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의 돌 - 아트 라이브러리 19 아트 라이브러리 19
존 러스킨 지음, 박언곤 옮김 / 예경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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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851년에서 1853년에 걸쳐 간행되었으니 <건축의 일곱 등불>의 후속작인 셈이다. 전작이 이상적 건축의 요건이라는 기본 이론서라면, 여전히 이론적 면모가 우세하지만 이 책은 그래도 건축의 실제적 측면에 보다 주목하고 있다.

 

3권으로 구성된 대작인데, 너무 방대하다고 생각한 저자 자신이 훗날 원본을 1/4로 축소한 요약본을 출간하였다고 한다. 옮긴이에 따르면 이 번역본의 저본은 요약본인데, 빠져버린 건축의 원리 부분을 포함시켰다고 한다.

 

구성을 보면 첫 번째 책은 건축의 이론으로서 건물의 구성 요소와 장식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독자가 아름답고 진정한 건축의 특성과 미학에 대해 올바른 식견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는 후반부에 시대별 건축 사조를 이해하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두 번째 책은 비잔틴 시대, 고딕 시대, 르네상스 시대 별로 건축의 특징과 변화를 소개하며, 산 마르코 성당과 두칼레 궁전을 건축미학적으로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게다가 저자가 매우 높이 평가하는 고딕 건축의 본질도 명쾌하게 서술하고 있다.

 

서양 고전 건축의 기본 요소와 명칭, 구성 원리 등을 모른 채 <건축의 일곱 등불>을 읽어나갈 때 매우 답답한 심경이었다. 막연한 뜬구름 같은 개념 인식은 진지하고 심원한 이해에 건널 수 없는 장벽이 되었다. 이러한 심경을 알아차렸는지 전반부에서 러스킨은 차근차근 쉬운 표현을 사용하며 건축에 무지한 독자에게 감식안을 갖도록 하기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러스킨은 건축의 미덕 두 가지를 제시한다. 힘 또는 훌륭한 건설이 하나이며, 그것의 아름다움과 멋진 장식이 또 하나다. (P.29) 이를 달리 표현하면 첫 번째는 인간이 만들어 낸 훌륭한 작품이라는 표시이며, 두 번째는 자신의 것보다 더 나은 작품에서 느끼는 인간의 기쁨에 대해 표현하는 것이다.” (P.33) 전작에서 제시된 법칙과 유사하지만 보다 실제적 요소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에 제시된 미덕을 바탕으로 먼저 저자는 건축을 6가지 요소로 세분하고 있다. 벽과 지붕과 개구부(開口部)는 건물의 최소 요건이다. 벽의 내력을 높이기 위한 장치가 피어와 버트레스이다. 지붕은 지붕 자체와 지붕의 토대가 되는 아치나 상인방로 구별된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렇게 세분한 요소를 개별적으로 고찰하고 분석하는 시간이다.

 

벽은 토대와 벽체, 꼭대기에 해당하는 코니스로 구분된다. 벽은 공간을 내부와 외부로 나누고 안전하게 지붕을 받쳐야 한다. 벽의 모든 구조와 기법 등은 하중과 압력을 효과적으로 견디는 방안을 강구하는데서 출발한다. 회랑과 같은 열린 공간에서는 공간 구분 기능은 불필요하므로 이때는 최소한도의 벽만으로 하중을 버티기 위한 공학적 효율성의 이해가 추구된다. 그래서 벽은 기둥이 되고, 코니스는 주두로 발전한다. 아치와 박공지붕의 설명 또한 흥미롭다. 지붕은 수직압력과 수평압력을 잘 지탱해야 하는데 이용 가능한 재료를 활용하여 안전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아치 형태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구조 역학적으로 튼튼하게 설계와 시공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하중을 견디기 위한 목적에서 벽을 무한정 두껍게 할 수 없으며 미학적으로 보기가 좋은 편이 아니다. 버트레스가 이런 필요성에서 등장하였다.

 

장식은 순수 건축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장식이 없어도 건물의 용도 수행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장식은 순전히 심미적 차원이다. 러스킨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모든 장식은 저급하다. 확실하고도 명백한 이유가 없다면 그 장식은 진정으로 저급한 것이다. 우리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경탄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비참한 자기만족이며 가엾은 일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고귀한 장식들은 이러한 것들과 정반대로, 신의 창조물에 대해 느끼는 인간의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다.” (P.91)

 

러스킨의 건축 비평 인식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이다. 그의 미학의 중심에는 신에의 귀의가 핵심이다. 신과 신이 만들어낸 자연을 찬양하고 묘사하는 것은 언제나 상찬으로 추앙되지만, 인간에 치중하는 것은 저열하고 하급으로 치부한다. 이는 그만의 독특한 세계관이자 가치관으로서 당대 일각에서는 이러한 그의 예술 및 건축 비평에 대해서 과도한 관념론이라는 비판도 존재했다고 한다. 하긴 이러한 경향이 후대 사회 비평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 숨은 동인(動因)일수도 있으리라.

 

러스킨의 글에는 문학적 향취가 자욱하다. 그의 글은 논설이나 학술서처럼 딱딱하지 않으며 기술과 공학을 다루면서도 예술적 감성이 스며들어 있다. 예술과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행복한 만남을 구현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찬은 아닐 것이다. 12장 장식의 취급 말미를 보자. 그는 독자와 함께 파도바를 출발하여 여로에 오른다. 곤돌라를 타고 브렌타 강의 흐름을 좇으며 이윽고 말로 갈아타고 좁은 도로를 따라 선창에 다다라 다시 배를 타고 도시의 실체를 응시한다, 이곳 베네치아로. 독자의 눈길과 숨길을 단숨에 사로잡는 러스킨만의 뛰어난 구도와 문체가 단연 빛을 발한다.

 

두 번째 책은 앞서 기술했듯이 시대별로 베네치아의 건축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본다. 하고 많은 도시 중 하필 베네치아를 선택한 이유를 저자는 명쾌하게 밝힌다. 비잔틴 시대에서 전성기인 고딕 시대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로 변천하는 건축의 흐름이 베네치아에 생생하게 남아 있으며, 그로테스크 르네상스로 변질되고 타락하는 현장이 유일하게 역력하다는 점이다.

 

러스킨의 글은 일종의 건축 에세이다. 그는 건축의 좁은 시야를 고집하지 않는다. 후반부의 첫 장은 베네치아 생성의 역사를 훑어나간다. 지리학적 고찰도 빼놓지 않는다. 그는 토르첼로 섬과 산 마르코 성당에서 이 시대의 전형을 발견한다. 러스킨 특유의 여행하는 보행자의 시선으로 멀리서 점점 다가가며 보고 발견하고 느끼는 엄숙한 감흥을 세밀하고 눈부신 색조로 묘사한다. 그 표현은 분명 시적(詩的)이지는 않지만 시적인 정서를 독자에게 안겨준다. 한 부분을 잠시 인용한다.

“......기쁨의 혼란이 한창일 때 그리스 기병의 가슴이 황금빛 힘의 웅대함 속에서 타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산 마르코의 사자는 별들로 뒤덮인 푸른 들판 위에 우뚝 솟고, 마침내 무아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아치의 용마루 장식들은 대리석 거품으로 부서진 채 번쩍임과 조각된 물보라의 소용돌이 안에서 푸른 하늘 저 멀리 몸을 던진다. 그것은 마치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 얼어붙은, 리도 해안의 새하얀 파도 거품들을 바다의 요정들이 산호와 자수정으로 장식해 놓은 듯하다.” (P.137)

 

고딕 시대의 대표적 건축으로 두칼레 궁전을 분석하고 있는데, 30쪽에 걸쳐 평면도와 조감도, 그리고 각 건축의 세부 그림을 제시하여 역사적, 건축 미학적, 건축 요소별로 철저히 그 아름다움의 근원을 파헤치고 있다. 말미에 가서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두칼레 궁전이 너무나 친숙하고 낯익어서 오랫동안 잘 알고 있던 건축으로 여겨질 정도다.

 

개인적으로 후반부의 핵심이자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대목은 고딕의 본질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러스킨은 이전부터 공공연하게 고딕 건축을 가장 높이 평가해 왔다. 이 장에서 그는 고딕의 본질을 여섯 가지로 정리한다. 야만성과 거칠음, 변화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교란된 상상력[기괴성], 완고함[견고성], 관대함이 바로 그것이다. <건축의 일곱 등불>의 주장 최고로 부합하는 건축 양식이 바로 고딕 건축이다. 고딕 속에는 신에 대한 찬미, 자연미, 박제화된 기교보다 거친 생명력이 살아 숨쉬며, 변화를 위한 변화가 아닌 고착화된 틀을 깨는 독창성 차원의 변화가 내재되어 있다.

 

고딕 건축과 르네상스 건축의 차이는 완벽성에 대한 추구에 있다고 러스킨은 인식한다. 과도한 완벽성은 건축에서 정교한 기교, 숙달된 솜씨, 세련미에 대한 요구로 드러난다. 이렇게 해서 위대한 고딕 정신은 서서히 파괴되어 갔다. 불명예스럽고 조악하며 타락한 최후의 양식을 그는 그로테스크 르네상스로 부른다. 그에게 더 이상의 베네치아는 의미가 없다, 건축에서도 현실에서도.

 

예전에는 불굴의 의지와 헌신으로 기독교의 도시들을 추월했던 베네치아가 이제는 방종의 교묘함과 다양한 허영심으로 그 도시들을 추월했다......평원 도시의 저주, 즉 자만심, 비만의 양식, 그리고 지나친 나태함과 같은 고대의 저주가 베네치아를 덮었다.” (P.224)

 

러스킨이 공들여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베네치아의 건축을 연구하고 분석한 것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 때문은 아니다. 그의 의도와 목적은 분명하다. 그는 고딕을 당대 유럽에, 영국에 부활시키고 싶어 한다. 그의 시각으로 볼 때 당대 건축은 한심하기 그지없다. 건축은 단순한 돌무더기가 아니다. 진정한 건축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마지막으로 러스킨의 고딕 건축 찬미를 그의 육성으로 들어본다.

그리스와 로마 건축이 생명력 없고 이롭지 못하며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처럼, 우리들의 옛 고딕은 역동적이고 쓸모 있고 신실하다. 옛 고딕은 모든 의무에 순종하고 모든 시대에 영속적이고 모든 마음에 교훈적이며 모든 직무에 고귀하고 거룩하다. 이것은 겸손함과 고귀함에 모두 적절하며, 마찬가지로 작은 집의 현관이나 큰 성의 성문에도 모두 적절하다. 일반 가정에 사용되면 친숙하고, 종교적 건물에 사용되면 경건하다. 단순하면서도 재미있기에 어린아이조차 이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힘으로 싸여있어 가장 강한 사람이라도 위압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찬양한다. 진정한 건축은 작업자의 모든 능력을 끌어내고 바라보는 사람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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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네버랜드 클래식 13
케니스 그레이엄 지음, 어니스트 하워드 쉐퍼드 그림, 신수진 옮김 / 시공주니어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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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표제가 매우 서정적이다. 영문 원제는 <The Wind in the Willows>이며 운율 효과로 발음할 때 느낌도 역시 좋다. 무엇보다도 앞뒤 겉표지의 그림이 인상적이다. 잔잔한 냇가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 보트를 젓는 두 동물. 그냥 쳐다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흐뭇해진다.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어린 아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썼던 이야기들을 모은 게 이 작품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동화와는 이야기의 지향하는 바가 다소 다르다. 말로 들려줄 때 효과적이도록 청각적 표현이 자주 보인다. 듣는 이가 지루하지 않도록 등장 동물의 성격과 행동 묘사는 매우 개성적이며 생동감이 뚜렷하다. 정서 함양을 위하여 밝고 온화하며 따뜻한 분위기가 풍기도록 각별한 신경을 쓴 흔적도 역력하다.

 

와일드 우드와 강 마을을 배경으로 유유자적하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 네 동물이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다. 두더지 모울, 물쥐 래트, 오소리 배저와 두꺼비 토드. 안온한 일상만 죽 나열된다면 곧 지루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작가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배치하고 독자와 청자에게 흥미를 유발하고 더불어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두더지 모울이 땅속 굴을 박차고 나와 강변의 물쥐와 친구가 되고 같이 생활하는 장면은 아무래도 낯설다. 몰은 나중에 우연히 자기가 살던 굴 근처를 지날 때 강렬한 원초적 본능의 냄새를 느낀다. 너무나 익숙하고 포근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것의 존재와 가치를 그는 깨닫는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친구들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물쥐 래트는 자신이 사는 강 마을을 너무나 사랑한다. 예술가적 기질이 농후한 그는 현재의 생활에 자족하며 유유자적하게 살아간다. 그는 낯선 고장과 모험을 싫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럴까? 누구나 마음 한켠에 모험가와 방랑자의 자아를 품고 있다. 우리는 간혹 불안해진다. 나만 이대로 정체되어 있는 게 아닐까? 보다 넓은 세상을 향해 풍운을 무릅쓰고 뛰어드는 게 보다 멋진 삶이 아닐까? 방랑자 래트의 이야기에 불현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눈빛이 흐려지는 게 어디 물쥐 래트 뿐이겠는가?

 

두꺼비 토드는 가장 독특하며 개성적인 캐릭터다. 천방지축에 흥미를 끄는 일에 앞뒤 안 가리고 몰두하는 성격. 그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저택에 산다, 토드 홀. 숲속 친구들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과 유사한 생활을 하며, 인간과 교류가 있는 것이 토드다. 이 작품의 후반부는 전적으로 토드의 모험담이라고 하겠다. 자동차를 훔쳐 타다 감옥에 갇히고 탈출에 성공하여 갖가지 고생을 겪다가 고향에 돌아온 그. 그의 부재를 틈타 족제비와 담비 일당이 무력으로 토드 홀을 강탈한다. 토드와 친구들이 힘을 합쳐 악당들에 대항하여 승리를 쟁취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

 

가장 어린이답고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가장 열렬히 환영받을 만한 유형이 토드라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확실히 순수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졌으며, 유혹에 약하고 참을성이 부족하다는 점도 굉장히 공통적이다. 토드의 존재는 잔잔한 연못에 이따금 파문을 그리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작품은 역시 어린 시절에 읽어야 제격이다. 머리가 굳고 가슴이 차가워진 어른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감흥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워낙에 자극적이고 현란하며 재미있는 즐길거리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그네들이 케네스 그레이엄이 들려주는 시적이고 전원풍의 환상적인 동화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면, 아이들은 보다 정서가 풍부하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으로 커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좋은 동화에게서 기대하는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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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강의 왕 마루벌의 새로운 동화 20
존 러스킨 지음, 최지현 옮김, 야센 유셀레프 그림 / 마루벌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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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재다능하였던 존 러스킨이 1841, 20대 초반에 쓴 동화이다. 동화로서 제법 인정을 받은 셈인데, 여기 마루벌 외에도 숲속나라, 서강출판사에서도 동화 번역본이 나왔고 영어학습용으로 나온 종류도 있다. 이 중에서 마루벌 본을 선택한 것은 번역문의 어조나 형태가 더 마음에 들었으며, 게다가 야센 기젤레프의 신비롭고 몽환적인 삽화의 압도적인 매력에 끌렸다.

 

젊은 러스킨에게서 벌써 후대의 대가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문장은 억누를 길 없는 재치와 품위 있고 고상한 격조가 묘하게 어울려 있다. 기젤레프의 삽화는 금상첨화 격이다. 흑백 위주에 간혹 단색을 추가하고 있는데, 윤곽선을 살짝 흐리고 배경도 안개 입자 효과를 주고 있어(미술에 문외한이라 무슨 기법인지 알지 못한다!) 작품에 옛스러움과 비현실적 공기를 더하고 있다. 삽화만 봐도 작품의 성격과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내용면에서 이색적인 것은 없다. 대개 동화의 모티브는 유사하다. 못된 계모에게 구박받는 전처 자식, 나쁜 형과 착한 동생의 대비 등. 여기에 초자연적인 존재가 개입하여 권선징악을 행한다. 이 동화에서는 황금강의 왕이 다양한 형태로 변신하여 나쁜 형들과 착한 동생 글룩을 시험한다. 시험에 탈락한 형들은 검은 바위로 변하게 되고, 글룩은 다시 황금강 아래 보물의 계곡을 되찾게 된다.

 

두드러지는 특징은 러스킨의 정의관이다. 형들이 몰락하게 된 결정적 원인은 탐욕이다. 자신의 것을 남과 나누지 않으며, 타인의 것을 끊임없이 탐내는 물욕. 갑자기 후대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가 연상된다. 두 작품의 정신은 일맥상통한다. 정의는 빈부의 격차를 당연시하지 않는다. 밑 빠진 항아리와도 같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행위와 도덕의 준거틀로 인정하지 않는다. 나 혼자만 잘 살고 행복하면 된다는 논리는 정의에 위배된다. 나와 이웃이 다 함께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어야 참다운 정의가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은 더 타산적이 되도록 노골적으로 강제된다. 제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도 금전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그들만의 세계에서 동류로 취급받지 못한다. 물질적 성패는 사회적 지위와 치밀하게 맺어져 이제는 분리를 논하는 자체가 우습다.

 

이 동화를 읽을 만한 또래의 아이들은 이미 세상의 감추어진 이면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러스킨의 순진한 정의관이 어느 정도 호응 받을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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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일곱 등불 마로니에북스 시각문화 총서 2
존 러스킨 지음, 현미정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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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를 읽게 된 후 급작스레 저자에게 관심이 생겼다. 러스킨의 삶은 전반기와 후반기로 뚜렷이 구분된다. 후반생의 그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회비평가라면, 전반생에서는 저명한 예술비평가였다. 특히 회화와 건축 부문에서 그 성과가 두드러졌다. 무슨 연유로 그는 관심의 영역을 예술에서 사회로 전환 아니, 확장하였는가? 그가 사회문제에 주의를 기울인 계기는 무엇인가? 이런 의문에 대한 대답을 그의 전반기의 저작에서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내가 이 책을 펼쳐든 까닭이다. 건축에는 무지하고 문외한인 주제에.

 

뒤돌아보건대 쉽지는 않은 책이다. 건축에 대한 기초지식을 지니고 고딕과 초기 르네상스 건축양식에 조예가 깊은 이라면 읽어나가는데 비교적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건축용어 자체부터 낯설고 그것이 건물에서 정확히 지칭하는 바가 무엇인지 애매한 경우가 빈번하였다.

 

다행히 이 책은 건축의 기술적 측면을 다룬 기술서적이 아니다. 러스킨은 오히려 건축의 정신을 강조한다.

건축은 인간이 세운 구조체를 배열하고 장식하는 예술로서, 사용목적이 무엇인건 간에 그 모습이 인간 정신의 건강, 힘 그리고 즐거움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다.”(P.21)

이러한 관점에 기초하여 당대의 건축문화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에서 그는 건축이 지향해야 할 일곱 법칙(원칙, 원리, 정신 등)을 제시하고 이것이 건축의 앞길을 비추어야 진정한 건축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희생의 등불

이것은 건설을 위해 값진 물건을 제공하는 정신”(P.23)이다. 건축가가 지닌 모든 물질적, 정신적 자원을 모두 투입해야 함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건축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라는 것이다. 이는 최소비용의 투입으로 최대의 성과를 기대한다는 경제학적 논리와는 상반된 주장이기도 하다. 러스킨은 당대 건축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정신이 사라졌음을 언급한다.

우리 중 누구도 전력을 다하지 않고서는 좋은 건축가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한, 최근에 세워진 건물 중에서 건축가나 건설자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없다. 이것이 현대 건축의 특별한 성격이다. 옛 건물들은 거의 대부분 각고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어린아이가, 야만인이, 시골뜨기가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최선을 다했다.”(P.35)

 

진실의 등불

건축은 진실해야 한다. 거짓되어서는 안 된다. 당연하지만 진부한 명제인데, 러스킨은 새삼 강조한다.

우리는 중상모략과 위선, 배신에 격분한다. 그것이 거짓이라서가 아니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인해 손실과 피해가 생기지 않는다면 별로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가장 큰 해악은 사실 달콤하게 속삭이는 번들거리는 거짓말이자, 친절하게 들리는 그릇된 견해들이다.”(P.46)

그는 거짓과 진실을 통상적 관념과는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그이기에 건축에서의 속임수를 다음의 세 가지 부류로 제시한다.(P.51)

첫째, 거짓된 구조나 지지 방식을 제시하는 것

둘째, 표면을 칠해서 본래의 재료와 다른 재료를 재현하거나, 평면의 그림을 입체의 조각처럼 보이도록 거짓으로 재현하는 것

셋째, 어떤 종류이건 주형으로 뜨거나 기계로 생산한 장식을 사용하는 것

 

러스킨의 당대에 철재가 건축에 도입되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에 대한 러스킨의 반응은 사뭇 부정적이다.

내 생각에 그 규칙이란 금속은 결물로는 쓰일 수 있을지언정 구조물로는 쓰일 수 없다는 것이다.”(P.58)

금속이 한계 내에서 사용되어 건축의 존재와 본성을 파괴하지 않는다 생각되더라도 너무 사치스럽고 빈번하게 쓰인다면 작품의 품위뿐 아니라 정직성 또한 손상시킬 것이다.”(P.59)

 

그의 견해를 현대 건축의 주류에 비추어 보면 매우 흥미롭다! 러스킨이 건축의 경제적 효용이 아니라 정신적 가치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새삼 드러낸다.

 

진실의 관점에서 러스킨은 건축의 올바른 재료는 자연에서 얻어진 것으로 국한한다.

진정한 건축의 색은 자연석의 색이다.”(P.70)

 

힘의 등불

당대 건축에 대한 러스킨의 비판적 인식은 힘의 결여를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당대 건축은 외관상 말쑥한 반면 소심하고 갑갑하고 빈곤하고 가련하다. 게다가 형식화된 기형, 움츠러든 정확성, 굶주린 정밀도, 옹졸한 인간혐오는 얼마나 해괴한 감각인지”(P.124)하며 절망적 탄식을 내뱉고 있다. 즉 예전 건축에 비해 당대 건축은 세련된 반면 본원적 힘을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건축에서 힘의 의미는 다음의 문장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에서 나온 배치와 지배로서 건축의 품위를 좌우하는 것은 그 정신적 힘의 표출이며, 또한 그 정도에 비례하여 숭고함도 높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건물은 인간이 수집한 뭔가를, 또는 인간이 지배한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성공의 비결은 그가 무엇을 모으고 어떻게 지배할지를 아는 데 있다. 이것이 건축의 위대한 두 지성의 등불이다. 하나는 지상에서 행한 일들에 대해 그에 합당한 존경을 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일들에 대한 지배권이 인간에게 귀속되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P.90~91)

 

러스킨은 힘을 부여하는 그림자의 중요성에 주목한다. 흔히 두드러지는 겉면에 시각이 분산되기 쉽지만, 건축에 깊이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림자라는 간과되지만 의미심장한 언급을 한다.

긍정적인 그림자의 활용은 화가보다 건축가에게 더 필수적이고 숭고한 것이라는 점이다......이런 까닭에 크기와 무게 다음으로, 건축의 힘은 그림자의 양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이 그림자의 실제적인 역할, 즉 인간의 일상에서 그것의 용도와 영향력은 일종의 인간적 공감을 표현하는 것이다.”(P.104~105)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비잔틴 건축의 종교적 고귀함에 대한 상찬을 아끼지 않으며, 이런 미학을 파악한 이가 거의 없음을 밝힌다.

 

아름다움의 등불

건축 또한 예술의 한 영역인 만큼 아름다움의 요소를 빼놓을 수 없다. 앞선 진실의 등불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러스킨은 아름다움을 자연과 연관시켜 파악한다. 그에게 인공미(人工美)는 진실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매우 아름다운 형태와 생각은 모두 자연물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는 점이다. 나아가 그것의 역 또한 기꺼이 가정하고 싶기에, 자연의 대상에서 오지 않은 형태는 추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다.”(P.129)

 

기이하거나 이색적인 것은 신기할 수는 있지만 아름답지는 않다. 아름다움은 평범함에 내재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우리는 빈도에 의해 아름다움을 추론할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이 흔하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추정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가장 흔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가정할 수 있다.”(P.131)

 

건축의 장식에서 중요한 부분인 조각에 대한 그의 견해도 독자적이다. 조각도 별개의 예술 영역으로서 미적 가치를 지니지만 그것이 건축과 구별될 정도로 튀는 것은 곤란하다고 본다. 가장 완벽한 조각은 가장 순수한 건축의 일부이어야 한다.”(P.164)

 

생명의 등불

건축에서 생명을 찾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이 점을 러스킨이 모르지 않음에도 그는 일말의 거리낌 없이 생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희생, 진실, 힘과 아름다움이 반영된 건축에 생명이 빠질 리 없다. 건축은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그대로 투영한다.

 

모든 사물은 생명이 충만할수록 고귀하다.

건축은 인간 정신 외의 다른 생명체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기분 좋은 소리의 음악이라든지 흠잡을 데 없는 색의 그림과 같이 본질적으로 자신 안에 즐거운 것들을 구성하지도 못하는, 즉 자력으로 행동할 수 없는 물체이다. 때문에 건축은 자신의 위엄과 즐거움을 위해서는 상당부분 그 생산에 관여하는 인간의 지성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수밖에 없다.”(P.197)

 

살아있는 건축의 확실하고 오해할 수 없는 징표가 나타나는데, 바로 지독한 성급함이다. 뭔가 이루지 못한 것을 향한 몸부림, 그것은 하위의 것들을 모두 경시한다. 그래서 아주 만족스럽다고 인정되는 것이나, 많은 시간과 신경을 필요로 하지만 그럴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 모두를 가차 없이 경멸하는 풍조가 생긴다.”(P.205)

 

생명력을 잃은 조각은 차가운 조각이다.

올바른 완성이란 의도한 인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고, 고도의 완성이란 좋은 의도를 생생한 인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재현은 정교한 처리보다 거친 처리에 의해 실현되는 경우가 더 많다.”(P.222)

 

흥미로운 점은 예술에서 차용과 모방에 대하여 비교적 너그러운 점이다. 순전한 창작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일 것이다. 그가 보기에 더 나은 예술을 위해 필요하다면 차용과 모방을 할 수 있으며, 문제는 흥미를 끌지 못하는 차용과 무작위적인 모방”(P.201)에 있다고 한다.

 

기억의 등불

건축은 자체로 역사성을 지닌다. 잘 지어진 건축물은 수백 년도 거뜬히 견디어낸다. 오늘날은 내구연한이 짧을수록 오히려 각광받는다. 신축된 지 이십년만 경과해도 벌써 노후화라는 표현이 오르내린다. 재개발, 재건축이 환영받는다. 경제적 이해득실 때문에. 그 지역에, 건축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안중에 두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러스킨이 목도했다면 분명 땅을 치며 통곡했을 것이다.

 

공공건물과 주거건물이 진정한 완벽성을 획득하려면 기억하거나 기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에 동의한다면 건물들은 좀 더 견고하게 지어질 것이고, 다른 면에서는 결과적으로 장식들이 은유적, 역사적 함의를 담아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오직 한 세대를 버티기 위한 집을 짓는 것은 그 사람의 악덕을 표시하는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내가 말하는 바는, 정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았다면 그들의 집은 신전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감히 훼손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우리 자신을 성스럽게 할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P.232~233)

 

우리가 의도하고 계획한 좋은 쓸모가 동시대인을 넘어 우리 인생여정의 계승자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이 지상에서 우리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신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 동안 이 땅을 빌려주셨다. 이는 위대한 신탁상속이다. 우리 뒤에 올 사람들도 마찬가지의 권리를 가진다.”(P.239)

 

건물의 가장 위대한 영광은 건물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에 달려 있고 말하고자 하는 바의 울림과 엄밀한 관찰의 깊이에 달려 있으며, 또한 찬성이나 비난이 교차하더라도 인간애의 물결로 오랫동안 씻긴 그 벽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불가사의한 공감에 달려 있다.

우리가 기대하는 건축의 진정한 빛과 색과 고귀함은 시간이라는 저 황금의 얼룩 안에 있다.”(P.240~241)

 

제아무리 잘 관리해도 건축물은 서서히 소멸될 운명에 처해 있다. 여기서 복원에 대한 요구가 등장한다. 듣자하니 이탈리아에서는 고대 로마의 유적지에 인공적 수리와 복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세월의 풍화 자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현상이라며! 반면 우리의 경우는 없는 건축물도 만들어낼 판이다. 진정한 문화적 고민의 결론이라기보다 상업적 고려의 흔적에 가까우리라.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에 대한 미약한 복원 논쟁을 기억한다면 여기에 대한 러스킨의 일침을 듣자.

복원은 건물에 가해질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어떤 잔여물도 거두어들일 수 없는 파괴다. 더불어 파괴된 작품에 대해서 거짓된 묘사를 하는 것과 같다. 건축에서 언젠가 위대하고 아름다웠던 것을 복구하는 것은 마치 죽은 자를 깨우는 것처럼, 불가능하다.”(P.248~249)

 

복종의 등불

러스킨은 대뜸 자유를 부정하며, 오히려 복종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며 전체주의자였단 말인가? 오해의 소지를 살만한 발언을 그는 왜 하는 것일까?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당대는 자유방임주의가 기세등등하게 세력을 떨치던 시기였다. 마음대로 하게 그대로 내버려 두면 만사가 잘 처리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laissez-faire . 러스킨은 자유방임의 폐해를 예견하고 있다. 과도한 자유는 곧 무질서에 다름 아니다. 규율된 자유, 그것을 복종으로 이해하는 게 아닐까?

 

가장 적당하고 진실한 이름은 바로 복종이다. 복종은 실제로 자유를 토대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단순한 예속일 뿐이다. 자유가 주어질 때 복종은 더 완벽하다.”(P.256)

 

무질서라는 것은 질병에 상응하는 동의어다. 반면 명예와 아름다움의 증가는 개성보다는 오히려 절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P.257)

 

예술에서 개성은 중요한 미덕이지만, 지고의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무수한 예술가와 예술작품이 범람하는 시대에서 일단 주목받기 위한 용이한 방편은 튀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성과는 다른 수준이다.

 

오늘날의 건축가들은 원형성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그리고 그를 구성하는 모든 것에 대해 놀랄 만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만의 위상이나 특이성을 위해 이러한 변화가 추구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튀기 위해 언어의 규칙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위반 없이는 언어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피할 수 없고 계산되지 않은 빛나는 노력의 결과다.”(P.260)

 

러스킨의 조언은 오히려 우리 시대에 더 적합하다. 대중은 기이하고 이색적이며 신기한 것에 열광한다. 비록 찰나적이지만. 그것이 인기로 포장되고 상업적 가치는 높아진다. 대중예술은 물론 순수예술도 점차 경박단소에 물든 지 오래다.

 

 

내용에 대한 소회가 다소 장황해져 버렸다. 이는 어쩔 수 없다. 그만큼 존 러스킨이 제시하고 주장하는 견해가 신선하면서 재기발랄하면서도 깊은 지혜를 품고 있다. 건축 비평을 빙자한 인간도덕론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 책의 본령이라 할 러스킨 자신이 그린 유럽의 초기 고딕과 르네상스 건축과 건축 장식 도판 및 이에 대한 분석과 설명도 분명 흥미진진하다. 불행히도 내게는 이를 받아들이고 음미하며 감상할 식견이 부족하다.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사물에 대한 언급은 언제나 공허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대신 건축을 기본으로 하지만 사회 전반에 확장하여 적용할 수 있는 그의 일곱 등불은 남다른 관심이 끌린다. 불과 서른 살의 이립(而立)에 그는 후반생의 사상적 기초를 이미 확고히 갖추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결코 우연히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러스킨의 발언 중 유독 내 마음을 뜨끔하게 하는 구절이 있다. 비단 나 외에도 여러 사람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밥벌이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리고 그 일은 열심히 해야 한다. 우리의 기쁨을 위해 하는 일은 다른 일이며, 그 또한 마음을 다해서 해야 하는 일이다. 대강 하는 게 아니라 의지로 하는 일이다.”(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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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찬가 - 한권의시 59
노발리스 / 태학당 / 1994년 7월
평점 :
절판


노발리스의 <푸른 꽃> 외에도 시 작품이 번역 출간된 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겨우 구해서 읽어보게 되었는데, 목차에서부터 대략 난감이었다. 노발리스의 시선집인줄 알고 있었는데, <밤의 찬가> 달랑 한 편만 수록되어 있을 줄이야, 게다가 이 시가 장시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소설을 통해 작가가 녹록치 않음을 알고 있었지만, 시는 정말 대략 난감이다. 가뜩이나 상징성이 풍부한 시인답게 종횡무진 현란한 표현을 구사하면 정서의 폭과 깊이를 넘나든다. 빛과 어둠의 대비 정도만 눈에 들어올 뿐. 할 수 없이 해설의 도움을 받고 재독해 보니 대략적이나마 시의 구조 내지 미약하나마 시인의 시적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노발리스의 삶에서 한 여성 조피 폰 퀸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첫사랑이자 약혼녀인 그녀의 때이른 죽음은 어찌보면 노발리스의 요절을 예고한 것이 아닐른지. 그녀의 죽음 당시 그가 받은 정신적 충격의 크기와 깊이에 대한 일화는 이를 알려준다.

 

<밤의 찬가>는 전체 6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4찬가와 제5찬가의 분량이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표제와 같이 을 찬양하고 있다. 낭만파에서 밤은 특별한 지위를 갖는 소재다. 낮의 환함, 명징성, 이성이 전시대의 고전주의와 계몽주의를 지칭한다면, 밤의 어둠과 모호함, 감성은 바로 낭만주의의 정신이다.

 

1찬가는 빛의 찬미로 시작한다. “오직 빛이 있는 곳에 풍만한 세계의 경이로운 영광이 계시된다.” 찬미는 바로 밤으로 향한다. “나는 스스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성스럽고 신비로운 밤으로 향한다.” 이제 시인은 본격적으로 밤에 대한 찬미를 아끼지 않는다. 그는 빛이 초라하고 어리석다고 하며, 낮과의 작별을 기쁘다고 표현한다.

 

2찬가는 잠을 노래한다. 밤은 잠과 불가분의 관계다.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밤의 사도인 성스러운 잠이 수행하는 역할과 그 의의를.

 

밤의 기쁨, 낙원의 졸음이 엄습하자 시인의 슬픔은 어느덧 사라져버리고 그곳에 기쁨의 눈물만이 흐른다. “그것은 유일한, 첫꿈이었지.” 이렇게 제3찬가는 잠에서 꿈으로 나아간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밤이 끝나고 아침이 되면 시인은 잠에서,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애인이 부재한 현실로, 기쁨과 즐거움을 기대할 수 없는 세상으로. 시인은 중얼거린다. “밤의 안식처인 신세계를 쳐다 본 자라면 누구나, 이 현세상에 돌아오지 않으리,” 이렇게 제4찬가는 죽음을 예언한다. 화려한 허상의 빛이 아니라 고귀하고 사랑스런 의미를 부여한그리고 어머니처럼 잉태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는 밤의 실상으로. 영원한 밤과 어둠은 곧 죽음이 아니겠는가.

시인은 이제

난 자유로운 몸이 되어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 있으리.“

 

시인은 이제

내가 죽음의 싱싱한 흐름을

느끼면

......

그리고 밤엔

성스러운 정열에 묻혀 죽으리.“

 

가장 긴 제5찬가는 역사와 종교와 철학의 혼합체에 가깝다. 에두르지만 명백하게 서양의 희랍 문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노래한다. 시인은 예수를 통하여 개인의 죽음을 역사적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려고 하는 듯하다.

이제 우리는 영원히 살고자

그들에게 따라가네.

 

사랑하면서 믿는 자, 이제

어느 무덤 가에서도

고통스럽게 울지는 않으리.“

 

6찬가는 유일하게 소제목이 주어져 있다. <죽음에의 동경>이라는.

밤의 영원함을 찬양하고

잠의 영원함을 찬양하는 시인이 가야할 곳은 이미 정해져 있다. 바로 아버님의 집이다. 불안한 동경과 감미로운 전율을 품고 시인은 고향으로의 여정을 시작하려고 한다.

무엇이 우리의 고향 가는 길을 막을까.

사랑스런 사람들 이미 오래 전에 인식하는데,

그녀의 무덤은 우리 생의 편력이 끝나는 곳,“

 

시의 형식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지만, 이 작품은 언뜻 보아도 자유로운 산문형식임이 두드러진다. 4찬가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운문체가 등장할 정도로. 즉 전반부에는 산문이 후반부에는 운문이 우세한 표현형식을 이룬다.

 

밤의 찬가는 자칫 ()의 찬가로 오독될 여지가 농후하다. 시적 내용도 결국 밤을 죽음과 연계시키고 있지 않은가. 이는 건강한 낭만이 아닌 후대의 퇴폐주의 내지 허무주의로 변질될 위험성을 태생적으로 내포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밤의 찬가>와 거의 비슷한 기간에 쓰여진 <푸른 꽃>과는 성향의 차가 크다. 아무래도 율리와 새로 시작한 사랑의 영향이 분명 없지 않을 것이다.

 

백여 면의 얄팍한 시집, 게다가 시의 원문도 수록되어 있어 실질적 분량은 그다지 많지 않다. 덕분에 삼독이 가능했다. 애석하게도 이 책은 절판되었다. 범우사에서 나온 <푸른 꽃> 번역본 에는 소설 외에 시로서 이 <밤의 찬가><성가>도 같이 수록되어 있다. 노발리스의 시 세계를 접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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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1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발리스 밤의 찬가를 읽고 싶어 책을 찾는데 정보도 별로 없고 도서도 현재 구매 가능한게 없네요~ㅠ 올리신 댓글이나마 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성근대나무 2024-02-13 15:27   좋아요 0 | URL
http://aladin.kr/p/yPjbA

댓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위 링크의 책에 ‘밤의 찬가‘가 수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