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의 기억 2 - 얼굴과 가면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박병규 옮김 / 따님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두번째 권은 1701년에서 1900년까지 200년간의 아메리카(미국은 아메리카가 아니다!) 역사를 고발하고 있다.
이 책을 통독하면서 새삼 절감하는 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가이다. "가장 좋은 인디언은 죽어 있는 인디언이다"라는 말이 대변하듯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위시한 소위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 원주민은 인간이라는 관념을 찾아볼 수 없다. 황인종이 그러할진대 오로지 노예를 목적으로 납치해온 흑인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메스티소나 물라토의 존재를 보건대 동물적 육욕을 억제하지는 못했던 듯 싶으니 참으로 위선적인 가식의 얼굴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식민지 산업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점차 본국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는 무리들이 생겨나고(주로 식민지 지배층이다) 이들이 원주민들을 감언이설로 꼬드겨 무기를 들고 본국에 투쟁하게 만든다. 제국주의에 대한 숭고한 항쟁이라, 얼마나 멋진 용어인가. 그대 순진한 원주민들이여, 그들은 제국주의 본국에 억압받고, 간사한 식민지배세력에 이용당하며, 끝내는 동족에 등을 돌린 머리없는 배신자에게 쫓겨나는구나.
19세기 중반부터 아메리카의 여러나라들이 차츰차츰 독립을 쟁취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배층(사제,대지주)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독립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노예와 원주민들의 삶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 단지 지배층이 바뀌었을 뿐.
오늘날 중남미를 떠올린다. 그들의 경제적 빈곤, 정치적 혼란, 그 뿌리는 식민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불과 백여년에 이러한 암흑세상이 지구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할 따름이다. 그러니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꿈틀거리는 원주민의 몸부림이 그치지 않을 수밖에.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아르티가스의 단절된 꿈에 더불어 슬퍼한다. 분열을 극복하고 대아메리카공화국을 이루고자 노력하여 한때는 성공한 듯 보였다. 사상누각도 이보다는 더 튼튼했을 것이다. 결국 그의 이름은 일개 국명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으니 그래도 아주 의의가 없었던게 아니라고 자위해야 할까. 호세 아르티가스는 찰나의 성공이나마 거두지도 못했으니 어찌하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대국 사이에 낀 오늘날의 우루과이, 거기에는 불의에 굴복하지 않았던 아르티가스의 서사시가 묻혀있다.
기막힌 사실은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연합군에 의한 파라과이 침공이다. 눈앞에 자신들과는 달리 정의의 길을 가는 그들이 그렇게 못마땅했나 보다. 오늘날 파라과이 영토는 갈기갈기 찢긴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니 말이다.
눈을 현대로 돌려 작금의 중남미는 왜곡된 사회구조가 교정되었는지 알고 싶다. 핍박받는 원주민과 하층민들에게 자신들의 나라는 기쁨과 감사의 대상일까 아니면 증오와 저주의 존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