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최순우의 한국미 산책, 학고재신서 1
최순우 지음 / 학고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작고한 지 30년이 지난 비교적 오래된 분의 글임에도 여전히 세인들의 사랑과 선택을 받는 이유는 방송의 힘과 아울러 후학들의 노력 덕택이다. 물론 저자의 글 자체가 스스로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간직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대놓고 말하자면 한국의 미, 즉 한국미를 발견하고 예찬하는 유형의 글은 여럿 있다. 교과서에서도 읽은 기억이 나며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란 인명도 기억에 떠오른다. 당장 온라인 서점에서 한국의 미라는 주제어로 검색해 보면 리스트가 죽 나타날 것이다. 그럼에도 내게 있어 파편화된 정보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감성적 측면에서 한국미는 여전히 가슴에 확 다가오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부러운 동시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 것의 사소한 단초에서도 진실한 미를 발견하는 일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본 무량수전과 내가 본 것은 똑같은 것이련만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P.78)을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사실 이 책은 읽기 그리 만만하거나 쉬운 책은 아니다. 한국미 전반에 대한 총론과 아울러 유형별 분류에 따른 개별 예술품에 대한 세세한 감상까지 이 책은 우리 전통예술에 대한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다루고 있다. 제대로 읽으려면 한 편 한 편 소개된 유물과 유적을 실제로 접하면서 음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의 글만 읽으면 반쪽(이것도 후하다!)짜리 이해에 불과하다. 한편 그가 쓰는 문체와 용어는 모두 1980년대 이전이라서 지금과는 달리 다소간 생소함이 존재하며, 수록된 도판도 죄다 흑백이라 저자가 공들여 찬미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확인하기에 어렵기도 하다.

 

한국미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대체로 이렇다. 무기교의 기교, 고졸(古拙)의 미, 가냘픈 선의 아름다움. 욕심을 부리지 않는 담박한 아름다움 등. 저자의 견해도 여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찌 보면 그가 주로 활동했던 1960년대와 70년대가 한국미의 재발견을 집중 조명하였던 때였으니 그 또한 이러한 인식에 기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저자가 이 책에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미 진부하고 상투적인 케케묵은 것의 반복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가 순전히 총론적인 미학만을 반복했다면 그러하였을지 모른다. 그는 미에 대한 추상적, 형이상학적 전개를 꺼린다. 그는 구체적인 예술품에 근거하여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칫 간과되기 쉬운) 사실적 아름다움을 세인들에게 알리고자 애쓴다. 전혀 무관한 미지의 대상이지만, 일단 알게 되면 관심을 갖게 되고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다. 신라 토우 편에서 그는 이런 특성들이 한국미가 지니는 체질의 원천적 역할”(P.210)이라고 하는데 물끄러미 토우를 들여다보면 그럴 듯도 하다.

 

저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것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사랑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경제 기적의 시대, 사람들은 오로지 서양의 것, 최신의 것만을 최고의 가치인 줄 추구한다. 조상의 오래된 지혜, 대대로 이어진 전통의 아름다움은 헌신짝처럼 버려진다. 비원의 연경당을 바라보면서 저자가 품은 탄식과 바램은 오늘날 아파트 공화국으로 변모한 도시의 풍광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소박하기조차 하다.

 

문화와 예술은 토양과 민족의 토대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신라의 석조보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얼굴상과 온화한 미소는 정녕 한국 사람의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움 자태”(P.122)를 무의식중에 반영한 것이다. 화엄사의 유명한 사자석탑이 언급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저자는 범인들이 흘려보기 쉬운 탑 앞에 마주보고 있는 공양상을 주목한다.

 

이 한 토막의 정경에서 우리는 한국의 아름다움과 한국인의 아름다움을 한자리에서 보는 느낌이며 민족적인 아름다움이란 어디서나 그 자연과 인문 그리고 그 족속의 감정이 멋지게 해화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격조가 생기는 것이라는 표본을 여기에서 보는 듯도 싶다.” (P.152)

 

도자기에 대한 과거의 논의를 보면 고려의 비색 청자와 상감 청자를 제일로 평하고, 분청사기는 청자의 퇴화로 간주하던 시기가 있었다. 저자의 글에서도 간혹 분청사기를 퇴화, 타락, 변질 등으로 표현하는 문구가 발견된다. 백자의 경우도 지금이야 건강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평가받지 한때는 한갓 자기에 불과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저자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하긴 조선의 막사발의 가치를 일본에서 먼저 인식하지 않았던가. 저자는 분청사기와 백자에 대해서 아름답다는 자구 외에 잘 생겼다는 말로서 찬미를 하는데, 그 소박하고 무심스러우며 순진한 아름다움을 지칭하는 적절한 어휘로 사용하고 있다. 분청사기철회초문대접의 순진미, 백자철회포도무늬 항아리의 잘 생긴 아름다움 등이 인상적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평가하고 식별하는 절대적 기준은 없다. 세인들의 문화와 기호의 변천에 따라 미의 기준은 상대적 차이를 보인다. 청자는 청자대로, 분청사기와 백자는 그것들대로 당대의 사람들과 문화의 시대적 요구를 충실히 반영한 것뿐이다. 그것을 만든 도공들은 후대의 평가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이를 확장하면 우리와 중국, 일본의 문화 예술에 대한 인식과 평가의 비교에도 적용할 수 있다. 모든 예술이 고유의 토양과 문화를 반영한 것이라면 중국의 예술에는 중국 사람들의, 일본의 것에는 일본 사람들의 정서와 미학이 깃들여 있음은 당연하다. 이를 다른 나라의 시각에서 거대하고 과시적이라느니, 인공적이고 장식적이라느니 비판적으로 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네들과 우리의 것과는 응당 차이가 존재하므로 우리 것을 잘 인식하기 위한 도구로서 비교한다면 모를까 그네들의 예술품을 평가하기 위한 잣대로 삼아서는 옳지 않다고 본다. 한국미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예찬하다보면 모르는 사이 우물 안 개구리 또는 국수주의적 함정에 빠지기 쉽다. 저자의 글에서 이따금 이런 분위기가 감지되는 것(예컨대 청화백자선도연적)이 나만의 착각이라면 다행이다.

 

청자와 백자의 대비가 회화에서는 수묵화와 풍속화로 이어진다. 오직 먹빛의 농담 하나만으로 화려한 채색이 넘보지 못할 심원한 경지를 구축한 화인들의 옛 그림을 물끄러미 보노라면 모노크롬의 흑백 영화에서 또는 모노럴 사운드의 SP 음반을 통해 접하게 되는 아려하면서도 예스러운 격조와 기품을 떠올리게 된다. 수묵화의 수준은 화인 자신의 천품과 비례한다는 말은 단순한 재주와 기법의 현현을 뛰어넘은 정신적 경지를 뜻한다. 이것은 문인화에 그치지 않고 산수화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정선의 통천문암도와 조옹도가 유독 심경에 다가온다.

 

단원과 혜원은 물론 긍재 김득신의 대장간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풍속화는 인간 중심의, 대중 사회가 도래하였음을 여실히 입증한다. 세상은 신선과 도인들이 아니라 서민들의 적나라한 희노애락을 문화와 예술에서도 반영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전 세대의 초월적 미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당대의 사실적 미는 특유의 해학미와 어우러져 보기 드문 감흥을 안겨준다.

 

이 책을 덮고 나서도 한국미는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우리네 고유의 예술을 창조한 이들과 그들이 살아간 당대라는 개체적, 시대적 한계를 극복해야 할 것이며 예술품이 지니는 독자적 미의 발현을 체득해야 한다. 아마도 한국미를 느낄 수 있게 되기를 영원히 갈구만 하다 마칠지도 모른다. 그래도 간단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네 조상들이 남긴 자취이자 바로 우리들의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2002년도에 발간되었는데, 2008년도에 체제를 바꾸고 컬러도판을 사용한 개정판이 나왔다. 이 단상에서 제기한 이해와 접근성의 문제점을 상당부분 해소하는 데 유익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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