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네버랜드 클래식 26
샬럿 브론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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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는 아주 오래 전 세로쓰기로 된 이군철 번역본(삼성출판사)을 읽은 기억이 있지만, 머릿속에는 아무런 잔상도 남아 있지 않다. 이번에 <제인 에어>를 재독하면서 여러 점에 놀랐다. 먼저 분량의 방대함이다. 시공주니어 판본은 더구나 아동, 청소년 대상 도서이므로 양장판에 고급 용지를 사용하여 책 무게가 한층 더 나간다. 출퇴근길에 지하철 내에서 들고 읽다 보면 팔이 무척 아프다.

 

다음으로 제인 에어의 인생 역경이 매우 파란만장함이다. 특히 어린 시절 그녀의 삶은 극적으로 불행하다. 이 소설을 단순한 성장, 연애소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완전한 오해였다. 작품의 전반부는 당대에 행해졌던 가정과 학교 내 학대를 고발한다. 더구나 주인공은 남성에게 의존하기보다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려는 정신이 강하여 여성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재밌다. 그것이 800면이 넘는 두꺼운 책의 책장을 계속 넘기게 된 동력일 것이다.

 

여자는 차분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 여자도 남자 형제 못지않게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아야 하고 그럴 장소가 필요하다. 엄격하게 구속당하고 발전이 없는 정체된 삶을 산다면, 남자와 똑같이 여자도 괴로워한다. (P.204)

 

서문이 딸린 전 3부 구성인데, 두 번째 판으로서 다른 번역본과는 구성이 다소 다르다. 서문에서는 비판자들을 향한 작가의 항의와 더불어 작가 새커리에게 헌정한다고 밝힌다.

 

이 소설 속 첫 번째 배경은 게이츠헤드 저택이다. 고아가 된 제인은 외숙모 집에 얹혀살게 되는데, 제인의 처지가 어떠한지는 하인보다도 못하다는 하녀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외숙부 리드 씨가 살아있었다면 달라졌을 테지만, 외숙모 리드 부인마저 제인을 노골적으로 학대한다. 제아무리 마뜩잖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조카에게 이렇게 대놓고 차별과 구박을 하는 게 온당한 노릇일지 알 수 없다.

 

리드 부인의 태도야말로 존과 두 자매가 제인을 무시하고 핍박하는 정당한 근거가 아니겠는가. 동물도 학대에는 저항하기 마련인데, 어린 제인의 반항은 자초한 결과일 뿐이다. 부인의 행동은 그들과 제인 간의 관계를 넘어서 자신들 관계마저도 파탄으로 몰고 가니 안타까운 일이다. 허영에 물든 가족과 타락한 존, 서로 간 애정이 일도 없는 자매. 온당한 가치관과 교육의 부재가 빚어낸 불행한 결말이다.

 

두 번째 배경은 로우드 기숙학교다. 제인을 내치고 싶은 리드 부인으로서는 속 시원했겠지만, 이러한 수준 낮은 학교가 운영되고 있음이 당대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다. 여러모로 부조리하고 형편없는 학교이지만 이미 최악을 겪은 제인으로서는 오히려 버틸만한 곳이다. 헬렌 번스와의 아름답고 애처로운 우정을 경험하며, 무엇보다 템플 선생을 통해 사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게 되었으니.

 

다만 운영 책임자 목사 브로클허스트가 문제의 근원임이 놀랍다. 어린 제인을 사탄의 무리로 매도하는 비교육적 처사와, 학생들에게는 검소, 소박, 수수를 강조하면서 자신의 가족은 호화롭게 치장하는 이중적 태도는 브로클허스트 목사가 교육자로서뿐만 아니라 종교인으로서도 위선자임을 강렬하게 고발한다.

 

종교인을 향한 부정적 서술은 나아가 새로이 찾게 된 사촌인 목사 세인트 존에서도 나타난다. 종교적 열의에 가득 차 선교사가 되어 인도로 떠나겠다는 그의 결심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18, 19세기에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포교 활동을 했던 수많은 선교사가 있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

 

다만 여기서 세인트 존은 제인에게 무리한, 본인으로서는 정당하다고 믿겠지만, 결혼 요구를 하고 있다. 그는 선교 활동의 동지로서 아내 제인을 필요로 할 뿐, 사랑의 반려자로서 아내 제인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타인에게 모범적인 목사 가정으로서 보이기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아내가 아닌 부목사로서 동행하겠다는 제인의 요청은 일언지하에 물리친 까닭이다. 심지어 이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일종의 가스라이팅마저 감행한다. 여기서 우리는 삶과 사랑과 종교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가장 문제적 장면은 로체스터 씨의 이중 결혼 시도다. 왜 그는 미친 아내 버사 메이슨과 이혼하지 않았는지 궁금하였는데, 당시 영국 법률은 이러한 사유로 이혼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로체스터 씨 개인으로서는 사기 결혼에, 발광한 아내로 미칠 지경임에 딱할 따름이다.

 

그가 저택에 정착하지 못하고 국내외로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함에도 유부남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제인과 결혼식을 치르러 했다는 점은 제아무리 동기의 순수성과 사랑의 절박성 등을 감안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용납하기 어렵다. 그렇게 되면 제인은 법적 아내로 인정받지 못 하게 되니 결국 첩이나 정부의 신분이 되고 말 텐데, 그건 이기심의 발로일 뿐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정당한 처사인지는 부정적이다.

 

대개 연애소설의 주인공은 선남선녀이기 마련이다. 제인 오스틴의 경우도 최소한 미인은 아니더라도 외모가 못났다는 평가 정도는 아니다. 여기서 작가는 대놓고 두 남녀 주인공의 외모를 박하게 묘사한다. 주변 인물의 미모가 오히려 훤칠하고 돋보일 정도다. 그럼에도 독자는 주인공에게 집중하게 되는데, 겉보기가 아니라 내면의 깊고 순수한 마음과 올바른 사고와 가치관, 지적이고 교양을 갖춘 그들의 가치가 훨씬 높기 때문이다. 특히 로체스터 씨로서는 방랑 과정에서 숱한 실망을 맛보았으며, 자신의 재산에만 눈독을 들이는 여러 유혹도 경험했을 터이므로 제인 에어의 인간미에 더욱 끌렸을 것이다.

 

작품 자체의 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단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건 우연한 행운의 남발이다. 소설이 독자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근본적 동인은 그것이 전혀 터무니없지 않다는 암묵적 동의에 있다. 제인이 로우드 학교를 떠나 새로운 직업으로 가정교사를 택하기까지는 무리가 없다. 하필 첫 번째 가정에서 인생의 남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게다가 신분상의 커다란 격차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는 일단 넘어가자,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그럴 수도 있으니까.

 

두 번째 우연은 손필드 저택을 몰래 떠난 제인이 거의 노숙자에 가까운 몰골로 구원받은 집에서다. 정말 우연히도 그들은 친사촌 관계였음이 밝혀진다. 천애 고아였던 제인에게 드디어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친척이 생기게 된 점은 기쁜 일이지만, 참으로 공교롭다. 작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는데, 세상을 뜬 숙부의 유언으로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다. 가난뱅이에서 졸지에 부자가 되었다. 물론 심성이 고운 제인이므로 넉넉지 않은 친사촌들과 재산을 나눈다는 결정은 훈훈하기 그지없다. 이러한 연속된 우연은 백번 양보해도 무리한 설정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제가 가난하고 비천한 출신에 못생기고 몸집이 왜소하다고 해서 감정도 없고 영혼도 없는 줄 아세요?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저는 당신 못지않게 영혼이 있고 감정도 풍부해요! [......] 우리 둘 다 무덤을 지나 하느님 앞에 섰을 때처럼 동등하게 말이에요. 우리는 동등해요!” (P.468-469)

 

무엇보다 이 작품의 매력은 연약한 아이에서 당당한 숙녀로 성장해 나가는 제인 에어를 바라보는 과정에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흔히 말하지만, 고난을 감수하는 일은 쉽지 않으며, 낙이 올 거라는 낙관과 희망의 끈을 계속 지니는 것도 어렵다. 게다가 제인은 불의와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는다. 상대적 차별이 존재하던 당대 사회에서 제인은 성별과 신분의 차이는 인정하지만 차별은 거부하는 담대한 용기를 지녔다. 로체스터 씨는 저택이 불타고 신체가 훼손되는 딱한 처지가 되었지만, 그건 미친 아내의 죽음과 이중 결혼 시도의 속죄를 위한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제 두 사람은 이제 대등한 관계에서 맺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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