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싱한 밀 이삭처럼 - 고흐, 살다 그리다 쓰다 열다
빈센트 반 고흐 지음, 황종민 옮김 / 열림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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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는 유명한 화가다. 그의 이름을 어지간한 사람은 누구나 들어봤으리라. 화가이므로 그의 그림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인기는 매우 크지만, 정작 인간 고흐는 잘 알지 못한다. 스스로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갇혔다는 정도.

 

이 책은 고흐 자신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고흐는 평생 동안 동생 테오와 서신을 교환하였다. 거기에서 우리는 화가이자 생활인 고흐의 인간다운 면모를 가감 없이 볼 수 있다. 이 책은 짤막한 문장과 단락을 서신집에서 발췌하였다. 서신을 온전히 수록한 게 아니고, 어떤 서사적 맥락을 갖춘 게 아니므로 고흐가 이런 생각을 했구나 정도를 체감하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한 가운데 고흐가 무엇을 중시하였고 어떤 점에 집중하였고 무슨 마음을 지녔는지를 단편적이나마 접할 수 있음은 의미를 가진다.

 

내가 자연에서 창조한 모든 작품은 불에서 꺼낸 밤처럼 고통을 견디고 완성한 것이다. (P.188)

 

고흐는 살아생전에 화가로서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세인의 정당한 평가와 인정이 없는 가운데,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무명 화가로서 그가 자신감을 지닐 수 있었을까. 자신이 정말 예술가의 재능과 역량을 가졌는지 확신할 수 있을까. 그는 수없이 자문하고 끊임없이 자답한다. 그래서일까 전편을 통틀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장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화가의 길을 끝까지 가겠다는 반복적 다짐이다. 그것이 너무 잦아 오히려 연민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내 마음속에 반드시 북돋아야 하는 힘이 들끓는다. 꺼뜨리지 말고 되살려야 하는 불길이 타오른다. 그 불길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지만, 설령 암울한 결과를 불러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P.13)

 

나아가 현세에서는 세속적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자포자기적 심정도 내비친다. 그래야 실망이라도 덜 할 것이라는 자기 위안 아니겠는가.

 

인생은 씨를 맺게 하는 시기일 뿐이며 현세는 열매를 거두는 곳이 아님을 점점 더 뚜렷이 깨닫기 시작한다. (P.73)

 

고흐의 화풍은 독특하여 언뜻 보아도 그의 그림임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는 인상파로 그를 통칭하지만, 정작 고흐 자신이 화가로서 어디에 주안점을 두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독특한 화풍은 어떤 계기로 나왔으며 무엇을 표현하고자 함인가. 이 글의 몇 단락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색상과 작법에 관한 그의 생각을 헤아려 볼 수 있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개성을 강렬히 표현하기 위해 내 멋대로 색상을 구사한다. (P.122)

 

화가 아닌 인간 고흐는 어떤 모습일까. 수입이 없는 그는 동생의 경제적 원조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그림과 생활 모두를 감당해야 했기에 항상 가난에 시달렸다. 마음의 풍요로움으로 자위하지만 궁핍의 그림자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하나, 성인 남성으로서 갖는 성적 외로움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는 경력 초기에 모두에게 지탄 받는 가정 비스무리한 걸 잠시 영위했을 뿐 이후로는 독신의 삶을 고수하였다. 그것이 자의였을까. 가족과 여성을 향한 그리움과 고독에 대한 사무침이 곳곳에서 배어난다.

 

나는 사랑 없이 살 수도 없고 살기도 싫고 살아서도 안 될 것이다. 나는 인간이다. 열정이 있는 인간이다. 나는 여자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얼어 죽거나 돌로 변할 것이다. (P.223)

 

가난과 고독 속에서, 화가로서 반신반의의 한 가닥 믿음만을 지닌 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날마다 오직 그림을 그리는 일뿐이다. 그에게 그림은 삶의 목적이자 수단이며, 자체로서 생존의 필수불가결한 원동력이다. 그가 화가를 구두장이에게 비유한 건 그만큼 자신이 노동자처럼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뜻함과 동시에 그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음의 방증이리라.

 

살아 있음이 느껴지는 유일한 순간은 온 힘을 다해 일할 때뿐이다. (P.41)

 

곳곳에 그의 대표작(비록 판형의 한계로 작은 크기지만)도 수록하고 있어 독서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게다가 읽기 어려운 문장도 아니다. 이상하게도 책장을 휙휙 넘기기가 여의치 않다. 마음 한구석에서 왠지 짠하고 답답한 상념이 계속 독서를 방해한다.

 

부록 <고흐의 삶에 대한 짧은 글>은 독자가 고흐의 삶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세심한 마음 씀씀이다. 인간 고흐를 가까이 대하고 싶지만, 본격적인 서간집은 부담스럽다면 이 책을 통해 그에게 다가가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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