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강의 왕 마루벌의 새로운 동화 20
존 러스킨 지음, 최지현 옮김, 야센 유셀레프 그림 / 마루벌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다재다능하였던 존 러스킨이 1841, 20대 초반에 쓴 동화이다. 동화로서 제법 인정을 받은 셈인데, 여기 마루벌 외에도 숲속나라, 서강출판사에서도 동화 번역본이 나왔고 영어학습용으로 나온 종류도 있다. 이 중에서 마루벌 본을 선택한 것은 번역문의 어조나 형태가 더 마음에 들었으며, 게다가 야센 기젤레프의 신비롭고 몽환적인 삽화의 압도적인 매력에 끌렸다.

 

젊은 러스킨에게서 벌써 후대의 대가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문장은 억누를 길 없는 재치와 품위 있고 고상한 격조가 묘하게 어울려 있다. 기젤레프의 삽화는 금상첨화 격이다. 흑백 위주에 간혹 단색을 추가하고 있는데, 윤곽선을 살짝 흐리고 배경도 안개 입자 효과를 주고 있어(미술에 문외한이라 무슨 기법인지 알지 못한다!) 작품에 옛스러움과 비현실적 공기를 더하고 있다. 삽화만 봐도 작품의 성격과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내용면에서 이색적인 것은 없다. 대개 동화의 모티브는 유사하다. 못된 계모에게 구박받는 전처 자식, 나쁜 형과 착한 동생의 대비 등. 여기에 초자연적인 존재가 개입하여 권선징악을 행한다. 이 동화에서는 황금강의 왕이 다양한 형태로 변신하여 나쁜 형들과 착한 동생 글룩을 시험한다. 시험에 탈락한 형들은 검은 바위로 변하게 되고, 글룩은 다시 황금강 아래 보물의 계곡을 되찾게 된다.

 

두드러지는 특징은 러스킨의 정의관이다. 형들이 몰락하게 된 결정적 원인은 탐욕이다. 자신의 것을 남과 나누지 않으며, 타인의 것을 끊임없이 탐내는 물욕. 갑자기 후대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가 연상된다. 두 작품의 정신은 일맥상통한다. 정의는 빈부의 격차를 당연시하지 않는다. 밑 빠진 항아리와도 같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행위와 도덕의 준거틀로 인정하지 않는다. 나 혼자만 잘 살고 행복하면 된다는 논리는 정의에 위배된다. 나와 이웃이 다 함께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어야 참다운 정의가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은 더 타산적이 되도록 노골적으로 강제된다. 제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도 금전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그들만의 세계에서 동류로 취급받지 못한다. 물질적 성패는 사회적 지위와 치밀하게 맺어져 이제는 분리를 논하는 자체가 우습다.

 

이 동화를 읽을 만한 또래의 아이들은 이미 세상의 감추어진 이면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러스킨의 순진한 정의관이 어느 정도 호응 받을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