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치쿠보 이야기 - 일본 고대의 신데렐라 이야기 일본명작총서 10
박연정 외 옮김 / 문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표제는 낯설어도 부제-일본 고대의 신데렐라 이야기-를 보면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짐작이 간다. 내용이 뻔할 거라고 지레짐작하여 흥미를 잃는다면 이 작품의 절반도 알지 못하게 된다. 일본 중세의 헤이안 시대 작품이므로 모노가타리 장르에서는 초기작에 속한다. 유명한 <겐지 이야기>보다 시기적으로 앞설 정도로.

 

계모에게 구박받는 전처의 자식이라는 점에서, 신데렐라와 마찬가지로 오치쿠보도 주인공의 초라한 지위를 상징하는 공간적 표상이라는 점에서 유명한 동화와 공통적이다. 반면 동화와 성인 대상의 모노가타리는 기본 성격에서 동질적일 수 없다. 게다가 고대 일본이라는 시대적, 지역적 차이점도 신데렐라의 나이브함과는 다른 독특한 성격을 부여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오치쿠보가 아니다. 전반부는 오치쿠보의 시녀인 아코기가, 후반부는 오치쿠보의 남편인 쇼쇼가 사실상 주인공이다. 오치쿠보의 역할과 캐릭터는 지나치게 소극적이다. 예쁘고 착한 인물인 것은 알겠지만 아무런 자기주장이 없다. 계모로부터의 학대에도 그저 괴로워하며 울기만 할뿐이다. 후에 쇼쇼가 계모에 대한 복수에 몰두하는 중에도 소극적 우려와 염려를 비칠 뿐이다. 물론 쇼쇼의 다음 말처럼 그 순수한 선함이 종국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미덕이지만.

 

아씨한테는 속된 마음이란 것이 없다네. 본인에게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도 불쌍하다고 하는 사람이니.” (P.158)

 

아코기와 다치하키 커플은 굳이 오치쿠보와 쇼쇼를 맺어주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없다. 아코기는 다른 시녀들처럼 계모의 딸들을 시중들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집으로 가버리면 그뿐이다. 그녀가 오치쿠보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야말로 그녀의 마음씨를 돋보이게 한다. 오치쿠보와 쇼쇼가 부부의 연을 맺도록 안절부절 못하며 필요한 준비와 물품을 구하기 위하여 애쓰는 대목, 늙은 덴야쿠노스케가 오치쿠보를 강제로 취하지 못하도록 전전긍긍하는 장면, 다치하키와 상의하여 오치쿠보를 구출하도록 쇼쇼를 부추기는 등 그녀의 활약과 재치가 없었다면 오치쿠보의 일생은 평생 오치쿠보 상태에 머물렀으리라. 이 점은 같은 처지의 수많은 뇨보들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통쾌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아코기가 성공하여 자신은 물론 남편마저도 출세의 길에 오르게 되는 것이야말로 뇨보들의 깊은 소망을 반영해주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의 작자는 신분 면에서 귀족층이 아니라 뇨보 같은 시녀들의 일상과 생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중간계급으로 생각된다. 우아하고 고상한 어휘보다 인물들의 심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속어적 표현과 희화적 장면이 거리낌 없이 등장하는 점도 이채롭다. 인물과 정경 묘사를 중시하지 않고 인물들의 행동과 사건 전개에 주안점을 두고 있어 보다 모노가타리적이라고 하겠다.

 

오치쿠보의 신데렐라 성공담은 전 4권 중에서 2권 전반부까지로 국한된다. 이후는 쇼쇼의 계모에 대한 철저한 복수로 점철된다. 이 점에서 서양의 동종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접어든다. 그런데 당사자인 오치쿠보는 내키지 않아 하는 복수를 쇼쇼가 집착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복수에 대한 일본 고유의 관념과 사랑하는 여인의 박해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상승 작용을 한 것은 틀림없다. 여기에 권선징악의 철저한 구현을 바라는 세인들의 소망이 가세되었다고 본다.

 

쇼쇼의 보복은 매우 가혹하다. 사람들 앞에서 계모 일행에게 모욕을 주는 행위도 수차에 걸쳐 서슴지 않는다. 계모의 셋째 딸의 남편을 빼앗고, 넷째 딸을 거짓 결혼으로 남부끄러운 사위를 얻게 만든다. 마침내 주나곤이 이사하려고 대대적으로 정비한 (오치쿠보 명의의) 저택마저 빼앗아 치명적 타격을 입힌다. 철천지 원한이 있지 않는 한 용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수의 정도가 처절하다. 물론 나중에는 아낌없는 효도로 되갚지만 말이다. 이런 게 가능한 것은 역시 권력의 힘이다. 계모와 주나곤은 감히 쇼쇼 집안에 대들지 못한다. 나중에 천황의 외숙이 되고, 대를 이어 태정대신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그 위세는 당당하기 그지없다. 권력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것이 어디 일본 사람뿐이겠는가. 다만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그들이 후에 쇼쇼의 호의에 모든 원한을 잊고 감사와 충성을 바치는 장면이다. 역시 우리네와는 정서가 차이를 보인다.

 

일본 중세의 독특한 결혼 풍습은 이미 알고 있지만, 정조보다 외양에 더 신경을 쓰는 오치쿠보의 태도는 여전히 낯설다. 체면과 허상을 중시하는 기질의 바탕으로 여겨진다.

 

오치쿠보는 남자의 정체보다 자신의 옷이 너무나 초라하고 속바지가 몹시 볼품없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P.25)

 

오치쿠보는 부끄러움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속옷은 제대로 갖추지도 못했고 윗옷에 바지 한 장만 달랑 걸쳐 입어 곳곳에 맨살이 드러난 옷차림을 생각하니 심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였다. 부끄러움으로 눈물보다 땀에 흠뻑 젖었다.” (P.27)

 

오치쿠보에 대한 계모의 태도는 단지 전처소생이라고 미워하는 것 같지 않다. 오치쿠보는 엄밀히 말해 정실 소생은 아니고 소실의 딸이라고 해야 옳다. 따라서 계모가 자신의 자식들과 오치쿠보를 차등하는 것은 납득이 간다. 소실의 딸이 자기 딸들보다 미모나 재주로나 뛰어남을 알고 있는 계모로서는 오치쿠보가 더욱 미웠으리라. 그래서 남자를 못 만나게 하고 계속 딸들 시중이나 들게 하면서 부려먹으려고 했던 것이다.

 

내 그리 남자를 만나지 못 하게 했건만 이렇게 분할 수가! 남자가 생긴 이상 결코 이 집에 그냥 붙어있지는 않을 게야. 남자 집으로 가겠지. 그 애가 없으면 큰일인데... 어여쁜 우리 딸들 옆에서 시중을 들게 하려 했는데.” (P.56)

 

그런 면에서 계모는 비록 악독한 인물이지만 강렬한 개성을 지닌다. 절 참배 길에 쇼쇼가 계모 일행을 괴롭히며 계모와 주고받는 대목이 이를 잘 보여준다.

 

(쇼쇼) “이제 충분히 질렸수?

(계모) “아직 안 질렸다.” (P.131)

 

고장난명(孤掌難鳴). 계모의 성격이 제아무리 독하고 모질다고 하더라도 혼자 힘만으로는 오치쿠보를 저리 박대할 수 없다. 오치쿠보의 아버지인 주나곤의 묵인과 외면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주나곤의 모호한 태도야말로 악랄함으로 일관하는 명확한 캐릭터의 계모와는 대조적이다. 주나곤은 딸아이가 오치쿠보로 불리는 것도 알고, 초라한 거처에 거주하고 있음도 잘 안다. 계모의 말만 듣고 구석방에 감금하고 괴롭혀 죽이라고 먼저 지시한 것도 주나곤이다.

 

이 작품의 문학적 의의를 해제에서 인용하며 끝맺는다.

 

“<겐지모노가타리>를 비롯한 헤이안 문학의 귀족적이고 우아한 미의식이 우월하던 시대에 그와는 전혀 동떨어진 해학적이고 사실적인 장면 묘사와 스토리로 당대의 대중성을 획득한 본 작품은 친밀한 계모담형 이야기, 개성적이고 일관된 성격의 인물 유형, 아코기나 다키하키 같은 조역들의 맹활약과 치밀한 플롯 전개로 고대 모노가타리의 세계를 초월하여 후대의 독자를 사로잡는 저력을 보여 준다.”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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