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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수록작>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펙트럼
공생 가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작가 김초엽을 알게 된 것은 <지구 끝의 온실>을 통해서다. 학교 추천 도서라고 하여 아이 책꽂이에 있길래 한번 읽어 보게 되었다. 나쁘지는 않지만 특별한 인상을 받지도 않았다. 다른 작품을 더 읽을 생각은 없었다. 2024년 고려대 도서관 대출 순위 상위 10권 내에 포함되어 있다길래 궁금해서 이 책을 읽는다.
인류의 미래가 유토피아로 나아갈 것인가, 디스토피아로 갈 것인가는 알 수 없지만, 개조된 DNA로 만들어진 신인류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신인류가 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단절된 사회와 갈등의 대결 구도는 여러 영화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처럼 순수한 장밋빛 의도로 출발한 기술이 밝은 미래로 이어지지 않는 모습은 돌고 돌아 결국 원점으로 회귀한다. 인간의 행복과 행복한 사회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신인류의 한계를 넘어 새로 만든 지구 밖 마을의 평화와 행복은 진실한 것인가. 무슨 연유로 순례자들은 시초지 지구에 남기를 선택하는가. 그토록 많은 괴로움이 그들에게 닥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P.54)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사실 ‘우리가 빛의 속도로도 갈 수 없다면’이 올바른 표제다. 워프 항법과 딥프리징의 기술, 이어서 고차원 웜홀 통로로 머나먼 우주여행이 실용화되었다면 인류와 지구 차원에서는 더없이 환영받는 발전이라고 하겠다. 모든 진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가까운 우주 슬렌포니아가 근처에 웜홀 통로가 없기에 졸지에 먼 우주가 되어 경제성 부족으로 항로가 폐쇄된 지 백년 이상 지났다. 슬렌포니아에 가족이 있는 정거장의 노인은 이산가족이 되었다. 노인은 되묻는다.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기술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P.181)
인간과 외계인의 조우는 우리 인간이 우주에서 지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된다. 외계인의 가능성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상반적이다. 인류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누군가를 기대하는 동시에, 그것이 인류의 미래에 어둠을 드리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서. <스펙트럼>에서 외계인은 지구 밖 우주에 존재하지만, <공생가설>은 외계인이 인간 내부에 깃들어 있다고 가정한다. 전자에서 화자의 할머니는 여러 루이와 관계를 형성하면서 그들의 문화와 체제를 관찰하고 이해하려 애쓴다. 색상의 차이로 의미를 표현하는 무리인들은 우리네 기존 편견을 깨뜨린다. 할머니가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행성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집단으로서 인간은 타자에 대한 이해에 앞서 그들을 향한 정복과 이익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므로.
<공생가설>은 영화 ‘트랜스포머’를 연상시킨다. 지구에 이미 먼 우주의 선진 문명을 가진 집단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그들이 개별 인간의 뇌 속에 자리 잡고 인간 문화 형성과 발달을 주도한다는 것, 인간이 일정 나이에 접어들면 유아기의 기억과 함께 개체를 떠난다는 것으로.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들을 그리워한다. 이 정도 되는 외계인이라면 충분히 공생 가능하리라.
류드밀라의 행성을 보며 사람들이 그리워한 것은 행성 그 자체가 아니라 유년기에 우리를 떠난 그들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P.141)
인간이란 존재는 이성만으로는 헤아리기 어렵다. 완벽한 논리를 거부하고 충동적 감정에 휘말리거나, 자신에 대한 이익을 거부하고 오히려 손해를 감수하는 선택을 감행하기도 한다. 타자의 눈에는 어이없지만 당사자는 굳이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나만 좋으면 그뿐이다. <감정의 물성>처럼. 감정을 보고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는 물체로 형상화할 수 있다면 좋은 감정이라면 환영을 받을 것이다. 반면 부정적인 감정은 혹시 마약류 같은 폐해를 낳지 않을까. 화자와 애인 보현의 인식차는 이해 불가능한 그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P.216-217)
우주 저편으로 넘어갈 터널 우주인이 될 수 있던 재경은 우주로 가는 대신 바다로 뛰어든다. 가윤의 우주 영웅은 삽시간에 온 세계의 비난 대상으로 전락한다. 힘든 시험과 신체 개조를 거치면서 인류의 대표자, 나아가 모든 여성과 소수자의 지향으로 추앙받던 그녀는 무슨 까닭으로 우주선 탑승을 거부했을까.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재경 이모를 이해하려는 가윤과 그녀의 행동을 통해 유의미한 선택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개조된 신체로 심해 탐사가 가능해진 재경은 처음부터 우주보다는 바다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는 이기적 동기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였다. 가윤은 터널 너머 저편 우주를 보고 싶었고, 대단한 광경이 아님을 인정한다. 그녀의 인정은 그녀가 실제로 목숨을 걸고 저편 우주로 갈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임을 우리는 안다. 작품해설에서는 재경에 대한 비판이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더불어 확대되었다고 하는데, 과도한 해석이다.
<관내 분실>은 과학소설의 외양을 띤 여성주의 문학이다. 죽은 엄마의 영혼이 마인드 도서관 내에 보관되었다는 미래 과학적 설정은 물론 흥미롭다. 게다가 인덱스가 삭제되어 존재하면서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된 엄마의 마인드도. 딸 지민은 생전 사이가 좋지 않은 엄마의 마인드를 대면하러 도서관에 온다. 그녀가 임신을 하였기 때문이랄까. 엄마의 마인드를 되찾기 위해 개인을 고유하게 드러낼 수 있는 물건을 찾으면서 소설은 여성주의로 넘어간다.
원래의 이름을 잃어버린 엄마. 세계 속에서 분실된 엄마. 그러나 한때는, 누구보다도 선명하고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이 세계에서 존재했을 김은하 씨. 지민은 본 적 없는 그녀의 과거를 이제야 상상할 수 있었다. (P.267)
북디자이너였던 결혼과 출산, 양육으로 엄마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생전에 엄마는 이미 세계와 단절되어 있었기에 사후의 마인드 분실은 오히려 새로울 게 없다. 사회도 가족도 그저 엄마라는 역할만 인식하고 인정할 뿐 개인 누구라는 고유성을 알아주지 않기에. 지민은 마침내 마주한 엄마의 고유한 본체를 인식하며 엄마를 이해한다고 하며 눈물을 흘린다. 딸과 엄마, 모녀간 여성성의 불화와 화합. 아마도 이 작품이 주목받은 건 과학소설에 여성주의를 절묘하게 결합해서라는 의견이다. 개인적으로 다소 작위적이라는 생각이지만.
과학소설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과학기술이 구현된 미래를 다룬다. 이 책에만도 인간 개조, 외계인, 우주여행, 의식의 기록화, 물성화된 감정 등을 다루고 있다. 통상적 공상의 범위 내에 있는 소재도 있지만 어떤 것은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참신함으로 무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각 작품은 낯설지 않다.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인간 영혼과 감정은 변치 않아서다.
인간이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백년이 지나도,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인간사는 복잡다단할 것이며, 그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도 해결되기 어렵다. 어쩌면 그로 인해 한층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 작품집에서 표출되는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멸시와 혐오, 경제적 부로 양분되는 사회 체제, 경제성의 논리로 외면받는 인간의 기본권은 그것을 알려준다.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혹시나 외계인과 조우하게 된다면 우리는 더욱 고민해야 할 것이다. 참다운 인간과 인간성은 무엇을 가리키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