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구성된 삼부작 연작소설이다. 이 중 <몽고반점>2005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면서 내가 한강이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알게 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 개인적으로 한강 작가를 애호하게 되었음을 덧붙인다.

 

부커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작품을 이제사 찬찬히 읽어보면서 작품에 대한 좋고 싫음의 편차가 상당히 클 수 있겠다 싶다. 소설 내내 비치는 파격적 소재와 성적 묘사, 여성주의, 폭력성에 대한 극단적 거부감 등이 보수적인 독자를 불쾌하게 만들 여지가 충분하다. 후기작의 시적 산문 문체에 사용하지 않았기에 독서 자체는 어렵지 않다. 건조할 정도로 담백한 필체는 조만간 그의 미래를 살짝 드러내기도 하지만.

 

삼부작의 주인공은 분명 영혜이지만, 그녀는 화자로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작중에서 그녀는 말수도 적고 거의 수동적이다. <채식주의자>는 그녀의 남편, <몽고반점>은 형부, <나무 불꽃>은 그녀의 언니가 각각 화자를 맡는다. 그들의 발언과 생각을 통해 독자는 영혜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해 보지만 그것은 결코 영혜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기에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채식주의자>라는 표제는 어쩌면 다소나마 어그로를 끌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싶다.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당시에도 채식주의자는 있었으므로. 다만 그녀의 선포는 너무 급작스럽고 공격적이다. 자신은 채식주의자이지만 남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음을 영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가 브래지어 차는 걸 싫어하는 행동을 통해 단초를 보였음에도 남편은 그녀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그녀의 육식 거부는 채식 자체보다도 동물성이 갖는 폭력성에 대한 거부에 가깝다. 남편과의 잠자리마저 저항하는 영혜가 내뱉는 젖가슴 예찬론은 폭력성에 대한 반감을 여실히 표출한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P.43)

 

동서와 처형이 나중에 영혜의 남편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지만, 사실 그는 평범한 유형의 남자다. 가정과 회사 생활에서 그는 어떻게든 버텨내려고 애쓴다. 그에게 부족한 점은 아내의 변신을 좀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회사 부부 모임에 데려갔다든지 처가 식구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든지 하는 행동이다. 그렇다고 그를 무작정 비난하는 건 온당치 못하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내의 행동이므로. 칼로 손목을 긋고 병원에서 새를 물어뜯는 아내를 받아들인다는 건 어떤 평범한 남편도 간단치 않다.

 

<몽고반점>에서 형부와 영혜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두 사람의 행위 결과는 파국으로 치달아 형부 가정은 파탄 나고 영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처제를 성적으로 이용하고 유린한 형부를 비난하면 충분한가, 정말로 영혜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고 할 수 있는가. 형부가 처제 엉덩이의 몽고반점에서 보았던 환상은 무엇이고, 처제가 자신의 몸에 그린 식물과 꽃 그림을 지우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자신의 몸에 역시 식물 그림을 그린 형부와 영혜의 육체적 결합이 갖는 함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것이 아름다운 동시에 추악한 장면이라면 작가는 그런 이중적 장면을 생생한 표현으로 그려냈는가. 식물의 섹스를 흉내 냈지만 두 사람의 행위는 역시 동물의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인가. 그런데 영혜는 왜 이제 꿈을 꾸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걸까.

 

앞선 소설들에서 어렴풋하고 은근슬쩍 엿보이던 작가의 의도는 <나무 불꽃>에서 좀 더 명확해진다. 우리는 여기서 제부는 감탄하고 남편은 등한시한 영혜의 언니를 비로소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뛰어난 생활 능력과, 겉보기에 성공적인 가정생활이 사실은 끝없는 버티기 노력의 산물임을. 현실과 타협하고 수용하며 지쳐가는 그녀와 달리 원초적 본능과 목소리로 현실을 거부하는, 비록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동생에 대해 부러움과 시샘의 양가적 속내를 보게 된다. 그녀에게 갖는 우리의 감정은 안타까운 동정심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역시 그녀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동류의식과도 같다.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게 된 계기인 꿈과 그에게 육식을 물리적으로 강제하려는 아버지의 행동에 있어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잔인한 폭력성이다. 개는 아버지 오토바이에 묶여 지쳐 나자빠질 때까지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간다. 딸의 입에 강제로 고기를 쑤셔놓고 뜻대로 안 되자 뺨을 때리는 행동에서 우리는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유산인 뿌리 깊은 폭력성을 확인하게 된다. 폭력에 대한 그녀의 반발과 혐오감은 <채식주의자>의 충격적 결말인 작은 새를 물어뜯는 영혜의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작가는 여기에서 육식은 동물성의 증표이며, 폭력성과도 짙게 결부하고 있다. 육식은 고기를 먹는 행위이며, 고기를 동물을 죽여야 획득할 수 있다. 그것은 생명체의 목숨줄을 강제로 끊어야 하며 피를 흘려야 가능하다. 우리는 생존을 핑계로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앗는다.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P.61)

 

<몽고반점>은 동물성과 대비되는 식물성을 지향한다. 언뜻 식물은 정적이며 수동적인 존재로 간주되지만, 영혜의 형부는 식물과 꽃을 인간의 나체와 결합함으로써 더없이 역동적이며 생명력으로 충만한 존재로 변화시킨다. 동물성이 폭력적인 반면 식물성은 비폭력과 평화로움을 나타낸다. 동물성은 죽음으로 이어지지만 식물성은 무한한 삶과 번창으로 뻗어나간다. 형부가 처제의 몸에서 육체적 욕망을 갈망하고, 그토록 무감각하게 반응하던 처제가 성적 욕망을 느끼게 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 동인이다. 그들의 행위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것이지만, 예술적 영감과 식물적 관능에 함몰된 형부는 통념의 끈을 넘어선다. 비록 세속적 파멸이 눈앞에 있더라도.

 

언니, 내가 물구나무서 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P.156)

 

외딴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영혜는 식음을 거부한다. 그녀를 찾아간 언니에게 그는 비밀을 털어놓듯 자신이 더는 동물이 아닌 나무라고 속삭인다. 음식 따위는 필요 없이 햇빛만으로 충분한, 그래서 물구나무서기 자세로 거꾸로 있어야 비로소 완전한 나무에 가까워진다며. 병원 관계자와 언니가 보기에는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영혜의 논리에서는 완벽하다. 동물로서의 인간 영혜는 죽지만, 식물로서의 나무 영혜는 새롭게 자라나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받지 않고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며 대지 속에서 대지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 나무의 초록빛 불꽃은 온전한 생명의 불꽃이 아닐까.

 

여성주의가 강제와 억압의 거부이자 여성 몸의 주체로서 재인식이라고 한다면, 영혜는 여성주의자다. 그의 어머니와 언니는 봉건적 가치관에서 아직 탈피하지 못한 상태이며, 그의 아버지는 전형적 남성중심주의자다. 이 작품을 여성주의 관점에서 해독할 수 있지만, 동물을 남성, 식물을 여성으로 무리하게 비정하지 않는다면 한계에 봉착한다. 여기서 작가는 여성주의 자체보다 동물적 폭력성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오래 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P.201)

 

문득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혹시 영혜의 언니가 아닐까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각 단편에서 주요 인물들은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영혜의 남편도, 형부도, 부모도 모두. 영혜는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독자 누구나 알고 있듯 그를 정상적인 사고의 인물이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비록 그가 던지는 화두가 강렬하고 메시지가 묵직하지만. 영혜의 언니는 매 단편마다 충격적 경험을 하고 이를 수습하는 역할을 맡는다. 동생의 자해 행위, 남편과 동생의 기묘한 육체 결합, 식음을 거부하고 스스로 나무가 되기 위해 죽어가는 동생. 모두가 도망치고 이성의 끈을 놓을 때 그녀는 온몸으로 이 모든 것을 감당한다.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동생을 용서할 수 없도록 미워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음을. 과연 그녀의 자각처럼 그녀는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는 건가, 자신은 이미 죽어 있는 존재인가? 이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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