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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소녀들 ㅣ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18
에드나 오브라이언 지음, 정소영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9월
평점 :
예전에 청목사에서 출간한 그린 북스 시리즈가 있었다. 청소년 대상의 명작 소설 모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개는 익히 아는 작품들이지만 일부 책은 굉장히 생소하였다. 문득 작품 목록을 훑다 보니 <아일랜드의 봄>과 <파란 눈의 아가씨>라는 표제와 작가 E.오브라이언이 궁금해졌다. 두 책은 일찌감치 절판되었고, 각종 도서관에서조차 찾기 어려웠다. 다행하게도 근년 들어 오브라이언의 책이 몇 권 번역되어 나왔는데, <시골 소녀들>이 <아일랜드의 봄>과 같은 책임을 알게 되었다. ‘시골 소녀들’ 3부작 중 1부에 해당하며, 원제는 ‘시골 소녀들’이 맞다. 그린 북스의 경우 표제를 좀 더 그럴듯하게 의역해서 붙인 모양이다.
이 소설은 발표 당시 아일랜드 내에서 금서로 지정되었고 한다. 어떤 내용이 외설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윤리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설정은 10대 중반인 화자 캐슬린이 노신사 젠틀먼과 교제하는 대목이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원조교제에 가까운데 여기서 그들은 육체관계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이 오래된 마을을 떠나는 게 아쉽지 않았다. 지쳐빠지고 늙은, 바스러지고 무너져가는 죽은 마을이었다. 가게들은 칠을 새로 해야 했고, 위층 창턱의 제라늄은 내가 어렸을 때보다 그 수가 줄어들었다. (P.209)
물론 아일랜드 사람이라면 1960년 이전 아일랜드 시골의 궁핍한 삶, 가정폭력과 가부장적 권위가 지배하는 가정의 모습, 캐슬린과 바바가 다니는 수녀원 학교의 과도한 금욕주의 교육 방침 등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에 즐거운 마음을 지니지 못하리라. 더블린으로 탈출한 두 사람이 부유한 중년남성과 어울리는 장면 또한 썩 유쾌하지는 못하다. 이런 내용이 보수적인 가치관을 지닌 이들에게 특히 반발을 유도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캐슬린이 가족과 집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집은 형편없이 쇠락한 가운데 아빠는 술에 의존하고 주기가 차면 부인과 딸을 마구 때린다. 화자는 이미 아빠를 두려워하고 아빠로서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엄마마저 사고로 세상을 떠나니 설상가상이다. 다행히 공부를 잘하여 수녀원 기숙학교에 장학생으로 갈 수 있게 되었지만, 학교의 교육 방침과 운영 방식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가혹할 정도다. 공교롭게 최근에 읽은 소설들에서 영국, 독일, 아일랜드로 국가와 종교는 다르지만 종교기관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은 학생들에게 매우 비교육적으로 훈육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책에서도 감옥으로 표현하고 감옥처럼 묘사한다.
캐슬린과 바바는 외모, 성격, 가정형편 등에서 매우 대조적이다. 비교적 유복한 바바는 캐슬린을 시종일관 무시하고 독설을 퍼붓거나 노골적으로 질투하고 나쁜 행동에 동참하도록 꼬드기는 등 어찌 보면 악역에 가까운 역할이다. 그저 수동적으로 당하는 캐슬린의 태도가 이해 안 될 때도 있지만, 결핵에 걸려 떠나는 바바를 바라보며 캐슬린이 품는 감정 상황은 독자가 쉽게 예단하기 어렵다.
내 영혼이 살아 발딱거렸다. 황홀감.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어떤 것. 살면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P.102)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축은 캐슬린과 젠틀먼 씨에게 있다. 병든 아내를 둔 노신사에게서 캐슬린은 우정 이상의 것을 발견하고 애정으로 나아가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젠틀먼 씨가 적극적으로 어린 숙녀를 유혹하였다는 비난은 온당치 않다. 두 사람은 그저 감정이 합치되었을 뿐이다. 캐슬린은 젠틀먼 씨에게서 아빠에게서 구할 수 없는 부성애를 기대하였을지 모른다. 부유한 노신사가 베푸는 여유롭고 은근하며 안정된 접대와 에티켓에 마음이 쏠렸을 수도 있다. 어쨌든 두 사람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공간에서 손을 잡거나 입맞춤을 하면서 서로 간에 기쁨을 느낀다. 그들은 관계의 진전을 바라지만 서두르지 않기에 내심으로는 바라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두 사람의 최초이자 마지막의 용기 있는 일탈은 젠틀먼 씨의 전보와 함께 날아가 버린다.
젠틀먼 씨와는 늘 그런 식이었다. 만사가 완벽해지는 순간, 그는 완벽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멀어졌다. (P.272)
난 벌써 슬퍼졌다. 그 누구도 그를 진정으로 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너무 초연했다. (P.287)
화자 캐슬린은 솔직하다. 자신과 자신의 처지를 옹호하거나 도색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자신이 바라보는 주변 환경과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그의 시각에 자신의 시골 마을은 쇠락하고 영락한 자취가 역력하다. 수도 더블린이라고 나을까? 물론 젊은 사람을 자극하는 상대적 번영과 활기를 인정하겠지만, 그것과 어울리기 위해서라도 캐슬린은 노동을 해야 한다. 화장을 하고 화려한 대도시로 돌아다니는 저녁의 삶은, 점원으로서의 낮을 토대로 해야만 가능하다.
우리는 키득거리면서, 낯선 승객들에게 ‘어쩌라고’ 식의 표정을 보이면서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내 생각에 우리가 대도시에 도전적으로 맞서는 들뜬 시골 소녀들의 삶을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P.209-210)
어쩌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그때까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던 십 대 소녀를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그들의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하고, 그들의 시각으로 가면 아래 뒤틀린 당대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였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작가는 캐슬린을 응원하고 옹호하지만 따끔한 비판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토록 사랑했던 엄마의 기일을 자신은 잊었지만, 자신이 그렇게나 미워했던 아빠는 기억했음을 보여주면서. 어쩌면 캐슬린은 젠틀먼 씨를 실체가 아니라 실현될 수 없는 공상의 꿈으로서 사랑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을 던지면서 말이다.
내가 참 어리석고, 가장 친한 친구였던 히키뿐 아니라 잭 홀랜드와 마사와 브레넌 아저씨 모두에게 의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의 실제 인물들 모두에게. 젠틀먼 씨는 그저 그림자였지만 내가 열망하는 것은 그 그림자였다. (P.295-296)