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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인의 사무라이 - 완역 가나데혼 주신구라 ㅣ 일본명작총서 1
다케다 이즈모.미요시 쇼라쿠.나미키 센류 지음, 최관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18세기 초에 발생하였던 실제 사건을 모델로 일본의 대표적인 명작 조루리로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무라이의 본 모습, 즉 충성과 복수, 할복이라는 극적 요소가 여기에서 모두 드러난다. 발표 당시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인 인기를 놓지 않고 소설, 영화, 드라마 등으로 각색될 정도로 일본의 국민연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배경이 된 실제 사건인 아코 사건에 대해서는 책 후반부의 해설에 자세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당대의 사건을 실명 그대로 쓸 수가 없는 무대극의 제약 상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 무로마치 막부 시절을 배경으로 한 군기 모노가타리인 <다이헤이키>를 차용하고 있다. 작중 인물과 실제 인물이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묘사되어 있어 혹자에 따라서는 다소간 혼동의 여지가 있다.
일본인들이 이 작품에 그토록 열광한 연유는 작품이 내세우는 지향점이 대중들의 가치관과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베네딕트가 일본을 상징하는 사물로 국화와 칼을 내세웠을 정도로 사무라이 정신, 즉 무사도는 오랜 전란의 시기를 겪어온 그들에게 인생관과 세계관의 핵심적인 기준이 되어 왔다. 그것은 외적으로는 절대적인 주군관계, 내적으로는 맹목적인 명예심을 근간으로 한다. 충성과 명예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체제를 지탱하는 기본 가치다. 이를 지키기 위해 무사는 스스로와 가족의 희생을 기꺼이 무릅쓴다. 개인적 감정과 애상을 드러내는 것은 무사의 수치이자 무사로서의 자격에 미달된 자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47인의 사무라이는 주군의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그리고 복수에 성공하였으며, 당당한 자세로 할복을 받아들였다.
또 하나, 무도한 지배층에 대한 반감과 약자에 대한 동정. 엔야 한간을 모욕한 고노 모로나오와 그를 비호한 막부는 신분과 세력 면에서 절대 지배층이다. 비행과 부정의를 자행하는 지배계급을 상대적 약자들이 통렬히 비판하는 행위를 감행할 때 대중들은 통쾌감과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작중에는 복수까지만 나타나고 할복과 관련한 내용은 생략되어 있지만 실제 사건에서 막부가 이들의 처리에 고심했던 연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는 단선적으로 흘러가기 쉬운 작품 구조에 다양성과 입체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몇 가지 날줄을 덧붙이고 있다. 하야노 간페이의 충성과 비극적 죽음은 장렬한 여운을 남겨주며, 리키야와 고나미의 우여곡절의 결합은 슬픈 결말을 목전에 두고 있어 비극미를 고조시킨다. 여기에 별도의 단을 할애하여 상인 기헤이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꿋꿋한 의리를 보여주어 무사가 아닌 서민계층에도 의리의 귀감이 존재함을 알려준다. 반면 오노 구다야 부자와 사기사카 반나이는 인물 간 갈등과 긴장을 끌어올리고 사건을 악화시키는 악역을 담당하도록 하고 있다.
오보시 유라노스케와 무사들이 온갖 고난을 감내하면서까지 복수에 매달릴 정도로 그들의 주군 엔야 한간이 훌륭한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그에 대한 작중 인물평은 ‘얕은 심기’라든지 ‘급한 성격’처럼 다소 부정적인데 가깝다. 당시 엔야 한간의 주위에 오보시가 있었더라면 모모노이 와카사노스케를 가신 가코가와 혼조가 구했듯이 어떻게든 원만하게 처리하였을 것이다. 오보시와 동료들이 자신들을 희생한 이유는 오로지 엔야 한간이 자신들의 주군이었다는 점, 그에게 생계를 의지하였다는 점이다. 그것만으로 충성의 이유는 충분하다.
“장한 일이로다. 누구라도 주군을 모시는 자의 마음은 당연히 이렇게 되어야 하는 법이다. 무언가 힘이 필요하다면 사양 말고 말하시오.” (P.215)
“큰 공이다. 큰 공을 세웠다라고 모두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후세 후대까지 전해지는 이 의사들의 이야기. 이것이야말로 실로 천황의 치세가 계속되는 것처럼 길이 남을 것이다.” (P.221)
그들의 맹목적 충성은 이렇게 대다수에게 찬양받는다. 그것의 바람직성 여부에 대한 가치 판단과는 별도로 당대 및 후대 일본인들의 가치관이자 근원적인 정서임은 인정해야 한다. 앞서 읽은 <소네자키 숲의 정사>가 인정(人情)의 경계에 도달하였다면, 이 작품은 일본인들의 정서의 다른 측면, 즉 의리(義理)의 극한을 보여준다.
정서와 문화 깊숙이 내재한 고유한 코드를 건드린 작품이 오래도록 회자되는 고전으로 정착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상이한 문화적 시각에서 볼 때 공감과 납득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최소한 이해는 할 수 있다. 비판적 관점은 유지하더라도 일본 및 일본인들을 이해하기 위한 창문으로서 접근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