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크라바트 ㅣ 비룡소 걸작선 16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 지음, 박민수 옮김 / 비룡소 / 2000년 1월
평점 :
품절
청소년 문학이라고 틀을 정해 놓기가 애매한 작품이다. 중세를 배경으로 환상 풍의 성장소설이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이 주는 다채로운 의미 부여는 녹록지 않다. 독일 동부 지역, 폴란드와의 인접 지역이라는 지리적 배경, 환상과 마법이 당연한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중세의 시대적 배경. 굉장히 이국적인 동시에 묘한 비현실성을 자아내는데 작가의 서술도 사실성에 얽매이지 않아 한층 그러하다. 작품 전체에 일관된 통일성보다는 각지에 흩어진 마법사와 관계된 신비한 개별 에피소드를 한데 그러모은 듯한 느낌이 강하다.
음식은 훌륭하고 풍족하잖아. 게다가 머리 위에 지붕도 있고-예전 같으면 아침에 눈을 뜨면서 저녁에 잘 곳을 걱정해야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 침대는 따뜻하고 기분 좋게 말라 있고 그런대로 푹신한데다가 빈대나 벼룩도 없고 말야. 이건 거지 소년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 아니겠어? (P.32)
크라바트가 코젤브루흐의 방앗간에 안착하게 된 연유다. 나날의 끼니와 잠자리 걱정을 하는 처지에서 안정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다면 앞뒤 잴 필요조차 없다. 궁핍한 중세의 경제적 상황을 알게끔 해준다.
배고픔이 가시면 그때야 비로소 주위를 둘러볼 심적 여유가 생기는 법. 방앗간이 생각만큼 좋은 곳이 아님을 깨닫고 도망칠 생각을 품지만 이미 늦었다. 마법의 서약으로 그는 철저하게 주인 마법사에게 예속된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잇따른 도망 시도가 무위로 돌아감을 첫 번째 꿈속에서 겪게 된다. 작품 말미에 메르텐의 탈주가 실패하고 자살 시도마저 가로막히는 대목에서 독자는 주인 마법사의 절대적 위력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호언장담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 방앗간에서 누가 죽고 누가 사는지는 내가 결정한다!” 주인이 소리쳤다. “나만이 그걸 결정할 수 있어!” (P.245)
주인이 직공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런대로 대우가 나쁘지 않고 마법도 배울 수 있으니 별일 없다면 직공들이 방앗간에 안주할 수 있으련만 하나의 난관이 가로놓여 있다. 그것은 일 년에 한 명씩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는 것인데 이는 인력으로 막을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엄숙한 법칙과도 같다. 크라바트는 자신에 유달리 친절하고 의지했던 톤다와 미할이 연거푸 죽음을 맞이하자 현상을 용인할 수 없다. 게다가 이들의 죽음은 방앗간 내에서 언급조차 금기시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마냥 나날을 지속해야 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다.
크라바트의 방앗간 생활은 삼 년간 지속되며 매년 비슷한 양식이 반복된다. 누군가의 죽음과 새로운 구성원의 등장, 마법사의 대부가 등장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의문의 방아 찧기, 부활절 의식 등. 작가는 여기서 역사성을 불어넣기 위해 아우구스트 선제후와 귀족으로 변신한 주인의 회담 장면을 삽입한다. 스웨덴과의 전쟁을 계속할지 중단할지의 의사결정에서 마법사는 전쟁을 주창한다. 죽음을 부르는 사악한 편에서 보자면 평화는 불편한 법이므로.
매년 반복되는 방앗간의 나날은 크라바트에게 한가지 선택이 불가피함을 알려 준다. 안주와 도전 중에서의 선택. 다소간의 부정과 불의를 감내할 수 있다면 안락하고 평온한 삶이 보장되어 있다. 우정과 정의를 선택하면 불편과 위험을 무릅써야 하고 목숨마저 장담하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길을 향해 걸어갈 것인가. 마법의 위력은 강력하며 이를 갖고자 하는 유혹이 커질수록 삶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올바른 방향에서 멀어지게 된다. 톤다의 무덤에서 주기도문을 떠올리지 못하는 크라바트의 모습처럼.
이 작품에서 크라바트의 꿈은 작품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현실에서 체험하지 못하는 방앗간의 진상을 경험하게 해주기도 하며, 톤다의 도움을 구하고 자신에 닥칠 앞날을 예시하여 대비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네 번째 꿈에서 크라바트는 꿈속에서 칸토르카의 도움으로 마법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칸토르카는 마치 크라바트에게서 그 어떤 오점을 지워 주고 있는 것 같았다. 크라바트는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칸토르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칸토르카가 자신을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P.263)
칸토르카는 크라바트에게 구원의 여신의 의미를 지닌다. 주인의 마법에 씐 방앗간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힘이라는 상투적이고 진부하지만 설득력 있는 설정이라면, 이를 실현하기 위해 크라바트가 칸토르카를 연상하고 환상 속에서 대화를 주고받으며 꿈속에서 교감을 갖는 대목은 플라토닉한 사랑의 순수성을 나타낸다. 오로지 그런 사랑이라야 마법사의 시험을 거치고 사랑하는 사람을 굴레에서 구출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칸토르카가 말했다.
“나를 걱정하기 때문에 두려워한다는 걸 말이에요. 그 때문에 당신을 알아본 거예요.” (P.337)
주인은 크라바트가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대담한 제안을 한다. 자신의 후계자가 되라는. 마법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으며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매혹적인 유혹의 자리. 우정과 사랑의 복수를 굳게 다짐하지 않았다면 흔들릴 수도 있지만 크라바트는 단호하다.
그리고 유로를 잊을 수 없다. 바보스러운 유로야말로 참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임을 크라바트는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현실적으로 주인에게 대항할 힘이 없는 유로로서는 그것이 자신을 보전하는 최상의 방책일 수밖에. 크라바트는 주인의 함정에서도 유로를 향해 빈 총을 쏘면서 마법에 굴하지 않고 우정을 중시하는 참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크라바트가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된 분기점이라고 하겠다.
이색적이며 흥미롭지만 의외로 읽기가 만만치 않은 작품. 작가의 다른 작품도 경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