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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진실 - 하 ㅣ 즐거운 지식 50
김준봉 지음 / 이담북스 / 2010년 6월
평점 :
상권은 한국전쟁 발발과 낙동강 방어선 전투, 인천상륙작전을 다루고 있으며, 하권은 중공군 개입으로 인한 전세 변화와 휴전회담, 그리고 전쟁의 영향을 기술하고 있다.
책의 기술 순서에 따라, 그리고 전쟁의 전개에 따라 내용을 살펴본다.
파죽지세로 북진을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조만간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다다를 것이며, 이것으로 전쟁은 종결될 것이라고 모두가 예상하였다. 실제로 맥아더는 휘하 장병들에게 본국에서 추수감사절을 지낼 수 있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이때까지가 맥아더의 경력에 있어 최고의 절정기였으며, 이후 그는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의 중대한 과실은 바로 중공군의 개입가능성을 무시하고 전력을 과소평가한 데 있다. 중공군이 설사 개입하더라도 곧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역시 호언하였다. 하지만 중공군의 실제 위력은 폭풍과도 같은 거대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1차 공세에서 유엔군에 경고를 날렸으며, 2차 공세에서 전체 전선에서 유엔군을 패주시키고 일부 부대는 궤멸시키는 가공함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3차 공세에서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내주게 된다.
북한군과 유엔군은 동일한 실수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목전의 진격에만 급급하여 상대방의 역습에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유엔군의 진격은 중공군의 유인책에 말려든 꼴이었다.
“중공군은 유엔군을 더 북쪽으로 깊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맥아더의 성격을 분석하여 ‘거만하고 완고’하다고 판정하고 그럴수록 좋다고 결론지었다...모택동이 쳐 놓은 덫 속으로 유엔군이 맹렬하게 진군하는 형태가 될 것이었다.” (P.44~45)
당시 미8군 사령관 워커는 “38선 넘어 북으로 160km 정도 진격 후 평양~원산 선을 확보한 후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판단”(P.45)하였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워커의 판단은 병력과 편제를 재정비하고, 병참 보급선을 확고히 한 후 차근차근 상대편을 옥죄는 것이었으며, 이것이 이루어졌을 경우 중공군의 대규모 역습은 불가능하고 설사 격퇴하지는 못하더라도 전선이 중부지방이 아니라 평양 이북에서 고착되어 향후 전쟁의 결과는 오늘날과 상이하였을 것이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은 그를 빛나게 하였지만, 역설적으로 지나친 성공은 그를 눈멀게 하였다. 그의 오판을 견제하기에는 그의 성공의 후광이 너무나 컸다.
중공군의 2차 공세에서 서부전선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고, 동부전선에서 유명한 미해병 1사단의 유명한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이 전개되었다. 중공군의 공세에 대한 방어선 구축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워커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한다.
“워커는 한국전쟁에서 많은 업적을 세웠음에도 그에 상응하는 인정을 받지는 못하였다...워커는 전사상 가장 뛰어난 기동방어를 성공시켰지만 그에 맞는 명예를 얻지 못했다. 리지웨이는 워커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를 가운데 하나를 밝혔다. 그것은 인정과 칭찬에 목말라하던 맥아더가 워커의 업적을 가로챘고, 자기의 과오에 대한 책임을 워커에게 전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116~117)
워커의 후임인 리지웨이는 전임자와 달리 전쟁 지휘의 실권을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미 정부의 정책방향에 맞추어 과도한 작전은 지양하고, 전쟁 이전의 수준을 되찾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는 비겁과 소심의 반영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아쉽지만 당시의 유엔군과 중공군의 역량을 철저히 비교하여 내린 전략적 판단이다.
“그는 인천상륙잔전 후 경주하듯이 북진한 데서 온 중공군의 침투, 매복, 역습의 경험과 중공군의 전투방식을 감안하였다. 그리고 유엔군은 횡적전선을 긴밀하게 유지하여 차근차근 전진해 나가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P.141)
그는 영토 확보는 부차적이라고 선언하며, 중공군의 전투 역량의 상실, 즉 최대한 중공군을 사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방침의 결과가 중공군 4차 공세의 원주 전투와 지평리 전투의 승리다. 이로 인해 중공군의 개입 이후 계속되던 중공군 불패의 신화를 깨뜨렸고, 유엔군의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전투의 의의는 매우 중요하다.
“한국전쟁에서는 지역을 탈취하거나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승리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인명손실을 끼치는 것이야말로 이기거나 중공이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관건임이 확실해졌다.” (P.172)
장진호전투와 지평리전투에서 볼 수 있듯이 전장에서 탁월한 지휘관의 능력과 판단은 휘하의 수많은 병력을 보전하고 패전을 승전으로 이끄는 원동력이다. 그런 면에서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 미해병 1사단장 스미스 소장, 미2사당 23연대장 프리만 대령에 대해서는 아무리 상찬을 해도 부족함이 없다.
“위관급 간부에게 육체적 용기가 요구되듯, 고급 간부에게는 도덕적 용기가 요구된다.” (P.281)
중공군은 최후의 일대 공세를 결심한다. “이 공격에서 성공하면 중공의 위신은 세워질 것이나 실패할 경우, 협상으로 나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P.209)
약 30만명이 동원된 이 공세를 홀로 저지한 것은 영국군 29여단으로서 이들의 임진강 전투는 <마지막 한 발>이라는 책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영국군의 분투는 서울로 진격하는 중공군의 대병력을 나흘간 저지하여 유엔군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6차 공세를 성공적으로 분쇄한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는 동부전선에서 역습을 가하기 위하여 고저상륙작전을 계획하였으나 승인받지 못하였다. 고저는 금강산을 지나 원산 동남쪽의 장소로 작전을 통해 동해안의 적군을 섬멸하고 북위 39도선까지 진출하려는 의도였는데, 무산되니 역시 아쉽기 그지없다. 이로써 유엔군과 미국정부의 의도는 명확해졌다. 즉 현 전선에서 더 이상의 확전을 금한다는 것.
전선의 고착에 따라 필연적으로 정전협상 논의가 등장하는데, 협상이 2년여가 경과할 만큼 지지부진했던 가장 큰 이유는 스탈린의 개입이었다. 스탈린은 섣부른 정전을 원치 않았다. 그는 아직 중공군이 더 싸울 여력이 있다고 판단하여 모택동과 김일성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이로써 후일 전쟁 원인론 중에 소련 음모론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후일 소련과 중국의 사이가 나빠지게 된 원인(遠因)으로 작용한다. 결국 스탈린 사후에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휴전협상 도중 공산군은 전선에 거대한 지하요새를 구축하였다고 한다. 총 길이 4,000km의 소위 지하 만리장성의 구축은 이후 전투가 대규모 인명살상에도 불구하고 영토점령에는 성과를 보이지 못하게 되는 결과로 나아가 이후 양군의 전력소모는 막대하게 되었다. 이것이 1952년 10월의 저격능선 전투와 삼각고지 전투이다.
“휴전 회담이 시작되고부터 승리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휴전 회담 기간 중에 있었던 많은 국지 소모적 전투는 휴전회담의 큰 게임 가운데 작은 부분으로 볼 수밖에 없다. 공산 측은 협상에서의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견딜 만한 힘이 남아 있다는 것과 희생의 자세를 과시하기 위해서 소모적인 전투를 치렀다.” (P.366~367)
우여곡절 끝에 휴전은 성립되었다. 이는 정전이지 종전이 아니다. 휴전의 성격과 한계는 다음과 같다.
“인명과 자원, 시간과 노력의 투입에도 불구하고 공식 평화조약은 달성하지 못하였다. 90일간 유효토록 설정한 휴전 조약이 90일 이내에 정치회담을 통해 평화조약 도출은 시도하지도 못한 채, 57년째가 되는 2010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P.366)
마지막으로 아래의 내용을 인용하며 맺는다. 이것이 한국전쟁을 통해 우리가 갖게 된 세계에 대한 책무이다.
“한국전쟁에서 3성 장군이면서 대대를 지휘하였던 몽클라 장군의 딸 파비엔 뒤프르는 그를 찾아간 기자에게 “한국의 발전과 평화는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어진 것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 내기 위해 어떻게 싸웠는지 기억해 주세요.”라고 말하였다.” (P.281~282)
※ 이 책은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의 면모를 파악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 일체의 군더더기 없는 간결하지만 핵심적인 진술을 담고 있으며 저자 나름의 군사지식에 기반한 적절한 코멘트도 인상적이다. 다만 저자의 경력에 기인한 정치적 촌평은 아쉽기 그지없다. 물론 저자도 나름대로의 정치적 식견과 견해는 지니고 있을 것이지만, 그것을 여과없이 배출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뛰어난 저서와 개인적 출판물의 경계를 구분 짓는다. 그런 의미에서 특히 책의 말미에서 소위 친북 좌파 정권에 대한 매도는 부적절하며, 이것이 저자의 노고를 깎아먹는다. 친북 좌파 정권에 대한 비난은 그런 정권을 지지하고 만들어 준 당시 다수의 국민을 좌파로 몰아붙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