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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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구성된 삼부작 연작소설이다. 이 중 <몽고반점>2005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면서 내가 한강이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알게 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 개인적으로 한강 작가를 애호하게 되었음을 덧붙인다.

 

부커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작품을 이제사 찬찬히 읽어보면서 작품에 대한 좋고 싫음의 편차가 상당히 클 수 있겠다 싶다. 소설 내내 비치는 파격적 소재와 성적 묘사, 여성주의, 폭력성에 대한 극단적 거부감 등이 보수적인 독자를 불쾌하게 만들 여지가 충분하다. 후기작의 시적 산문 문체에 사용하지 않았기에 독서 자체는 어렵지 않다. 건조할 정도로 담백한 필체는 조만간 그의 미래를 살짝 드러내기도 하지만.

 

삼부작의 주인공은 분명 영혜이지만, 그녀는 화자로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작중에서 그녀는 말수도 적고 거의 수동적이다. <채식주의자>는 그녀의 남편, <몽고반점>은 형부, <나무 불꽃>은 그녀의 언니가 각각 화자를 맡는다. 그들의 발언과 생각을 통해 독자는 영혜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해 보지만 그것은 결코 영혜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기에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채식주의자>라는 표제는 어쩌면 다소나마 어그로를 끌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싶다.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당시에도 채식주의자는 있었으므로. 다만 그녀의 선포는 너무 급작스럽고 공격적이다. 자신은 채식주의자이지만 남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음을 영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가 브래지어 차는 걸 싫어하는 행동을 통해 단초를 보였음에도 남편은 그녀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그녀의 육식 거부는 채식 자체보다도 동물성이 갖는 폭력성에 대한 거부에 가깝다. 남편과의 잠자리마저 저항하는 영혜가 내뱉는 젖가슴 예찬론은 폭력성에 대한 반감을 여실히 표출한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P.43)

 

동서와 처형이 나중에 영혜의 남편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지만, 사실 그는 평범한 유형의 남자다. 가정과 회사 생활에서 그는 어떻게든 버텨내려고 애쓴다. 그에게 부족한 점은 아내의 변신을 좀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회사 부부 모임에 데려갔다든지 처가 식구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든지 하는 행동이다. 그렇다고 그를 무작정 비난하는 건 온당치 못하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내의 행동이므로. 칼로 손목을 긋고 병원에서 새를 물어뜯는 아내를 받아들인다는 건 어떤 평범한 남편도 간단치 않다.

 

<몽고반점>에서 형부와 영혜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두 사람의 행위 결과는 파국으로 치달아 형부 가정은 파탄 나고 영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처제를 성적으로 이용하고 유린한 형부를 비난하면 충분한가, 정말로 영혜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고 할 수 있는가. 형부가 처제 엉덩이의 몽고반점에서 보았던 환상은 무엇이고, 처제가 자신의 몸에 그린 식물과 꽃 그림을 지우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자신의 몸에 역시 식물 그림을 그린 형부와 영혜의 육체적 결합이 갖는 함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것이 아름다운 동시에 추악한 장면이라면 작가는 그런 이중적 장면을 생생한 표현으로 그려냈는가. 식물의 섹스를 흉내 냈지만 두 사람의 행위는 역시 동물의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인가. 그런데 영혜는 왜 이제 꿈을 꾸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걸까.

 

앞선 소설들에서 어렴풋하고 은근슬쩍 엿보이던 작가의 의도는 <나무 불꽃>에서 좀 더 명확해진다. 우리는 여기서 제부는 감탄하고 남편은 등한시한 영혜의 언니를 비로소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뛰어난 생활 능력과, 겉보기에 성공적인 가정생활이 사실은 끝없는 버티기 노력의 산물임을. 현실과 타협하고 수용하며 지쳐가는 그녀와 달리 원초적 본능과 목소리로 현실을 거부하는, 비록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동생에 대해 부러움과 시샘의 양가적 속내를 보게 된다. 그녀에게 갖는 우리의 감정은 안타까운 동정심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역시 그녀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동류의식과도 같다.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게 된 계기인 꿈과 그에게 육식을 물리적으로 강제하려는 아버지의 행동에 있어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잔인한 폭력성이다. 개는 아버지 오토바이에 묶여 지쳐 나자빠질 때까지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간다. 딸의 입에 강제로 고기를 쑤셔놓고 뜻대로 안 되자 뺨을 때리는 행동에서 우리는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유산인 뿌리 깊은 폭력성을 확인하게 된다. 폭력에 대한 그녀의 반발과 혐오감은 <채식주의자>의 충격적 결말인 작은 새를 물어뜯는 영혜의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작가는 여기에서 육식은 동물성의 증표이며, 폭력성과도 짙게 결부하고 있다. 육식은 고기를 먹는 행위이며, 고기를 동물을 죽여야 획득할 수 있다. 그것은 생명체의 목숨줄을 강제로 끊어야 하며 피를 흘려야 가능하다. 우리는 생존을 핑계로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앗는다.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P.61)

 

<몽고반점>은 동물성과 대비되는 식물성을 지향한다. 언뜻 식물은 정적이며 수동적인 존재로 간주되지만, 영혜의 형부는 식물과 꽃을 인간의 나체와 결합함으로써 더없이 역동적이며 생명력으로 충만한 존재로 변화시킨다. 동물성이 폭력적인 반면 식물성은 비폭력과 평화로움을 나타낸다. 동물성은 죽음으로 이어지지만 식물성은 무한한 삶과 번창으로 뻗어나간다. 형부가 처제의 몸에서 육체적 욕망을 갈망하고, 그토록 무감각하게 반응하던 처제가 성적 욕망을 느끼게 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 동인이다. 그들의 행위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것이지만, 예술적 영감과 식물적 관능에 함몰된 형부는 통념의 끈을 넘어선다. 비록 세속적 파멸이 눈앞에 있더라도.

 

언니, 내가 물구나무서 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P.156)

 

외딴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영혜는 식음을 거부한다. 그녀를 찾아간 언니에게 그는 비밀을 털어놓듯 자신이 더는 동물이 아닌 나무라고 속삭인다. 음식 따위는 필요 없이 햇빛만으로 충분한, 그래서 물구나무서기 자세로 거꾸로 있어야 비로소 완전한 나무에 가까워진다며. 병원 관계자와 언니가 보기에는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영혜의 논리에서는 완벽하다. 동물로서의 인간 영혜는 죽지만, 식물로서의 나무 영혜는 새롭게 자라나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받지 않고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며 대지 속에서 대지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 나무의 초록빛 불꽃은 온전한 생명의 불꽃이 아닐까.

 

여성주의가 강제와 억압의 거부이자 여성 몸의 주체로서 재인식이라고 한다면, 영혜는 여성주의자다. 그의 어머니와 언니는 봉건적 가치관에서 아직 탈피하지 못한 상태이며, 그의 아버지는 전형적 남성중심주의자다. 이 작품을 여성주의 관점에서 해독할 수 있지만, 동물을 남성, 식물을 여성으로 무리하게 비정하지 않는다면 한계에 봉착한다. 여기서 작가는 여성주의 자체보다 동물적 폭력성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오래 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P.201)

 

문득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혹시 영혜의 언니가 아닐까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각 단편에서 주요 인물들은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영혜의 남편도, 형부도, 부모도 모두. 영혜는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독자 누구나 알고 있듯 그를 정상적인 사고의 인물이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비록 그가 던지는 화두가 강렬하고 메시지가 묵직하지만. 영혜의 언니는 매 단편마다 충격적 경험을 하고 이를 수습하는 역할을 맡는다. 동생의 자해 행위, 남편과 동생의 기묘한 육체 결합, 식음을 거부하고 스스로 나무가 되기 위해 죽어가는 동생. 모두가 도망치고 이성의 끈을 놓을 때 그녀는 온몸으로 이 모든 것을 감당한다.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동생을 용서할 수 없도록 미워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음을. 과연 그녀의 자각처럼 그녀는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는 건가, 자신은 이미 죽어 있는 존재인가? 이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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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소리 - 열정의 피아니스트 임현정의 나의 이야기
임현정 지음, 양영란 옮김 / 청미래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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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임현정의 자서전이다. 자서전이란 용어가 거창하다면, 임현정 삶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한국, 콩피에뉴, 루앙, 파리, 벨기에, 뇌샤텔로 장을 구분하였는데, 임현정의 거주지역이자 음악의 여로를 담고 있다. 특이하게도 프랑스어로 된 글을 번역하였다. 베토벤 소나타 전집을 출시하면서 세간의 화제가 되자 프랑스 현지에서 피아니스트 개인에 대한 궁금증이 컸던 듯하다.

 

솔직히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 소나타는 아직 내 취향이 아니다. 라벨의 음악(스크리아빈은 잘 모르니까)도 귀에 와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피아니스트로서 그를 존중한다. 앞서 읽은 책을 포함해서 이 책에서 음악을 향한 그의 진지하고 투철한 자세를 높이 평가한다.

 

타고난 재능을 논외로 할 때 지독하다는 느낌을 그에게 우선 떠올린다. 어린 나이에 홀로 프랑스 유학길을 오른다든가 말도 안 통하는 타지에서 차별에 시달리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는 모습, 자신의 직관을 따르기 위해 루앙 국립음악원에서 자발적 외톨이를 선택하는 장면 등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좌초하기 쉬운 환경에서 그는 살아남고 성공을 거두었다. 정말로 목숨을 걸 정도의 독한 마음과 행동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제아무리 뛰어난 인물도 홀로 성공의 길에 오르지 못한다. 주변에서 그를 돕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이다. 그를 둘러싼 환경과 인물이 항상 호의적이지 않다. 그가 기술하는 이모네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위를 자행하였는지 궁금할 정도다. 루앙 국립음악원의 피아노 담당 교수도 제자의 성취가 못마땅하다면 어찌 교사 자격이 있을지. 반면 마르크 오플레, 콜레트 테니에르, 앙리 바르다 교수를 만난 건 천운이기에 그들을 향한 그의 지극한 사의는 온당하다. 알렉산드르 라비노비치-바라콥스키의 우연한 인연은 그의 발전을 위해 더없이 소중하다.

 

피아니스트 임현정은 개성적인 인물이다. 한국 교육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유학을 떠난 것, 퀸 엘리자베스 뮤직채플의 풍요로움을 과감히 떠난 것, 명성의 고속도로인 유명 콩쿠르에 나서지 않은 것, 음반사의 제안에 베토벤 소나타 전곡이라는 거대한 역제안을 하고 이루어낸 것. 음악적 도전을 무리일 정도로 과감하게 실행해 나가는 것 등. 이 모든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음악 자체에 진실하고 헌신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지나칠 정도로 개성적인 그의 음악 해석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음악은 영혼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 표현은 테크닉, 혹은 속도의 인질이 되어 억압받거나 제약을 받을 수가 없다. 받아서는 안 된다. 그만큼 제일 먼저 그 표현과 나의 영혼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P.93)

 

그 소나타들의 영감이 베토벤의 심장에 뛰어들어왔을 때 뛰었던 그 심장의 템포로,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들려주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하고야 말 것이었다. 베토벤을 위해서, 우리의 삶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P.216)

 

이 책은 의외로 영성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외로움과 풍파에 시달린 그가 종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뜻밖에 불교를 받아들였음은 놀랍다. 서대산인 성담 스님을 주저치 않고 스승님이라 부르고, 에필로그에 스님을 향한 헌사를 남길 정도면 통상적 입문을 넘어서는 단계라고 하겠다.

 

많은 아이가 피아노를 배운다. 수많은 영재, 천재들이 각종 음악학교에 넘쳐난다. 유럽으로, 미국으로 음악 유학을 떠나는 학생도 많다. 젊은 음악인 중에 세계 유수 콩쿠르 입상자들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요즘 핫한 조성진, 임윤찬이 대표적이며, 여성 중에는 임현정, 문지영, 손열음 등의 언뜻 떠오른다. 그들에게 피아노는 무슨 의미고, 음악은 어떠한 존재인가. 비판적인 시각으로는 쇠퇴하는 서양 클래식 음악의 일개 연주자에 불과하다. 그것에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칠 의의가 있는가. 부모의, 또는 당사자의 철모르는 극성맞음의 산물이 아닐까.

 

피아노라는 악기, 클래식 음악이라는 장르는 예술에 이르는 수단이다. 바이올린과 같은 다른 서양 악기, 가야금과 거문고 같은 전통 악기를 선택할 수 있다. 대중가요, 팝송, 국악을 전공해도 좋다. 아니 음악을 떠나서 미술, 건축, 사진, 연극 등의 다른 예술 장르에 관심을 기울여도 좋다. 중요한 건 수단이 아니라 예술의 본질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임현정은 불교를 통해 또 다른 깨달음의 길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기술한다. 침묵의 길.

 

중요한 것은 음악에 대한 나만의 독특하고 개인적이며 직관적인 욕망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의 침묵이다. 피아노는 그저 그곳으로 데려가주는 사공일 뿐이다. (P.36)

 

피아노는 우리가 음악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는 그 공간을 열어준다. 그러면 나는 세계와 하나가 된다. (P.225)

 

전반부는 예상과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임현정 개인의 삶과 음악의 경로가 솔직하게 펼쳐진다. 후반부도 대체로 그러하지만, 그의 표면적 모습과 행위가 아닌 내면의 목소리를 육성으로 토로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는 여기서 자신을 아름답게 포장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의 솔직함과 종교적 견해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적어도 내면을 드러내고자 하는 과감한 용기를 지녔음을 부인하지 못하리라. 그것이 이 책을 읽은 묘미이자 뉴스와 음반 표지의 화려하고 당당함에 가려진 그의 참모습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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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4년 11월 26일(화) 19:30

장소 : 금호아트홀 연세

연주 : 김유빈 (피아노)

프로그램

  - 라벨, 소나티네

  - 드뷔시, 판화 L.100

  -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 B단조 Op.58


* 세줄평

전반부는 인상주의, 후반부는 쇼팽의 선곡이다. 라벨의 경묘함도 좋았지만, 드뷔시의 <판화>를 이렇게 집중해서 들어본 기억이 없다. 풍부한 색채감과 화성적 느낌이 새삼 뛰어나다. 쇼팽의 곡은 확실히 라벨과 드뷔시에 비해 듣기가 심적으로 편하다. 명곡다운 훌륭한 연주다. 날씨 탓인지 청중이 많지 않은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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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4년 11월 25일(월) 19:30

장소 : 금호아트홀 연세

연주 : 신민자 (피아노), 함수연 (피아노)

프로그램

  - 프로코피에프, (2대의 피아노를 위한) 로미오와 줄리엣 OP.64 [S. Babayan 편곡]

  - 풀랑,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FP.156

  - 리스트. (2대의 피아노를 위한) 노르마의 회상 S.655

  - 쇼스타코비치,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티노 A단조 Op.94

  - 라흐마니노프, 2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2번 Op.17


* 세줄평

프로코피에프의 첫곡의 강렬함이 놀라움을 안겨주는데, 개별 곡목이 하나하나 재미 있지만 풀랑과 쇼스타코비치의 유머러스함이 기억에 남는다.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가 이렇게 좋은 작품이었는지 내내 감탄하였다. 피아노 듀오는 선입견이 있어서 잘 듣지 않게 되는데 반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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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 연대기
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옮김 / 사계절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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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드 앗 딘의 <집사> 최초 3부작을 구입해 놓고 호기롭게 <부족지>에 도전하였다가 뜨거운 맛을 본 후로는 서가에 잘 비치해 놓고 오랫동안 다시 펼쳐들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 방대함과 난삽함에 느낀 당혹감에 비례하여 일반독자 수준에서 이해가 잘 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책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역자도 마찬가지 생각이 있었던 듯싶다.

 

몽골제국사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는 <집사>에 보다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한 이유로 이번에 한 권으로 된 <몽골제국 연대기>를 내놓게 되었다. (P.9, 서문)

 

<집사> 5권을 완역한 김호동 교수가 원전의 내용을 압축 요약하여 몽골제국 역사를 연대기 형식으로 출간한다는 소식에 처음으로 북펀딩에 참여하였다. 남들 누구 못지않게 역사를 애호하는 내 마음에 그만큼 <집사>는 커다란 빚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출간 기념 오프라인 북토크에도 참석하였고, 몽골제국에 앞서 유목 제국의 기초 개념을 정리하기 위해 흉노 제국 관련서를 예습 차원에서 읽었다.

 

이 책은 몽골제국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 말은 곧 <집사> 5권 가운데, <칭기스 칸기><칸의 후예들>이 핵심을 차지한다는 것이며, <일 칸들의 역사><이슬람의 제왕>은 필요한 범위 내에서 일부만 취급한다. 다만 <부족지>는 대체로 빼놓았는데, 일단 여기를 건들게 되면 늪에 빠질 위험성 때문이리라.

 

칭기스 칸의 일생은 대체로 잘 알려져 있고, 그의 후손들이 어떻게 세계 제국을 건설하였는지에 관한 개략적 역사는 새삼스럽지 않다.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몽골인들 자신의 관점과 목소리로 그들의 찬란한 역사와 건국의 시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데 있다. 14세기 초, 광대한 몽골제국의 뼈대는 아직 굳건하게 남아 있고, 카안 울루스, 즉 원 제국도 여전히 중국을 지배하던 시절이므로 몽골제국은 세계사의 중심이었다. 분명한 한계도 보이는데, 일 칸국의 후기에 편찬된 까닭에 종교적으로 이슬람교에 치우친 관점을 보이며 아무래도 자신들의 조상인 훌레구 및 후손들에 다소간 우호적인 기술을 찾아볼 수 있다.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그의 군대가 몰고 온 파괴가 이슬람권 각 지방에 미치자 창조주께서는 그 같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파괴를 가져온 바로 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신의 완벽한 위력과 명령을 분명히 드러내신 것이다. (P.57-58)

 

대제국의 시조와 영웅의 탄생과 관련하여 신화적 요소가 반영되어 있음을 여기서도 보게 되는데, 알란 코아가 한 줄기 빛으로 임신하였다는 내용은 우리네 고대 신화와도 유사성을 보여 흥미롭다. 칭기스 칸의 출생에서도 상서로운 징표가 나타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칭기스 칸은 생전 몽골 초원의 통일에 매진하였다. 여러 부족과의 전투 중에서 특히 옹 칸과의 경쟁을 상세하게 기술하는데 그만큼 옹 칸이 최대의 적수였음과 더불어 칭기스 칸의 부친과 옹 칸이 의형제 관계였음에 더욱 그러하다. 칭기스 칸이 옹 칸에게 적시한 일곱 가지 은혜의 내용이 이를 잘 나타내준다.

 

칭기스 칸은 초원 제국의 전통에 충실하였다. 그는 몽골의 이웃한 적국인 금, 서하 및 카라 키타이를 확실히 제압하고, 특히 금에 대해서는 조공 관계를 맺고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가 정주국가인 금을 정복한다거나 멀리 중앙아시아의 호라즘을 멸망시킬 계획은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음을 여기서 새삼 확인할 수 있음은 흥미롭다. 사실상 세계 제국으로의 야망은 호라즘 정복에서 비롯하였다고 해야 한다.

 

이제 내가 가까운 변경의 적들을 일소하고 모두 복속시켰으니, 우리는 이웃이 되어 지혜와 용기에 근거하여 협력의 길을 걷도록 합시다. 그래서 세상의 번영을 가져다주는 상인들이 마음 놓고 오고 갈 수 있도록 합시다. (P.134)

 

종래 몽골제국에 대해서는 칭기스 칸 사후, 크게 중국의 원 제국과 네 개의 칸국으로 사실상 분열되었다고 배웠다. 편역자는 이 책에서 전혀 다르게 설명하는데, 그들이 비록 다툼과 갈등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들 모두는 자신들이 하나의 가계임을 결코 잊지 않았고, 대칸국의 적통성을 존중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국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쿠릴타이가 개최되면 제국 각지에서 왕족들이 대칸국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들 대형 울루스의 지배자들이나 거기에 속한 몽골인들은 여전히 자기가 몽골제국이라는 더 큰 정치체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몽골제국이 네 개의 독립적인 국가로 분열되었다고 보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위험성이 있다. (P.289)

 

편역자는 울루스 개념을 전면적으로 도입하여 칸국을 울루스로 대체한다. 킵차크 칸국은 주치 울루스로, 차가다이 칸국은 차가다이 울루스로, 일 칸국은 훌레구 울루스, 대칸국은 카안 울루스로 각기 명명한다. 주치와 차가다이 울루스는 칭기스 칸의 명령에 따른 것이므로 정통성을 지니는데, 훌레구의 경우 자신이 무력으로 쟁취한 것이기에 타 울루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고 따라서 훌레구 울루스의 역대 칸들은 카안 울루스의 승인을 매우 중시했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헷갈리는 개념인 칸과 카안의 차이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칸은 왕을, 카안은 황제에 해당하는 것. 칭기스 칸도 처음에는 칸이었고 추후에 카안의 자리에 올랐다. 칭기스 칸의 후계자인 우구데이, 구육, 뭉케, 쿠빌라이는 모두 카안이며, 차가다이, 훌레구, 가잔 등은 모두 칸이다.

 

아릭 부케는 울었고 카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는 눈물을 닦으면서 , 사랑하는 형제여! 이 반란과 분란에서 우리가 옳았는가, 아니면 자네들이 옳았는가?”라고 물었다. 아릭 부케는 그때는 우리였지만 오늘은 당신들입니다.”라고 대답했다. (P.308-309)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향한 욕망은 혈육 간 애정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의 형제 간 충돌에서 승자는 쿠빌라이 카안이 되었지만 이것은 결과의 사안이지 옳고 그름의 사안은 아닌 것이다. 저자는 쿠빌라이 카안 시기의 카안 울루스의 번영기를 소개한 후 자신의 지역인 훌레구 울루스로 관심을 돌린다.

 

무패의 신화를 자랑한 몽골군이 유일하게 참패한 세력이 바로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다. 비록 몽골군의 주력군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제법 규모가 있는 군대였으며, 무엇보다 몽골군과 훌레구 울루스의 후대 칸들이 여러 차례 복수를 시도했으나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라시드 앗 딘의 군주였던 가잔 칸도 원정에 실패하였으니 이는 결국 훌레구 울루스의 국세가 강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몽골제국 중에서 훌레구 울루스가 가장 일찍 몰락한 것도 우연은 아니라고 하겠다.

 

셋째_독자적인 왕국인 카울리(高麗)...의 싱. 그곳의 군주를 이라고 부른다. 쿠빌라이 카안은 자기 딸을 그에게 주었다. 그의 아들이 카안의 측근인데 그곳의 왕은 아니다. (P.359-360)

 

이 책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고려에 대한 기록이다. 카안 울루스에 12개의 지방 행정 단위인 싱이 있다고 하면서 세 번째로 고려를 소개하며, 한편으로는 독자적 왕국이라고 기술한다. 몽골제국에 항복한 고려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자치권은 인정하지만 커다란 틀에서는 몽골제국의 일부라고 간주하고 있는 셈이다.

 

김호동 교수는 일반독자의 쉬운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편의를 도모한다. 우선 지도다. ‘몽골제국 출현 전야의 세계와 몽골 고원의 주요 부족들’(P.48-49)에서 시작하여 칭기스 칸의 대외 원정, 훌레구의 서방 원정, 몽골의 남방 원정 등 14개의 지도를 제공하여 글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여러 사건을 시각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제시한다. 개인적으로 역사서와 기행문은 지도가 필수라는 생각이다.

 

가계도도 제공한다. 한창 읽다 보면 누가 누구인지, 누구의 자손인지 등 친족 관계가 혼란스러울 때가 있는데, 편역자는 주요 인물의 경우 조상과 후손의 계보도를 제시하고 있어 혈연 관계를 파악함에 있어 무척 유용하다. ‘칭기스 칸 조상의 계보’(P.28), ‘칭기스 칸의 증조부 카불 칸의 일족’(P.56)을 비롯하여 주치 가문의 계보도, 우구데이 카안의 가계도, 차가다이 울루스 칸 계보도, 주치 울루스 칸 계보도, 톨루이-쿠빌라이 카안의 가계도, 카안 울루스 카안 계보도, 훌레구 울루스 칸 계보도 등 상세한 계보도를 확인할 수 있다.

 

편역자가 공들여서 비록 개괄서로 편집하였지만 원전 자체가 현대 기준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으며, 사실과 여러 일화가 혼재되어 있어 다소간 어수선함은 어찌할 수 없다. 그럼에도 기존 세계사, 특히 중국사가 카안 울루스, 즉 원 제국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계를 극복하여 세계사적 관점에서 몽골제국의 전반적 면모가 특히 잘 그려져 있음은 뛰어난 점이다. 편역자는 각 장의 서두에 자신의 견해를 조금 전개하고 있을 뿐, 어디까지나 원전의 충실한 전달에 방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관통하는 기조는 어디까지나 저자 라시드 앗 딘의 목소리다.

 

다시 한번 편역자 강호동 교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 책을 밑받침으로 삼아 언젠가 <집사> 전권 완독에 도전해 보겠다는 결심을 새삼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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