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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구드 아버지의 영웅서사시 - 투르크계 오구즈 부족의 이야기
유수진 외 옮김, 방민호 감수 / 걷는사람 / 2025년 8월
평점 :
원서는 <키타비 데데 고르구드>이며, 튀르크계의 일파인 고대 오구즈족의 영웅서사시라고 한다. 오구즈족은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다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오스만튀르크를 일으켰고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이란 북서부에 후손을 남기고 있다. 아제르바이잔 국립 과학 아카데미 회장이 축사를 남기고, 아제르바이잔 재단에서 후원했다는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유산으로 생각된다.
우리 책은 ‘데데 고르구드의 책’으로도 알려진 <키타비 데데 고르구드> 아제르바이잔 판본을 한국어로 처음 번역한 책이에요. 유라시아 유목 민족 중 오구즈족에 전해지는 영웅서사시를 한국에 처음 소개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P.233, 작가의 말)
원서는 모두 12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데, 이 책은 그중 6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바사트가 외눈박이 테패괴쥐를 물리친 이야기
- 디르새 칸의 아들, 부가즈 이야기
- 살루르 가잔의 집이 약탈 당한 이야기
- 바이배래의 아들, 밤스 배이래크 이야기
- 가잔 베이의 아들, 우루즈가 포로로 잡힌 이야기
- 두카 노인의 아들 돔룰 이야기
영웅서사시라고 하지만, 설화적 요소가 핵심을 이루는 이야기도 있다. 외눈박이 테패괴쥐 이야기와 돔룰 이야기가 그러하다. 각각 선녀와 외눈박이 인간 괴물, 알라신과 저승사자가 이야기에 등장한다. 나머지는 역사적 이야기에 가까운데 특히 살루르 가잔 혹은 가잔 베이 본인과 아들 우루즈, 친구 배이래크 등이 여러 편에 걸쳐 있다.
별다른 주석이 없어 이야기들의 시대적, 지역적 배경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살루르 가잔의 집이 약탈 당한 이야기’에 보면 아미트 부족에 대해 아나톨리아 반도 동쪽으로 해설하며, 본문에 조지아라는 지역명이 등장하는 걸로 보건대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이란, 튀르키예에 걸치는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야기에 나오는 적대세력 이교도는 아마도 기독교도들로 이해되는데, 이 경우 서쪽으로는 동로마, 북쪽으로는 아르메니아와 조지아 등과 치열하게 세력다툼을 벌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영웅서사시이므로, 원문은 분명 운문체로 쓰였지만 이 책은 산문으로 번역하였다. 그래도 중간에 운문 대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대목은 운문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디르새 칸의 아들, 부가즈 이야기’와 ‘가잔 베이의 아들, 우루즈가 포로로 잡힌 이야기’ 등이 대표적이다.
‘바사트가 외눈박이 테패괴쥐를 물리친 이야기’는 선녀와 나뭇꾼 설화와는 달리 선녀가 오구즈인들에게 재앙을 내리는데, 그것이 테패괴쥐다. 불사의 외눈박이 인간 괴물의 눈을 찌르는 설정은 <오디세우스>의 에피소드와 유사하다. 식인 당하는 인간의 고통에는 무감각하면서, 눈의 통증을 하소연하는 테패괴쥐의 태도는 매우 이율배반적이다.
‘살루르 가잔의 집이 약탈 당한 이야기’에는 숨은 영웅 가라자 양치기가 등장한다. 그는 이교도의 양목장 급습을 방어하였으며, 살루르 가잔이 약탈을 보복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가잔은 애초에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자신이 천한 양치기의 도움을 받는다는 점이 명예에 불리하다는 판단이었다. 만약 가라자 양치기가 나무를 뽑지 못했다면 양치기는 정말 죽음을 맞이하였을 터이니 계급적 차별이 당시 얼마나 심하였음을 알게 해준다.
‘바이배래의 아들, 밤스 배이래크 이야기’는 여러모로 생각해 볼 여지가 많은 이야기다. 밤스 배이래크는 영웅인가? 그는 십육 년 동안 이교도의 포로로 붙잡혔다. 그를 사모한 한 베이의 딸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하는데 그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즉 돌아와서 반드시 그녀와 결혼하겠으며,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저주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그리고 이교도들이 신랑 배이래크를 공격한 것은, 신부 아버지가 자기에게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했는데 약속을 어긴 데에 대한 이교도 베이의 분노였다. 이것의 진실은 무엇인가? 앞서 베이들은 바이래크와 바느치채크의 중매장이 역할로 고르구드 아버지를 낙점한다.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난제를 꼭 그가 맡아야 하는 게 온당한지 의문스럽다.
‘두카 노인의 아들 돔룰 이야기’에서 품행이 형편없어 알라신의 노여움을 산 당사자는 돔룰인데, 결과적으로 희생자는 돔룰의 부모뿐이다. 신에게 대든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빼앗기게 된 돔룰은 자신이 살기 위해 부모의 목숨을 부탁하나, 자기 자식이라도 솔직히 쉽지 않은 요청임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돔룰 부부는 장수하겠지만, 그의 부모는 무슨 죄란 말인지.
아멘! 아멘! 말하는 얼굴에 웃음이 가득할 겁니다.
신께서 거룩한 이름 무하마드를 위해 당신의 죄를 사해 주실 겁니다! (P.173, 바이배래의 아들, 밤스 배이래크 이야기)
처음에는 오역인 줄 알았다. 무슬림인데 “아멘”은 당치않을 테니. 하지만 자세히 알아보니, ‘아멘’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공통이며, 발음은 좀 달라서 ‘아-민’이라고 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기원이 동일함을 여기서 알 수 있다.
표제에서 고르구드 아버지를 강조하는 이유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는 작중에서 주로 시인이자 음악가, 점장이 역할을 맡는 것으로 보이는데, 대개 이야기 마지막 대목에 잠깐 등장할 뿐이다. 이야기 중에 실제로 참여하는 사례는 밤스 배이래크 이야기의 중매쟁이 역할 말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책은 “어린 독자”(P.236, 작가의 말)를 대상으로 삼는다. 문체도 평이하고 주석도 달지 않아서 이야기 흐름을 따라 내용을 죽 따라가기에 적합하다. 원문 번역자 외에 우리말 작가가 공동 작업한 이유는 어린 독자가 읽기에 어렵지 않도록 문장과 표현을 다듬은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