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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고사 - 19세기 베스트셀러, 서울의 춘향전
이윤석.최기숙 지음 / 서해문집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경판본과 완판본이 <춘향전>의 대표적인 판본이라면, <남원고사>는 근래 들어 주목받는 이본이다. 다만 입소문에 비해 실제로 접하기는 쉽지 않은 판본이기도 하다. 이는 대중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번역본이 부재한 까닭이다. 현시점에 알라딘에서 ‘남원고사’로 검색해 보면 연구서를 제외하면 모두 세 종류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 그마저도 서해문집 판은 품절로 사실상 절판이나 다름없다. 결국 설성경 번역본과 정길수 번역본만이 독자에게 접근 가능하다. 도서관에서 두 가지 번역본을 살펴보았는데,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한 게 아님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두 책 모두 교주본으로 전문적 주석을 달고 있고, 원문과 번역문을 나란히 수록하여 전문 학술 도서에 가깝다.
서해문집의 이윤석과 최기숙 번역본은 필요한 최소한의 주석과 해설을 곁들이고 <남원고사> 본래의 콘텐츠가 지닌 맛을 살리기 위해 깔끔한 번역문을 지향한다. 원문에의 충실성은 헤아릴 수 없지만 적어도 소설로서 가독성과 흥미성의 전달에는 성공하였다.
<남원고사>는 주류 판본과 여러 가지 설정과 대목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먼저 춘향의 성씨는 성씨가 아니라 김씨다. 신분이 기생이라는 점은 경판본과 마찬가지다. ‘사랑가’ 대목이 첫날밤이 아니라 광한루의 첫 만남에서 등장하며, ‘십장가’도 실제 매를 맞기 직전에 불린다. 춘향 어미는 거지로 분장한 어사를 끝끝내 박대하고, 춘향이가 풀려난 게 변 사또가 아니라 어사의 수청을 허락한 덕분으로 알고 기뻐한다. 어사가 춘향을 풀어주는 장면에서도 춘향을 구박한 기생들에게 칼머리를 이로 물어뜯어 벗기라는 무자비한 명령을 내리는데 아무리 봐도 어사로서 공정한 처분이라기보다는 사적 복수에 치우친 것으로 보인다.
춘향의 성격도 완판본과 유사하지만 한층 강렬하게 그려진다. 불망기를 달라고 똑 부러지게 요구한다든지, 이별 통보에 미친 듯이 분노를 표출하다가 전별주를 건네는 모습, 자신을 잡으러 오는 패두들을 능수능란하게 접대하는 대목에서 다소곳한 요조숙녀와는 거리가 멀다. 본문에서도 춘향의 성품을 이렇게 기술한다.
춘향이 본디 사재고 도도하여 매몰차고 꼿꼿한지라 관속들이 꺼리고 싫어하더니 (P.193)
주류 판본의 <춘향전>을 읽으면서 항상 아쉽게 느꼈던 점은 변 사또가 암행어사에게 파직당한 이유가 석연치 않다는 점이다. 수청을 거부한 춘향을 감옥에 가둔 이유만으로는 애매하다. 일단 춘향의 신분을 기생으로 간주한다면, 수령은 산하 기생에게 관례상 수청을 요구할 수 있다. 춘향과 이 도령의 관계는 흔하디 흔한 일시적 만남에 불과하다. 물론 춘향은 대속을 해서 기생의 신분을 면했다고 하지만, 이게 실제로 법적으로 인정되는지 여부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변 사또는 불법 행위를 저지른 셈이니 처벌은 당연하다. 한편 자신의 요구가 확실한 불법 행위임을 알고 있는데도 변 사또가 수청을 강요했을까 반문할 수 있다.
<남원고사>는 이러한 미비점을 상당 부분 보완하였다. 변 사또가 파직당한 결정적 죄목은 탐관오리라서이다. 어사가 된 이 도령은 전라도를 순행하면서 선비와 농민 등 신분을 물론하고 수령의 정사에 대해 탐문한다. 이 과정에서 남원 부사가 탐학한 인물임을 파악하였고, 생일잔치를 위해 백성을 가렴주구 하는 걸 목도하였으며, 잔칫상에서 변 사또 자신의 목소리로 이를 자랑하도록 조정한다. 어사의 유명한 시구는 이러한 빌드업을 통해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나는 묘리 있는 일이 있소. 심심한 때면 이방 놈과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등록하지 않은 토지를 뒤져내어 단둘이서 똑 반으로 나누니, 그런 재미가 또 있는가? (P.369)
<남원고사>는 완판본에 비해서도 분량이 매우 많다. 번역문만 수록해도 400면에 이르는 본격 장편소설이다. 세책본이라는 특성상 분량 늘리기를 의도함과 아울러, 춘향 이야기라는 줄기에 다양한 이야기를 부가하여 다채로운 읽을거리를 추구했을 것으로 본다. 소설의 첫대목은 화창한 봄날을 예찬하며 시작하는 데 풍광 묘사에 그치지 않고 역사와 문학의 전적을 이것저것 끌어와 길게 인용한다. 이어지는 칠언절구의 나열, 이 도령의 화려한 옷차림, 광한루로 놀러 갈 때 남원 지방의 자연과 만물에 대한 온갖 묘사를 열거하는 등 분량을 늘리는 데 주력한다.
춘향과 이 도령의 이별 장면에서 정철의 <사미인곡> 전문을 수록하며, 압권은 옥에 갇힌 춘향을 위로한답시고 남원 왈짜들이 와서 벌이는 갖가지 행태다. 이들은 노래를 부르고, 소설을 읽으며, 노름판을 벌이고 놀이를 하다가 끝내 술주정과 싸움으로 이어지는 희화적 장면을 연출하는데, 제법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춘면곡>, <처사가>, <어부사> 거의 전문을 인용하고, <삼국지연의>, <수호지>, <서유기>의 한 대목을 삽입하는 등 독자가 흥미롭게 여길 만하다고 생각되면 차입을 망설이지 않는다.
<남원고사>의 독자층이 누구일지 생각해 본다. 작중에 상당한 고전과 한문 지식이 필요한 문구와 대목이 많으므로 서민은 읽어도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 양반층과 학문을 깨우친 중인 및 부유한 평민층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게다가 흥미성을 전제로 하는 소설이므로 재미와 해학 요소도 아끼지 않는다. 양반층은 서민의 풍속과 세태를 알 수 있으며, 중인과 평민층은 지배층을 향한 기롱과 본인 계층의 실상을 해학적으로 접할 수 있으니 모두가 좋아할 만한 요소가 아니겠는가.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당대의 풍습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도령이 방문했을 때 춘향이 갖가지 담배를 내놓는 대목에서 당시 담배가 일대 유행이었음을 알게 되는 점이 전형적이다. 남원 왈짜의 행태를 통해서는 당대 인기 소설과 노름, 놀이 문화의 일면을 헤아릴 수 있다. 아울러 해학성도 새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방자의 인물됨 묘사, 이별 장면에서 이 도령과 마부의 장난, 변 사또의 말 상대인 이 낭청의 이도 저도 아닌 애매모호한 말투가 유달리 기억에 남는다.
<남원고사>라고 이본의 이름을 달리했는지가 이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이본의 작자 또는 편자는 널리 알려진 경판본 춘향전의 줄거리를 뼈대로 삼지만, 이 도령과 춘향의 사랑 이야기로만 작품을 한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식자층과 서민층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덧붙이는 데 주력한다. 그리고 강압적인 지배층과 무력한 서민층의 대결에서 사필귀정의 해방과 쾌감을 느끼도록 하는 데 관심을 집중한다. 이것이 단지 소설 속 꿈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도 실현될 수 있기를 소망하는 심정 또한 품고 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