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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데 고야 - 붓으로 역사를 기록한 화가 ㅣ 내 손안의 미술관 8
엘케 폰 라치프스키 지음, 노성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고야 독서 2탄이다. 부제 ‘붓으로 역사를 기록한 화가’는 저자가 아니라 출판사가 붙인 듯하다. 부분적 연관성은 있지만 이 책의 성격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원저는 독일어인데, 표제는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겨울>이다.
원제와 차례를 보면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는 하는 주제를 파악할 수 있다. 구성은 크게 1부 ‘벽걸이 양탄자 그림에 일가를 이루다’, 2부 ‘고야가 그린 사계’, 3부 ‘붓으로 진실의 얼굴을 그리다’이다. 2부가 핵심인데, 특이한 것은 고야의 그림 중 사계, 특히 ‘겨울’을 제재로 삼았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고야의 생의 이력을 따르지만 초점은 다소 다르게 가져간다.
대가로 성공하기 이전의 고야를 1부에서 다룬다. 마드리드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낙방하고 이탈리아 아카데미에 합격한 고야. 태피스트리, 즉 벽걸이 양탄자 밑그림으로 성공하고, 이어 성당의 천장 벽화를 그리는 단계로 나아간다. 3부의 경우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판화집 <변덕>과 <전쟁의 참화>를 이야기하지만, 깊게 파헤치지는 않는다. 다만 판화집 <변덕>을 당대 도덕 교육을 위한 그림으로 이해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화가로서 고야의 삶 중에서 주목할 점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화법에 도전하는 점이다. 이 책에서도 일흔다섯의 나이에 석판화를 학습한 점을 언급한다.
고야의 사계 연작은 이전 책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던 작품이다. 이 저자는 왜 특히 <겨울>에 집중하였을지 궁금하다. 고야 이전의 사계 그림은 예쁜 장식 그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무더운 여름도 상쾌하게, 매서운 겨울도 따뜻하게 그려 보는 이로 하여금 흐뭇한 정서를 품게 만드는 그림으로. 고야는 전혀 다르다.
고야의 겨울은 정말 겨울답다. 매서운 추위에 몸이 절로 웅크려드는 겨울이다. 고야는 매섭게 휘날리는 눈보라와, 얼음처럼 얼굴을 찌르는 겨울 바람을 붓으로 그렸다. (P.72)
단지 겨울답게 추위를 제대로 그렸다고 대단하지 않지 않는가. 저자는 <겨울> 그림 속 여러 요소를 분석하면서 당대 에스파냐 사회와 미술 화풍을 함께 분석한다. 겨울바람을 막고자 옷자락을 뒤집어 쓴 남자들의 펄럭이는 옷자락이 갖는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 우하단의 꼬리를 말고 있는 개의 모습이 갖는 그림 속 함의가 어떠한지. 말년의 <개>에 이어 <날개 달린 개>까지 이르러서는 당대 사회의 마녀와 광기를 파헤친다. 그것은 에스파냐를 지배했던 가톨릭 교회의 불의와 압제와도 연관된다.
에스파냐는 이성과 학식을 갖춘 사람이 인정받지 못하는 나라였다. 모든 국민들이 마녀나 악마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고, 도처에 검은 미신과 마술이 판치는 나라에서 이성의 능력을 설명하는 학자는 기를 펴기 어려웠다. (P.97,99)
출세지향적인 고야의 화가로서 경력은 양탄자 밑그림에서 출발하여 초상화가로 명성을 떨치고, 수석 궁정화가가 되어 왕과 왕실의 초상화를 그림으로써 영광의 절정에 이른다. 저자도 언급했듯이 고야가 장수하지 않고 이때 죽었더라면 우리는 고야를 거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고야의 위대성은 귀가 먼 이후 <변덕>과 <전쟁의 참화>, 그리고 ‘검은 그림’ 연작으로 이어지면서 당대 사회와 종교의 야만과 비이성을 드러내고, 고상한 대의를 내걸지만 실은 수많은 보통사람의 삶을 무너뜨리고 학살을 유발하는 전쟁의 참화를 고발한 데 있다. 나아가 빛과 밝음의 거짓과 위선 속에 내재한 어둠과 근원적 두려움과 공포를 보여준 데 있다고 본다.
고야는 두 눈을 똑바로 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고야는 자신이 흘러간 낡은 시대와 다가올 새 시대를 고루 체험할, 역사의 격동기 한복판에서 살아 있는 증인이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P.10)
장수와 다작의 화가 고야의 그림 중에서 풍경화와 정물화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은 특이하다. 초상화든, 마호와 마하 그림이든, 벽걸이 양탄자 밑그림은 물론, 동판화의 단색 속에서도 고야는 집요하게 사람을 그리려고 하였다. 하다못해 노년의 투우 그림조차도 소와 더불어 사람을 놓치지 않는다.
역자는 고야를 에스파냐의 역사를 그림으로 나타낸 화가라고 칭한다. 고야가 의식적으로 역사를 담으려고 애쓰지는 않았다고 본다. 고야는 그저 자신이 목격한 당대의 현실, 즉 미신과 종교와 전쟁이 가져온 불의와 비이성과 야만성을 그림으로 충실히 기록하려고 하였다. 그는 분명히 알았다. 이것이 올바른 상황이 아니라는 점을, 인류는 분명히 보다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그러한 고야다움의 단초를 저자는 <겨울> 그림에서 읽어내려고 하였다.
이 책 역시 미술서적답게 고급지를 사용하고 컬러인쇄를 통해 고야의 그림은 물론, 관련된 선대와 후대 화가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다만 저자의 의도가 명확하기에 이 책이 고야의 전모를 충실하게 담았다고 하기는 어렵다. 고야에 관한 기초지식을 가진 상황에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고야 화풍의 일면을 제시하여 관심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유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