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트
프랑크 베데킨트 지음, 김기선 옮김 /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어느 작품을 읽고 그 소회가 다수의 견해 또는 소위 정설(定說)과 차이가 있을 때, 문득 고민하게 된다. 내가 근본적으로 오독(誤讀)을 한 것인지. 혹은 작품 자체가 상이한 독후감을 낳게 하는 열린 구조일 가능성은 없는지.

카이트 후작은 철저하고 냉혹한 이기주의자이며,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 부정과 사기를 서슴지 않는 부정적 인간형이다. 이렇게 작품해설과 등장인물의 대사는 알려준다.
“당신처럼 냉혹한 인간은 없기 때문이예요.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의 관능과 향락만을 추구하기 때문이예요.” (P.16)
그렇다면 그의 사기행각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그가 몰락하게 된 상황을 독자는 기뻐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카이트는 이방인이다. 그는 당대 부르조아 사회에서 활동을 하지만, 그들과 어울리지는 못한다. 그는 선녀궁이라는 예술과 오락의 복합공간을 건축하려는 웅대한 꿈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어렵게 자라온 자신의 삶과 불안정한 생활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그는 돈이 없다. 그는 자기자본이 없으므로 타인자본, 즉 투자유치나 채무를 통해 조달할 수밖에 없다. 투자자는 냉철하다. 그들은 개인적 형편이나 감정을 고려치 않는다. 오직 투자에 대한 수익 가능성에 예민하다.

이렇게 보면, 카이트는 불운한 벤처사업가다. 벤처가 반드시 정보통신업종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뛰어난 아이디어를 갖고 있지만, 실행에 옮길 재원이 없을 때 벤처캐피탈의 필요성이 존재한다. 카이트의 선녀궁은 어찌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시민사회가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귀족사회가 무너지는 시기, 그들에게는 문화예술 향유에 대한 열렬한 수요가 잠재되어 있음을 파악하는 날카로운 안목을 카이트는 지니고 있다.

그의 독단성은 과단성의 다른 면이며, 이기적 모습은 목표에 극도로 집중함에 따른 외연적 모습이다. 그가 투자자들의 돈을 회계장부 없이 임의로 지출하는 것은 자신의 말마따나 체계가 잡히지 않는 초기임을 감안하면 용서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투자자들에 의해 축출된다. 투자자들인 부르조아는 더 이상 카이트가 없어도 선녀궁을 완성하고 운영함으로써 수익을 챙길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외관상 유능하고 타산적인 사업가로 비쳐지지만 그것이 허상임이 막판에 드러난다. 그는 오히려 단단한 외피에 상처입기 쉬운 연약함을 감추고 있으며, 치밀하고 정교한 사업계획을 하기에는 감정과 인간관계에 취약하다.

마지막 장면에 권총과 일만 마르크의 돈을 번갈아 보다가 권총을 내려놓으면서 하는 카이트의 대사는 삶의 치열함과 처절함을 상기시킨다.
“인생이란 미끄럼틀이지...”

놀이터의 미끄럼틀에서 사람들-주로 아이들-은 계단을 올라가 높은 곳에서 쌩~하며 타고 내려온다. 그리고 올라감과 내려감을 반복한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한 번 내려왔다고 여기서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비록 다시 내려가게 될지라도 쉼 없이 다시 올라가려는 노력, 그것이 인생이다. 산언덕으로 계속 커다란 바위를 굴려올리는 그리스신화의 시지프스와 마찬가지로.

카이트는 자본주의 성숙단계에 진입하기 시작한 당대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순수함을 꿈꾸었던 순진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속이려던 부르조아 사회의 속물들에게 오히려 사기를 당하였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와 부르조아는 처음부터 결코 원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내 재능이라는 것은 단지 부르조아 사회 분위기 속에선 숨을 쉴 수 없다는 사실뿐이오.” (P.14)
“그런 재능은 가져서 유리하다기 보단 오히려 불신감을 일으키게 한다오. 그래서 이 부르조아 사회는 내가 이 세상에 나온 이래로 줄곧 나에 대해 혐오감을 갖는거요.” (P.15)

친구 숄쯔는 모든 면에서 카이트와 대비된다. 그는 인본주의자이며, 도덕주의자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귀족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의 선한(?) 인간성은 자기중심에만 머문다. 그래서 그는 향락인간이 되고자 카이트를 찾아오고, 카이트와 도덕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는 현실 감각이 없이 관념의 노예가 되어있다. 그가 택한 관능에서 버림받자 그가 갈 곳은 오직 한 군다, 정신병원뿐이다. 외관상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카이트보다도 부정적 인물로 귀결된다.

카이트의 동거녀 몰리는 일찍부터 카이트와 고락을 같이 하였으며, 그에게 시골로 가서 안온한 삶을 살 것을 계속 요구한다. 그녀는 부르조아 사회의 비정함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모두가 당신을 몰락시키는데 혈안이 된 이 살인굴에서 빠져나가요...야비하고 비열한 사기꾼들한테 사기당하면서 모가지를 비틀게 내버려 두고있는 거예요.” (P.84~85)
그녀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데, 그녀의 비극은 카이트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데 있다. 카이트는 영락을 거듭할지언정 소시민적 근근한 삶을 영위할 인물이 아니다.

극중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이며 부르조아적 인물상은 안나와 카지미어이다. 안나는 카이트를 이용하여 가장 이득을 본 인물이다. 그녀는 부유한 상인 카지미어와 결혼함으로써 백작부인의 허울만 좋은 명예를 던지고 부를 선택하였다. 그녀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한편 카지미어는 작품의 또 다른 원동력이자 숨겨진 주인공이다. 그는 카이트의 프로젝트에 참가하지 않다가 성공이 거의 확실해지자 그를 쫓아내고 모든 것을 차지한다. 선녀궁과 안나 모두를.

카이트는 정말 지탄받아 마땅한 악당일까? 숄쯔의 대사를 빌려본다.
“슬픈 건지 다행인 건지간에-난 자네를 이제까지 지독히 교활한 악당으로 생각해 왔어. 이젠 그 환상도 버렸네. 악당이라면 말이야...그런데 자네는 나와 마찬가지로 운이 없어. 게다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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