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차가운 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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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껍데기를 갖고 산다. 혹자는 그것을 가면이라 칭한다. 껍데기든 가면이든 그것은 외부 세계로부터 나를 보호하거나 가리는 목적이다. 타인의 날카롭거나 호기심 어린 시선을 차단하며, 소심하고 내성적인 사람이 외부와의 접촉을 꺼려 방패막이를 삼기도 한다.

 

우리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위선자라고 일컫는다. 이처럼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부정적이다. 솔직히 말해보자. 안팎이 한결같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존재하는지, 그들의 세상살이는 평안한지를. 대다수 사람은 위선적인 면모를 지닌 채 살아가기 마련이다. 어린 나이에서 비롯되었든 성인이 된 후 시작하였든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이며, 껍데기 또는 가면의 넓이와 두께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내가 정성과 지혜를 다해 빚은 탈 속에서 끊임없이 탐색하고 긴장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사랑받거나 칭찬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P.68)

 

이 작품 속 화자이자 주인공인 조각가 장운형과, 인테리어 디자이너 E에 대해 낯설고 이질적인 인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와 동류에 속해서이다. 위선적인 집안과 부모 아래서 일찌감치 세상의 속리를 깨우친 화자는 반생을 철저하게 두꺼운 가면을 쓴 채 살아온다. 세상은 진실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원하고 기대하는 것에 따르고 부응하는 데 있다. 그렇기에 그는 진실을 감출 수 없는 손을 믿으며, 손으로 작업하는 조각을 직업으로 택한다. 화자가 삶에서 마주치는 두 명의 여자와 마주친다. LE.

 

무엇인가 숨겨져 있었다. 끔찍한 무엇인가가. 그 숨겨진 것 위로, 저 아이는 저렇게 이상스러운 아름다움을 가졌다. 순간 나는 그녀에게 애정을 느꼈다. (P.85)

 

L은 연민과 혐오를 동시에 안겨주는 인물이다. L의 아픈 과거에 동정하면서도 그가 폭식과 거식을 반복하며 자신의 삶을 축내는 대목에서는 괴기스러움에 외면하고 싶을 정도다. L은 가면을 쓸 줄 모르거나 아주 얇은 가면 밖에 갖고 있지 못하다. 그녀의 자존감과 가치판단은 전적으로 외부로 향해 있다. 무리한 다이어트를 해서라도 좋아하는 남자와 어울리겠다는 그녀의 사고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요즘 많은 젊은 여성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오히려 순진하기에 가면을 쓰고 껍데기를 두를 줄 모르며 세상의 풍파를 오롯이 맨몸으로 마주한다.

 

육손이의 가슴 아픈 굴레를 천형처럼 지닌 E는 어떠한가. 뭇 남성들의 시선과 설렘을 끌어내는 영민하고 당당한 여성의 꺼풀 아래 얇고 흰 속살을 지닌 본모습이 숨어 있을 줄 누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호숫가에서 백조가 우아함을 유지하기 위해 수면 아래 맹렬히 발을 젓듯이 그녀의 삶은 긴장과 압박, 노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녀가 이따금 플러그 빠진 인형처럼 일순간 넋이 나간 듯한 양태를 보이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장운형은 처음에 점토로 사람의 손을 빚는다. 그가 보기에 인체 중 가장 솔직하고 믿을 수 있는 부위가 손이다. 제아무리 얼굴과 몸을 둘둘 말아 감추더라도 손을 통해 그 사람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어서다. 그가 라이프캐스팅으로 전환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인데, 껍데기 속 숨겨놓은 본모습의 인간 면모를 드러내고 싶은 것과 함께, 손을 통해 자신의 실체가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이다. 그는 진실을 알고 싶으면서도 진실을 가리는데도 진심이었다.

 

E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의 몸 어디에선가 미미하게 새어나오곤 하던 구역질과 공허의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자석의 같은 극처럼 나를 밀어내곤 하던 환멸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 그것은 애정이라 할 수도 있고 오히려 반대의 것이랄 수도 있는, 극도로 양가적인 감정이었다. (P.280)

 

L은 그를 떠나고, 그는 E와 세상의 시선에서 사라진다. L의 껍질은 얄팍하므로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였지만, 그 때문에 홀로 껍질을 벗어던지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화자와 E가 뒤집어쓴 가면과 껍데기는 튼튼하고 빈틈을 거의 찾을 수 없는 형국이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상대방이 뭔가를 숨기고 있음을 깨닫는다. 역겹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질긴 인연으로 묶인 두 사람. 그들이 자신과 상대를 옭아맨 단단한 껍데기를 마침내 깨뜨릴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은 더는 기존의 인물로 남아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마지막 대목에서 H 외에 아무도 달라진 두 사람을 인지하지 못한 것은 상징적이다. 두 사람의 본모습을 아는 사람은 H밖에 없으므로.

 

우리에게서 일체의 껍데기와 가면을 벗겨버리면 어떤 장면이 전개될까. 모르긴 해도 그리 유쾌하거나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피부가 신체와 환경을 경계 짓듯이, 심리적 껍질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어느 정도 필요하리라. 다만 그것이 굳고 단단한 껍데기로 변질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화자 어머니의 하얀 탈바가지 얼굴. 고상하고 품위 있는 위선적 지성인의 민낯을 보여주는 아버지의 얼굴. 그 점에서는 오히려 두 손가락을 잃은 외삼촌이 더 솔직하고 덜 위선적이다. 그도 없어진 손가락을 가리려 애썼지만, 여기서 실망을 느낀 것은 아마 화자 혼자뿐일 것이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P.313)

 

다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비좁고 단단한 껍데기에 갇혀 있을 때 우리네 생명은 위축되고 말 것임을. L의 거대한 비만일 때 손과, 다이어트 후 온기감을 상실한 손을 비교해 보자. L의 육체의 풍요로움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날씬한 E의 차가운 몸과 입술, 그리고 메마른 육체와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가면은, 껍데기는 결국 사물에 불과하다. 그것의 본질은 다만 텅 비어있음이다.

 

이 소설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갖추고, 장운형의 원고가 본문으로 중간에 들어가 있는 액자 구조를 취하고 있다. H는 작가의 분신이자 서사 전개와 마무리를 담당한다. 그는 또한 작중 인물의 여정에 대한 치밀한 관찰자이자, 장운형과 E의 탈태를 유일하게 알아차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펴낸날이 2002118일이다. 보유한 한강 책 중 유일한 1쇄본이다. 신기하여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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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의 태양 히타이트 제국 - 김경상 사진집
김경상.이기우 지음 / 학연문화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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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제국을 다룬 신간이 나왔고, 게다가 유물과 유적 사진집이라고 하니 더욱 기대감이 크다. 앞서 두 권의 히타이트 관련 도서를 읽었지만 시각 자료의 부족함에 아쉬움이 컸다. 내가 튀르키예로 여행 가서, 그것도 히타이트 유적지를 방문한 기회를 얻을 가능성을 기약할 수 없으니 말이다.

 

신국판보다 큰 판형, 4백 면에 가까운 두툼함, 고급지를 사용한 묵직함까지 사진집에 어울린다. 그런데 책을 펼치는 순간 당황스럽다. 흔히 생각하는 사진집이 아니다. 사진과 글의 비중이 대등하다. 사진작가의 약력을 보니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사진을 다큐멘터리에 접목하였으니 글의 비중이 크고 역할이 중요하리라 짐작한다.

 

우리가 스핑크스 게이트를 지나려 할 때, 마치 그 문이 고대의 의식에 우리를 초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들어가자! 이곳에서 우리는 신성한 세계와 맞닿을 수 있을 거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희망적으로 외친다. 이 순간, 고대 히타이트의 신화와 전설이 살아나는 듯, 우리의 가슴 속에 뜨거운 열정이 솟구친다. (P.45)

 

이것이 사진집인가, 다큐멘터리인가? 아니면 한 개인의 여행 수상록인가? 사진에 대해서는 별다른 불만은 없다. 더 많은 사진이, 더 큰 크기로 수록되었으면 하는 정도. 글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다큐멘터리 영상처럼 감성적 문장이 사용되었으면 그러려니 할 텐데, 시종일관 영탄적이며 감상적 문장이 난무한다. 주관적 감상의 과도함은 오히려 독자의 몰입을 방해할 정도다. 아니면 나의 감성과 상상력이 빈곤하여 글쓴이와 공감을 못 하는지도 모르겠다.

 

섬세한 문학작품과 미술작품도 아닌 폐허의 잔해와도 같은 성벽과 돌, 깨어진 부조에서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의 감명과 통찰력, 경이를 느낄 수 있는가. 문학적 영감을 투사했다면 할말 없지만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던가. 131면의 한 부조에 대한 설명을 예시로 든다. 과도한 상상력과 문학적 표현을 남용하였는데, 글쓴이가 부조에서 이를 찾아냈다면 대단한 감수성의 소유자라고 할 만하다.

 

왼쪽에 서 있는 저글러는 긴 머리를 소유하고 있으며, 짧은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녀의 몸짓은 우아하면서도 강렬하다. 그녀가 단발을 삼키는 모습은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내려는 듯한 열정과 역동성을 보여준다. 저글러의 시선은 관객을 매료시키며, 그녀가 던지는 물체들이 공중에서 춤을 추듯이 빛난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자신감과 끈기가 가득 차 있다. (P.129)

 

너무 비판적이지 않나 싶지만 그만큼 실망의 깊이를 반영한다. 사실 더 많은 비판은 편집과 교정을 향해야 한다. 부실하거나 산만한 원고라도 편집자의 꼼꼼한 가감과 배치, 교정을 거쳤다면 보다 깔끔한 책이 되었을 텐데 이 책에서 그 역할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에는 중복되는 내용이 두서없이 반복되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반드시 그래야 할 당위성이 없으므로 편집의 무심함을 보여준다. 내용 중복 사례는 P.255-256P.256-260을 비교하면 금방 드러난다. 히타이트 번영과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 부분이다. P.326-333도 마찬가지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가 고대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는 내용인데, 앞부분에 언급한 내용을 되풀이하고 있다.

 

교정의 오류도 자주 눈에 띈다. 예컨대 김해 금관가야 유물을 열심히 소개하는 대목에 뜬금없는 성산 대가야 사진 설명이 들어가거나(P.167), 5장의 카라테페 요새를 방문하는 내용인데 갑자기 야즐르카야 방문길이라고 적고 있다(P.192). 참고로 야즐르카야는 2장에서 다룬다.

 

각 장의 배치도 유기적 맥락이 취약하다. 4장 히타이트와 고대 한국 유물의 연관성은 뜬금없으며, 8장은 히타이트라기보다 아시리아와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가깝다. 5장은 후기 히타이트에 해당하는데, 히타이트 제국의 멸망 이후이므로 순서상 가장 뒤편에서 다루는 게 합당하다. 9장은 박물관 유물 소개의 글을 그대로 옮긴 듯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사진집은 사진이 중심을 차지하고, 글은 사진 내용을 소개하는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는 견해다. 책 전반부에서 히타이트 역사 개요를 충실히 쭉 훑어 사진 이해의 기초 지식을 제공한 후, 본문은 하투샤, 야즐르카야, 알라자휘육, 카라테페 요새, 퀼테페 유적과 유물이 히타이트 역사에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무슨 연관성과 의의를 지니는지 덧붙이면 충분하다. 독자들이 이 책을 집는 이유는 결국 사진 때문이 아니겠는가.

 

히타이트 제국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독자라면 수록한 사진이 다소간 도움이 되겠지만, 초심자라면 글 따로, 사진 따로의 편집으로 전체적 내용 이해가 쉽지 않으리라. 출판 자체가 워낙 희소한 히타이트 관련 서적이고, 글로만 접하게 마련인 유적, 유물 사진을 좋은 품질의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뛰어난 기획이다. 감상평도 이에 부합하여 좋게 평가하고 싶지만 솔직히 다소간 실망스럽다. 기획에 미치지 못하는 문자 콘텐츠와 편집, 교정의 수준이 두드러져 읽는 내내 진한 아쉬움을 남겨준다.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역작이 나왔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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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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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쇼코의 미소

씬짜오, 씬짜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한지와 영주

먼 곳에서 온 노래

미카엘라

비밀

 

2024년 서울대 학생들이 가장 많이 빌린 책 중 두 편이 들어 있고, 고려대 학생들이 가장 많이 빌린 책 중 다른 한 편이 포함된 작가. 최은영. 나로서는 전혀 처음 듣는 이름인데, 혹시 뛰어난 신진 작가를 놓치는 게 아닌가 싶어 서둘러 이 책을 읽는다. 작가의 첫 작품집이다.

 

수록 작품 일곱 편을 관통하는 공통적 특징이 우선적으로 두드러진다. 각 작품을 개별로 분절하다 보면 중복되고 반복될 우려가 있기에 하나의 큰 맥락에서 일관된 특성을 다루어 보고 싶다. 분명한 것은 작가는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양태를 나타낸다는 점이다. 그 점을 논외로 하자면 독서는 흥미로운 경험이기에 후속작도 기대된다.

 

첫째, 과연 글로벌 시대다. 작품의 지리적 배경은 물론 등장인물의 인종적 배경까지 다채롭다. 일본(<쇼코의 미소>), 독일과 베트남인(<씬짜오, 씬짜오>), 프랑스와 케냐인(<한지와 영주>), 러시아와 폴란드인(<먼 곳에서 온 노래>). 우리 문학의 지평이 그만큼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이것이 새로움에 대한 손쉬운 접근에서 비롯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둘째, 사회 부조리에 대한 강한 의식이다. 순애 언니의 남편은 빨갱이로 몰려 감옥 생활을 하고 출소 후에도 심신이 온전치 못하다. 미카엘라의 아빠는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덕분에 가정생활은 평탄하지 못하다. 학생운동 전통에 치열한 노래패의 선배는 권위적이고 성차별 문화에 젖어 있다. 우리는 월남전을 미국과 베트남 간 전쟁으로 생각할 뿐 월남에서 우리가 저지른 행위는 무심하다. 작가는 인물의 입을 빌려 주저 없이 비판한다.

 

전쟁요? 그건 그저 구역질나는 학살일 뿐이었어요.” 응웬 아줌마가 말했다.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사무적인 말투였다. (P.81, <씬짜오, 씬짜오>)

 

셋째, 세월호 사건. 작가가 작품들을 공들여 쓰고 있을 당시 세월호 사건의 사회적 파장이 거세었다. 작가도 여기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으니, 이 사건을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 여럿 있다. <미카엘라>, <비밀>이 그러하다. 전자는 동명의 세례명을 가진 서로 다른 두 딸의 엇갈린 운명을 미카엘라 엄마가 하나로 품어내는 인식을 통해 세월호 사건이 빚어내는 참사의 실체를 분명히 한다. 후자는 가족의 슬픔과 고통의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연락이 끊긴 손녀딸을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순진한 자술이 비극을 한층 배가한다. 작품해설을 통해서 모호한 암시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이는 저만의 숨으로, 빛으로 여자를 지켰다. 이 세상의 어둠이 그녀에게 속삭이지 못하도록 그녀를 지켜주었다. 아이들은 누구나 저들 부모의 삶을 지키는 천사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누구도 그 천사들을 부모의 품으로부터 가로채갈 수는 없다. 누구도. (P.241, <미카엘라>)

 

넷째, 여성의 세계. 여성작가이다 보니 비중이 높을 수 있겠지만, 작중 주요 인물과 능동적 행위자는 죄다 여성이다. <쇼코의 미소>의 할아버지, <한지와 영주>의 한지를 제외하면 남편, 아빠는 어떤 이유로도 작중에서 왜소한 모습이다. 영주의 남자친구는 쪼잔한 모습이다. 순애 언니의 남편은 어찌 되었든 그 모든 불행의 단초가 된다. 미카엘라의 아빠 또한 노동운동에 매진하면서 정작 가정을 빈곤 상태로 빠뜨리지 않는가. 특히 <씬짜오, 신짜오>의 아빠는 소통과 인정을 거부하는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다섯째, 작품의 형식이 대체로 회상적이다. 고등학교 교류 학생으로 알게 된 쇼코와 소유의 인연은 할아버지와 주고받은 편지를 전달하러 온 쇼코의 출국으로 이어지기까지 과거를 내내 회상한다. 베를린에서 이웃한 응웬 아줌마 일가와의 추억도 훗날 화자가 회상하며 다시 아줌마와 재회하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화자 엄마의 눈으로 바라본 자신과 순애 이모의 가슴 아프고 슬픈 삶의 여정은 사후 화해로 이어지기에 안타까움과 애틋함이 교차한다. 화자 영주가 프랑스 수도원에서 만난 케냐 청년 한지와의 만남은 자체로 막막한 추억이다. 서울과 페테르부르크를 넘나드는 화자와 미진 선배의 인연, 화자와 율랴의 회상은 망자에 대한 사랑과 공감 아니겠는가. 할머니 말자는 치명적인 병으로 살날이 많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손녀 지민을 그리워한다. 중국에서 연락이 끊긴 손녀의 진실을 모른 채.

 

여섯째, 소통과 단절. 수록작 모두는 가족, 이웃, 사회, 인종 간 소통이 어떻게 형성되고 깨어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가족이라고 늘 돈독하고 화목하지 않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오히려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심이 소통의 단절을 가져온다. 미스터 김과 쇼코가 서슴없이 속내를 교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소유보다 가까워서가 아니다. 영주는 부끄럽고 창피하고 잘못한 일을 유독 한지에게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는가. 화자의 엄마는 그토록 순애 이모를 사랑하면서도 저버릴 수밖에 없었는지. 화자의 엄마와 응웬 아줌마가 순수하게 나누었던 유대는 역사적 사건에 얼마나 취약했던가. 소통과 유대가 원활히 작동할 때 인물 간 관계가 따뜻하며 긍정적으로 작용함을 작가는 보여준다.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그런 태도가 서서히 그들의 사이를 멀게 했고, 함께 살았던 시간 동안 쌓아왔던 마음들도 더 이상 그 관계를 지탱해주지 못했다. (P.114, <한지와 영주>)

 

일곱째, 순수한 서사의 미덕. 작가는 문장에 별다른 문학적 기교와 꾸밈을 덧붙이지 않는다. 오로지 이야기 자체가 주는 힘으로 작품을 이끌어 나간다. <쇼코의 미소>가 주는 아련한 슬픔, <한지와 영주>가 들려주는 막막한 애정의 느낌은 오로지 인물들의 고유한 삶과 행동, 그들이 주고받는 관계가 빚어내는 다양한 스펙트럼에 있다. 그것의 결과가 비록 이별과 죽음으로 이어지고 인물들이 행복하게 나아가지 못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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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니트 에디션) (3종 중 1종 랜덤)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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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은 한강과 더불어 내가 애정하는 작가다. 근년 들어 잠시 소홀했는데, <이중 하나는 거짓말> 니트 에디션을 구매하면서 다시 관심을 두려고 한다. 내가 고른 파란색 표지는 채운 버전이라고 한다.

 

이 소설은 세 명의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모두 24장 구성인데, 지우, 소리, 채운이 번갈아 가며 각 장의 화자를 담당한다. 그들이 풀어내는 이야기의 결은 밝거나 따뜻하지 않다. 차분하고 자성적인 그들의 내레이션은 흔히 기대하는 성장소설의 희망적인 성격과는 완연히 다르게 흘러갈 것임을 짐작케 한다. 게다가 작가 김애란도 초기작과는 달리 이후 작품들에서 상당히 다른 변모를 보이지 않았던가.

 

세 명 모두 가정사가 딱하다. 지우는 가정을 버린 아버지를 제외하고 엄마와 함께 엄마 애인 집에서 함께 사는데, 그 엄마가 어느 날 바다에 실족사한다. 채운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실수로 아버지를 찌르고 엄마가 대신 감옥에 간다. 아버지는 식물인간 상태다. 그나마 소리가 낫다. 중병을 앓던 엄마는 교통사고로 사망하지만 그래도 멀쩡한 아버지가 있으므로. 작가는 이들을 같은 학급으로 몰아넣는다. 그전에는 서로 간에 전혀 알지 못하였던 그들을.

 

세상에 인간은 있되

구원도 없고 기적도 없고 선의도 없다는 걸 잊었습니다. (P.12)

 

아마도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는 위와 같으리라. 대체로 어둡고 고요하게 가라앉고 고개를 들어도 눈앞에 밝은 빛을 찾을 수 없는 듯한. 작가는 자신의 말처럼 삶의 비정함을 전면에 내세우고 싶었던 것일까. 표제와도 같이 거짓 없는 삶은 없다는 것처럼. 단순한 자기소개에서조차 거짓이 개재되어 있듯이 삶 자체에는 얼마나 수많은 거짓이 있게 마련인가. 진실을 부각하기 위해 거짓을 허용하든,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을 용인하든 진실과 거짓이 혼재된 것이 삶의 실체다.

 

등장인물은 제각기 거짓말을 내뱉는다. 의도가 좋고 나쁨과는 상관없이. 채운의 거짓말은 부작위에 의한 거짓이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찔렀음을 자백하지 않으며, 소리에게 아버지의 손을 잡아달라고 부탁할 때 진짜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채운 엄마는 자신이 부정을 저질렀음을 채운에게 밝힌다. 소리는 채운에게 그의 아버지의 상태를 솔직히 말하지 않는다, 그것도 완전한 오해에서. 소리 아버지는 소리 엄마의 죽음과 관련하여 아내의 절실한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였음을. 지우와 지우 엄마는 어떠한가. 엄마의 죽음을 지우는 단순 사고로 믿지 않는다. 불치병 진단을 받은 엄마가 자신을 속이고 의도된 죽음을 선택하였을 것으로 확신하고 용서하지 못한다.

 

작가는 주인공들을 깊은 수렁에 빠뜨린 채 방치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홀로인 그들 곁에는 충직한 동반자가 있다. 지우에게는 용식이, 채운에게는 뭉치가. 용식이를 돌보며 지우는 따돌림 시절을 버텨낼 수 있었고, 만화를 그리면서 비참함을 견뎌낼 수 있었다. 채운에게 뭉치는 가족과 같은 존재다. 세상에 홀로 남아있는 그에게 유일하게 믿음과 애정을 베푼 게 뭉치가 아니던가. 소리는 그런 게 없다고? 아니다, 소리는 용식이가 죽기 전까지 그를 돌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아버지가 곁에 있다.

 

삶의 가장 엄혹한 시절을 겪으면서 세 사람은 서서히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소리는 무덤에서의 고백으로 엄마와 화해하고, 지우는 피가 섞이지 않은 선호 아저씨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지우가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을까 전전긍긍하던 채운은 그날 밤 지우의 심적 상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차리고 오히려 놀라게 된다. 자신은 그토록 처절히 불행하였건만 그 광경을 보면서 동경하던 사람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삶은 이야기와 다를 테지. 언제고 성큼 다가와 우리의 뺨을 때릴 준비가 돼 있을 테지. 종이는 찢어지고 연필을 빼앗기는 일도 허다하겠지.’ (P.232)

 

채운 엄마의 간절한 소망처럼,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하고 살게 될 것이다.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삶이 제아무리 가혹하게 자신의 뺨을 때릴지언정 어쨌든 살아내는 것이 그들의 몫이므로. 삶의 희로애락을 겪어야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은 힘들고 고달픈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제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것을 거부할 수 없기에 최선을 다해 그것을 무릅쓰고 나아가야 한다. 삶의 이야기는 이렇게 형성된다.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데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도? 지우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P.233)

 

구성과 형식, 내용 전개 면에서 작가가 한땀 한땀 공들인 티가 묻어난다. 전혀 무관한 세 사람의 만남과 어울림, 그네들의 일상과 삶이 교묘하게 교차하거나 스쳐 지나가도록 하는 설정. 지우의 만화를 별도로 자세히 다룸으로써 그것 자체로 지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이를 읽는 채운의 복잡한 내면도 연동되도록 하는 구상. 1인칭 화자의 제한된 시점임에도 독자는 화자의 심정은 물론 자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다른 인물의 내면도 다소나마 헤아릴 수 있다.

 

<비행운><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변화된 작가의 글쓰기는 여전하다. 어두운 삶의 현장에서도 한 줄기 빛과 웃음을 찾던 작가는 성장소설의 외양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성장소설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인가. 작가가 한껏 그려내려 애쓰는 삶의 희망적 측면이 그다지 희망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작가도 그들의 미래를 낙관하지 못하는 듯 희망 섞인 바람을 나타낼 뿐이다.

 

채운의 가정을 들여다보면서 새삼 개인의 성장에 있어 가정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이상적 뜻에서 가정은 언제나 찬미의 대상이다. 즐겁고 행복해야 마땅한 그 무엇으로. 현실은 과연 그러한가. 우리가 주변에서 항상 접하게 되는 것은 가정의 위기가 아니던가. 지우가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정작 채운은 지긋지긋하게 여겼던. 이상적이고 참다운 가정의 가치와 실현 곤란성에 이율배반성에 탄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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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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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펙트럼

공생 가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작가 김초엽을 알게 된 것은 <지구 끝의 온실>을 통해서다. 학교 추천 도서라고 하여 아이 책꽂이에 있길래 한번 읽어 보게 되었다. 나쁘지는 않지만 특별한 인상을 받지도 않았다. 다른 작품을 더 읽을 생각은 없었다. 2024년 고려대 도서관 대출 순위 상위 10권 내에 포함되어 있다길래 궁금해서 이 책을 읽는다.

 

인류의 미래가 유토피아로 나아갈 것인가, 디스토피아로 갈 것인가는 알 수 없지만, 개조된 DNA로 만들어진 신인류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신인류가 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단절된 사회와 갈등의 대결 구도는 여러 영화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처럼 순수한 장밋빛 의도로 출발한 기술이 밝은 미래로 이어지지 않는 모습은 돌고 돌아 결국 원점으로 회귀한다. 인간의 행복과 행복한 사회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신인류의 한계를 넘어 새로 만든 지구 밖 마을의 평화와 행복은 진실한 것인가. 무슨 연유로 순례자들은 시초지 지구에 남기를 선택하는가. 그토록 많은 괴로움이 그들에게 닥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P.54)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사실 우리가 빛의 속도로도 갈 수 없다면이 올바른 표제다. 워프 항법과 딥프리징의 기술, 이어서 고차원 웜홀 통로로 머나먼 우주여행이 실용화되었다면 인류와 지구 차원에서는 더없이 환영받는 발전이라고 하겠다. 모든 진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가까운 우주 슬렌포니아가 근처에 웜홀 통로가 없기에 졸지에 먼 우주가 되어 경제성 부족으로 항로가 폐쇄된 지 백년 이상 지났다. 슬렌포니아에 가족이 있는 정거장의 노인은 이산가족이 되었다. 노인은 되묻는다.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기술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P.181)

 

인간과 외계인의 조우는 우리 인간이 우주에서 지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된다. 외계인의 가능성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상반적이다. 인류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누군가를 기대하는 동시에, 그것이 인류의 미래에 어둠을 드리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서. <스펙트럼>에서 외계인은 지구 밖 우주에 존재하지만, <공생가설>은 외계인이 인간 내부에 깃들어 있다고 가정한다. 전자에서 화자의 할머니는 여러 루이와 관계를 형성하면서 그들의 문화와 체제를 관찰하고 이해하려 애쓴다. 색상의 차이로 의미를 표현하는 무리인들은 우리네 기존 편견을 깨뜨린다. 할머니가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행성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집단으로서 인간은 타자에 대한 이해에 앞서 그들을 향한 정복과 이익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므로.

 

<공생가설>은 영화 트랜스포머를 연상시킨다. 지구에 이미 먼 우주의 선진 문명을 가진 집단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그들이 개별 인간의 뇌 속에 자리 잡고 인간 문화 형성과 발달을 주도한다는 것, 인간이 일정 나이에 접어들면 유아기의 기억과 함께 개체를 떠난다는 것으로.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들을 그리워한다. 이 정도 되는 외계인이라면 충분히 공생 가능하리라.

 

류드밀라의 행성을 보며 사람들이 그리워한 것은 행성 그 자체가 아니라 유년기에 우리를 떠난 그들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P.141)

 

인간이란 존재는 이성만으로는 헤아리기 어렵다. 완벽한 논리를 거부하고 충동적 감정에 휘말리거나, 자신에 대한 이익을 거부하고 오히려 손해를 감수하는 선택을 감행하기도 한다. 타자의 눈에는 어이없지만 당사자는 굳이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나만 좋으면 그뿐이다. <감정의 물성>처럼. 감정을 보고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는 물체로 형상화할 수 있다면 좋은 감정이라면 환영을 받을 것이다. 반면 부정적인 감정은 혹시 마약류 같은 폐해를 낳지 않을까. 화자와 애인 보현의 인식차는 이해 불가능한 그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P.216-217)

 

우주 저편으로 넘어갈 터널 우주인이 될 수 있던 재경은 우주로 가는 대신 바다로 뛰어든다. 가윤의 우주 영웅은 삽시간에 온 세계의 비난 대상으로 전락한다. 힘든 시험과 신체 개조를 거치면서 인류의 대표자, 나아가 모든 여성과 소수자의 지향으로 추앙받던 그녀는 무슨 까닭으로 우주선 탑승을 거부했을까.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재경 이모를 이해하려는 가윤과 그녀의 행동을 통해 유의미한 선택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개조된 신체로 심해 탐사가 가능해진 재경은 처음부터 우주보다는 바다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는 이기적 동기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였다. 가윤은 터널 너머 저편 우주를 보고 싶었고, 대단한 광경이 아님을 인정한다. 그녀의 인정은 그녀가 실제로 목숨을 걸고 저편 우주로 갈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임을 우리는 안다. 작품해설에서는 재경에 대한 비판이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더불어 확대되었다고 하는데, 과도한 해석이다.

 

<관내 분실>은 과학소설의 외양을 띤 여성주의 문학이다. 죽은 엄마의 영혼이 마인드 도서관 내에 보관되었다는 미래 과학적 설정은 물론 흥미롭다. 게다가 인덱스가 삭제되어 존재하면서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된 엄마의 마인드도. 딸 지민은 생전 사이가 좋지 않은 엄마의 마인드를 대면하러 도서관에 온다. 그녀가 임신을 하였기 때문이랄까. 엄마의 마인드를 되찾기 위해 개인을 고유하게 드러낼 수 있는 물건을 찾으면서 소설은 여성주의로 넘어간다.

 

원래의 이름을 잃어버린 엄마. 세계 속에서 분실된 엄마. 그러나 한때는, 누구보다도 선명하고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이 세계에서 존재했을 김은하 씨. 지민은 본 적 없는 그녀의 과거를 이제야 상상할 수 있었다. (P.267)

 

북디자이너였던 결혼과 출산, 양육으로 엄마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생전에 엄마는 이미 세계와 단절되어 있었기에 사후의 마인드 분실은 오히려 새로울 게 없다. 사회도 가족도 그저 엄마라는 역할만 인식하고 인정할 뿐 개인 누구라는 고유성을 알아주지 않기에. 지민은 마침내 마주한 엄마의 고유한 본체를 인식하며 엄마를 이해한다고 하며 눈물을 흘린다. 딸과 엄마, 모녀간 여성성의 불화와 화합. 아마도 이 작품이 주목받은 건 과학소설에 여성주의를 절묘하게 결합해서라는 의견이다. 개인적으로 다소 작위적이라는 생각이지만.

 

과학소설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과학기술이 구현된 미래를 다룬다. 이 책에만도 인간 개조, 외계인, 우주여행, 의식의 기록화, 물성화된 감정 등을 다루고 있다. 통상적 공상의 범위 내에 있는 소재도 있지만 어떤 것은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참신함으로 무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각 작품은 낯설지 않다.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인간 영혼과 감정은 변치 않아서다.

 

인간이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백년이 지나도,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인간사는 복잡다단할 것이며, 그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도 해결되기 어렵다. 어쩌면 그로 인해 한층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 작품집에서 표출되는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멸시와 혐오, 경제적 부로 양분되는 사회 체제, 경제성의 논리로 외면받는 인간의 기본권은 그것을 알려준다.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혹시나 외계인과 조우하게 된다면 우리는 더욱 고민해야 할 것이다. 참다운 인간과 인간성은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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