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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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쇼코의 미소

씬짜오, 씬짜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한지와 영주

먼 곳에서 온 노래

미카엘라

비밀

 

2024년 서울대 학생들이 가장 많이 빌린 책 중 두 편이 들어 있고, 고려대 학생들이 가장 많이 빌린 책 중 다른 한 편이 포함된 작가. 최은영. 나로서는 전혀 처음 듣는 이름인데, 혹시 뛰어난 신진 작가를 놓치는 게 아닌가 싶어 서둘러 이 책을 읽는다. 작가의 첫 작품집이다.

 

수록 작품 일곱 편을 관통하는 공통적 특징이 우선적으로 두드러진다. 각 작품을 개별로 분절하다 보면 중복되고 반복될 우려가 있기에 하나의 큰 맥락에서 일관된 특성을 다루어 보고 싶다. 분명한 것은 작가는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양태를 나타낸다는 점이다. 그 점을 논외로 하자면 독서는 흥미로운 경험이기에 후속작도 기대된다.

 

첫째, 과연 글로벌 시대다. 작품의 지리적 배경은 물론 등장인물의 인종적 배경까지 다채롭다. 일본(<쇼코의 미소>), 독일과 베트남인(<씬짜오, 씬짜오>), 프랑스와 케냐인(<한지와 영주>), 러시아와 폴란드인(<먼 곳에서 온 노래>). 우리 문학의 지평이 그만큼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이것이 새로움에 대한 손쉬운 접근에서 비롯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둘째, 사회 부조리에 대한 강한 의식이다. 순애 언니의 남편은 빨갱이로 몰려 감옥 생활을 하고 출소 후에도 심신이 온전치 못하다. 미카엘라의 아빠는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덕분에 가정생활은 평탄하지 못하다. 학생운동 전통에 치열한 노래패의 선배는 권위적이고 성차별 문화에 젖어 있다. 우리는 월남전을 미국과 베트남 간 전쟁으로 생각할 뿐 월남에서 우리가 저지른 행위는 무심하다. 작가는 인물의 입을 빌려 주저 없이 비판한다.

 

전쟁요? 그건 그저 구역질나는 학살일 뿐이었어요.” 응웬 아줌마가 말했다.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사무적인 말투였다. (P.81, <씬짜오, 씬짜오>)

 

셋째, 세월호 사건. 작가가 작품들을 공들여 쓰고 있을 당시 세월호 사건의 사회적 파장이 거세었다. 작가도 여기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으니, 이 사건을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 여럿 있다. <미카엘라>, <비밀>이 그러하다. 전자는 동명의 세례명을 가진 서로 다른 두 딸의 엇갈린 운명을 미카엘라 엄마가 하나로 품어내는 인식을 통해 세월호 사건이 빚어내는 참사의 실체를 분명히 한다. 후자는 가족의 슬픔과 고통의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연락이 끊긴 손녀딸을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순진한 자술이 비극을 한층 배가한다. 작품해설을 통해서 모호한 암시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이는 저만의 숨으로, 빛으로 여자를 지켰다. 이 세상의 어둠이 그녀에게 속삭이지 못하도록 그녀를 지켜주었다. 아이들은 누구나 저들 부모의 삶을 지키는 천사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누구도 그 천사들을 부모의 품으로부터 가로채갈 수는 없다. 누구도. (P.241, <미카엘라>)

 

넷째, 여성의 세계. 여성작가이다 보니 비중이 높을 수 있겠지만, 작중 주요 인물과 능동적 행위자는 죄다 여성이다. <쇼코의 미소>의 할아버지, <한지와 영주>의 한지를 제외하면 남편, 아빠는 어떤 이유로도 작중에서 왜소한 모습이다. 영주의 남자친구는 쪼잔한 모습이다. 순애 언니의 남편은 어찌 되었든 그 모든 불행의 단초가 된다. 미카엘라의 아빠 또한 노동운동에 매진하면서 정작 가정을 빈곤 상태로 빠뜨리지 않는가. 특히 <씬짜오, 신짜오>의 아빠는 소통과 인정을 거부하는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다섯째, 작품의 형식이 대체로 회상적이다. 고등학교 교류 학생으로 알게 된 쇼코와 소유의 인연은 할아버지와 주고받은 편지를 전달하러 온 쇼코의 출국으로 이어지기까지 과거를 내내 회상한다. 베를린에서 이웃한 응웬 아줌마 일가와의 추억도 훗날 화자가 회상하며 다시 아줌마와 재회하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화자 엄마의 눈으로 바라본 자신과 순애 이모의 가슴 아프고 슬픈 삶의 여정은 사후 화해로 이어지기에 안타까움과 애틋함이 교차한다. 화자 영주가 프랑스 수도원에서 만난 케냐 청년 한지와의 만남은 자체로 막막한 추억이다. 서울과 페테르부르크를 넘나드는 화자와 미진 선배의 인연, 화자와 율랴의 회상은 망자에 대한 사랑과 공감 아니겠는가. 할머니 말자는 치명적인 병으로 살날이 많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손녀 지민을 그리워한다. 중국에서 연락이 끊긴 손녀의 진실을 모른 채.

 

여섯째, 소통과 단절. 수록작 모두는 가족, 이웃, 사회, 인종 간 소통이 어떻게 형성되고 깨어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가족이라고 늘 돈독하고 화목하지 않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오히려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심이 소통의 단절을 가져온다. 미스터 김과 쇼코가 서슴없이 속내를 교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소유보다 가까워서가 아니다. 영주는 부끄럽고 창피하고 잘못한 일을 유독 한지에게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는가. 화자의 엄마는 그토록 순애 이모를 사랑하면서도 저버릴 수밖에 없었는지. 화자의 엄마와 응웬 아줌마가 순수하게 나누었던 유대는 역사적 사건에 얼마나 취약했던가. 소통과 유대가 원활히 작동할 때 인물 간 관계가 따뜻하며 긍정적으로 작용함을 작가는 보여준다.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그런 태도가 서서히 그들의 사이를 멀게 했고, 함께 살았던 시간 동안 쌓아왔던 마음들도 더 이상 그 관계를 지탱해주지 못했다. (P.114, <한지와 영주>)

 

일곱째, 순수한 서사의 미덕. 작가는 문장에 별다른 문학적 기교와 꾸밈을 덧붙이지 않는다. 오로지 이야기 자체가 주는 힘으로 작품을 이끌어 나간다. <쇼코의 미소>가 주는 아련한 슬픔, <한지와 영주>가 들려주는 막막한 애정의 느낌은 오로지 인물들의 고유한 삶과 행동, 그들이 주고받는 관계가 빚어내는 다양한 스펙트럼에 있다. 그것의 결과가 비록 이별과 죽음으로 이어지고 인물들이 행복하게 나아가지 못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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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니트 에디션) (3종 중 1종 랜덤)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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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은 한강과 더불어 내가 애정하는 작가다. 근년 들어 잠시 소홀했는데, <이중 하나는 거짓말> 니트 에디션을 구매하면서 다시 관심을 두려고 한다. 내가 고른 파란색 표지는 채운 버전이라고 한다.

 

이 소설은 세 명의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모두 24장 구성인데, 지우, 소리, 채운이 번갈아 가며 각 장의 화자를 담당한다. 그들이 풀어내는 이야기의 결은 밝거나 따뜻하지 않다. 차분하고 자성적인 그들의 내레이션은 흔히 기대하는 성장소설의 희망적인 성격과는 완연히 다르게 흘러갈 것임을 짐작케 한다. 게다가 작가 김애란도 초기작과는 달리 이후 작품들에서 상당히 다른 변모를 보이지 않았던가.

 

세 명 모두 가정사가 딱하다. 지우는 가정을 버린 아버지를 제외하고 엄마와 함께 엄마 애인 집에서 함께 사는데, 그 엄마가 어느 날 바다에 실족사한다. 채운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실수로 아버지를 찌르고 엄마가 대신 감옥에 간다. 아버지는 식물인간 상태다. 그나마 소리가 낫다. 중병을 앓던 엄마는 교통사고로 사망하지만 그래도 멀쩡한 아버지가 있으므로. 작가는 이들을 같은 학급으로 몰아넣는다. 그전에는 서로 간에 전혀 알지 못하였던 그들을.

 

세상에 인간은 있되

구원도 없고 기적도 없고 선의도 없다는 걸 잊었습니다. (P.12)

 

아마도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는 위와 같으리라. 대체로 어둡고 고요하게 가라앉고 고개를 들어도 눈앞에 밝은 빛을 찾을 수 없는 듯한. 작가는 자신의 말처럼 삶의 비정함을 전면에 내세우고 싶었던 것일까. 표제와도 같이 거짓 없는 삶은 없다는 것처럼. 단순한 자기소개에서조차 거짓이 개재되어 있듯이 삶 자체에는 얼마나 수많은 거짓이 있게 마련인가. 진실을 부각하기 위해 거짓을 허용하든,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을 용인하든 진실과 거짓이 혼재된 것이 삶의 실체다.

 

등장인물은 제각기 거짓말을 내뱉는다. 의도가 좋고 나쁨과는 상관없이. 채운의 거짓말은 부작위에 의한 거짓이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찔렀음을 자백하지 않으며, 소리에게 아버지의 손을 잡아달라고 부탁할 때 진짜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채운 엄마는 자신이 부정을 저질렀음을 채운에게 밝힌다. 소리는 채운에게 그의 아버지의 상태를 솔직히 말하지 않는다, 그것도 완전한 오해에서. 소리 아버지는 소리 엄마의 죽음과 관련하여 아내의 절실한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였음을. 지우와 지우 엄마는 어떠한가. 엄마의 죽음을 지우는 단순 사고로 믿지 않는다. 불치병 진단을 받은 엄마가 자신을 속이고 의도된 죽음을 선택하였을 것으로 확신하고 용서하지 못한다.

 

작가는 주인공들을 깊은 수렁에 빠뜨린 채 방치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홀로인 그들 곁에는 충직한 동반자가 있다. 지우에게는 용식이, 채운에게는 뭉치가. 용식이를 돌보며 지우는 따돌림 시절을 버텨낼 수 있었고, 만화를 그리면서 비참함을 견뎌낼 수 있었다. 채운에게 뭉치는 가족과 같은 존재다. 세상에 홀로 남아있는 그에게 유일하게 믿음과 애정을 베푼 게 뭉치가 아니던가. 소리는 그런 게 없다고? 아니다, 소리는 용식이가 죽기 전까지 그를 돌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아버지가 곁에 있다.

 

삶의 가장 엄혹한 시절을 겪으면서 세 사람은 서서히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소리는 무덤에서의 고백으로 엄마와 화해하고, 지우는 피가 섞이지 않은 선호 아저씨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지우가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을까 전전긍긍하던 채운은 그날 밤 지우의 심적 상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차리고 오히려 놀라게 된다. 자신은 그토록 처절히 불행하였건만 그 광경을 보면서 동경하던 사람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삶은 이야기와 다를 테지. 언제고 성큼 다가와 우리의 뺨을 때릴 준비가 돼 있을 테지. 종이는 찢어지고 연필을 빼앗기는 일도 허다하겠지.’ (P.232)

 

채운 엄마의 간절한 소망처럼,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하고 살게 될 것이다.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삶이 제아무리 가혹하게 자신의 뺨을 때릴지언정 어쨌든 살아내는 것이 그들의 몫이므로. 삶의 희로애락을 겪어야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은 힘들고 고달픈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제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것을 거부할 수 없기에 최선을 다해 그것을 무릅쓰고 나아가야 한다. 삶의 이야기는 이렇게 형성된다.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데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도? 지우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P.233)

 

구성과 형식, 내용 전개 면에서 작가가 한땀 한땀 공들인 티가 묻어난다. 전혀 무관한 세 사람의 만남과 어울림, 그네들의 일상과 삶이 교묘하게 교차하거나 스쳐 지나가도록 하는 설정. 지우의 만화를 별도로 자세히 다룸으로써 그것 자체로 지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이를 읽는 채운의 복잡한 내면도 연동되도록 하는 구상. 1인칭 화자의 제한된 시점임에도 독자는 화자의 심정은 물론 자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다른 인물의 내면도 다소나마 헤아릴 수 있다.

 

<비행운><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변화된 작가의 글쓰기는 여전하다. 어두운 삶의 현장에서도 한 줄기 빛과 웃음을 찾던 작가는 성장소설의 외양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성장소설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인가. 작가가 한껏 그려내려 애쓰는 삶의 희망적 측면이 그다지 희망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작가도 그들의 미래를 낙관하지 못하는 듯 희망 섞인 바람을 나타낼 뿐이다.

 

채운의 가정을 들여다보면서 새삼 개인의 성장에 있어 가정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이상적 뜻에서 가정은 언제나 찬미의 대상이다. 즐겁고 행복해야 마땅한 그 무엇으로. 현실은 과연 그러한가. 우리가 주변에서 항상 접하게 되는 것은 가정의 위기가 아니던가. 지우가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정작 채운은 지긋지긋하게 여겼던. 이상적이고 참다운 가정의 가치와 실현 곤란성에 이율배반성에 탄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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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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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펙트럼

공생 가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작가 김초엽을 알게 된 것은 <지구 끝의 온실>을 통해서다. 학교 추천 도서라고 하여 아이 책꽂이에 있길래 한번 읽어 보게 되었다. 나쁘지는 않지만 특별한 인상을 받지도 않았다. 다른 작품을 더 읽을 생각은 없었다. 2024년 고려대 도서관 대출 순위 상위 10권 내에 포함되어 있다길래 궁금해서 이 책을 읽는다.

 

인류의 미래가 유토피아로 나아갈 것인가, 디스토피아로 갈 것인가는 알 수 없지만, 개조된 DNA로 만들어진 신인류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신인류가 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단절된 사회와 갈등의 대결 구도는 여러 영화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처럼 순수한 장밋빛 의도로 출발한 기술이 밝은 미래로 이어지지 않는 모습은 돌고 돌아 결국 원점으로 회귀한다. 인간의 행복과 행복한 사회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신인류의 한계를 넘어 새로 만든 지구 밖 마을의 평화와 행복은 진실한 것인가. 무슨 연유로 순례자들은 시초지 지구에 남기를 선택하는가. 그토록 많은 괴로움이 그들에게 닥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P.54)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사실 우리가 빛의 속도로도 갈 수 없다면이 올바른 표제다. 워프 항법과 딥프리징의 기술, 이어서 고차원 웜홀 통로로 머나먼 우주여행이 실용화되었다면 인류와 지구 차원에서는 더없이 환영받는 발전이라고 하겠다. 모든 진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가까운 우주 슬렌포니아가 근처에 웜홀 통로가 없기에 졸지에 먼 우주가 되어 경제성 부족으로 항로가 폐쇄된 지 백년 이상 지났다. 슬렌포니아에 가족이 있는 정거장의 노인은 이산가족이 되었다. 노인은 되묻는다.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기술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P.181)

 

인간과 외계인의 조우는 우리 인간이 우주에서 지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된다. 외계인의 가능성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상반적이다. 인류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누군가를 기대하는 동시에, 그것이 인류의 미래에 어둠을 드리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서. <스펙트럼>에서 외계인은 지구 밖 우주에 존재하지만, <공생가설>은 외계인이 인간 내부에 깃들어 있다고 가정한다. 전자에서 화자의 할머니는 여러 루이와 관계를 형성하면서 그들의 문화와 체제를 관찰하고 이해하려 애쓴다. 색상의 차이로 의미를 표현하는 무리인들은 우리네 기존 편견을 깨뜨린다. 할머니가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행성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집단으로서 인간은 타자에 대한 이해에 앞서 그들을 향한 정복과 이익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므로.

 

<공생가설>은 영화 트랜스포머를 연상시킨다. 지구에 이미 먼 우주의 선진 문명을 가진 집단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그들이 개별 인간의 뇌 속에 자리 잡고 인간 문화 형성과 발달을 주도한다는 것, 인간이 일정 나이에 접어들면 유아기의 기억과 함께 개체를 떠난다는 것으로.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들을 그리워한다. 이 정도 되는 외계인이라면 충분히 공생 가능하리라.

 

류드밀라의 행성을 보며 사람들이 그리워한 것은 행성 그 자체가 아니라 유년기에 우리를 떠난 그들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P.141)

 

인간이란 존재는 이성만으로는 헤아리기 어렵다. 완벽한 논리를 거부하고 충동적 감정에 휘말리거나, 자신에 대한 이익을 거부하고 오히려 손해를 감수하는 선택을 감행하기도 한다. 타자의 눈에는 어이없지만 당사자는 굳이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나만 좋으면 그뿐이다. <감정의 물성>처럼. 감정을 보고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는 물체로 형상화할 수 있다면 좋은 감정이라면 환영을 받을 것이다. 반면 부정적인 감정은 혹시 마약류 같은 폐해를 낳지 않을까. 화자와 애인 보현의 인식차는 이해 불가능한 그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P.216-217)

 

우주 저편으로 넘어갈 터널 우주인이 될 수 있던 재경은 우주로 가는 대신 바다로 뛰어든다. 가윤의 우주 영웅은 삽시간에 온 세계의 비난 대상으로 전락한다. 힘든 시험과 신체 개조를 거치면서 인류의 대표자, 나아가 모든 여성과 소수자의 지향으로 추앙받던 그녀는 무슨 까닭으로 우주선 탑승을 거부했을까.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재경 이모를 이해하려는 가윤과 그녀의 행동을 통해 유의미한 선택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개조된 신체로 심해 탐사가 가능해진 재경은 처음부터 우주보다는 바다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는 이기적 동기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였다. 가윤은 터널 너머 저편 우주를 보고 싶었고, 대단한 광경이 아님을 인정한다. 그녀의 인정은 그녀가 실제로 목숨을 걸고 저편 우주로 갈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임을 우리는 안다. 작품해설에서는 재경에 대한 비판이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더불어 확대되었다고 하는데, 과도한 해석이다.

 

<관내 분실>은 과학소설의 외양을 띤 여성주의 문학이다. 죽은 엄마의 영혼이 마인드 도서관 내에 보관되었다는 미래 과학적 설정은 물론 흥미롭다. 게다가 인덱스가 삭제되어 존재하면서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된 엄마의 마인드도. 딸 지민은 생전 사이가 좋지 않은 엄마의 마인드를 대면하러 도서관에 온다. 그녀가 임신을 하였기 때문이랄까. 엄마의 마인드를 되찾기 위해 개인을 고유하게 드러낼 수 있는 물건을 찾으면서 소설은 여성주의로 넘어간다.

 

원래의 이름을 잃어버린 엄마. 세계 속에서 분실된 엄마. 그러나 한때는, 누구보다도 선명하고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이 세계에서 존재했을 김은하 씨. 지민은 본 적 없는 그녀의 과거를 이제야 상상할 수 있었다. (P.267)

 

북디자이너였던 결혼과 출산, 양육으로 엄마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생전에 엄마는 이미 세계와 단절되어 있었기에 사후의 마인드 분실은 오히려 새로울 게 없다. 사회도 가족도 그저 엄마라는 역할만 인식하고 인정할 뿐 개인 누구라는 고유성을 알아주지 않기에. 지민은 마침내 마주한 엄마의 고유한 본체를 인식하며 엄마를 이해한다고 하며 눈물을 흘린다. 딸과 엄마, 모녀간 여성성의 불화와 화합. 아마도 이 작품이 주목받은 건 과학소설에 여성주의를 절묘하게 결합해서라는 의견이다. 개인적으로 다소 작위적이라는 생각이지만.

 

과학소설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과학기술이 구현된 미래를 다룬다. 이 책에만도 인간 개조, 외계인, 우주여행, 의식의 기록화, 물성화된 감정 등을 다루고 있다. 통상적 공상의 범위 내에 있는 소재도 있지만 어떤 것은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참신함으로 무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각 작품은 낯설지 않다.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인간 영혼과 감정은 변치 않아서다.

 

인간이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백년이 지나도,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인간사는 복잡다단할 것이며, 그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도 해결되기 어렵다. 어쩌면 그로 인해 한층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 작품집에서 표출되는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멸시와 혐오, 경제적 부로 양분되는 사회 체제, 경제성의 논리로 외면받는 인간의 기본권은 그것을 알려준다.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혹시나 외계인과 조우하게 된다면 우리는 더욱 고민해야 할 것이다. 참다운 인간과 인간성은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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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1월 11일(토) 20:00

장소 :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연주 : 양지윤 (첼로)

프로그램

  -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5번 C단조 BWV 1011

  -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G장조 BWV 1007

  -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 C장조 BWV 1009


* 세줄평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은 여러번 들었지만, 실연은 처음이다. 확실히 1번과 3번이 귀에 와닿는다. 5번을 프로그램 중간에 놓았으면 어떨가싶다. 첫곡부터 어둡고 장중한 분위기가 가뜩이나 토요일 저녁이라 몸이 녹진녹진한데 더욱 집중하기 어렵게 만든다. 연주자는 명상적이거나 활기찬 곡 자체의 느낌을 최대한 명확히 표현하는데 주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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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초니에레 51~100 작가와비평 시선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김효신 옮김 / 작가와비평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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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옮긴이에 의해 2004년 간행한 칸초니에레 1~50편의 후속작이다. 이번에는 표제처럼 칸초니에레 중 51~100편의 시를 담고 있다. 다만 이번에는 단독 번역이다. 수록작은 주로 소네트 외 발라드 3, 마드리갈 2, 칸초네 5, 세스티나 2편이다.

 

축복 있으리니, 그날과 그달, 그 해, / 그리고 그 계절과 그때, 그 시각과 그 순간, / 그 은총의 마을, 그리고 나를 사로잡은 / 아름다운 그녀의 두 눈에 넋을 빼앗긴 바로 그곳. (P.54, 61)

 

역시 핵심을 차지하는 내용은 라우라에 대한 사랑이다. 라우라를 향한 사랑, 그리움, 갈망과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슬픔, 절망, 회한이 교묘히 엇갈린다. 사랑은 기쁨과 행복이지만, 보답받지 못한 사랑은 고통과 분노, 슬픔 나아가 증오로도 변모되기 마련이다.

 

<칸초니에레> 366편 중 거의 전부가 라우라와 사랑에 관련된 시이므로, 한꺼번에 읽다 보면 성마른 독자라면 물리고 지칠 정도이다. 이 정도면 단순한 사랑과 애정을 넘어서 거의 광기 어린 집착의 수준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다른 측면으로 보면 시인의 그녀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깊고 한결같음의 증좌라고 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일순간의 감정에 휘말려 단기간에 폭풍같이 써 내려간 시가 아니고 10, 20년에 이르는 기나긴 기간에 걸쳐 쓰고 다듬고 복기하며 재음미한 시들이 아니겠는가.

 

이제 돌아보니, 나의 주여, 10년 하고도 또 한 해를 / 거부할 수 없었던 잔인한 멍에에 / 짓눌려 가혹한 삶을 살았나이다. (P.58, 62)

 

잔혹한 길, 불현듯 사랑에 사로잡혔네. / 매년 같은 계절이 돌아와 / 나의 해묵은 상처를 새롭게 하는구나. (P.240, 100)

 

무엇보다 시인은 라우라의 눈빛에 매혹당하고 지배받는다. 최초의 그 순간 그녀의 눈빛으로 공격받고 이후 영원히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함을 무수한 시구에서 표현한다. 특히 이 책의 수록작 중에서 세 편의 칸초네(71~73)는 각 시의 분량도 압도적이거니와 라우라의 눈을 제재로 삼고 있는 점에서 특별하다. 라우라의 눈은 시인에게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주는 양면적 존재다. 시인은 그 감정을 여과 없이 찬가와 애가로 형상화한다. 한편 84편 소네트는 구성 면에서 심장과 눈의 대화 형식으로 사랑의 불가피성을 나타내고 있어서 이색적이다.

 

사랑이 둥지를 튼 그대 어여쁜 눈에, / 내 어설픈 문체를 바치오니 / 본성은 게으르지만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네. (P.96, 71)

 

내 언제나 달려가네 / 그 빛을 향해, 마치 내 구원의 뿌리인 양, / 죽음을 갈망하며 달음질칠 때, / 그 빛에 머무는 시선만으로도 나 살아가리라. (P.128, 73)

 

앞서 읽은 페트라르카 서간문을 보면, 시의 주인공 라우라는 실제 세속의 인물인 동시에 시인 마음속에서 하나의 이상화된 불멸의 여인상으로 승격화된다. 신에게 끝없는 기도와 찬미를 드리듯 시인은 라우라의 노래를 지칠 줄 모르고 읊는다.

 

시인의 진정한 슬픔은 그녀를 향한 무한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라우라의 냉대에 있다. 작중에서 라우라는 시종일관 시인의 마음을 일부러 외면하면서 경멸과 멸시의 눈초리로 냉대한다. 물론 그녀가 유부녀 신분이기에 당연하겠지만 극적인 대비를 위해 한층 과장하여 표현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이따금 라우라도 실제로는 마음 한편에 시인을 향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시구를 보면 사실일지 아니면 시인의 착각 내지 자기 위안인가 궁금하다.

 

사실인즉 만에 하나로 사랑을 이룬 나라오. / 나의 적은 정말 강했지만, / 나는 그녀의 가슴을 관통하는 슬픔을 보았다네. (P.198, 88)

 

라우라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 몇 편의 시는 오히려 많지 않기에 한층 주목하게 된다. 53편 칸초네는 콜라라는 인물에 대한 것이다. 서간문에서 콜라의 이념에 페트라르카가 열렬히 동조하였고, 그의 타락에 시인이 커다란 실망을 표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콜라와 그가 바꿔놓을 정치체제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잘 표현한다. 친구 콜론나에게 보내는 소네트(58)와 동생에게 바치는 소네트(91), 그리고 시인 치노의 죽음에 바치는 소네트(92) 모두 흥미롭다.

 

최근에 번역 출간된 <칸초니에레> 완역본을 얼마 전에 구입하였다. 천천히 시간 날 때마다 찬찬히 읽으면서 음미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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