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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령, 판도라의 상자 ㅣ 독일현대희곡선
프랑크 베데킨트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1999년 4월
평점 :
품절
베데킨트를 대표하는 작품은 소위 이 ‘룰루’ 2부작이다. 룰루는 2부작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이름이며, 동시에 이 작품을 지배하는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베데킨트의 극작품으로 뿐만 아니라, 알반 베르크의 동명의 오페라로 더욱 유명하다.
룰루 2부작은 등장인물의 파격성과 사건 전개의 극단성, 그리고 적나라한 성(性)의 노출 등으로 당대에 매우 파장을 일으켰다. 다만 호의적인 것은 아니어서 오랜 세월 음지에서 소수의 매니아들에게 숭배 받다가 근자에 들어서 서서히 베데킨트 재평가에 힘입어 빛을 쐬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작품해설에 따르면 음란물로 취급받기까지 한 대담한 성적 표현은 초판본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베데킨트는 후일 작품을 수정하면서 이를 대폭 온건하게 손보아 현재의 수정본에서는 암시적으로만 그려진다.
룰루는 사회 밑바닥층 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의 육체적 매력을 십분 활용하여 신분 상승과 안락한 생활을 이루어낸다. 그녀에게 사회적 윤리와 도덕은 의미가 없다. 오로지 현세의 즐거운 유희와 쾌락만이 유일한 삶의 지표다.
“룰루는 현재 자신의 존재 이외는 달리 누가 생각해 주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적 평가가 어떠하던 개의치 않는다.” (P.217)
이런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은 쉐엔 박사이다. 쉐엔 박사는 어린 그녀를 수렁에서 구해준 인물이며 그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는 사회적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룰루를 병원장인 골 박사에게 넘기고, 그가 죽은 후에는 화가 슈봐르츠와 결혼시킨다. 이어 슈봐르츠의 자살 후에는 무대에 올려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줄 남자를 물색하기도 한다.
룰루의 매력은 치명적이다. <지령>을 보자. 젊은 룰루를 감시하다가 늙은 골 박사는 사고로 죽게 된다. 슈봐르츠는 룰루의 과거를 알고 견디지 못해 자살한다. 쉐엔 박사는 어떠한가. 그는 결국 룰루에게서 헤어나지 못하고, 젊고 부유한 귀족 약혼녀와 파혼하고 그녀와 결혼한다. 이제 행복한 삶을 누리기만 하면 되지만, 룰루는 한 남자에 매이는 여성이 아니다. 쉐엔 박사는 주위의 모든 남자들, 심지어는 자기 아들 알봐마저 룰루에게 접근하는 것을 보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악연을 끊기 위해 룰루에게 자살을 요구하다 룰루의 총에 맞아 죽고 만다. <판도라의 상자>에서도 마찬가지다. 로드리고 크봐스트는 룰루를 위협하다가 룰루의 계략에 의해 쉬골흐에게 목숨을 잃는다. 알봐 쉐엔은 매춘에 나선 룰루를 견디다 못해 그녀가 데려온 남성을 죽이려 하다가 오히려 죽음을 앞당긴다. 여성동성애자인 게슈뷔츠 백작부인은 룰루를 위해 대신 감옥살이도 하고 일생을 헌신하지만 살인마 잭에게서 룰루를 구하려다 오히려 처참한 종말을 맞이한다.
이렇게 룰루는 자신을 둘러싼 남성들에게 파면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전형적인 팜므파탈이다. 자신의 육체적 매력을 충분히 의식하고 발산하려 애쓰는 면에서 그녀는 분명히 그러하다. 반면 그녀는 관능이 뚝뚝 배어나오는 그러한 유와는 다르다. 겨우 이십대 초반인 그녀는 아직 소녀티를 간직하고 있다. 그녀의 사고와 행동도 때로는 여인보다는 소녀의 순수함을 보여준다. 그녀는 쉐엔 박사를 사랑하지만,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뭇남성들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삶이란 즐거운 파티이며, 파티에서 다른 사람에게 잠시 웃음과 수작을 주고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과 상충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눈 뜨는 봄>에서 청소년들의 성(性) 문제를 제기하면서 동성애를 언급하기도 한 작가는 이 작품에서 슈봐르츠 백작부인을 등장시켜 본격적인 여성동성애를 드러낸다. 비록 작중에서는 미묘한 암시로 제시하고 있지만, 슈봐르츠 백작부인의 처절한 헌신은 연민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다.
룰루에게 매혹당하지 않는 존재, 그럼으로써 극중에서 목숨을 보전하는 유일한 인물은 바로 쉬골흐다. 그는 룰루의 아버지인 동시에 때로는 연인이기도 하다. 정체성을 파악하기 힘든 묘한 인물이지만, 그는 룰루의 육체에 물론 관심을 가지지만 그녀를 이용하는데 더 큰 주의를 기울이며, 마지막에는 룰루를 매춘으로 내모는데 아무 거리낌도 없다. 그는 성과 속, 선과 악에 초연하다.
<지령>은 쉐엔 박사, <판도라의 상자>는 아들 알봐 쉐엔이 각각 룰루의 파트너로 나온다. 아버지의 살인자와 결혼하는 아들,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만큼 알봐에게 룰루의 매력은 벗어날 수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알봐는 믿고 있던 주식이 휴지쪼가리로 바뀌면서 영락하여 궁핍한 생활을 하며 중병에 걸리지만, 룰루가 매춘에 나서는 것에 현실적으로 불가항력임을 알면서도 내면으로는 인정하지 못한다. 전편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양보로 가슴속에 꾹 눌러 담았고, 후편에서는 죽는 순간까지도 룰루에 충실한 알봐 쉐엔이야말로 이 연작에서 가장 충실하면서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룰루의 본질을 알면서도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당신의 타고난 재주 때문에 누구나 자기 주위 사람들을 모두 꿈에도 생각하지 않던 범죄자로 만들고 말어...언젠가 자기 내부가 온통 무너져버리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분명하게 말해주고 싶어. 자제력에 얽매여 있는 남자일수록 더욱 쉽게 쓰러지고 말지. 그럴 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P.104)
주위 사람들을 불나방으로 만든 룰루는 자신도 결국 살인마에게 끔찍한 최후를 당하게 된다. 그녀는 비극의 우아한 주인공으로 끝맺지 못한다. 그것은 룰루의 속성 내지 본질에 기인한다.
“룰루는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희생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낱 보잘 것 없는 짐승처럼 죽게 된다. 룰루의 속성은 변태 살인자 잭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모두 파멸되어 있었던 것이다.” (P.217~218)
실제 사건에서 참조한 살인마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는 여성만을 대상으로 삼은 변태살인자다. 그에게 룰루의 육체, 특히 음부는 더할 나위 없이 구미가 당기는 물건이다.
“지에미! 지금까지 이렇게 멋진 조갑지는 처음 보았어.” (P.204).
초판본을 보면 이후 대사는 현재의 수정본과는 매우 다른 성격임을 알 수 있음을 해설을 통해 알게 된다. 룰루 2부작은 어찌 보면 룰루의 높은 의학적 가치를 갖는 음부가 빚어낸 비극적 산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룰루 2부작은 과격하다. 거칠고 적나라하여 구성과 표현에서 숨김이나 주저함이 없다. 귀족계급과 시민사회의 고상하고 우아함에 젖어있던 당대 사회의 관념으로 이해하기에 난해하다. 등장인물은 모두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누가 룰루를 악녀라고 매춘부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겠는가. 또한 룰루에 의해 스러져가는 인물 군상도 복합적 면모를 지니고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사회의 내재하는 모순적 이중성을 헤집어 대낮에 환히 드러내고 있다. 그 상처는 햇볕에 쓰라리다. 쓰라림은 거부를 일으킨다. 그러나 상처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 국내 유일의 번역본이다. 다만 제대로 된 도서라고 하기엔 오자(誤字)가 너무 많다. 전혀 교정을 보지 않은 듯하다. 겉표지의 작가명이 ‘프랑크 붸데칸트’로 나와 있으니 본문의 무수한 오류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이런 책이 저명한 대학교의 출판부 이름으로 게다가 <독일현대희곡선>이라는 시리즈의 일환으로 나오다니 의의를 찾기에 부끄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