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토리 이야기
민병훈 옮김 / 어문학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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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원작이라는 표기가 앞표지에 뚜렷하다. 보지는 못했지만 꽤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인 듯하다. 하지만 일본 최초의 모노가타리라는 역사성을 지닌 작품이라는 사실이 내게는 더 중요하다.

 

책은 230면의 분량이지만, 후반부에는 일본어 원문을 수록하였고, 부록으로 다케토리 이야기와 관련된 해설과 자료가 실려 있어 실제 한글 번역문은 104면 밖에 되지 않은 짧은 이야기집이라고 하겠다. 부록은 이 작품의 생성과 설화와의 관계, 주목할 만한 의의 등을 소개하고 있어 작품의 심화적 이해에 유용하다. 여러 점에서 이 책은 일반 감상자보다는 학습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대의 모노가타리와 달리 이 작품은 사실성보다는 설화적 요소가 강하다. 노인이 가구야 히메를 발견한 게 대나무 속에서였고, 수개월 만에 쑥쑥 자라서 구혼자가 생길만큼 성장한 점은 친숙한 민담 및 전설 등과 다를 점이 없다. 게다가 끈질긴 구혼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가구야가 내건 허혼 요건은 더없이 터무니없으며, 이를 달성하려는 다섯 구혼자들의 노력도 판타지와 코믹 요소가 혼재되어 황당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재미를 가져온다. 더욱이 가구야가 원래 있던 달세계로 승천하는 광경은 가히 압권이다. 한마디로 전기소설(傳奇小說)로 분류될 수 있겠다.

 

대다수 모노가타리의 주인공은 남성이다. <오치쿠보 이야기> 정도만 여성 주인공으로 기억될 뿐. 그런데 최초의 모노가타리의 주인공이 여성이며, 그것도 비교적 독립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다는 점이 이채롭다. 가쿠야 히메는 노인이 혼인을 언급하자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할 필요성을 오히려 반문한다. 게다가 여성 입장에서 피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당대 결혼 관습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뿐이 아니라 겨우 구혼자들을 물리쳤더니 임금이 권력의 힘으로 후궁을 삼겠다는 곤란한 형편에 놓여도 이에 굴하지 않는다.

 

그런 후궁 생활은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인데, 억지로 후궁 생활을 하게 하신다면 사라져 버리겠습니다. (P.76)

 

이 이야기는 여러 어원(語源) 설화를 담고 있기도 하다. 가구야 히메를 차지하기 위한 다섯 구혼자의 노력은 제각기 헛수고를 하거나 가짜를 만들기도 하는 등의 실패로 끝나게 되는데, 해당 일화 마지막에 이에서 유래한 어원을 소개하고 있다. 동음이의어를 활용하여 마치 와카의 가케고토바를 연상시킨다. 예컨대 (부처의 가짜) 바리때를 버리는 것과 부끄러움을 버리는 뻔뻔함(하지오 스테루)을 연계시키거나 불쥐의 가죽옷을 가짜로 만든 게 탄로나 보람이 없게 된 아베 우대신의 이름을 빗대어 보람 없다(아헤 나시)고 하는 등 해학적 풀이와 연결시키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는 일본 최고봉인 후지 산의 어원 풀이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제법 그럴싸한 해석이다.

 

쓰키노 이와가사가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산에 오른 일에 연유하여 그 산을 병사로 넘치는 산, 즉 후지산(富士山)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그 불사약과 편지를 태운 연기는 지금도 구름 속으로 피어오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P.104)

 

가구야 히메는 원래 달나라의 사람이었는데, 잠시 이 세상에 머물다가 달세계로 승천한다. 동화에 나오는 천녀(天女)니 선녀와 같은 설정이다. 그런데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간다는 표현은 단순한 승천의 개념 이상으로 다가온다. 아무리 이 세상에 정들었다 한들 원래 고향과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설레고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가구야는 한숨짓는다.

 

달을 보면 왠지 세상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나도 모르게 슬퍼집니다. 어찌 다른 근심이 있겠습니까. (P.85)

 

부모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리 기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슬플 따름입니다. 하지만 제 뜻대로 되지 않아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P.88)

 

여기서 승천은 귀천(歸天)으로 해석할 여지가 생긴다. 가구야는 꽃다운 젊은 나이에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며, 이것이 승천으로 미화된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다케토리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다. 작중 인물은 모두 실패와 상실을 겪고 슬픔을 맞이한다. 다섯 구혼자와 임금은 가구야 히메를 얻지 못하며, 노인 부부도 애지중지 키운 딸을 달나라로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 주인공인 가구야도 원래의 세계로 가는 게 슬플 따름이다.

 

이야기 곳곳에 산재된 해학적 요소와 배치되는 애잔한 정서감이 묘한 여운을 드리운다. 이것이 단순히 최초의 모노가타리로서의 역사성을 뛰어넘어 현대에도 의미를 지니는 연유가 아닐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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