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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바람 위에 있어 ㅣ 열다
헤르만 헤세 지음, 폴커 미헬스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8월
평점 :
헤르만 헤세의 글은 아주 오래전 집중적으로 읽었다. 이후 산발적으로 한두 편 읽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헤세의 자연, 특히 구름 에세이를 다룬 이 책의 접근은 매우 생소하다. 헤세가 그렇게 구름을 사랑하고, 깊은 관심을 지니며 천착하였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구름은 하늘 저 멀리 있기에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신과 가까운 존재이다. 흰 구름은 평화로운 자연과 목가적 전원의 상징이다. 반면 먹구름은 폭풍과 재난, 그리고 비극으로 귀결된다. 색으로 말하자면 붉게 물든 석양의 구름이 자아내는 신비로움을 빼놓을 수 없다. 구름은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하늘을 떠다닌다. 구름은 정처 없이 떠도는 하늘의 방랑자다. 나그네, 방랑자를 구름에 비유함은 동서양이 공통적이다.
너희는 본질적으로 우리와 닮았으니, / 우리 방랑자들, 우리 닻 없는 항해자들을 닮았으니. (P.18, 구름의 노래)
방랑자의 모든 슬픔과 기쁨을 / 헤아리지 못한 사람은 / 구름을 이해하지 못하리. (P.81, 흰 구름)
헤세의 문장에서 이 모든 것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그는 구름을 방랑자와 많이 연결한다. 작가 자신의 삶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은 탓이리라. 그가 독일을 떠나 스위스의 자연에 은거한 연유는 모국에 발을 붙일 자리를 찾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당대 모국에게 있어 그는 반항아로 간주되었으니.
원래 세상과 잘 맞지 않는 사람이었지. 세상은 그런 반골적인 나에게 수없이 회초리를 들었지만 그래도 나를 죽이지는 못했어. 나는 여전히 살아 있고, 세상에 저항하며 버텨 왔어. (P.131, 저녁 구름)
편자는 헤세를 “구름 관상학자”(P.160)로 칭한다. 한마디로 구름을 보고 읽어낼 줄 안다는 말이다. 그만큼 헤세가 구름을 깊이 관찰하고 애정하여 일반 사람이 간과하는 다채롭고 미묘한 구름의 형상을 파악하였다는 뜻이리라. 구름이 무한한 하늘에 실체감을 부여함으로써 인식 가능한 공간으로 만드는 존재임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확실히 그것을 깨닫는다. 나로서는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견해다.
구름은 광대무변의 공간에 실체감을 부여하고, 그 공간을 살아 있게 하고, 측정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 우리를 그 공간과 연결시켜 준다. (P.10, 구름)
제아무리 아름답고 뛰어난 자연 경관도 오래 보거나 자주 보면 흥미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단순히 아름다움에 열광하지 않는다. 우리를 진정으로 사로잡는 건 그것과 연결된 감정이다. 칼리다사의 <메가두타>에서 구름은 부부간 사랑의 전령이다. 헤세도 구름을 바라보며 첫사랑의 추억을 회상하고, 학생 시절에 어머니를 부끄럽게 여겨 외면했던 가슴 아픈 경험을 반추한다. 꿈속에서나마 어머니가 자신을 보며 웃고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며 위안 삼는다.
구름은 변화무쌍하다. 잠시만 눈을 다른 데 두었다가 바라보면 원래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다. 그러기에 구름은 덧없음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구름을 쳐다보면 인간은 상념에 젖기 마련이다. 그것은 추억과 회상, 나아가 그리움과 슬픔의 정조다.
이처럼 인생무상과 회한에 사로잡히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레 노쇠와 죽음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구름에 자욱하게 뒤덮인 흐린 하늘은 사람의 마음마저 착 가라앉힌다. 젊은 시절의 방랑과 들뜸도 어느덧 사라지고 열정과 활기마저 쇠진하게 된다. 하늘 높이 흰 구름에서 기쁨을 찾기보다 덧없음에 사로잡히기 쉬우며, 석양의 지는 노을에 오히려 철렁하게 공감하게 되는 때. 헤세는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러면서 힘들지만 소소한 기쁨을 구하자고 말한다.
나는 늙어 가고 생명이 시들어 가는 과정의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는 것이 몹시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독서나 음악, 자연 속에서 소소한 기쁨을 누립니다. (P.148, 1951년 2월 이름가르트 샤비키에게 보낸 전언에서 발췌)
헤세의 시, 산문, 편지, 단편과 장편소설 등에서 구름과 연관된 글만을 폴커 미헬스가 편집한 게 이 책이다. 색다르면서도 흥미로운 기획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구름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안개와 호수, 석양, 푄 같은 온갖 자연 현상을 함께 다루는 자연 에세이다. 몇 편의 시와 산문에 그치지 않고 <페터 카멘친트>와 <유리알 유희> 같은 소설에도 구름에 연관한 대목을 들어가 있더니 헤세의 구름 사랑은 참말이 아닐 수 없다.
헤르만 헤세의 서정적인 문장을 오랜만에 접할 수 있었다. 아울러 구름과 자연, 그리고 풍요로운 상념에 젖어 들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