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스톤 공원의 동물 친구들 - 우리 곁의 야생 동물들 시튼의 동물 이야기 7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이성은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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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의 통상적인 작품 특징은 동물 주인공을 하나하나 개별적인 인격을 지닌 존재처럼 간주하여 화자가 보고 듣고 겪은 그들의 사례담을 생생하게 기술하는 방식이다. 이 책은 시튼의 기존 작품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이 책은 시튼 자신의 알고 지냈던 동물에 대한 일종의 소개서 내지 안내서에 가깝다. 그것도 북아메리카 전역이 아니라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국한해서. 시튼 자신은 서문에서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의의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1872, 옐로스톤 국립공원이 설립되면서 야생 동물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러면서 서서히 이 동물들도 우리를 향해 다른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현재 북서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이 보호구역에서만 야생 동물들이 넘쳐날 뿐만 아니라, 에덴동산 시절부터 사람을 향해 보였던 모습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P.5)

 

이 책에 나타나는 동물의 수는 무척 많다. 코요테, 프레리도그에서 시작하여 여우, 수달 등의 털 짐승들과 사슴류, 다람쥐류, 곰 및 고양이과 동물 등 어지간한 포유류는 거의 섭렵하고 있다. 심지어 박쥐도 등장한다. 따라서 등장 동물은 충분한 호흡을 갖고 독자적인 개성을 보여 주기보다는 종의 일원으로서 화자에 의해 독자에게 소개된다. 일부 두드러진 일화조차 동물이 아닌 인간의 관점으로 접근한 경우다. 이 책의 주인공은 화자 자신이다.

 

국가에 의한 보호를 받고 있으니만치 순수 야생 동물과는 행동양식이 다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을 두려워하고 적대시하지 않는 대신 무덤덤하거나 오히려 친밀한 관계를 맺는 예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검은꼬리사슴의 유명한 높이 뛰는 모습을 아내에게 보여 주기 위해 사슴을 놀라게 하였지만 전혀 의외의 반응을 보인 사례가 전형적이다.

 

녀석이 놀라 도망쳤을까? 전혀 아니올시다. 녀석은 옐로스톤 보호구역에 사는 사슴이었다. 총이나 개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 채 평생을 안전하게 살아 온 것이다......전혀, 단 한 발자국도. 그래서 오늘날까지 내 아름다운 반려자는 검은꼬리사슴이 언덕을 향해 튀어올라가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P.94)

 

화자와 동물 간의 숨 막히는 대결이 코믹하게 펼쳐지는 우는토끼 대목도 흥미진진하다. 뻘뻘 땀을 흘리고 용을 쓰며 토끼굴을 열심히 파헤치는 화자를 저 멀리 뒤쪽에서 여유롭게 바라보는 토끼의 대조적 장면이 눈앞에 선하다.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은 스컹크와 오소리에 대한 옹호도 이채로운데, 스컹크에 대해서는 미국의 상징 동물로 적합하다는 의견도 제시한다.

 

나는 스컹크라면 가슴 깊이 감탄해 마지않는다. 사실, 이 동물이야말로 미국에 어울리는 상징이라고 나는 한때 주장했다......녀석이야말로 이상적인 시민이다. (P.141)

 

강인하고 튼튼하며 끈덕진 데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용감한 오소리”(P.161)도 높이 평가하며 존경을 표한다. 소년 해리와 친절한 오소리 이야기의 독자라면 화자의 의견에 십분 동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야생 동물의 외양과 소리 등에서 호감 대신 거리끼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게 사실이다. 이 녀석이 성질이 사나운 건 아닐지, 나를 당장 공격해서 물어뜯지나 않을까 등등. 야생 짐승 때문에 죽음의 위험에 빠졌던 사례를 들려달라는 집요한 기자의 질문에 퓨마가 아닌 미친 황소의 이야기를 태연히 들려주는 화자는 우리의 상식에 경종을 울린다.

 

미지의 존재는 일단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게 마련이고 소중한 가치를 알아보기에 앞서 먼저 적대하게 된다. 사람들 사이도 마찬가지지만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마음을 열고 서로에게 다가가기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시튼은 이렇게 제안한다.

 

초원 위로 나지막이 솟은 흙무더기에 앉아 있는 힘세고 해로운 데 없으며 고결하기까지 한 저 야생 동물에게 이처럼 다정한 습성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깨달아서, 나와 마찬가지로 녀석을 사랑하고 또한 그 종족을 멸종 위기에서 구하는 방법을 찾는 데 동참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P.180-181)

 

시튼이 사냥을 중단하게 된 일화가 실려 있는데 음미할 가치가 있다. 시튼이 말코손바닥사슴 암컷 소리를 흉내 내 수컷을 유인하여 아내의 사냥이 성공하였다. 이 경험이 일반인에게는 엄청난 영웅담과 자랑거리임이 틀림없지만 시튼에게는 불쾌감만 남긴다. 야생 동물 애호가인 자신이 떳떳지 못한 방식으로 그 아름다운 동물을 단지 재미 삼아 죽이는 데 일조했다는 자책감이리라.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난 듯했고 사냥 책과 이야기에 나왔던 올바른 규칙을 따라 정확하게 딱 떨어진 듯 보였지만, 아주 불쾌했다.

.......

그 이후로 나는 말코손바닥사슴을 결코 불러내지 않았고, 그때 사냥했던 라이플총을 두 번 다시 사용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선반에 걸어 놓았다. (P.120)

 

익숙한 코요테에서 비롯하여 불쌍한 조니 같은 흑곰까지 다양한 동물군과 함께, 얼핏 동일해 보는 유형도 다종다양한 종으로 나눠진다는 사실, 그럼으로써 우리네 야생 동물 인식이 얼마나 빈약한지도 이 책을 통해 드러난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방문하여 여기에 소개된 동물들을 실물로 찾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즐거움은 배가될 것이다. 하지만 여러 사정상 책갈피를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펴야 하는 우리네 같은 사람들조차도 자체로서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어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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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 고양이 - 진정한 동물 영웅들 시튼의 동물 이야기 5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장석봉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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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수록된 여덟 편의 이야기는 전혀 새롭지 않다. 이전에 읽은 논장 판 5권 세트에 전편이 분산 수록되어 있고 당시 이야기 하나마다 적지 않은 즐거움을 누렸다. 오늘 개별적 논평을 다시 읽어보아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으므로 새삼 하나하나 억지로 반복 기술할 생각은 없다. 다만 밝히고 싶은 점은 여전히 이 책의 이야기가 신선하고 재밌다는 사실이다.

 

시튼 동물기의 주인공은 대체로 야생동물이다. 순수한 야생동물이라면 이 책에 등장할 이유가 없다. 그네들의 삶과 죽음을 우리가 알 까닭이 없음에서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과 인간이 접촉하였고 인간에 의해 그들의 삶이 영향받고 관찰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가로놓였다, 인간과의 관계가 적대적인가 또는 우호적인가. 모든 동물이 야생은 아니다. 우리 주변의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동물들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그네들의 내적인 삶을 정말로 잘 알고 있는지 정말 자신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 책에 나타나는 동물들은 이러한 유형 중의 어느 하나에 속하지만, 작가는 단언한다. 그들은 모두 영웅이라고.

 

인간과 동물의 접촉 및 갈등은 대개 인간이 자신의 생활 영역을 점차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동물의 영역과 중첩되는 데서 발생한다. 아메리카들소가 인간에 의해 멸종하자 먹잇감이 사라진 배드랜즈의 빌리같은 늑대가 목장을 습격하게 되었다. 또는 인간의 간섭으로 먹이사슬 체계가 일거에 무너짐으로써 자연의 균형을 어긋나게 된 데서 문제의 발단이 비롯된 예도 있다. 카스카도 주의 멧토끼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까닭은 인간이 그들의 천적을 학살해 버린 데서 시작하였다. 도대체 매와 올빼미를 사냥한 사람들에게 보상금을 주는 멍청한 법”(P.211)을 제정한 사람들은 제정신인가?

 

사람들은 원인을 차근차근 살펴보지 않는다. 당장 눈앞에 목도한 상황만을 문제시할 뿐이다. 늑대가 소를 잡아먹는다고? 그러면 늑대를 다 죽여라! 토끼들이 너무 많아 들판이 황폐해진다고? 그러면 토끼를 학살해라! 매우 단편적이고 즉흥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문제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은 외면한 채.

 

인간의 사냥과 학살에 대항하여 순전히 자신의 힘과 능력만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동물을 보면 절로 박수가 나온다. 게다가 비열한 수단으로 동물 영웅을 해치려고 하는 야비한 인간에게는 반감이 치솟는다. 정당한 대결의 규칙조차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란.

 

페어플레이라고! 이런 게 너희들이 말하는 페어플레이야. 이 더러운 거짓말쟁이들, 이 치사한 겁쟁이들 같으니라고!” (P.230)

 

미키는 꼬마 워호스를 풀어주었고, 화자는 사냥개들을 몰살시킨 배드랜즈의 빌리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동정심이든 영웅에 대한 외경심이든 확실한 것은 인간 내면 깊숙한 데서 분출하는 감정이다.

 

늑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녀석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 고귀하지만 짧은 길을 선택한 것이다. (P.292)

 

반면 위니펙의 늑대전서구 아녹스의 주인공에 대한 독자의 감정은 명백한 동정과 안타까움이다. 늑대는 위험을 감수한 채 굳이 위니펙에 머물러야 했을까, 지미가 그리웠다면 가끔씩 몰래 들러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등등. 아녹스도 마찬가지다.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반간지 않는 바람난 배우자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차라리 그냥 주저앉아 편안한 삶을 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를 집으로 강렬하게 잡아당기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움 아니면 본능?

 

집으로, 집으로, 즐거운 집으로! 아녹스보다 더 강렬하게 집을 사랑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아녹스의 강렬한 본능은 옛 비둘기장에서 있었던 시련과 슬픔을 잊게 해 주었다. 창살 안에 갇혀 지낸 세월도, 새로운 사랑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그 힘을 내리누를 수는 없었다. (P.92)

 

뒷골목 고양이 키티는 다면적 요소를 담고 있다. 초라한 길냥이의 인생 역전 스토리. 길냥이가 왕족 고양이로 대접받는 장면에서 엿보이는 인간의 얄팍함과 우스꽝스러움. 키티의 선택을 통해 되묻게 되는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가에 대한 질문. 위니펙의 늑대, 그리고 전서구 아녹스와 마찬가지로 키티 또한 현재의 안온함과 풍요로움을 거부하고 뒷골목 고양이로 남는 길을 선택한다. 독자로서는 둘 모두의 행로에 다소간 공감하면서도 반드시 그러했어야 하는가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하다.

 

나머지 이야기는 전반적 분위기가 다르다. 하얀 순록의 이야기는 실화와 전설이 교묘하게 뒤섞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일단 지리적 배경이 미국과 캐나다가 아니라 유럽 대륙의 노르웨이라는 점에서 이질적이다. 그럼에도 썰매 끌이 순록을 비인간적으로 대우하는 처사에 대한 하얀 순록의 분노는 동물 모두의 공통적 감정일 것이다.

 

불테리어 이야기의 스냅을 영웅으로 부를 것인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것이다. 이 이야기의 분위기는 해학적인데, 화자가 자칭 개 전문가라고 하면서 첫 상봉 시 쩔쩔매는 대목이 그러하다. 사냥개들이 늑대를 구석에 몰아넣고 마지막 전투를 망설이는 대목에서도 결코 그들이 겁을 내는 게 아니며, 단지 숨을 고를 뿐이라고 강변하는 어절도 마찬가지다. 스냅의 맹목적 용기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유용하지만 개 자신에게는 무모하다. 현명한 사냥개는 늑대 사냥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지 않는다. 그런 개는 바보일 따름이다.

 

소년과 스라소니의 대결은 진정한 야생의 세계를 보여준다. 인간이 야생동물에게 우위에 있는 것은 강력한 도구를 사용한다는 점에 있다. 노약자나 병약자가 포식자와 마주친다면 상황은 정반대로 진행될 수 있다. 이것이 엄혹한 자연의 법칙이다. 포식자 또한 자기 생명 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다. 작가가 스라소니를 물리친 소년이 아닌 죽임을 당한 스라소니를 영웅의 일원으로 취급한 까닭은 새끼의 생존을 위해 먹잇감을 구하려는 어미 스라소니의 처절한 노력에 마음이 쏠려서였을 것이다.

 

자연의 세계에서는 누구도 영속하지 않는다. 포식자든 피식자든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과정을 반복한다. 개체는 일생을 마치지만 종은 영속한다. 우리는 개체로서 불가피한 삶을 영위하지만 생명 자체의 소중함과 존엄성은 존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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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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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작가의 무게 방점은 부제에 놓여 있다. 언론의 선정적 보도의 결과가 개인의 명예를 실추시켰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늘날의 폭력은 반드시 물리적 힘에 의존하지 않는다. 대중의 입방아에 올릴 수 있다면 진위 여부는 중요치 않다. 대중은 흥미 욕구만 충족시킨다면 보도의 진실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언론과 대중의 야합이 카타리나 블룸에게 폭력을 가한 셈이다.

 

이 소설은 작가의 목적성이 뚜렷하다. 실제 사건의 바탕에 작가적 상상력이 일부 가미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럼으로써 독자는 논픽션으로 이 작품을 심정적으로 인정한다. 여기에는 작가 자신의 모호한 태도로 일조한다. 그는 후기에서 이 작품의 소설적 성격을 부정하거나 제한적으로만 인정한다.

 

이것은 하나의 팸플릿이자 논쟁의 글로, 그 자체로 생각했고 계획했으며 그대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내가 바로 이 테러리스트 소설(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소설도 아니고 테러리스트도 등장하지 않는다.)을 썼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지만 않았다면 (P.147)

 

제목, 부제, 모토라는, 얼핏 보기에는 사소한 것 같은 이 세 가지가 이 이야기의 중요한 구성 요소다. 이것들은 이야기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이것들이 없다면 이 이야기의 팸플릿 같은 성향-이것은 사실 경향 소설이다!-이 이해되지 않는다. (P.151)

 

이것의 소설 여부를 떠나 중요한 점은 언론의 자유라는 무소불위의 방패에 의지하여 본질을 저버리고 타락한 언론매체에 의해 인권이 무자비하게 유린당하는 현실을 문학적 형식을 통해 적나라하게 까발렸다는 데 있다.

 

죽음을 맞은 베르너 퇴트게스와 아돌프 쇠너 기자는 개인적으로 억울하게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이 도대체 죽어야 할 당위성을 인정할 수 없을 테니. 대중의 알권리를 충족하기 위해 헌신한 대가가 고작 죽음이라니. 자신과 비슷하거나 훨씬 심한 기자들도 세상에 널려 있고 오늘날에도 여전한데 말이다. 퇴트게스의 후임자인 에긴하르트 템플러의 기사도 전임자와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다.

 

<차이퉁>에 헤드라인과 센세이션을 제공하고 다른 신문에까지 진짜이야기를 제공하려 함으로써 그저 자신의 의무를 다했을 뿐인, 신문 기자의 이런 끔찍한 무지‘, 그렇다, 거의 아무것도 알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그의 무지함 (P.150)

 

요는 이러한 선정성과 센세이션을 도구 삼아 언론의 본질보다는 상업적 효과에 치중하는 상업 언론이 무자비하게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상업성에 치중하다 보니 매출 증대에 도움이 된다면 진실 여부는 중시하지 않고 따라서 무수한 기레기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오늘날 언론은 기자와 기레기를 구분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혼재되어 있다.

 

진상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차이퉁>의 모든 비방, 거짓말, 왜곡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P.122)

 

일개 젊은 여성 카타리나 블룸이 그렇게 화제가 되고 속속들이 파헤쳐진 연유가 오로지 미모가 결부된 상업성에 있다고 보기에는 지나치다. 언론의 입맛에 꼭 들어맞는 다른 사유가 있기 때문일 텐데, 빨갱이 투르데로 명확해진다. 카타리나가 일하는 블로르나 댁에서 부인이 좌파라는 점이 핵심이다. 까닭은 이 작품의 배경이 1970년대 초, 독일이라는 점을 유념하면 충분하다.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지배적 가치구조를 이루던 당시, 좌파 세력이 사회의 유력인사가 되고 그들이 범죄자의 은닉과 부도덕한 여성을 후원하여 사회의 근간을 흔든다고 선동할 때 대중의 관심과 반응은 격렬해진다. 더욱이 그 여성이 정직한 노동의 가치를 무시하고 보다 손쉬운 수단으로 부를 축적하며 일말의 회개 없이 뻔뻔한 태도를 보인다고 한다면 그에 대한 대중의 반감과 분노는 한층 치솟게 마련이다. 이 모든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언론의 과도한 작태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텐데 오로지 조작, 날조 그리고 선동으로 이루어낸 결과라고 할 때 그들에 면책을 부여하는 게 마땅할지 심히 의심스럽다.

 

그는 다음 면을 읽고, <차이퉁>지가 카타리나는 영리하고 이성적이라는 자신의 표현에서 얼음처럼 차고 계산적이다라는 말을 만들어 냈고, 범죄성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을 표명한 말에서는 그녀가 전적으로 범죄를 일으킬 수 있다라는 말을 만들어 냈음을 알게 되었다. (P.38)

 

잔잔한 연못에 누군가 돌멩이를 던지면 한동안 파문이 일고 난 후 다시금 잔잔해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말 그럴까? 나중에 나는 몰랐다, 의도는 순수했다, 단지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외쳐본들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블로르나 부인은 일자리를 잃었고 남편은 중심적 업무 대신 시답잖은 일거리만 주어졌다. 사업상 긴밀한 친구이자 동지는 그와 거리가 멀어졌다. 이쯤에서 되묻는다. 그들 부부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이 쓰레기를, 한 사람을 세상 끝까지 추적하는 이 빌어먹을 쓰레기’(P.87)가 빚어낸 결과다

 

이런 소재는 자칫 감정에 휩쓸리기 쉽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분명한 사안에서 글쓴이와 읽는이가 똑같이 흥분하면 역시 선동적 글쓰기에 지나지 않게 마련이다. 작가는 객관적이고 건조한 문체를 구성한다. 때로는 조소와 냉소를 날리지만 결코 감정의 고조를 용납지 않는다. 작가가 냉정할 때 독자가 더욱 몸이 단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작가는 배수 작업에 비유한다. 자신의 역할이 물빼기가 원활하게 되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한정한다. 배수구의 물이 막히거나 고임 없이 안정적으로 흐를 수 있도록 정체된 웅덩이를 뚫는 일. 반복되는 작가의 차분한 배수 작업 비유는 언론의 과도한 흥분과 선동에 대조적이다. 그래서 더욱 논쟁의 글로서 성공적으로 되었다.

 

여기서 의도하는 바는 다름 아닌 일종의 배수 혹은 물 빼기 작업이다. 명명백백한 정리 과정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때때로 수면 차이나 수면 조절이 필요한 흐름을 타게 되더라도, 관대히 이해해 주길 바란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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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여우 이야기 시튼의 동물 이야기 6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장석봉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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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여우는 붉은여우의 변종이라고 한다. 은여우로 불리는 까닭은 털빛이 검정과 회색이 섞여 있어 외관상 은색으로 빛나 보여서라고 한다. 은여우는 아름다운 모피 덕분에 사냥꾼의 집중적 관심 대상이 된다는데 그들로서는 반갑지 않은 관심이라고 해야겠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도미노 또한 은여우로서 숱한 사냥 위기를 헤쳐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선택된 여우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겨울이 다가오면서부터였다......그 여우를 왜냐하면 그 귀족은 지금 자신에게 걸맞는 호사스러운 옷을 걸치고 있었으므로. 겨울옷을 입고 서 있는 도미노는 장대한 은여우였던 것이다. (P.38)

 

인간의 눈에 비친 여우는 대체로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인간과 영역을 접하면서 농장 등에서 손쉬운 먹잇감을 구하는 여우의 행태는 인간에게 피해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활할 정도로 영리함은 그들을 잡고 싶어 하는 인간의 눈에 좋게 비칠 리 없다. 기존의 시튼 이야기에서도 여우에 대한 묘사는 부정적이거나 양가적 감정이 혼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이 작품 속의 도미노에 대해 작가는 시종일관 공감과 동정의 따스한 시선을 드리우고 있다. 도미노 부부가 합심하여 기러기 사냥에 성공하는 장면은 그들의 근육과 지성, 끈기의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낸 성과로 상찬받아 마땅하리라.

 

이들 부부는 한몸이다. 새끼들은 잊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잊어야만 한다. 죽음만이 이들 부부를 갈라놓을 수 있다. (P.99)

 

여기서 도미노 부부는 일부일처제의 바람직한 전형으로 치켜올려져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짝에 헌신하는 장면을 작품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간들의 대대적인 여우 추적 대목을 보라! 추적에 지친 암여우가 위기 상황에 놓이자 도미노는 자신을 일부러 드러내어 모든 사냥꾼과 사냥개가 자신을 쫓도록 유도한다.

 

야생동물의 삶은 언제나 죽음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도미노의 인식처럼 낯선 짐승은 모두 적이기 마련이다. 그중에서 인간은 가장 강력하고 위험한 존재. 그들의 잘못은 단지 인가 근처에 거주하는 데 있다. 아니, 사람들이 여우굴 가까운 곳으로 접근하였다는 게 보다 사실에 가깝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새끼 도미노. 모피를 탐내는 사냥꾼의 덫, , 그리고 사냥개. 무수한 여우들이 목숨을 잃는다. 우리의 도미노도 죽음의 목전에 다다른다. 작가의 외침을 들어보라! 이것은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 모두의 심경이리라.

 

! 사시나무 골짜기의 강이시여, 최후를 맞을지도 모를 도미노의 흔적을 지켜 주세요. 울타리가 되어 적으로부터 보호해 주소서! (P.129)

 

은여우의 생존을 단지 운이라고 폄하할 필요는 없다. 도미노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십분 발휘했고 여기에 운이 더해졌을 뿐이다. 도미노 가족은 끝내 살아남았고 그것으로써 성공하였다. 작가가 아름다운 도미노 찬사를 말미에 덧붙인 것은 과연 응당한 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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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 바이킹의 신들 현대지성 클래식 5
케빈 크로슬리-홀런드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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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다른 북유럽 신화 관련서와 비교할 때 이 책의 특징은 해설서와 이야기책의 중간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50여 면의 서론을 두고 북유럽 신화 체계의 전반적 개요-우주론, 주요 신들 등-를 충분히 다루어 신화 이야기에 대한 독자의 이해도를 높이고 있다. 어차피 북유럽 신화 원전에 충실하게 그대로 번역하면 대다수의 독자는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신화의 시간적, 내용적 흐름을 재구성하고 불친절하거나 불명료한 대목은 글쓴이의 상상력이 메꾸어야 한다.

 

부제가 의미하듯이 북유럽 신화에서 순전히 신들이 등장하는 내용만 다루고 있다. 통상 반지 이야기로 불리는 뵐숭 가문과 니플룽 가문의 비극은 소개하지 않는다. 북유럽 신화의 주인공은 신들일 수밖에 없으니 당연할뿐더러 덕분에 세계 창조에서 시작하여 라그나뢰크로 막을 내리는 일관된 신화 체계가 주는 전언은 혼란스럽지 않고 명료하다.

 

이 책의 구성 자체는 원전에 충실하다고 하겠다. 보다 대중적인 개설서는 흥미로운 사건 중심의 이야기만 편집하여 서사 중심의 신화적 흐름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는 반면, 이 책은 비가, 노래, 연가 등의 제목이 달린 원전의 내용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개설서를 읽은 독자로서도 생소한 내용과 장면에 자주 맞부닥친다. 리그의 노래, 그림니르의 비가, 바프트루드니르의 비가, 힌들라의 시, 하르바르드의 노래, 로드파프니르의 비가, 알비스의 비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신화의 중심적 내용이 이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신화의 폭과 깊이를 풍부하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몇 개의 내용만 간단히 들여다본다.

 

힌들라의 시에서 프레이야와 수퇘지로 변신한 그의 애인 오타르의 존재가 드러난다. 프레이야의 품행은 목걸이를 얻기 위한 네 난쟁이와 동침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렇게 방정하지 못하다. 힌들라는 이를 비난한다.

 

그림니르의 비가에서 그림니르[오딘]가 자신에게 온정을 베푼 가이로트의 아들 아그나르에게 세계와 신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대목은 흥미롭다. ‘오딘과 빌링의 딸은 빌링의 딸에게 실망한 오딘의 여성 비난의 글로 해석되는데, 고금이 유사하여 미소를 짓게끔 한다. ‘로드파프니르의 비가는 오딘이 인간에게 남겨 준 교훈 내지 훈계의 장이라고 하겠다.

 

이 책의 아쉬운 점도 언급하자면 간혹 편집상 교열이 미흡하다는 인상이다. 그리고 영어권 책이므로 번역 자체도 영어식으로 이루어져 일반적 표기와 다소 차이가 있다. 라그나뢰크 대신 라그나로크, 발드르 또는 발데르 대신 발더, 회니르 대신 호니르가 그러하다. 이건 독자가 적응할 수밖에 없다.

 

반복해서 북유럽 신화를 읽다 보니 새삼 간과했던 장면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몇 가지를 다시 생각해본다. 신화 초반부에서 로키는 장난꾸러기의 신이었다. 그런 그가 신들에 적대하여 라그나로크의 주역이 된다는 것은 분명히 무슨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원래 거인족인 그가 자신의 근본과 숙명을 인식했을까, 신들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행한 처사에 분개하였을까. 어쨌든 발더의 살해를 유발하고 신들에게 악담을 퍼붓는 로키는 이미 라그나로크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라그나로크 실행의 첫 단추를 꿰었다.

 

다시는 이런 잔치를 열지 못할 거야. 날름거리는 불꽃이 이 궁전을 완전히 불태워 버리고 자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릴 것이거든. 자네 몸뚱이도 불꽃 속으로 사라질 거고 말이야 (P.379)

 

라그나로크에 대해 추가하자면, 오딘과 바프트루드니르는 라그나로크와 신들의 최후를 알고 있었다. 라그나로크는 부지불식간에 닥치지 않았다. 오딘은 신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발할라에 모은 전사들로서는 역부족이었다.

 

티르와 히미르의 관계도 다시 정리해본다. 히미르는 티르의 친부인가 의부인가? 다른 곳에서는 티르를 오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일단 논외로 하자. 티르가 히미르의 친자라고 하면, 티르는 신족이 아닌 거인족이라는 셈이다. 로키와 마찬가지로. 히미르가 티르의 친부라면, 토르가 히미르를 죽이는데 말리지 않고 수수방관하는 티르는 천륜을 저버린 셈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히미르는 티르의 의부라고 해야 설명이 가능하다.

 

라그나로크에서 주르트와 대결하는 프레이르는 보검이 없어 역부족으로 죽음을 맞는다. 프레이르는 게르드와 결혼하기 위해 스키르니르에게 대가로 그의 보검을 주었다. 여기서 그의 비극이 배태되었다. 자신의 청혼을 타인에게 의탁한 소극성. 결혼 성사를 위해 설득이 아닌 저주의 주문을 통한 위협과 겁박의 사용. 프레이르와 게르드의 결혼 생활의 행복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누가 봐도 온당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신은 정의롭고 거인은 불의하다는 이분법적 견해는 올바르지 않다. 앞서 프레이야의 행실을 보았듯이 오욕칠정의 면에서 신들도 차라리 인간적이다. 적수 바프트루드니르를 꺾기 위한 오딘의 해법은 정당하지 못하다. 그런 오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바프트루드니르의 차분한 태도가 오히려 감동적이다. 자신의 딸의 구혼자인 난쟁이 알비스를 물리치기 위한 방법도 토르답지 않게 비열하다. 미드가르드를 일대 혼란으로 몰고 간 안드바리의 저주받은 반지 또한 발단은 신들의 무자비한 강탈에서 비롯하였다.

 

라그나로크는 신화 세계의 멸망이다. 신들과 거인들이 최후를 맞이하고 몇몇 신만이 간신히 살아남았다. 세계의 중심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인간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종말인 동시에 출발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하여 땅 위에도 새로운 생명들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종말이었다. 그리고 다시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P.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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