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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누키노스케 일기 ㅣ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수필비평선집
사누키노스케 지음, 정순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11월
평점 :
호리카와 천황은 일본의 제73대 천황이며, 그 아들이 제74대 도바 천황이다. 작자 사누키노스케는 호리카와 천황을 지근에서 모시던 여관이었다. 이 책은 자신이 모시던 호리카와 천황의 죽음과 추억에 대한 회상록이다. 2부 구성으로서 상권은 호리카와 천황의 사망 경과를 묘사하고 있으며, 하권은 호리카와 천황에 얽힌 추억을 기술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호리카와 천황과 작자와의 관계다. 일기 내용과 해설에 따르면 작자는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여관, 즉 조선시대의 상궁 같은 지위인 동시에, 후궁과도 같은 애첩 역할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일기 내용에 따르면 천황을 언급할 때 ‘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등 공적 상하관계를 넘어서 개인적인 깊은 애정관계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을 본 다지마 여방이 ”마치 한집안 사람끼리 하는 행동처럼 격의가 없으시니 다른 사람은 아예 두 분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사옵니다.“라며 재미있어했다. (하권 12단)
이처럼 동갑내기로서 천황과 작자는 주위에서 시샘할 정도로 돈독한 정을 주고받는다. 와병 중에도 신하들의 시선에서 작자를 무릎으로 가려주는 행동 등 애정과 배려가 넘칠 정도다. 이런 작자였기에 천황에 대한 연모의 정은 남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고 천황의 죽음을 대하는 심경도 남달랐을 것이다. 작자는 심지어 다른 사람들처럼 소리내어 울 수도 없을 정도(상권 19단)였다.
호리카와 천황의 죽음으로 작자는 궁중에서 물러나 자택에 은거하지만, 곧 명에 의해 아들인 도바 천황을 모시게 된다. 심신을 다해 섬긴 천황이 이승에 없지만 세상사는 언제 그러했다는 듯이 곧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럴수록 천황에 대한 사무치는 심경은 새록새록 하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는데도 나는 여전히 호리카와 천황님 계실 때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권 12단)
“다른 사람들은 지난날의 추억으로 무엇을 떠올리곤 할까? 나는 오랫동안 모시고 있던 호리카와 천황님 생각뿐이다.” (하권 23단)
샘물과 부채 뽑기 일화(하권 12단)와 둘 간의 연인스런 티격태격 일화(하권 23단)는 해제에서 언급했듯이 신분 고하 차이를 넘어선 개인적이고 진실한 인간관계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오랫동안 천황은 인간이 아닌 신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천황은 외경과 존엄의 대상이었지 희로애락을 표출하는 인간다운 면모를 기록으로 만나보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천 년 전에 한 여관은 사랑과 존경과 충성을 바치고 모시던 천황의 일상과 죽음이라는 특이한 소재를 사적인 관점에서 가식 없이 솔직한 시각으로 기술하였다.
독자는 이 일기를 통해서 우선 천황의 인간적 면모를 알게 되어 흥미로우며, 죽음을 맞이하여 두려움 속에서도 의연함을 지키려는 천황의 심정과 태도에 다소간 놀라게 되며, 무엇보다도 한결같은 마음가짐으로 천황을 그리워하고 추억에 잠겨 호시절을 회상하는 작자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