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미하일 레르몬또프 지음, 임채희 옮김 / 열린책들 / 1997년 3월
평점 :
품절


레르몬토프의 시작품집이 이미 10여년 전에 번역 출간된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우연히 레르몬토프가 아니라 레르몬또프로 검색한 결과 알게 된 사실이다. 많은 외국어도 그렇지만 특히 러시아어는 우리말 표기가 혼재되어 있어 혼란스럽다.

여기에 실린 67편의 시는 그의 많은 시작품 중에서 서정시만 발췌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서사적 장시들은 제외되어 그의 시 세계를 전반적으로 조감해 보기에는 불완전한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기대치 않은 번역본의 존재는 의외의 기쁨을 안겨준다.

대체적으로 그의 작품경향을 몇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개인적 소회를 토로한 시들, 특정인(여인)을 수신자로 하는 시들, 역사적 소재를 다룬 시들, 현실비판적 사회시 등등. 그 중에서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개성의 발현과 역량 발휘를 억압하는 체제 속의 소외된 자아를 그린 시편들이다.

어차피 언어가 같지 않으므로 원시가 지니는 형식적, 예술적 묘미를 알아차리기는 불가능하므로 하릴없이 인상에 남은 몇몇 시의 내용만 잠시 되새겨 보련다.

<터키 인의 하소연> : “노예 제도와 쇠사슬 때문에 사람들이 신음”하는 “내 조국”을 터키가 아니라 러시아로 대치해 보자.

<독백> : 십대의 어린 시절에도 이미 그의 시의 특색이 잘 드러나 있다. “재능과 자유에 대한 열렬한 사랑은/어디에다 쓸 수 있을까요?/우리는 언제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을까요?/.../우리의 삶은 음산합니다./.../조국에서는 숨이 막힐 것 같고,/...”

<파도와 사람들> : “공허한 소음” “보잘것없는 무리” 등의 어휘와 “그들의 영혼은 파도보다 더 차갑다!”는 표현의 분위기가 어둡고 스산하다.

<보로지노 들판>, <보로지노> :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관심을 두고 있다. 특히 후자에서 “용사들은-너희들이 아니야!” 문구를 서두와 말미에 반복 사용함으로써 과거 러시아 인민들의 힘과 역량을 상기하여 현재의 억압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나는 살고 싶다> : 작가는 억눌린 평온이 아니라 치열한 삶, 폭풍우와 고통으로 점철되더라도 진정으로 살아있는 삶을 누리고 싶음을 토로한다.

<인어> : 희생된 용사와 마찬가지로 당대의 지식인은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차갑고 말이 없어요./그는 잠들어 있어요...”

<돛> : 앞의 <나는 살고 싶다>와 같은 심경이다. “반항아인 그는 폭풍우를 바라고 있다./마치 폭풍우 속에 평온이라도 있는 듯이!”

<시인의 죽음> : 뿌쉬낀[푸시킨]의 죽음에 자극받아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시로 작가의 문명을 떨친 계기가 되었다. 시사성을 제외한다면 그리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다만 존경하던 대선배의 죽음으로 충격받아 권력층을 “쓰레기”와 “사형집행인”과 같이 직접적으로 지칭하여 비난을 퍼부은 바람에 작가는 생애 내내 고초를 겪는다. 하긴 권력층 입장에서도 대놓고 자신들을 욕하는 사람을 어찌 가만두겠는가.

<누렇게 익은 곡물밭이 물결치고> : 레르몬토프로서는 보기 드물게 밝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작품이다. 작가는 조숙한 만큼 초기작에서도 어둡고 비판성이 내재한 시를 써왔다. 여기서는 자연으로부터의 위안과 행복을 상찬한다.

<명상> : 자기비판과 반성이 강하게 드리운다. “나는 슬픈 듯이 우리 세대를 바라본다!/.../위험 앞에서는 수치스럽게 소심하고/권력 앞에서는 경멸스런 노예들이다./.../우리는 소리도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져 가리라,/...”

<시인> : 다마스크 강철 단검이 쓸모가 없어져 장식용으로 전락한 것처럼 시인도 사명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자괴감. “비웃음당한 예언자여, 그대는 다시 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는지,/.../그 황금 칼집에서 다시는 뽑지 않을 것인지?...”

<얼마나 자주 나는> : 시인은 현재의 자신의 상태를 초월하여 자유로운 비상을 꿈꾼다. “나는 영혼 속에서 지난 옛날의 꿈과/망쳐버린 세월의 신성한 소리를 어른다./.../나는 자유로운, 자유로운 새처럼 날아간다./..."

<울적하고 슬프다> : 글자그대로 울적하고 슬픈 시상. 희망, 사랑, 정열의 덧없음이여...

<편집인, 독자 그리고 작가> : 편집인과 독자, 작가가 등장하여 진정한 작가상과 작품관을 논하는 독특한 시편이다. “도대체 언제 메마른 러시아에서/거짓된 허식과 결별하고 나서/사상은 평범한 언어와/정열의 고상한 목소리를 얻게 될까?”

<먹구름> : 먹구름에 작가의 심경을 이입하여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 “영원히 차고 영원히 자유로운 너는/조국도 없고, 너에겐 추방도 없다.”

<유언> : 작가의 죽기 1년 전, 시인은 이미 죽음을 예감하는 듯, 유언을 남기고 있다. 유언과 실제 작가의 죽음이 묘하게 중첩되어 씁쓰레한 뒷맛을 남긴다.

<발레리끄> : 14면에 걸친 이 책에 수록된 가장 긴 작품이다. 발레리끄 강에서의 전투를 담고 있다. 레르몬토프는 수신자를 염두에 둔 서신 풍의 시작을 여럿 남기고 있다.

<안녕, 잘 있거라> : <유언>과 같은 사세구(辭世句)다. “안녕, 잘 있거라, 씻기지 않는 러시아여.”

<절벽> : 여전히 담담한 씁쓸함을 자아낸다.

<따마라[타마라]> : 장시 <악마>에도 동일한 이름이 등장한다. 그루지야 설화를 배경으로 하는데, 레르몬토프는 카프카즈에 대해서 남다른 애착을 남기고 있다.

<나뭇잎> : 나뭇잎과 작가 자신은 동일한 신세다. “참나무 잎은 태어난 나뭇가지에서 떨어져/잔혹한 폭풍우에 내쫓긴 채 초원으로 굴러갔다./그 잎은 추위와 무더위, 슬픔 때문에 마르고 시들었으며/마침내 흑해에까지 굴러갔다.”

<나는 홀로 한길로 나간다> : 3장에서 작가의 체념적 심리상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시인은 이미 삶에 지쳐 있다. “이미 나는 삶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지나간 그 무엇도 나는 애석해 하지 않는데./내가 찾는 것은 자유와 평온!/나는 나를 잊고 잠들었으면 좋겠다!”

<바다의 공주> : 바다의 공주의 순진한 사랑의 기대는 잔인하게 배신당한다. 시인의 순진함도 당대에 배신당하였다.

<예언자> : 시인을 무엇보다도 괴롭히는 것은 무지한 이들의 어처구니없는 비난이다. 그들은 예언자, 즉 시인을 바보라고 손가락질하며 헐벗고 가련하다고 경멸한다.

레르몬토프는 프랑스대혁명이 몰고 온 자유의 바람이 반동체제의 강화로 굳게 억압되던 숨 막힐 듯한 시대의 불운아였다. 그는 당대의 조국에 좌절하였으나 결코 조국의 자연과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시 <조국>을 보자.

“나는 조국을 사랑한다, 그러나 기이한 사랑이다!
나의 이성도 그 사랑을 이기지 못한다.
피로 산 영광도
당당한 확신으로 가득 찬 평온도
까마득한 옛날부터 전해오는 귀중한 전설도
내 속의 유쾌한 몽상을 뒤흔들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사랑한다 - 나 자신 그 이유를 모르지만 -
조국의 초원의 차가운 침묵,
그 끝없는 숲의 흔들림,
바다와 같은 그 강들의 범람을 사랑한다.
나는 짐마차를 타고 시골길을 질주하는 것을 사랑하고
그리고 밤의 그림자를 느린 시선으로 꿰뚫어 보면서,
묵어갈 곳을 찾아 사방에서
슬픈 마을들의 가물거리는 불빛을 마주치는 것을 사랑한다.
나는 불탄 그루터기의 가는 연기,
초원에서 밤을 지새는 짐마차 행렬
그리고 누런 곡물밭 한가운데 언덕 위
흰빛의 자작나무 한 쌍을 사랑한다.
남모른 기쁨을 가지고
나는 꽉 찬 곡식 창고와
짚으로 덮힌 오두막집
그리고 조각한 덧창문을 바라본다.
명절에, 이슬 맺힌 어느 저녁,
술취한 농부들의 이야기 소리에 맞추어
발을 구르고 휘파람 불며 춤추는 것을
한밤중까지 바라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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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2월말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루씨야 2014-09-19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나무님,, 혹 이 시집 가지고 계신가요? 품절센타 통해서도 구할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너무 읽어보고 싶어서요.

성근대나무 2014-09-22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씨야님, 미안합니다.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책이라서...

루씨야 2014-09-22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나무님,, 어느 도서관인지?? 좀 알려주세요..네??

성근대나무 2014-09-22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학도서관에서 빌렸기 때문에 어려우실꺼고요. 서울시 통합도서관 사이트(http://lib.sen.go.kr)에서 책제목으로 자료검색하면 5군데가 나오니까 이용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루씨야 2014-09-24 0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대나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