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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ㅣ 환상문학전집 13
루돌프 에리히 라스페 지음, 귀스타브 도레 그림, 이매진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앞서 어린이용 책을 읽고 나니 문득 순화되거나 가공되지 않은 원작의 참모습이 궁금해졌다. 아울러 뷔르거 판본과 다른 라스페 판본의 내용도. 황금가지에서 나온 책을 구해 읽게 되니 다행이다. ‘독자에게 드리는 글’에서 벌써 작품의 허풍이 시작된다. 모험담의 진실성을 선서하는 인물들이 누구인가? 걸리버, 신밧드, 알라딘.
남작의 모험 연대순으로 비교적 기록되어 있다는 점도 적이 다행이다. 제아무리 두서없고 자유롭게 읽어도 그만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한참 모험담이 전개된 후 후 불쑥 어릴 적 모험의 시초로 되돌아가면 다소 당황스럽다. 앞서 읽은 책과 비교하면 어린이용이 아니므로 사건과 표현이 보다 직설적이고 잡다한 수사와 친절한 설명이 배제되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서술과 배경이 현실감을 강조하듯 객관적이다. 사자와 악어 이야기, 유명한 교회 첨탑에 말 매단 이야기와 썰매 끄는 늑대 등 익숙한 여행담이 처음부터 죽 이어지지만 곧 차이점이 슬슬 드러난다.
라스페 판본에서 친애하는 남작은 영국에 충성한다. 그것은 라스페가 인생의 후반을 위탁한 게 영국이고, 남작의 모험담을 펴낸 곳도 영국이어서이다. 여하튼 남작은 영국군 특급 군함을 타고 아메리카로 향하다가 거대한 고래와 조우한다. 지브롤터 방어전에서는 스페인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공을 거둔다. 게다가 라이벌 프랑스인에 대한 경쟁심을 드러내고, 노골적으로 영국과 영국인을 칭송한다. 독일 남작이 영국에 충성한다는 설정은 독일인 뷔르거 입장에서는 못마땅하게 여겨졌을 터이므로 이러한 대목이 대폭적으로 수정된 것으로 보인다.
뮌히하우젠 남작의 허풍이 순전히 터무니없고 과대망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 어렵다. 이따금씩 내비치는 날카로운 현실비판과 풍자에는 라스페의 눈에 비친 사회의 부조리가 그대로 담겨있다. 거대한 기구로 의과대학을 통째로 석 달 동안 공중에 들어 올린 일화에서 남작은 슬그머니 말한다.
잘 알려진 사실대로 대학 전체가 허공에 매달려 있던 석 달 동안 환자를 보러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사람이 죽을 일도 없었던 것이지요......하늘에 떠 있는 기간 동안 약장사들이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장의사의 절반 정도는 망했을 겁니다. (P.72)
핍스 선장의 배를 타고 북극으로 향하다가 혼자서 북극곰 수천 마리를 죽인 이야기, 여행가 드 토트 남작의 출신에 관한 터무니없는 험담 등은 잔인하고 점잖지 않지만 역시 흥미롭다. 에트나 화산 아래로 들어가 불카누스 신과 만나고 지구 반대편으로 나와서 치즈 섬 탐험과 거대한 고려의 뱃속에서 탈출하는 등 숨 가쁘고 정신이 핑핑 돌도록 남작의 모험은 끊이지 않는데, 무엇보다도 첫 번째 모험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독수리를 타고 유럽과 아메리카를 두루 돌아다니는 낯설면서도 기이하며 장대한 모험담의 스케일은 압도적이다.
두 번째 모험 이야기는 뷔르거 판본에서는 온전히 누락되어 있다. 아마도 이 2부가 라스페 판본을 읽는 가장 큰 보람일 것이다. 작가는 2부를 온전히 아프리카 내륙 탐험에 할애하고 있어서 다양, 다기하지만 산만하기 그지없던 1부에 비하면 체계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거대한 마차와 곡, 마곡, 스핑크스 등과 심지어는 돈키호테의 등장과 같은 공상과 환상이 난무하는 가운데 남작 일행은 아프리카 내륙에 도착하는데 성공하고, 남작은 통치자가 된다. 날고기를 먹는 관습을 없애기 위한 강력한 반발을 퍼지의 배포로 무마하고 이어 백성들을 총동원하여 대영제국에까지 이르는 거대한 다리를 건설한다.
1부의 모험담이 대체로 지리적, 문화적으로 생소하지 않은 지역과 배경들을 무대로 하여 엉뚱하고 황당한 모험과 여행 이야기로 구성되었다면, 2부는 유럽인들에게 미지의 대륙인 아프리카 오지를 직접 겨냥한다. 리빙스턴의 아프리카 내륙 탐험이 시도된 게 19세기 전반이므로 남작 이야기가 출판된 18세기 후반에는 그야말로 순전한 야만과 상상의 공간이었으리라. 그래서인 듯 남작은 물 만난 물고기마냥 좌충우돌하며 거리낌 없이 자신의 모험을 실현해나간다. 아무도 실체를 알 수 없으니 어떤 허풍을 늘어놓아도 부담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상적인 장면이 있는데 항해 중에 노예무역선과 마주치는데 흑인들이 백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넘기는 설정(P.156)이다. 남작은 사악함과 끔찍함에 치를 떨면서 노예무역선을 침몰시키고 백인들을 모두 구조한다. 이것을 흑인 폄하의 인종주의적 시각으로 액면 그대로 봐야할지 의문스럽다. 작중에는 이러한 흑인들을 비열하고, 사악하다고 비난하는데 라스페가 노예무역의 현실을 몰랐을 리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역으로 백인에 의한 흑인 노예무역의 비인도주의와 몰인간성에 대한 적나라한 비난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아울러 2부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개척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남작 일행은 아프리카 내륙에 영국식 정치 제도와 문화를 이식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은 달콤한 퍼지였다. 눈앞의 얄팍한 편익과 쾌락을 제시하여 저항과 반발을 불식하고 유럽 문화를 수용하게 만드는 것. 남작 일행이 대영제국을 연결하는 거대한 다리를 건설하는 것은 공고한 지배체제를 구현하기 위한 인프라의 확충이 아니겠는가. 이때 퍼지를 향한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과 반응을 보는 남작의 상념은 미묘하다. 남작은 알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하는 방법을.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표변하기 쉬운가를.
미치도록 동경하면서 엄청난 호기심과 상상을 키워 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사람들이 좋아했던 맛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어쨌거나 그들은 퍼지에 지독하게 빠져 들어갔습니다. 기쁨과 만족, 환호에 취한 거죠. (P.181)
모험은 이어서 와우와우 새를 잡기 위한 남작 일행들의 또 다른 세계 여행담으로 연결된다. 아메리카와 러시아를 넘다들다가 파나마 운하와 수에즈 운하를 파는 시대를 앞선 선구적인 혜안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 두 곳의 운하 필요성에 대하여 당대에 이미 광범한 인식이 이루어졌던 것인지 아니면 순전히 작자의 현저한 혜안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한편 마지막 대목에서 남작은 루소와 볼테르의 계몽주의 세력의 대두를 물리치고 프랑스 국민 의회를 쫓아낸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시기, 온 유럽의 불안한 시선으로 프랑스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 라스페로서는 자신이 의탁한 영국의 왕정체제를 지지하고 민중지배체제를 적극적으로 비판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바알세불과 동일시하였다.
뮌히하우젠 남작 이야기를 정신없고 산만하며 좌충우돌에 우왕좌왕하는 단순한 모험담과 여행담으로 국한하고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있다. 상당수의 내용 또한 그러하다. 여기에는 당대인의 시각에 부합하는 오락적 요소가 가득하며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정치적, 도덕적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요인도 분명 존재한다. 반면 당대 부조리에 대한 스치듯 지나치지만 뼈있는 비판이랄지 노예무역에 대한 인도주의적 반대, 권력층과 지배세력의 가식과 허위에 대한 암시 등도 제법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제법 진지한 자기성찰과 역사인식도.
나는 그곳에서 세월의 황폐함과 파괴에 비탄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한때 웅장했던 건축물은 시간의 파괴에 대한 참으로 우울한 증거로서 스스로를 전시하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유적 주위를 몇 바퀴 거닐면서 지상의 모든 존재들이 지닌 덧없고 일시적인 본성에 대해 명상에 잠겼습니다. (P.121-122)
라스페는 재승박덕의 전형적 인간이다. 글 속에 그의 회한이 숨어있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의 인생행로를 꼬이게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절도와 사기로 점철된 어두운 삶이 오히려 뮌히하우젠 남작의 이야기를 편집하도록 하는 동인이 되었으니 또한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