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셀라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6
새뮤얼 존슨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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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를 읽을 때 중간에 <라셀라스>가 소개되었다. 이 작품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제인 에어>에서 굳이 언급될 정도면 나름의 가치가 있을 거라는 판단이 들어서 찾아보게 되었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철학적 허구또는 철학적 우화이다. 우리가 소설 작품에서 기대하는 인물의 강렬한 개성과 인물 간의 갈등과 대립, 외부 환경과의 충돌 등의 요소는 여기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인물의 사고와 대화, 행동을 기술하는 작가의 태도는 차분하고 느긋하며, 관점은 지극히 관조적이다. 이 작품을 소설로 분류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소설이 아니라면 어떤 장르로 간주할 수 있을지 애매하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왕자가 대답하였다. “나에게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다는 것, 아니 나에게 부족한 게 뭔지 모른다는 것, 바로 그것이 내 불만의 원인입니다.” (P.21)

 

라셀라스 왕자가 행복의 골짜기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심리는 싯다르타 왕자와 다르지 않다. 자기의 풍요로움에 대비되는 민중의 고통을 구제하고자 하는 해법을 찾기 위해서가 후자라면, 전자는 자신이 누리는 행복이 과연 최고, 최선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를 갖는다. 인간은 상대적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현재를 파악하는 존재다. 불행이 있어야 행복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건 양지와 음지, 빛과 어둠, 선과 악처럼 우주의 보편적 원리에 해당한다. 절대적 행복은 오직 깨우친 자에게만 해당할 뿐, 속인들은 이를 알기 어렵다.

 

우리네는 왕자의 번민에 쉽사리 공감하기 어렵다. 그건 우리가 완전한 행복을 누린 경험이 전혀 없어서다. 세상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 시절에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때는 올바른 이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처지다. 다만 외관상 더없는 지상천국으로 묘사되는 행복의 골짜기로 들어온 사람들의 내심은 모두 이를 후회하고 있다는 시인 이믈락의 발언은 현실을 드러낸다.

 

진실로 여쭙건대 제가 알기로 왕자님을 모시고 있는 자들 가운데 이 은둔의 처소에 들어온 날을 한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P.70-71)

 

왕자와 공주, 그리고 이믈락 일행이 골짜기를 벗어나 세상을 돌아다니는데, 주로 머물게 된 곳은 이집트다. 이미 서구 문명이 우위를 점하였음을 인정하고 있는 가운데 아비시니아에서 그나마 가까운 문명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왕자 일행은 다양한 유형과 계층, 직업의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어울리며 관찰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탐색한다.

 

세상 사람들은 겉보기에 모두 행복하고 즐거워 보인다. 웃음 띤 가면을 벗기면 그 아래 슬픔과 고통, 거짓의 참모습이 드러나기에 위선의 껍데기를 꽁꽁 동여매고 한사코 움켜잡는다. 그것을 건드리는 행위는 일종의 역린(逆鱗)이기에 왕자는 젊은 친구들에게서 내쫓김을 당한다. 쾌활한 젊은이도, 부유한 상인도, 은자도, 철학자도, 모든 것을 겪은 노인도 결코 행복하지 않음을 알게 되고, 궁정의 왕좌나 일반 평민의 가정을 살펴보았지만 권력과 지위도 행복을 담보하지 못함을 발견한다.

 

한편 피라미드를 방문하는 도중에 공주의 시녀를 아랍인 도둑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벗인 시녀가 사라지자 공주는 식음을 전폐하고 은둔할 생각마저 품는다. 극도의 슬픔과 절망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음에도 시간의 경과가 마음을 풀어놓게 되는 현상은, 곧 행복의 반대편인 불행마저도 완전하고 절대적인 불행은 존재하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후반부에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물은 천문학자다. 명망 있는 학자로 소문난 그를 이믈락이 방문하는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서 이성의 분별을 상실한 인물임을 발견한다. 물론 학자 자신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몰입하여 평생을 바쳤기에 자신의 인식과 믿음을 철석같이 믿기에 자족적인 상태이다. 왕자 일행과 교분을 나누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비교와 판단의 새로운 근거가 생기기 전까지는. 이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이 행복하지 않음을, 그리고 학문과 진리의 세계에 몰두한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이쯤에서 왕자 일행과 그가 헤어져야 하지만, 착오를 제외하면 고매한 인품과 현명함을 지닌 노인이기에 함께 지낸다.

 

진정한 행복을 찾는 왕자 일행의 여정 결말은 마지막 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결론이 아무것도 없는 결론이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자신들 소망이 현실에서 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기에 그들의 도전은 결과적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빈손인 건 아니다. 그들은 행복의 골짜기로 돌아가겠지만 이전처럼 무의미와 권태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헛된 욕망을 품고 방황하지도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마음의 상태이므로, 원효대사의 해골 물처럼.

 

인간은 늙어 죽을 때까지 행복이란 이 세상에서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임을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사람이 행복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으며 자기도 언젠가는 그런 행복을 얻으리라고 계속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지요. (P.89)

 

사실 작품의 지향과 결론은 심오하거나 색다르지 않다. 우리네가 역사를 거치면서 반복해서 들어왔던 진리가 바로 이것이다. 근대의 문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담은 작품이 있는데, <파랑새>가 여기에 해당한다. 파랑새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이곳 우리 주변에 있다. 왕자와 공주는 이걸 비로소 깨달은 반면, 이믈락은 행복의 골짜기에 들어오기 전에 겪은 여러 세상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작중에서 여러 번 그는 절대적인 행복의 부재를 설파한다.

 

작가는 작품의 첫 문장에서 이미 결론을 암시한다. 여정이 시작되기에 앞서 결과가 예견된다면 무척이나 김빠지게 마련이지만, 왕자 일행의 세상 체험이 결론에 이르는 구도의 과정임을 다양한 사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우화가 여늬 작품과 성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공상이 속삭이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들으며 희망의 환영을 열심히 좇아가는 사람들이여, 나이를 먹으면 젊은 날의 기대가 이루어질 것이며 오늘 부족한 것이 내일이 되면 채워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들이여, 아비시니아의 왕자 라셀라스에 관한 이야기에 한번 귀를 기울여보라.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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