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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ㅣ 펭귄클래식 38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제인 에어>를 읽은 후 자연스레 진 리스의 작품을 펼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 간에 맺어짐의 장벽이 되었던 미친 여인 버사. 작가는 그녀가 단지 말 없는 들러리가 아닌 주체적 인간으로서 정당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숨결을 불어 넣는다. 작가는 왜 이러한 시도를 했을까. 먼저 도미니카 출신인 진 리스 자신과 버사 간 지역적, 민족적 동질성을 느껴서이리라. 영국 남자와 결혼한 크리올 여인이 영국 본토에 와서 처한 곤경과 부당한 대우에 분개한 연유도 있다. 경제적 자유의 박탈과 인종적, 문화적 갈등에 따른 광인 취급.
그렇다고 이 소설을 무조건 <제인 에어>와 연계해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선배 작가의 명작은 오로지 이 작품을 탄생시킨 계기였을 뿐 그녀가 그리는 소설 속 인물과 상황은 완전히 독자적이다. 그렇게 볼 때 사르가소 바다를 경계로 대서양 양 끝에 자리한 서인도 제도와 유럽 간 인종적, 문화적, 심리적, 제도적 격차의 광막함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다.
그러니 당신들과 이곳 유색인종들 사이에서 나는 내가 누구며, 어디가 내 나라인지,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 내가 왜 태어난 것인지 궁금할 때가 많아요. (P.149)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어머니는 크리올이다. 서인도 제도의 식민지에서 태어난 유럽인의 후손. 그들은 농장주로서 식민지 지배층이지만, 노예해방으로 일거에 전락하고 만다. 백인이지만 본토의 백인과는 동급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백인. 식민지 흑인과 본토 백인 양쪽에서 배척당하는 어중간한 지위. 유럽인이지만 유럽 문화와 정서보다는 식민지 문화와 정서에 가까움과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 그것이 크리올이다. 흑인들은 그들을 ‘흰 바퀴벌레’라고 불렀다.
이 작품은 크게 두 가지의 개인적, 사회적 갈등을 다룬다. 우선 식민지 흑인과 지배층 유럽 백인 간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갈등이다.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는 신분적,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고자 메이슨 씨와 재혼한다. 유럽에서 건너온 신흥 백인 지주인 메이슨 씨는 식민지의 어둡고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알지 못한다. 그네들의 백인 지배층에 대한 은폐된 혐오의 깊이와 세기를 알지 못한 채 아내의 잇따른 경고도 외면하고 순진하고 무심한 언행으로 일관하다 일순간에 저택은 불타버리고 앙투아네트의 남동생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는 광기에 사로잡힌다.
다음으로 앙투아네트와,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에서 건너온 남성 간의 인종적 갈등 그리고 남성우월주의를 다룬다. 양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앙투아네트는 가족에 의해 영국 남성과 결혼한다. 이는 상호 간 이해관계가 일치해서인데, 크리올로서는 본토 백인 남성과 혼인으로 인종적 정통성을 보장받고 싶어 했으며, 본토 백인 남성은 신부의 막대한 지참금을 통해 무일푼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실질적 욕망을 지녔다. 여기에 당대 영국 법령은 결혼한 여성의 독립적 법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기에 남편의 재산권 독점이 가능하였다.
나는 내가 하기로 되어 있는 역할을 연기했을 뿐이다. 그녀와 나는 전혀 아무 상관없는 관계이다. 나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다 나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행해진 것이다. (P.114)
여기까지는 당대 현실이 그러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무슨 연유가 되었든 결혼한 두 사람이 무탈하게 잘 살아가면 모순과 불합리가 그나마 상쇄될 수 있으니. 문제는 결혼한 본토 백인 남성(이 작품에서는 로체스터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이 신부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서인도 제도에서 자라난 크리올 문화에 대한 존중과 이해의 노력이 전혀 부재하다면 애정이 차차 생길 수 있다고 기대하기도 난망하다. 이것이 이 소설의 핵심 포인트다. 남자는 돈을 바라보고 생면부지의 크리올 여성과 결혼했다는 자괴감과, 유럽인이 아닌 타 인종과 결혼했다는 불편감을 시종일관 되새김질한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 속 앙투아네트의 남편은 다문화에 대한 인식과 이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내게 적개심을 품은 것 같았다. [......] 내가 이 장소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나는 그것을 느꼈다. 나를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P.211)
이것은 그가 앙투아네트를 버사라고 호칭하는 데서 두드러진다. 별다른 이유가 없다. 그저 자기가 그렇게 아내를 부르고 싶어서 부를 뿐이다. 이를 애칭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게, 애칭은 원래 이름을 귀엽게 표현하는 것이지 이름을 완전히 바꾸는 게 아니다. 이름이 개인의 정체성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남편의 행위는 아내를 대등한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명시적 폭력에 해당한다. 더구나 옆방에 아내가 있음에도 일부러 하녀 아멜리와 관계를 맺은 것은 공개적 수치와 모욕주기에 불과하다. 아내를 하녀와 동급으로 취급한다는.
버사는 내 이름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것은 나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만들려는 거지요? 그것도 오베아예요. (P.208)
샬럿 브론테는 그녀의 소설 속에서 똑 부러진 주체적 여성상을 창조하였다. 제인은 로체스터 씨의 일방적 시혜를 거부하고 대등한 관계에서 결합한다. 이처럼 여성주의적 입장을 명료하게 내세운 작가가 버사를 그렇게 괴물 같은 미치광이로 묘사하였다는 점은 의외다. 작가에게 버사는 자신이 주목하고 관심을 둘 여성이 아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면, 그녀 역시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유럽 중심의 제국주의적 시각 말이다. 버사는 식민지의 크리올이기에 토착 흑인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당대의 어쩌면 보편적 인식을 작가는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그녀가 아무리 영국 순수 혈통의 크리올이라지만, 크리올을 영국 사람이나 유럽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 (P.101)
이 작품에서 광기는 서인도 제도의 크리올인 앙투아네트 혈연 속에 흐르는 유전성으로 설명한다. 본토 유럽 백인이 아니고 서인도 제도의 야만성에 오염된 존재로서 말이다. 작중에 로체스터는 끊임없이 앙투아네트를 불인정하고 의심하며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그가 그녀에게 갖는 건 오로지 육체적 욕망뿐이다. 오죽하면 필요한 재산을 다 챙겼으니 앙투아네트가 자유로이 살아갈 수 있도록 놓아주라는 유모 크리스토핀의 정당한 요청마저 단칼에 거절한다. 그에게 앙투아네트는 미쳤건 아니건 간에 이미 자신의 소유물이기에 절대로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존재다. 차라리 망가뜨릴지언정 말이다. 이쯤에서 진짜 광인이 누구인지 헷갈린다.
그녀는 미쳤지만 내 것이야, 내 것이야. 신들도, 악마들도, 운명도 다 관심 없다. 그녀가 웃건 울건 혹 두 가지를 다 하건, 그건 단지 나만을 위한 것이어야 해. (P.233)
이제 그녀는 단지 유령이다. 구름으로 가려진 잿빛 하늘 아래서 그녀는 단지 유령이야.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절망을 빼곤. (P.239)
<제인 에어>의 버사와 달리 이 작품 속 앙투아네트는 무너지지 않는다. 아니, 원작의 버사가 정말로 광녀였는지는 오로지 로체스터의 진술에 의존할 뿐이다. 낯선 이국땅의 저택에 감금된 그녀의 상황에 대해 작가는 원작과는 달리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앙투아네트의 판단과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로체스터의 바람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에 대한 인식을 명료하게 가져간다. 자신이 누구이며,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진 리스는 소설 속 로체스터가 아내 버사에게 행한 은폐된 사고와 행위의 기저 원인을 드러냄으로써 제국주의적 백인 우월주의와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의 실체를 폭로한다. 그리고 이러한 편향된 이데올로기가 결국 제인 에어의 창조자인 여성 작가 샬럿 브론테마저 당연한 것으로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한 당대의 현실 인식과 맞닿아 있음을 나아가 보여준다. 종국적으로는 이것이 19세기 당대에 국한한 과거의 유물로 그치지 않고, 작가 당시의 20세기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현상임을 유명한 고전에 빗대어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