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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영혼의 거울 - 개정판 ㅣ 다빈치 art 6
프란시스코 데 고야 지음, 이은희.최지영 옮김 / 다빈치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2001년 출판본의 개정판이다. 처음부터 개정판을 펼쳤다면 다행이고, 혹시라도 구판을 읽을 생각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책장을 덮고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 내가 꼭 그러했다. 구판과 개정판은 전혀 다른 책이라고 보면 된다. 기본 콘텐츠는 동일하지만, 판형도 훨씬 커졌고 편집도 완전히 새로 하였다. 구판은 독자의 이해력과 인내력을 테스트하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니었을까 할 정도로 독서에 무척이나 불편하였다.
이 책은 크게 두 개의 장으로 나누어지지만, 내용상으로 보면 네 개의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고야의 주요 회화 작품이 한 영역을 별도로 차지한다.
첫 번째 본문은 ‘고야의 삶과, 그리고 예술’로 고야에 대한 약사에 해당한다. 구판에는 이탈리아 미술평론가 마게리타 아부르체세의 글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개정판에는 이 대목이 생략되어 어떤 게 맞는 건지 알 수 없다. 고야의 일생과 예술세계는 앞서 몇 권의 책을 읽었기에 새삼스럽지 않다. 다만 새로운 작품으로 여섯 점의 연작 <산적 엘 마라가토의 체포>를 소개(P.21)하고 있어 관심이 쏠렸다. 후기작으로 <호세 데 칼라산스 성인, 최후의 만찬>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의 현대성을 부각하고 있는 점(P.24)도 흥미로웠다.
두 번째는 고야 자신의 육성을 들어볼 수 있는 귀한 자리다. 그가 절친 사파테르에게 보낸 편지를 수록하고 있는데, 100페이지 정도 되므로 꽤 많은 분량이다. 서신 교환은 사파테르가 사망한 180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으며, 온갖 시시콜콜한 개인사부터 자신의 작품에 대한 고충과 세간의 평판에 대한 의식까지 전반적으로 담고 있다. 산 프란시스코 엘 그란데 대성당의 작업에 매달려 있음을 알 수 있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산 이시드로 평원>을 그리느라 고야가 쏟는 에너지와 스트레스가 굉장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주제가 <산 이시드로 평원>으로, 너무나도 어렵고 까다롭다네. 산 이시드로 축일에 왕궁에서 이 그림을 공개할 걸세. 사랑하는 벗이여, 솔직히 이 문제가 끝날 때까지 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걸세. 잠도 자지 못하고 쉬지도 못하지. (P.107, 1788년 5월 31일)
고야 자신의 말처럼 아내보다도 더 친근하고 솔직하게 토로하는 표현은 단순한 우정을 넘어설 정도의 끈끈하고 농밀한 느낌마저 자아낸다. 그토록 사적인 편지가 후대인들에게 공개되었을 것을 알았다면 고야가 이토록 무람없이 문장을 쓰지는 않았으리라.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된다면 자네와 함께 있고 싶네. 난 자네를 깊이 사랑하고 있네. 자네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이 세상에 또 없을 걸세. (P.51, 날짜 없음)
아! 잠깐만, 자넬 그리워하는 나를 천 번만 안아주게나.
내가 자네에게 줄 수 없는 것을 갖게나[여성의 성기 그림]. (P.127, 1797년 10월 10일)
세 번째는 고야의 주요 회화 작품 소개다. 이 부분은 일종의 컬러 도록에 해당하므로 용지를 달리하고 있다. 1772년 필라르 바실리카의 프레스코화에서 시작하여 최후기작인 <보르도의 우유 파는 아가씨>에 이르기까지 60면에 걸쳐 연대순으로 그의 주요 작품을 순서대로 보여준다. 판형이 커진 만큼 그림 감상에 제격이며, <산 이시드로 평원>, <종교 재판소>, <카를로스 4세 가족>, 1808년 5월 역사화 2편과 <결투> 등은 양면에 걸쳐 시원스레 보여준다. 유명한 마하 작품 2편도 그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핵심은 네 번째 본문에 있다고 본다. 고야의 유명한 판화 연작인 <카프리초스> 80편을 모두 수록하고 있다. 각 면에 한 편씩 판화 작품을 싣고 아래에 판화의 제목과 간단한 설명을 소개한다. 얼마 전에 그의 판화전을 관람하였는데, 전시회 도록보다 이 책을 더욱 추천할 만하다.
고야가 인간 정신의 어두운 측면과 다양한 삶의 양상들을 관찰하여 그려낸 이 작품들은 영원히 존재하는 부조리와 강박관념과 동시에 즉각적이며 보기 드문 현실 감각을 드러낸다. (P.199-200)
유독 마음에 끌리는 작품은 6번 ‘아무도 모른다’, 12번 ‘이빨을 찾아서’, 24번 ‘구원은 없었다’, 37번 ‘제자가 더 많이 아는 건 아닐까?’, 52번 ‘재단사의 재주’, 80번 ‘때가 되었다’이다. 23번과 24번은 무고한 여인을 등장시키며, 37번에서 42번까지는 소위 당나귀 시리즈라고 하겠다. 한편 <카프리초스>를 상징하는 43번 ‘이성의 꿈은 괴물을 낳는다’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해석보다는 그림 설명 자체가 다른 해석의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곱씹고 싶다.
이성으로부터 버림받은 환상은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끔찍한 괴물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환상이 이성과 결합하면 예술의 모체가 되고, 모든 경이로움의 원천이 된다. (P.247)
마지막 다섯 번째 글은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미술 평론이다. 맞다, <멋진 신세계>로 유명한 소설가다. 그는 고야 작품 전반을 다루지 않고, 후기작에 집중한다. ‘검은 그림’ 연작과 판화집 <카프리초스>, <전쟁의 참화>, 그리고 <어리석음>이 갖는 의미에 주목한다. 이 글은 앞에 실린 <카프리초스> 이해를 위한 해설 성격을 지니고 있어 매우 유익하다.
고야가 그림에 나타난 것처럼 날카로운 현실 인식과 시대 감각을 지닌 사상가적 면모로서 세상의 미신과 무지, 광기와 폭력, 야만성의 시각으로 정말로 역사와 사회를 인식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판화집 내용은 이를 반박하지 못한다. <전쟁의 참화>에서 고야는 전쟁의 영광과 위세를 배제하고, 전쟁의 이면에 가려진 인간 일반의 비인간성과 인간 개개인의 고통에 집중한다. <카프리초스>에 비해 덜 알려진 <어리석음>을 한층 주목하는 것 또한 흥미롭다.
더욱 침울하고 불가사의해진 <어리석음>에 나오는 풍자는 전체적으로 <카프리초스>보다 덜 직접적이다. 거기에 등장하는 비유는 훨씬 더 일반적이고 신비하다. (P.299)
이 책을 프란시스코 고야의 입문서로 삼기에는 적절치 않다. 그의 삶과 예술세계에 대해 기초적인 지식을 지닌 독자가 한층 심화한 이해를 원할 경우에 적합하다. 무엇보다 판화집 <카프리초스>에 크나큰 관심을 지닌 독자라면 만족도가 높을 것이다. 절판된 게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