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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에 관한 대화
프리드리히 슐레겔 지음, 이영기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평점 :
슐레겔이 시문학에 관한 종합적 의견을 개진한 문학 이론서다. 앞서 그리스와 로마 시문학 연구와 아테네움 단편을 통해 부분적으로 표명한 그의 낭만주의 이론이 여기서 비로소 집대성되고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된다. 슐레겔이 주창한 독일 낭만주의 이념의 진면목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이 매우 유익하다.
크게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는데, 각각 명확한 목적과 특성을 지닌다. ‘시문학의 시대들’은 서양 문학사 약사에 해당하고, ‘신화에 관한 연설’은 근대 시문학의 핵심적 요소로서 낭만주의 정신을 소개한다. ‘소설에 관한 편지’는 서양 소설사 약사이자 이론이며, ‘괴테의 초기 및 후기 작품에서의 상이한 야식에 관한 시론’은 작가론이다. 이 네 개의 장을 관통하는 정신은 시문학, 즉 포에지이며 고대 그리스에서 태동한 시문학을 근대에 부활하는 요체가 바로 낭만주의라고 주장한다.
슐레겔이 말하는 시문학, 즉 포에지는 말하자면 오늘날의 문학이다. 다만 저자는 문학 전체를 시문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시문학의 시대들’에서 슐레겔은 서양 문학사를 개관한다. 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와 그의 후대가 형성한 고대 시문학은 쇠퇴를 거듭하다 로마 시대에 와서 겨우 풍자시로 명맥을 유지한다. 중세의 암흑기를 일깨운 근대 시문학의 창시자로 단테를 추앙하고,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가 뒤따른다. 이어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로 르네상스의 대미를 장식하고 시문학은 단절된다. 그리고 근래에 와서 괴테의 등장과 더불어 시문학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고 보고 있다. 괴테 이전의 작가들이야 워낙 당대에도 위대한 작가로서 명성이 높았던 반면 괴테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고 있음은 뜻밖이다. 게다가 이때는 필생의 역작 <파우스트>가 아직 발표되기도 전인데 말이다.
여기서 시문학이 도대체 무엇인지 의문이 생길 법하다. ‘신화에 관한 연설’에서 저자는 시문학은 낭만적 정신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자연이 상상력과 사랑의 정신과 결합하여 글로 표현된 것을 시문학의 시작으로 본다. 이성을 지양하고 상상력의 자유로운 발현을 추종하기에 외관상 산만하고 신비롭고 혼란스럽게 보이는데, 그러한 카오스적 무질서의 모습이 시문학의 본질이라고 간주한다. 다만 고전 시문학은 고대 신화에 기반하는 데 반해 근대 시문학은 근거할 신화가 없기에 인위적으로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야 하며, 그것이 곧 역사에 근거하여 정신적으로 구축해야 하며 그것이 곧 낭만적 포에지다. 슐레겔은 스피노자의 독특한 신비주의 관념에서 이론적 토대를 찾고 있다.
온갖 잡동사니의 병적인 위트라는 말을 나는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 점을 옹호하며 단호하게 내가 주장하는 바는, 그러한 그로테스크한 것들과 고백들이야말로 비낭만적인 우리 시대의 유일하게 낭만적인 창작물이라는 것입니다. (P.77)
‘소설에 관한 편지’는 구체적으로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다. 고전 문학에 비해서 당대 소설은 너무 그로테스크하고 난삽하고 잡동사니 같은 글에 불과하다는 견해에 대해 그것이 근대 소설의 전형적인, 따라서 바람직한 특성이라고 오히려 반론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로렌스 스턴과 드니 디드로의 작품을 긍정한다. 낭만주의 문학은 포에지를 자유롭게 드러내기 위해 형식과 표현에서 제약을 거부한다. 위트, 아라베스크, 사랑의 정신, 그리고 자기 고백이야말로 근대 소설의 중요한 요소에 해당하며, 루소의 <고백록>을 탁월한 소설이라고 평가한다. 저자가 생각하는 소설은 장르 구분이 아니라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한 권의 책이다. 이쯤에서 슐레겔의 유일한 소설 <루친데>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잡힌다.
소설은 한 권의 낭만적인 책입니다. (P.88)
나는 소설이란 이야기와 노래와 다른 형식들이 섞여 있는 것 말고는 달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세르반테스도 결코 다른 방식으로 창작하지 않았으며, 보통은 매우 산문적인 보카치오마저 자신의 문집을 노래들로 테를 둘러 장식했습니다. (P.89)
슐레겔은 당대 작가 중 괴테를 높이 평가한다. 낭만주의 문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최고 수준까지 올린 문학사적 인물로서. <파우스트>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평가가 나온다니, 우리가 괴테를 너무 한 작품만으로 편협하게 바라봐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저자는 마지막 ‘괴테의 초기 및 후기 작품에서의 상이한 양식에 관한 시론’에서 괴테의 초기작에서 현재까지 문학을 낭만주의의 발현과 완성에 이르는 여정으로서 파악한다. 시기별로 세 단계로 구분하는데, 생소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타소>, <헤르만과 도로테아>를 각 시기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여기에 <빌헬름 마이스터>를 따로 언급한다. 괴테는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 이후 침체기에 놓여있던 서양 문학을 일거에 진보의 정점으로 견인한 작가라는 게 슐레겔의 평가다.
이 책은 내용상으로도 파격적이고 흥미롭지만 형식에 있어서도 참신하다. 네 개의 장은 각각 원고, 연설, 편지, 에세이 형식을 취하고 있어 획일적이지 않다. 이 글들이 비슷한 관심사를 지닌 사교 모임에서 발표하고 참석자 간 짤막한 대화와 토론이 전개되므로 책명에 ‘대화’가 덧붙여졌다. 다만 대화는 어디까지나 보충적 성격을 지닐 뿐이다.
슐레겔에 따르면 낭만주의 문학에서 중요한 표현 양식인 아라베스크와 알레고리는 본질에서 태동한다. 신비로움을 언어로 적확하게 대치할 수 없기에 알레고리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환상을 펼쳐야 하기에 정돈되지 않고 어수선한 혼돈과 모순, 열정적 표현은 아라베스크 형식을 택하게 됨은 필연이라고 하겠다.
바로 인위적으로 정돈된 혼돈, 모순들의 매혹적 대칭, 전체의 가장 작은 부분에서조차 살아 있는 열광과 아이러니의 놀랍고도 영원한 교체가 내게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간접적인 신화처럼 보입니다. 유기체적 조직도 이와 동일한 것이며, 아라베스크야말로 인간 상상력의 가장 오래되고 근원적인 형식임에 틀림없습니다. (P.64)
이 책의 의의는 슐레겔이 전개하는 독일 낭만주의 문학 정신과 이론의 흥미와 이해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 자신의 소설은 물론이고, 독일 초기 낭만주의 작가들인 노발리스, 브렌타노, 티크 등의 작품에 깃든 정신과 요소가 무엇인지, 얼핏 혼란스럽고 복잡한 작품에서 그들이 의도한 정신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여기에 있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