석을 보았다. 물론 모조품이었다. 그외에도 많은 이집트와 중동지역의 고대유물을 인상깊게 보았다.

역시 작년에 중국 실크로드 여행을 다녀왔을 때다. 둔황 석굴을 들여다 보았더니 많은 석굴들이 도굴당한 상태였다. 독일, 프랑스 등등의 소위 탐험가 및 학자들에 의하여. 그때 통역을 해주던 박사 연구원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도둑놈'이라고 하는 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몇달전 신문 한켠에 난 기사를 보았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의하여 세계문화유산인 바미안 석굴이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둔황석굴 내의 많은 벽화에서 부처의 눈이 도려내진 기억이 떠오른다.

많은 이집트학 선구자들이 유물을 발굴하거나 또는 도굴하는 기록을 보거나 읽으면서 내내 마음 한구석에 떠나지 않은 생각들이다. 고고학이란 학문은 한때 유물도둑과 동일시되었다고 한다.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을 속여서 또는 몰래 빼가는 행위는 물론 비열하다. 동시에 어쨌든 그들 덕택에 많은 역사적 유물들이 망실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도 또한 사실이다. 양날의 칼인 셈이다.

그 찬란했던 이집트 문명이 완전히 잊혀지다시피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이미 로마시대에 이집트 문자는 아무도 해독불가능한 암호가 되다시피 하였고 중세를 거치면서 이집트에 고도의 문명이 존재했다는 기억조차 사라졌다니. 그러니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입 때 발견한 로제타석을 가지고 끈질긴 연구끝에 샹폴리옹이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게 되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여겨진다.

고대 이집트에 관하여 엄청난 연구가 이루어졌고 많은 사실들이 드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집트의 많은 것이 신비에 싸여 있다. 소위 세계 몇대 불가사의라고 하는 피라미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많은 영화에서 이집트를 신비스러운 세계로 다루는 것도 이해가 된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는 처음 접하였다. 고급용지를 사용하였고 수많은 도판을 사용하여 읽기와 보기의 균형을 꾀하였다. 그럼에도 담고 있는 내용은 만만하지 않다. 대중적이지만 제법 깊이를 담고 있어서 쑥쑥 진도가 나가지는 못한다. 물론 낯선 분야인 탓도 있지만.

이 책의 도움을 받았지만 여전히 난 이집트에 무지하다. 영화와 소설을 통해서 람세스라든지 투탄카멘 등의 어휘는 귀에 익었고 당시의 의상과 건축도 제법 복원을 해놓았지만 당시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가 그들이 어떤 역사적 굴곡을 겪은가에 대한 총체적 시각이 부족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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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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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기억 3 - 바람의 세기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박병규 옮김 / 따님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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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지막 세번째 권 읽기를 마치다. 읽는이가 이렇게 숨막힐진대 저자는 어떤 심경으로 이 처절한 작품을 집필할 수 있었을지 감탄과 경이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권은 20세기 라틴아메리카 현대사를 아우르고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제국주의에서 잇달아 독립을 쟁취하여 진정한 그들만의 역사를 개척해 나가는 장면에서 한가닥 희망을 엿본다면 20세기 후반에 이르러도 그들 민중의 삶에는 일말의 개선도 없다는 현실 앞에서 좌절과 허탈을 금치 못한다.

비록 독립을 하였지만 단지 지배층의 교체를 의미할 뿐 국민 전체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오히려 더욱 악랄하게 탄압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혁명과 뒤집는 쿠데타의 연속. 유럽은 물러났지만 이제 미국의 강력한 개입과 조종은 이름만 독립국일뿐 여전한 식민지와 다름없다.

만약 지금의 우리사회에서 언론과 방송이 군부의 쿠데타를 노골적으로 요구한다면 국민들의 반응과 태도는 어떤 양태를 보여줄 지 궁금하다. 그런데 그런 일이 남미에서 자연스러운 일상적 현상으로 비일비재하다. 볼리비아의 역사 150년에서 쿠데타만 150번 이상이라니 이건 어떤 정권도 평균적으로 1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슬프기 짝이 없다.

남미 지배층과 국민들이 과연 동일한 국가 이념을 공유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수십만명의 목숨을 앗는 대량학살이 손쉽게 자행된다는 말인가. 식민역사의 오염된 유산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 혹은 사회주의 이념은 모두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도구일 뿐이다. 무엇이 절대적으로 진리인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국민이 정당한 투표절차를 통해서 사회주의 이념을 채택하고 지지하였다면 그 대의를 존중하고 따르면 될 것이다. 어찌 타국에서 국민들의 선택을 집단적 어리석음이라고 낙인찍고 국가체제를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인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차라리 외세와 손잡고 기대는 특권층은 이미 국민이기를 포기한 존재들이다.

21세기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찬반여론이 거세다. 분명 나름대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측면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세계질서를 유지하고 재편하기 위하여 무수한 폭력적이며 야만적인 비열하기 짝이 없는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아직도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는 쿠바가 단적인 예다. 단지 자신의 바로 앞에서 반대 체제가 들어섰다는 것 때문에 일체의 문호를 닫아걸고 국가를 전복하기 위하여 수십년을 공작해 왔다는 것. 카스트로의 쿠바가 미국을 공격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암울한 세계속에 가끔씩 한줄기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나 그 빛을 너무 약해서 오래가지 못하다가 20세기 말에 이르러서 구름이 점차 걷히고 있다. 오늘날 브릭스라고 일컬어지는 브라질을 포함하여 여러국가에서 독재체제가 무너지고 자유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중남미에서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체제가 자리를 잡은 역사는 없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침략 이전 그들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았고 기억에서 삭제되도록 강요당하였다. 그리고 그후 그것은 주체의 역사가 아니라 억압과 피지배의 수난사였다. 이제 겨우 자신들의 진정한 역사를 꾸려나갈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하루바삐 안정된 사회체제를 구축하여 앞으로 다시는 어두운 과거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희망할 뿐이다. 그것이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고 그들보다 몇발짝 앞서나간 이웃의 소박한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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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3.27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