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소리 - 열정의 피아니스트 임현정의 나의 이야기
임현정 지음, 양영란 옮김 / 청미래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피아니스트 임현정의 자서전이다. 자서전이란 용어가 거창하다면, 임현정 삶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한국, 콩피에뉴, 루앙, 파리, 벨기에, 뇌샤텔로 장을 구분하였는데, 임현정의 거주지역이자 음악의 여로를 담고 있다. 특이하게도 프랑스어로 된 글을 번역하였다. 베토벤 소나타 전집을 출시하면서 세간의 화제가 되자 프랑스 현지에서 피아니스트 개인에 대한 궁금증이 컸던 듯하다.

 

솔직히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 소나타는 아직 내 취향이 아니다. 라벨의 음악(스크리아빈은 잘 모르니까)도 귀에 와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피아니스트로서 그를 존중한다. 앞서 읽은 책을 포함해서 이 책에서 음악을 향한 그의 진지하고 투철한 자세를 높이 평가한다.

 

타고난 재능을 논외로 할 때 지독하다는 느낌을 그에게 우선 떠올린다. 어린 나이에 홀로 프랑스 유학길을 오른다든가 말도 안 통하는 타지에서 차별에 시달리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는 모습, 자신의 직관을 따르기 위해 루앙 국립음악원에서 자발적 외톨이를 선택하는 장면 등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좌초하기 쉬운 환경에서 그는 살아남고 성공을 거두었다. 정말로 목숨을 걸 정도의 독한 마음과 행동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제아무리 뛰어난 인물도 홀로 성공의 길에 오르지 못한다. 주변에서 그를 돕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이다. 그를 둘러싼 환경과 인물이 항상 호의적이지 않다. 그가 기술하는 이모네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위를 자행하였는지 궁금할 정도다. 루앙 국립음악원의 피아노 담당 교수도 제자의 성취가 못마땅하다면 어찌 교사 자격이 있을지. 반면 마르크 오플레, 콜레트 테니에르, 앙리 바르다 교수를 만난 건 천운이기에 그들을 향한 그의 지극한 사의는 온당하다. 알렉산드르 라비노비치-바라콥스키의 우연한 인연은 그의 발전을 위해 더없이 소중하다.

 

피아니스트 임현정은 개성적인 인물이다. 한국 교육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유학을 떠난 것, 퀸 엘리자베스 뮤직채플의 풍요로움을 과감히 떠난 것, 명성의 고속도로인 유명 콩쿠르에 나서지 않은 것, 음반사의 제안에 베토벤 소나타 전곡이라는 거대한 역제안을 하고 이루어낸 것. 음악적 도전을 무리일 정도로 과감하게 실행해 나가는 것 등. 이 모든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음악 자체에 진실하고 헌신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지나칠 정도로 개성적인 그의 음악 해석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음악은 영혼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 표현은 테크닉, 혹은 속도의 인질이 되어 억압받거나 제약을 받을 수가 없다. 받아서는 안 된다. 그만큼 제일 먼저 그 표현과 나의 영혼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P.93)

 

그 소나타들의 영감이 베토벤의 심장에 뛰어들어왔을 때 뛰었던 그 심장의 템포로,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들려주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하고야 말 것이었다. 베토벤을 위해서, 우리의 삶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P.216)

 

이 책은 의외로 영성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외로움과 풍파에 시달린 그가 종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뜻밖에 불교를 받아들였음은 놀랍다. 서대산인 성담 스님을 주저치 않고 스승님이라 부르고, 에필로그에 스님을 향한 헌사를 남길 정도면 통상적 입문을 넘어서는 단계라고 하겠다.

 

많은 아이가 피아노를 배운다. 수많은 영재, 천재들이 각종 음악학교에 넘쳐난다. 유럽으로, 미국으로 음악 유학을 떠나는 학생도 많다. 젊은 음악인 중에 세계 유수 콩쿠르 입상자들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요즘 핫한 조성진, 임윤찬이 대표적이며, 여성 중에는 임현정, 문지영, 손열음 등의 언뜻 떠오른다. 그들에게 피아노는 무슨 의미고, 음악은 어떠한 존재인가. 비판적인 시각으로는 쇠퇴하는 서양 클래식 음악의 일개 연주자에 불과하다. 그것에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칠 의의가 있는가. 부모의, 또는 당사자의 철모르는 극성맞음의 산물이 아닐까.

 

피아노라는 악기, 클래식 음악이라는 장르는 예술에 이르는 수단이다. 바이올린과 같은 다른 서양 악기, 가야금과 거문고 같은 전통 악기를 선택할 수 있다. 대중가요, 팝송, 국악을 전공해도 좋다. 아니 음악을 떠나서 미술, 건축, 사진, 연극 등의 다른 예술 장르에 관심을 기울여도 좋다. 중요한 건 수단이 아니라 예술의 본질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임현정은 불교를 통해 또 다른 깨달음의 길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기술한다. 침묵의 길.

 

중요한 것은 음악에 대한 나만의 독특하고 개인적이며 직관적인 욕망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의 침묵이다. 피아노는 그저 그곳으로 데려가주는 사공일 뿐이다. (P.36)

 

피아노는 우리가 음악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는 그 공간을 열어준다. 그러면 나는 세계와 하나가 된다. (P.225)

 

전반부는 예상과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임현정 개인의 삶과 음악의 경로가 솔직하게 펼쳐진다. 후반부도 대체로 그러하지만, 그의 표면적 모습과 행위가 아닌 내면의 목소리를 육성으로 토로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는 여기서 자신을 아름답게 포장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의 솔직함과 종교적 견해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적어도 내면을 드러내고자 하는 과감한 용기를 지녔음을 부인하지 못하리라. 그것이 이 책을 읽은 묘미이자 뉴스와 음반 표지의 화려하고 당당함에 가려진 그의 참모습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